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5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이 죄인이 말씀 앞에 섭니다.
온갖 불의와 죄로 얼룩진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주의 보혈로 덮어주소서.
조금만 틈이 나면 조금만 시간이 나면 죄를 먹고 마시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사로잡나이다.
이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런 종을 긍휼의 그릇으로 보듬어 주옵소서.
그 그릇에 주의 보혈을 담아 부어주소서.
내 영이 주의 보혈로 정결케 되어 주의 성령이 내 안에서 마음껏 역사하게 하소서.
오늘 주의 지혜와 은혜를 구하오니 소낙비와 같이 부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롬 14:1-12
제목 : “너는 누구냐?”라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나의 묵상
로마에 있는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였으며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교제하지는 못했지만 오가는 소식으로 항상 교제하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특수성이 있었다.
로마는 이방지역이었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그곳에도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로마에 와서 계속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로마에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생활습관이나 전통 그리고 문화들이 서로 다른 관계로 인하여 신앙생활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먹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들은 함께 예배한 후에 식사도 함께 하였는데 이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시간에 서로의 문화와 전통으로 인하여 갈등이 시작된다.
유대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유대 전통을 중시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시중에 유통되는 고기는 우상에 바쳐진 제물이라고 하여 먹지 않았다.
음료수로 사용되는 포도주도 그와 같은 이유로 그들은 마시지 않았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은 안식일이나 월삭 월망 등 유대인의 전통에 중요한 날을 기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먹고 마시며 어떤 중요하게 여기는 날들로 인하여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마찰을 빚게 된 것이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유대 전통을 알 수도 없었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모든 것이 자유로웠던 것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전통 때문에 먹지 못하는 고기나 마시지 못하는 포도주도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먹고 마셨다.
그래서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먹고 마시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제약을 받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업신여겼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분방하게 신앙생활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유대 전통에 제약을 받고 아무 것이나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하였고, 아무 것이나 먹고 마시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믿음이 강한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여기서 ‘받으라’는 헬라어로 ‘프로스람바노’로써 단순히 권면하고 부탁하는 어조가 아니라 아주 강력하게 명령하는 투의 말이다.
따라서 믿음이 강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으로 믿음이 약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 것을 주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먹고 마시고의 문제보다도 더 큰 죄가 바로 서로를 업신여기고 정죄하며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신앙의 정도와 색깔은 다르지만 하나님이 다 받으신 자들이다.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물론 이것은 복음과 진리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다.
만약 이 문제가 복음과 진리의 문제라면 목숨 걸고 막아야 할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다 한 주를 섬기는 자들이기에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하며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나와 신앙의 색깔이 조금 다르다고 얼마나 그를 비판했는가?
나에 비해서 신앙의 정도가 떨어진다고 그를 얼마나 업신여기기도 했었는가?
그런 나는 마치 눅 15장에 나오는 큰 아들과 다름없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가 외국으로 가서 그 모든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하고 말았다.
알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그 어디에도 자기 몸 하나 붙일 곳이 없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을 요량으로 돼지를 치는 집에 종으로 들어가지만, 그것도 여의치 못하였다.
그 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집이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여 심지어 종들조차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자기의 꼴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한편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후로 매일 같이 습관처럼 하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동구 밖에 나가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하면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자기 신세가 처량하여 아버지 집에 가서 아들이 아니라 종의 신분으로라도 배를 곯지 않고 먹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생각하고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에게 꾸지람 들을 것을 상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까이 왔을 때 멀리서 희미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OO야, OO야~~~”
그 소리는 점점 커지는데 가만히 보니까 아버지가 맨 발로 자기를 향하여 달려오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자기는 염치가 없어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상황만 살피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맨 발로 달려오시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가슴에 안고 잘 왔다고 하면서 등을 토닥여 주신다.
씻지도 못하고 냄새나는 아들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자신 앞에 서 있는 아들만 보일 뿐이다.
그 아들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종들을 불러 명령한다.
“좋은 옷을 갈아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를 해라. 우리가 잔치를 하자.”
둘째 아들은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종의 하나로 여겨줘도 감지덕지일 것 같은데 아버지에게서 어떠한 책임 추궁이나 꾸지람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큰 아들은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여 자기 동생을 비난하는 것이다.
오늘 내 안에 큰 아들의 모습과 둘째 아들의 모습이 공존한다.
내 안에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함께 내재해 있다.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는 나보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얼마나 업신여기고 무시했는지 모른다.
나만큼 일하지 않으면 그들을 놀고먹는 자 취급하면서 묵사발을 만들기도 하였다.
내가 보기에 나보다 열심히 일하고 좋은 결과를 내면 내 속에서 시기와 질투로 인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디지를 못하였다.
오늘 주님께서는 나를 향하여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신다.
복음 안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며, 이런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충만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나의 의만 남아서 상대방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업신여기는 모습만 보이는 것이다.
이런 나는 내가 나를 봐도 용납할 수 없는 자이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이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나 그런 나를 주님은 용납하신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오늘 현재 나에게도 그런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 용납의 삶, 이해하는 삶, 먼저 손을 내미는 삶, 먼저 섬기는 삶을 살 때 그것이 바로 영생을 누리는 삶이 된다.
이것은 나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 얻은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하나의 나의 의가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언제든지 유대 그리스도인과 같이 약한 자가 될 수 있고, 이방 그리스도인과 같이 믿음이 강한 자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둘째 아들과 같이 고개를 들 수 없는 乙이 될 수 있고, 큰 아들과 같이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는 甲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이 오늘 나에게 물으시는 “너는 누구냐?”라는 이 물음 앞에서 항상 죄인임을 깨닫고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는 자이지만, 그런 나를 주님께서 용납해 주셨다는 복음의 진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겸손히 나아갈 따름이다.
나는 언제든지 자신의 입장이 바뀔 수 있음에 유념하여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대답할 것을 준비하여야겠다.
그동안 나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사람들에게 정말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며, 오늘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겠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그 은혜에 다시 한 번 감격하며 영광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소리 높여 찬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그동안 나는 내가 제법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죄가 그렇게나 많은지 정말 몰랐나이다.
나는 몸으로 지은 것들만 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으로 마음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나를 넘어뜨리는지.....
원망과 불평, 비난과 멸시, 업신여김과 무시,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이 그동안 내 안에서 얼마나 많았었는지, 내 안에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그대로 공존함을 깨닫게 되었나이다.
주님...
내가 조금만 손해를 보아도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갚아주어야만 하는 큰 아들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요, 아무런 대책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둘째 아들의 모습이 바로 나였음을 고백하나이다.
이런 나로 인하여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갈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상처를 주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 가운데 거하게 하소서.
이는 예전에 담임으로 목회를 하면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며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잘 되어야 하고 성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의로 인함입니다.
장마와 홍수로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다시금 태풍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이들을 위로하시고 무엇보다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가운데 있는 이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이 코로나가 오히려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무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