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말씀 앞에서 안식얻지 못하면, 생명없는 자 되어 저의 삶은 언약 밖의 백성이 되며 원수의 나라에서 포로로 눈 뜨나이다. 불쌍히 여기사 건져주옵소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신공양하는 대신, 성전에서 지정한 만큼의 돈을 드렸다(레27:2).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이므로, 굳이 자신을 바치지 않아도 이미 다 하나님의 것이다. 더우기,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피조인간 중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택하셔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고, 또 그 민족의 대표로서 레위지파를 구별하여 자신의 소유를 삼으셨다(민3:41,45~51).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을 더욱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드리는 자발적인 서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하다. 여기서는 나이와 성별에 맞는 돈만 드리면 그것으로 서원이 끝이 난다. 무언가 섭섭하다. "행위의 지속"이 없다. 예를 들자면, 30대 중반인 나의 경우, 하나님께 나를 바치겠노라 서원하였으면, 성전세겔로 은 50을 달아서 갖다 바치면 나의 서원은 끝인 것이다. 나의 일생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할 수 있는 일도 제법 있을 것 같고, 시켜만 주면 무슨 봉사든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은 50세겔을 바친 나는 더이상 할 것이 없단다. 이상하다. 나는 돈을 바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송두리째 바치려고 한 것인데...???
궁금한 마음에 30분간 방은혜 선교사님(前북인도선교, 現아프리카 이주민선교)과 통화하고서 실마리를 얻었다. 하나님께 나를 바친다는 본래적 의미는, 나를 하나님이 받으실 "제물"로 온전히 바친다는 의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은 내가 살아 숨쉬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갖다 바치는 일개미같은 삶을 헌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내 존재를 제단에 드려 하나님의 받으실 향기로 타오르는 것을 참된 헌신이라고 하신다(롬12:1). 내가 드린 은 50세겔은, 이제보니 나의 생명을 대신 상징한 돈이었다. 그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질서와 관리를 위하여 일정한 수치로 계산되었을 뿐이다. 그 본래적 의미는 "생명"인 것이다. 즉, 서원의 참된 본질은 "나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오늘날 드려지는 수많은 돈들은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 것인가? 주일마다 내는 갖가지 헌금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날 교회에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도들이 모일만한 건물과 장소의 유지과,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도와야할 자들을 위한 구제가 목적되어야 할 것이다. 더이상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돈으로 서원을, 서원제를 대신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생명은 이미 십자가의 구주 안에 연합되어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된 제물이신 주 예수와 연합되어 이미 열납되고 흠향된, 완성된 서원제의 제물로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헌금의 의미를 다시 묵상하게 된다. 또한, 서원의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제 헌금은 구제와 선교와 봉사와 지역교회의 유지를 위하여 걷히고 쓰여야 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을 벗어난 헌금의 의미는 성경적이지 못하다고 감히 말한다. 만약, 낡은 교회의 보수를 위해 누군가 거액을 내놓았다면 그것은 아름다우나, 소원성취를 버무려서 일천번제의 헌금을 요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 심판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성도는 일구월심 마음에 뜻하는 한 가지의 "비나이다"를 이루려도 지성으로 천번의 헌금을 꼬박꼬박 토해내고, 교회는 그 돈을 가지고 교회의 신축부지를 구입한다면, 교회는 주님의 신부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요, 신도들은 거룩한 신부의 탈을 쓰고서 자기 뱃심을 채우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차라리 교회도 낡고 사람도 많아져 자리를 옮기려하니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곳은 좀 낫겠다. 대신 모범적으로 알아서들 솔선수범(?)하라고 교회 장로집사권사들에게 은근히 압력주지 말고 말이다.
서원은 어떠한가. 많은 이들이 갖가지 서원을 한다. 목사로, 사역자로, 선교사로.. 나 역시 초등학교 때 목사로 서원하고, 중학교 때에는 CCM 콘서트에 갔다가 아프리카 선교사로도 서원하였다. 그 뒤로도 두 세번 더 서원하였다. 그뿐인가.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나는 결신도 다섯 번은 넘게 하였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알맹이는 없는 서원이었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being "this") 그 존재가 된 자리에서 일궈낸 무엇(thing = ministry)으로 하나님을 섬겨보겠다는 이야기였다. 앞서서 언급된 일개미와 동급이었던 것이다. 나 자신이 제단에서, 예수님과 연합되어 죽는, 그 본질은 없었고 내가 가진 모든 능력과 열정과 순수함을 앞다투어 꺼내들고 제단 위에 불사르는 괴이한 불장난만 계속할 뿐이었다. 카인의 제사였고, 그것은 존재물이 바닥나면 비참해지는 실존으로 살았던 고통의 시간이었다. 따라서, 헌금낼 돈이 떨어지면 슬퍼했고, 재능을 펼칠 곳이 사라져도 슬펐으며, 나름대로 사역을 돕던 자리가 없어져도 슬퍼했다. 그뿐이랴, 세월이 가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차로 사라지는 것 같은 공허함도 나를 수시로 찾아왔다. 그 모든 것이 심판을 받고, 참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눈을 떠 안식에 참여한 자가 되었으나, 오늘도 그 옛사람의 본성은 여전히 활개를 친다. 1주일간 어린이집이 방학하는 것과 맞물려서 두 아이가 감기몸살로 아프다. 그런 연유로 회사에 나가는 아내 대신 3일간, 아이들과 함께 꼼짝없이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어야 했다. 3일째가 되니 갑갑함에 신경이 이만저만 곤두서는 것이 아니다. 뭐라도 좀 해야되겠는데, 아이들 먹이고 치우고 재우고 놀아주는 것 외엔 할 수가 없다. "이까짓 일"이라고 생각했던 행복한 육아의 시간에 대한 가벼움은 아내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육아가 아닌 "일 다운 일을 좀 하고 싶다"는 남성성의 본능이 아침부터 비명을 지른다. 영원히 이렇게 살 것도 아니건만, "행위"와 "존재물"에 익숙한 내 육신은 3일을 못 참고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나 말씀은 진리를 비추신다. 너의 것을 드리는 행위를 그만두고, 오늘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안식 안에 거하라고 하신다. 너를 존재 자체로서 오늘도 산 제사로 드리라 하신다. 너의 서원을 안식의 명령에 복종함으로 갚으라 하신다.
Pray.
주님, 번잡하고 무기력한 듯 보이는 하루에도, 당신의 백성은 당신의 말씀, 언약 안에 거하는 존재적 복종으로서 온전한 제사를 드리나이다. 육신으로 보면 곤고하고, 세상이 보기엔 무력해 보여도 저는 당신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서원의 산 제물입니다. 이 은혜의 법칙, 언약의 백성으로 복종케 하여 참된 안식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I pray in Jesus name. Amen.
2011.12.29. Timothy Ch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