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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5:1-7)

작성자paulmok|작성시간16.05.09|조회수388 목록 댓글 0

일시: 20160509() ayyeka

제목: 겸손하라! 돌보심이라!

본문: 베드로전서 5:1-7

 

1. 시작기도

하나님! 오전 내 책상 앞에 앉아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하지만 어제 있었던 일로 마음이 요동치고 흔들립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기뻐했었는데 한동안 괜찮아 보이던 아들의 문제가 다시 터져 나오니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 아이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 속에서 아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가요? 이 아들에 대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지 암담합니다. 애꿎은 아내에게만 책임의 화살을 돌리는 저 자신에 대해 화가 나기도 하고 아이가 흔들리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원망이 나오기도 합니다. 오전 내내 마음을 잡지 못하다가 그래도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인 것을 인정하고 다시 말씀 앞에 나왔습니다. 생명의 주님! 살려주십시오. 땅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사오니 오직 주의 생명 안에서 살아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본문기록(주해)

1. 핍박받는 때의 교회 지도자들(1-4)

교회의 지도자에게는 언제나 무거운 책임과 어려움이 따라 온다. 특별히 그 교회가 환난 속에 있다면 그 책임과 어려움은 더 심각한 것이다. 베드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신을 동료 장로로 소개하면서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어려움과 책임을 실감하며 권고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밝힌다(1).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은 베드로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베드로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을 상기시킨다. 베드로 당시 교회의 대부분의 사람은 베드로를 기억한다. 그들은 베드로가 어떤 증인이었는지를 기억한다. 수치스러운 배신, 맹세와 부인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바로 그 밤에 그가 그리스도를 부인한 즉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최초의 고난을 목도했다(22:60-61).

베드로는 증인이었다. 용서받고 회복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따스함을 누린 증인.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을 나타날 영광(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신자들에게 임할 미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 말했다. 베드로는 범죄하고 회개하고 회복된 영적 지도자, 목사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죄인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연약한 인생들을 하나님은 부르셔서 자신의 양무리를 맡겨 주신다는 것이다(2). 장로의 주요 역할은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주신 명령(21:6)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베드로가 시편23편의 목자상을 언급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시편23편에 나타난 목자의 임무를 알고 있다. 그것은 인도하고(2), 영적 안내와 양식을 공급하고(3), 안위하고(4), 튼튼하게 하고(5), 바로잡는 것이다(2). 이러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목사의 동기가 분명해야 한다. 그것은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자원함으로 감당하는 것이다(2). 가장 부적절한 목양의 동기 중 하나는 바로 다음에 강조되는 것이다. 바로 더러운 이를 위해 섬기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목양을 담당하는 자들을 후하게 대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라고 가르친다(딤전5:17-18). 그러나 성경은 명백하게 목회자가 물질에 대해 탐욕을 가지는 것을 금지한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를 혼란시키기 위해 사탄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권세를 사용하는 것을 즐겨하지 말아야 하고 권세를 증가시키거나 보존하거나 과시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양 무리의 본이 될 수 있는 교회 내의 경건한 지도력은 속임과 탐욕과 아첨과 권위주의가 없는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함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삶의 진실성 등을 포함한다(3).

목양에 대한 최고의 동기 부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4).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장이시다. 모든 목자들은 그분 앞에서 책임있게 행해야 한다. 목자장은 신실하고 경건한 목자들을 높여주실 것이다. 목자장이 선한 목자들에게 주실 영광의 면류관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용납되는 영광의 면류관이다. 또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그분과 함께 누릴 영광을 묘사한다. 그 면류관은 시들지 않는다(4). 이 면류관은 그리스와 로마 경기에서 우승자들에게 수여되던 곧 시들고 마는 월계관과 대조된다.

