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주님.
죄악은 끈질깁니다.
그 결과는 쓰디 쓴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은 달콤함을 제시하며 사기를 칩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머뭅니다.
주의 온전함으로 저를 감싸시옵소서.
보호하심을 바라나이다. 아멘.
<나의 묵상>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진다.
‘번성하고 생육하고 충만하라‘라는 말씀이 실현된다.
노아는 수렵이나 목축이 아닌 농사를 시작한다.
땅에 대한 축복도 실현된다.
그 풍요함이 넘쳤던가...?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든다.
함(그는 가나안의 아비이다.)은 그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린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뒤걸음쳐 들어가서 덮으며 얼굴을 돌이켜 보지 아니한다.
이제 노아는 깨어나서 둘째 아들 함이 행한 일을 알고
저주를 받아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길 원한다고 한다.
또한,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즉 셈은 가나안의 상전이 되는 것이다.)
야벳을 창대하게 하시고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를 원한다.
홍수 후, 노아는 삼백오십 년을 더 살고, 구백오십 세가 되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마감된다.
노아는 홍수 심판 사건을 경험하고, 그 후손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퍼져 나가는 것을 본다.
그 와중에 셈, 함, 야벳이 술 취한 그를 향한 태도로 말미암아 축복과 저주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의 잘못은 뉘우치거나 회개함이 없다.
포도주 마시고 술취해 벌것벗고 누운 것이 허물이나 죄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함이 그 사실을 말했다고 죄가 되고, 야벳과 셈이 가리웠다고 축복의 대상이 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함은 죄인되고 야벳과 셈은 축복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의 원인은 노아가 제공하였다.
노아는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는 없고 자녀들만 저주하고 축복한다.
이것은 홍수 심판후 평온을 찾은 것에서 온 안일함이 아니었던가?
'섰다고 생각했을 때 넘어질까 두려워하라'는 바울의 고백이 생각난다.
특히 본문에 대해
어버이 날에는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영적 아비인 목회자에 대한 질서와 존경을 강조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사회에서 상전에 대한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잘 인용되고, 그 만큼 많이 듣던 곳이다.
노아에 대한 아들들의 태도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예언되었고, 이것은 어느 공동체나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에는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이것을 이용한 기만은 과연 허락되는 것일까?
물론, 일반적인 온전한 가르침은 예외이다.
(묵상가운데, ‘기만으로 가르침이 예외’라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온전한 가르침이 예외’라는 표현을 하게 되니, 이러한 표현을 하면서도 내 자신이 씁쓸한 것은 첫째, 교회 구조가 예수님 중심이 아닌 담임목사 중심이 되어 버린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전체적인 분위기-본질이 희석되어 하나님 말씀보다는 담임목사의 철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둘째로 그러한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나의 심성 때문이다.)
부모와 노인, 교회의 권위자, 사회의 지도자를 존중하고 우대하는 것은 아름다운 질서이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혼이 오염된지도 모르고 자신을 주장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가장한 추악함이다.
특히 교회 내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부흥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거룩한 소명하에 그리스도를 머리하고 목회자와 성도가 하나가 되어 나아간다는 본질적 의미가,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를 머리하고 목회자가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자신의 아성을 쌓는 줄도 모르고 쌓거나 소위 목회 성공을 위해 그것을 이용하여 종교적 짐을 지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애매한 경계선은 본인 자신이 알 것이다.
모르면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성은 인간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 모두라 했으니, 나도 예외는 아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으니, 내가 그러한 속성이 짙으므로 그러한 것을 익히 잘 찾아내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나를 잘 살펴 오염된 영혼이 되지 않도록 할 일이다..
특히나, 목회자가 되겠다고 신학을 한다는 사람이니, 소위 평신도와 다른 입장에서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꼭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직분을 갖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잠시 본 말씀묵상선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지난 묵상을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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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의 말씀 : 벧전 5:1-7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3. 본문 주해
서신의 말미에 이르러 베드로는 성도중 장로들에게 권면한다.
신약성경에는 집사, 장로, 감독등 삼중적 성직 위계가 나온다.
집사는 교회의 일시적인 요구와 봉사하는 일을 맡았고, 장로는 가르치는 일이 중심이 되는 목회하는 일을 맡았다.
감독은 교회들을 감독하며 양떼들을 총괄하는 일을 맡았다.
성도는 주님의 양으로 비유되며 장로는 주님의 양을 치는 목자로 비유된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인사를 하면서 그들을 목자로, 성도들을 양떼로 비유한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시며(요 10:14), 목자장이시다(4절).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자들이며, 이들은 주님이 위임하신 목자로서 주님의 양떼인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
요한복음 10:·1-18절에서는 목자와 양과의 관계가 자세히 서술된다.
‘목자는 양떼를 친밀하게 알고 있으며 그는 양을 팔로 붙든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
목자는 도적이나 강도처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울타리를 넘지 않고 문을 통하여 정당하게 출입하며 동시에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양들은 다른 음성과 목자의 음성을 구별한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선한 목자이다.
이에 반해 삯꾼 목자는 조금만 위태로워도 쉽게 달아나 버린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양을 치라고 명하셨다(요 21:15-23).
