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이나, 그 행함까지도 주님의 주권적 은혜로 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롬 4:1-8).
작성자복음지기작성시간20.07.29조회수258 목록 댓글 02020년 7월 29일(수)
* 시작 기도
주님...
불법이 아니라도 주님 앞에서 할 일이 많은데 어찌 그리 불법이 판을 치며 나를 끌고 가는지요?
이 죄인이 불법의 종이 되어 꼼짝하지 못하고 끌려가나이다.
이처럼 영으로 죽은 자되어 불법을 밥 먹 듯 하고 있사오나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사오니 내 의가 아닌 주님의 의로 나를 구원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하게 하사 불법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오직 의의 종으로 삼아주소서.
오늘도 무화과 옷을 벗고 오직 그리스도의 옷, 보혈의 옷으로 덧입기 원하오니 내 안에 예수로 부요한 자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롬 4:1-8
제목 :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이나, 그 행함까지도 주님의 주권적 은혜로 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행위로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로마서에서는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서에서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것만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구원, 곧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는 믿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행위를 배제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논증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영화를 가졌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한껏 사용하면서 그 동산에서 왕처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먹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창세기 2:17절 말씀이 그에게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계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지금 당장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육신도 언젠가는 죽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면 늘 하나님의 품속에서 거하여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 수 있지만 계명을 어기므로 인하여 언약이 깨지고 결국 아담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분리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진정한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죽었다(고전 15:22).
따라서 아무리 유대인들이 대단하고 잘났을지라도 그들 스스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계명인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지옥의 불을 지피는 땔감 정도로 취급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구원, 곧 의롭다 함을 얻는 근거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믿음을 강조하는 예로 창세기 15:6절의 아브라함을 근거로 들고 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하여 두 가지 약속을 하신다.
첫째는 자손에 대한 약속이며, 둘째는 땅에 대한 약속이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결혼을 하였으나 75세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도 밤하늘에 떠 있는 뭇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네 자손을 이와 같이 주겠다고 하신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아브라함은 아멘으로 받는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에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곧 디아스포라 유대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근거로 믿음을 강조할 때 예로 든 아브라함을 또한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그가 실제로 아들을 바친 행동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그의 행함으로 인하여 그의 믿음이 온전하여 졌다고 말한다.
(약 2:21-22)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사람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행함이 항상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인 것이다.
행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은 항상 행함을 수반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행함만을 강조할 때 그것은 율법주의가 되어서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자기주장의지의 죄에 빠지게 되고 만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곧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분리된 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결과 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의 은총에 거하게 된다.
결국 이런 자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는 복을 받은 자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죄를 씻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의 피, 곧 보혈의 공로밖에 없다.
물론 나의 죄를 나의 입으로 자백하면 예수님의 보혈로 나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신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할지라도 내가 알지 못하고 지은 죄까지 다 자백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이것은 결국 나의 이성과 나의 능력으로는 온전한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나의 죄를 온전히 자백하고 회개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주님께 있다.
주의 영,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내가 알지 못하는 죄까지 다 자백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 바로 은혜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 것이다.
내가 내 입술로 내 죄를 자백한다고 하여 그것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렇게 자백할 수 있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 곧 의롭다 함을 얻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 될 수밖에 없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그러나 나의 입술로 나의 죄를 자백하는 행위를 통해서 죄씻음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을지라도 그 구원의 근거는 내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의 주권에 있음을 인정할 때 그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믿음은 행함이 따라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행함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그 행함까지도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임을 믿음으로 고백하여야 한다.
따라서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나 믿음도 선물이요, 또한 행함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는다면 그 자리에 나는 없어지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나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였었다.
그래서 믿음만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행함만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쪽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가 있어야 비로소 그것이 진정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똑똑하고 능력이 있다고 하여 어떻게 온전한 행함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있을 수도 없고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내 입으로 자백하지 않은 죄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래서 구원 받을 수 없다면 내가 어떻게 구원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나는 기억력도 좋지 않아서 내가 행한 모든 악행을 다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자백할 수 있는 것까지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은 내가 자백하는 것까지 주님의 섭리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보면 죽어 마땅한 자이다.
지금까지 내가 행한 악행이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해보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다.
그저 재와 티끌가운데 앉아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그런 가난한 마음을 주셔서 나 자신이 회개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 모습으로 주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 주님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신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도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찬송과 영광을 올려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내 힘과 의지로 내가 지은 죄를 자백하는 줄 알았었나이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다시 한 번 보게 하시고 그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의 눈물을 뿌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주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요, 죽어 마땅한 자니이다.
이런 나를 주님의 말씀의 사역자로,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오니 나의 생각과 나의 뜻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 전하기 원하시는 영생의 말씀만 전하게 하소서.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은 자들이 점점 많아져 그들이 참된 진리 안에서 모두가 영생을 누리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 주신 은혜 앞에 나는 죽고 오직 주님만 나타나 그 영광의 빛을 비추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