1-1 묵상

목회는 그저 설교 잘하고 심방 잘하고 전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사역을 시작한지 20년이 되는 올해 과연 목회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인지 다시 물어보게 된다. 교회의 친한 한 50대 집사님이 요즘 같은 어려운 때, 40대 후반 50대 초반이 되면 직장에서 짤리는 시대에 목사야 말로 70세까지 정년이 보장된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말하는 농담(?)을 들으면서 과연 내가 목회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베드로가 베드로서신을 통해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료 장로들에게 권면하던 당시의 상황은 로마제국의 조직적인 핍박 가운데 생명을 내놓고 믿고 생명을 걸고 사역을 해야 했던 박해의 시대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 시대에는 목양으로의 부르심이 당연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목회자나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나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오늘날 풍요와 번영이 신이 되어버린 시대에 목회란 무엇인가? 믿음생활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목회자이지만 솔직히 고난은 피하고 싶은 주제이다. 목자장께서 주시는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보다는 여기서 받는 현실의 영광이 더 시급하다. 그러니 베드로의 시대보다 지금이 예수 제대로 믿기 더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다.

! 그러고 보니 지금 나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 감사할 일이다. 편안하고 안락하다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목회가 무엇인지 고민할 이유도 없이 그냥 목회라는 하나의 직업을 선택한 직업인으로 한 평생 살다 갔을 것이다. 상대적인 성실함과 이 땅에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난의 현실 앞에 서게 되니까 이게 분명해 진다. 내가 목회자인지 직업인인지 정체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교회가 수익 창출을 따지고 손익분기를 논하는 이익단체처럼 되어가고 백화점의 고객처럼 서비스를 요구하는 이 시대는 그러므로 베드로의 시대보다 더 심각한 박해의 시대이다.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이 없다. 모두가 땅의 것에 취해서 그것만 보고 살아간다. 교회 밖에서 몰려오는 박해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각성하고 진리의 주를 바라보게 하는 이유가 되지만 교회 내의 타락은 진리, 복음, 생명이라는 주제를 박물관에 전시된 오래된 골동품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다시 그리스도의 고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고난은 피해야할 주제가 아니라 기쁨으로 맞이해야할 축복이다. 고난은 자원함으로 기꺼이 양 무리의 본이 되는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는지 검증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지금 나에게 주시는 어려움- 목회자의 정체성까지 고민하게 만드는-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자. 불충하고 자격미달 이지만 그래도 나에게 맡겨주신 양 떼가 있음에 감사하자. 그리고 목회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성도로서 복음을 바로 깨닫고 영생의 삶을 이 땅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 생명을 전해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미루어지고 있는 말씀 나눔 모임을 이번 주에는 연락들을 다시 해서 시작 날짜를 정하고 시작해야겠다. 생명의 말씀을 나누고 그 생명의 교제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로 목회다.

 

2. 인도받는 자들의 책임(5-7)

목사가 양무리를 치는 일에 주된 책임을 지는 것처럼 양 무리는 그들을 인도하는 책임을 맡은 목사들에게 순복하는 주된 책임이 있다(5). 순종은 명령이며 지시이다. 이 명령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단순히 목회자의 스타일이나 지도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목회자의 지도권을 고의로 방해하고 그를 비판하며 중상하고 징계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양무리에게 그런 권리를 주지 않으셨다. 목자들이 책임있고 경건한 지도력으로 회중을 인도하는데 양 무리가 그 지도를 거부할 때 그, 무리는 주님께 불순종하고 사단이 들어오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경건한 지도와 그것에 대한 순종은 교회 구성원 전체에 있어 서로를 겸손히 존경하는 태도로 표현되어야 한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겸손이 신자의 옷차림의 일부가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이 이미지는 베드로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런 겸손을 직접 경험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바로 그날 밤, 예수님은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13).

겸손은 자신의 강점을 알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의 약점을 알고 그 영역에서 성장을 도와주시도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 이상으로 겸손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 요지를 강조하기 위해 베드로는 잠언3:34를 인용함으로 5절을 완성한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믿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을 약점은 없고 강점만 가진 자들로 본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의 자신의 의견과 자신의 생각들만 믿는다. 그 결과 불가피하게 그들은 스스로 관심과 영광을 구한다. 하나님은 이런 태도를 싫어하신다.

겸손히 주님을 따르며 그분께 순종할 때 우리는 그분의 능하신 손 또는 능력아래 있다(6). 이것은 사단의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역사에 간섭하시고(13:9, 26:8) 또 고난을 주심으로써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에 대해 말한다(30:21).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비록 그 손은 우리에게 깊은 고통과 고난을 경험하게 할 수 있어도 여전히 우리를 보호하고 고난이 다할 때까지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는 약속을 발견한다(6).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사단을 대적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사단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하나님을 신뢰함은 궁극적으로 때가 되면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반드시 고난의 때, 박해의 상황을 끝나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능하신 손을 신뢰할 때 우리가 따르는 그 하나님은 우리를 깊이 돌보신다(7).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6:25-34). 그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고난과 핍박의 상황에 적용한다.