이는 억지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 속에서 주신 사명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맡은 양이 자신의 양이 아니요 주님의 양이며 ‘하나님의 양무리’임을 확실히 알았다.
그리하여 자신을 본으로 삼아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장로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기쁨으로 돌보며 억지로 하지 말 것이다(2절).
돈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즐거움으로 할 것이다.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며 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 것이다(3절).
그리하면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결코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4절).
한편 젊은이들은 웃어른들에게 복종할 것이다(5절).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서로를 섬겨야 한다(5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발을 씻기신 것을 목도하였다(요 13:4-16).
주와 선생이 되시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는 겸손을 보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예표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복종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아들을 높이 들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때에는 우리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죽기까지 서로 복종할 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절).
성부 하나님과 성자 아들은 영원부터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으로 거하셨다.
곧 우리가 복종하여 아들 안에 거하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요 17:23).
이는 새 언약 안에 머무는 것으로, 하나님은 언약 안에 있는 자를 돌보신다(히 8:9).
그 때 우리의 모든 염려는 주님의 것이 되며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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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중풍으로 인한 불편한 몸 때문에 지팡이를 사용하시는데,
그 지팡이로 이거 저거를 가리키며 말씀하실 때 두려움과 더불어 화도 난다.
어렸을 적, 꾸중을 듣는데 연탄집게로 맞을 거 같은 두려움에 있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좀 언성을 높게 말씀하시면 반사적으로 방어하게 된다. 때론 내 언성도 높아진다.
노인이신 어머니는 가끔 전혀 엉뚱한 말씀도 하신다. 이럴 때면 이해보다는 화가 난다.
내적치유 관점에서는 어렸을 때의 내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두려움이 깔려 있고 그 피해를 준 어머니를 그때의 어린 내가 용서해야 한다고 한다.
오늘, 다시 한 번 그 어머니를 용서한다.
그 어머니는 나를 훈육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하긴 어머니 입장에선 동생과 심하게 다툰 우리에게 몇 번 경고하신 후에 훈육하셨으니 어머니로선 당연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은’ 어머니의 ‘경우’로 훈육하셨으니 그 ‘어린’ 나는 연탄집게가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연탄집게가 빨갛게 달아 올라 있는 줄 착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나도 혈기가 만만치 않다.
지금도 내 가슴에 그 혈기가 가슴 안에서 작은 불로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혈기내서 이득 본 것이 하나도 없다.
정직히 고백하건데, 말씀에 순종해서 알기 보다는 손해를 여러차례 봄으로써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이니 미련하기가 그지 없는 인생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을 되찾아 본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1:20)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이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이것이 가짜라는 것을 안다. 알지만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실재성 앞에 무릎 꿇는다. 말씀은 가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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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 그의 마음을 다스렸으면 어떤 축복을 받았을까?
전통적 관점으로 함이 흑인이라고 한다면, 그들만이 갖고 있는 남다른 특성은 축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셈과 야벳은 분명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 벗음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분별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죄는 짓지 않았다. 그로인해 축복이 되었다.
옳고 그름은 분별하자.
그러나 그로 인해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자.
그렇다면 잘못된 것에 비겁하라는 말인가?
사랑과 긍휼로 다가가자.
하나님의 심정과 심장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지난 1년 동안 이것을 많이 잊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자.
입을 열어 말하라 하면 순종하고, 함구하라면 함구하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그분이 모든 인생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비굴하진 말자.
내 명예와 사리사욕을 위해 타협하지 말자.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을 찌르거나 영혼을 훼손 시켜서는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그 근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영혼도 훼손 되지 않는다.
혹여 거친 단어나 어휘일지라도 그 진실성이 느껴지면 통한다.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 그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감동에 따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순종할 일이다.
<마침기도>
주님,
주의 심정과 주의 심장을 구합니다.
더러운 죄악, 그 죄성이 나를 지배하려 하고 문지방에 배고픈 사자처럼 엎드려져 있습니다.
주님의 낯을 구합니다.
당신의 눈동자에 나의 눈동자를 맞추길 원합니다.
오, 주님.
양치는 개가 되기를 원하여 기도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주인의 눈빛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양몰이 개.
양치기 개의 할 일은 그것뿐입니다.
양치기 개가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주인이 양치는 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이러한 기도를 잊은 지 1년이 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나의 사고와 논리를 바탕으로 잘잘못만 따지는 신학은 죽은 것입니다.
진리를 분별한다고 하나
주의주장에 의한 편협함은 자기 아성일 뿐입니다.
옳다고 생각된 것이 틀렸다면 버릴 줄도 아는 겸손함을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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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maninjesus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1.18 묵상이라고 올려 놓은 후, 서교수님의 묵상 글을 보니 '가나안 주의'에 대한 경고가 핵심임을 알게 됩니다. 함의 죄의 속성이 가나안에 흐름까지 보게 됩니다. 노아라는 한 인간에게서 나온 자녀들이 선악간에 선택이 있음을 봄과 동시에, 한 인간인 노아 자신속에도 함과 같은 요소가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노아나 함과 같은 한 인간으로서 내 안의 가나안주의를 물리치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 속에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