맡겨버리다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또는 다른 무엇에게 던지다를 의미한다. 이 말은 의도적으로 신뢰하기로 결단함을 뜻한다. ‘염려다른 방향으로 끌리다, 나뉘거나 산만해지다를 의미한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우리의 주의를 흩뜨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서로 다른 방향들로 잡아 당긴다.

맡겨버림의 결과는 너희를 돌보심이라이다. 여기서 동사의 형태는 현재능동직설법이다. 이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이 계속적이며 불변하고 끝이 없음을 나타낸다. 하나니은 성도들의 고난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특별히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겸손히 그분을 신뢰하기 원하신다.

 

2-2. 묵상

교회는 민주적인가? 민주적이라는 말과 함께 교회에 파고 들어온 가치관은 인본주의이다. 지극히 인간중심적이며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 경제원리가 교회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경의 질서를 인간 스스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옵션으로 전락시켰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가 교회 내에서 경제의 논리와 세상 권력 앞에 철저히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본다. 물론 거기에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복음을 통한 생명의 연합을 경험하지 못한 나와 같은 세속적인 목회자들이 큰 원인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진리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진리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리지 못하니 세상의 성공과 세속의 가치를 마치 복음인양 강단에서 선포한다. 진리의 생명수에 목마른 이들에게 계속 야곱의 우물물만 제공하니 세상의 그럴듯한 가치가 생명수의 자리를 대체해 버렸다. 교회는 오는데 예배는 드리는 데 심지어 성경 공부는 하는데 계속 목마르다. 하늘에 속한 생명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땅의 것으로 성을 쌓는다. 오늘날 교회 안에 복음을 통한 생명이 선포되지 않으니 심리학, 경제학, 자녀교육법, 재정관리원리...온갖 것들이 들어와 버렸다. 하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니 이 땅에서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마련한 자구책이다.

 

이 땅의 원리는 시들어버리는 꽃과 같음을 인정해야 한다. 목회자나 성도나 모두 땅의 것의 유한함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가운데 순종하는 것이 살 길이다.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따라가야 한다. 내 원리가 아닌 성경의 원리,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랑의 원리 안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한다. 말씀의 원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 바로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그 언약을 따라가는 것이 생명의 시작이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바로 깨닫고 바로 가르쳐야 한다. 목회자가 먼저 말씀의 원리 가운데 들어가 영생의 기쁨으로 살림을 받고 그에게 맡기신 양 떼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때 인간 스스로 만든 안전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영원한 피난처의 하늘 평안과 보호를 누리게 된다. 거기에서 주님의 회복과 돌보심을 경험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매일 누리게 될 것이다.

 

2-3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교만함이 내 안에 늘 도사리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지 못할까? 교만이 이유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말씀의 교훈 앞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이 부분의 말씀은 양 무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전에 오늘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자구책과 자기를 보호할 바벨탑을 쌓으려 하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아들의 진로와 관련하여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을 넘어서 원망이 입에서 툭터져 나왔다. 어젯밤은 지옥이었다.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다시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탈출하려는 교만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아들의 문제를 통해 다시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교만을 직면하게 하신다. 끙끙앓다가 말씀 앞에서 나의 민낯을 직면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처분에 맡겨 드립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내 아들이라고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했으면 될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내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이다. 인정하고 기다리자. “때가 되면”....이 때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당시에 박해의 크로노스 안에 있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하지만 그들은 망가지지 않았다. 박해와 고난이라는 장애가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만들어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소량의 교만도 걸러내는 필터가 되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다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을 향해 나가는 것을 보는 믿음의 눈을 열었다. 기다리자. 말씀 안에서 기다리자.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일 뿐이다. 지금 내가 배워야 할 것은 아무 것 할 수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시는 겸손의 능력이다.

 

4. 나의 결단과 기도

말씀하시는 주님! 오늘도 저의 현실 가운데 가장 정확한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만한 나를 아들을 통해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고백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을 소망합니다. 말씀 안에 견고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소망을 날마다 허락하옵소서. 선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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