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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묵상

방언보다 더 큰 은사, 예언은 계시로 아는 비밀이며 영생이다(고전 14:1-13)

작성자굿뉴스|작성시간26.06.09|조회수109 목록 댓글 1

방언보다 더 큰 은사, 예언은 계시로 아는 비밀이며 영생이다(고전 14:1-13)

1. 오늘의 말씀 : 고전 14:1-13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2. 시작 기도

아버지... 지난주일 천안 세움교회 8주년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창과 파주에서 그간 영으로 교제하던 지체들을 대면하여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제주와 수원의 공동체도 마음을 담은 사랑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각 지체가 합력하여 열방에 생명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니 감사가 넘쳤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크신 일, 독생자를 보내시고 생명을 주신 일을 널리 선포하게 하소서. 로마서 주해묵상의 최종 원고를 정독하면서 내 영혼이 복음으로 회복되고 충만해지고 감격합니다. 나머지 출간 과정도 간섭하여 침체된 영혼을 살리는 역사가 있기를 구합니다. 오늘도 감사함으로 하늘 성소로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아버지 집으로 나아갑니다. 오염된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고린도전서 12-14장은 고린도교회 안에 나타난 은사의 문제를 다룬다. 12장에서는 영적 은사의 다양성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통일성을 논하였다. 성령이 성도 각자에게 나누어주는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를 위해 은사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13장은 은사를 사용하는 길로서 ‘사랑’을 제시한다(12:31b;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4장은 고린도교회의 예배 시 문제가 된 방언의 은사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방언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비교된다. 예언은 교회에 덕을 세운다는 점에서 방언보다 더 큰 은사이다(12:31a;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14장의 서언(1절)은 12장 31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12:31).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14:1).

 

“더 큰 은사”(12:31)는 방언의 은사보다 공동체에 더 유익한 “예언의 은사”이다. 은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the most excellent way)은 “사랑의 길”이다(way of love)(NIV).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는 병행하거나 대립한다. 두 은사의 공통점은 모두 성령의 선물이라는 점이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고(2절),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계시”이다(6절). 만일 방언을 해석하면 예언의 범주에 들어간다(5절). 방언은 개인의 신앙에 유익하나 공동체를 세우는 것과는 무관하다. 은사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기에, 방언은 권장되나 제한되어야 한다. 특히 방언은 공중 예배 시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본 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린도교회가 방언을 특별한 은사로 알고 남용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방언을 성령 받은 외적 표시로 간주했던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당시 신비종교에서 나타나는 황홀경의 현상과 유사하였다. 확실히 자기의식을 초월한 황홀경의 체험은 신적 존재와 만나는 착시현상을 불러온다.

 

2-5절에서 바울은 왜 방언이 예언보다 덜 중요한지를 밝힌다. 방언과 예언의 우열을 가늠하는 기준은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여부에 있다. 방언은 신자 개인의 덕을 세우나 예언은 교회(공동체)의 덕을 세운다(4절).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2절). 그러나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덕을 세우며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이다(3절).

 

그렇다고 바울이 방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예언보다 못하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더 원한다(5절). 바울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18절). 하지만 그가 만일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였다면 교인들에게 무엇이 유익하였겠는가?(6절). 그는 방언을 하였으나 방언이 아닌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을 끼쳤다,

 

7-8절은 피리와 거문고와 나팔의 비유로, 10-11절은 외국어의 비유로 예언이 방언보다 더 우월함을 강조한다. 물론 그 기준점은 공동체의 유익이다. 생명 없는 피리나 거문고도 음색이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피리를 부는 것인지 거문고를 타는 것인지 알 수 있겠는가?(7절). 또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전쟁을 치르겠는가?(8절). 이와 같이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않으면(방언을 말하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10절). 그것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말이 있으나 뜻이 없는 말은 하나도 없다(10절). 그러므로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하면, 바울은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외국인이 되고, 그도 바울에게 외국인이 될 것이다(11절).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자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예언이 풍성하기를 구해야 한다(12절). 13절은, 2-12절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14-19절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논하고, 20-25절은 방언과 예언을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논하고, 26-40절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예배와 관련하여 논한다. 공동체를 세우는 점에서 예언은 방언보다 더 큰 은사이다. 문자적으로 예언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사로서 예언은 그렇지 않다. 바울서신 전체를 통해 예언은 가장 많이 나오는 은사이다(살전 5:20; 고전 11:4-5; 12-14장; 롬 12:6; 엡 2:20; 3:5; 4:11; 딤전 1:18; 4:14).

 

14장에서 말하는 예언은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진다. 예언은 계시와 지식과 가르침과 함께 언급된다(6절). 이로 보건대 계시와 예언, 지식과 교훈은 서로 관련이 있다. 26절에서는 계시만 나오고 예언은 나오지 않는다. 30-31절에서는 예언과 계시가 나란히 나온다. 이런 표현을 종합하면, 예언은 ‘계시의 수단’이다. 계시는 비밀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 비밀을 계시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간략하게 적은 바와 같습니다”(엡 3:3).

 

13:2에서 예언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하였다(4:1). 그렇다면 바울은 ‘비밀’이라는 개념을 통해 ‘예언과 계시’를 연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이 드러나는 계시를 말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 모두가 특별히 예언하기를 바란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12:31)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4:1).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14:5).

 

그러면 예언을 통해 전해지는 계시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은 하나님의 비밀이 아니다. 계시는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알 수 있는 영역이다. 인간의 이성이 아무리 순수해도 그것은 만물 안에서 경험한 세계만 알 수 있도록 한정되었다(칸트). 칸트의 통찰은 바울이 이미 말한 바이다(고전 2:9).

 

하나님의 비밀은 창세전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정하신 지혜이다(고전 2:6-7). 창세전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하신 약속이다(딛 1:2; 요일 2:25).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는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엡 3:11).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그의 기쁘신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엡 1:5).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계시로 비밀을 알았다고 말한다(엡 3:3). 그리고 그가 기록한 것을 읽는 독자(신자)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엡 3:4). 이 비밀은 유대인은 물론 모든 이방인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엡 3:6).

 

복음을 통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이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창세전 약속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상속은 생명을 전제로 한다. 부모로부터 태어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겠는가? 함께 상속자가 되는 것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영생의 약속을 가지는 자가 된다.

 

복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비밀이 드러나는 계시이다. 예언의 은사는 바로 이 계시를 전하여 사람들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다. 영생을 얻은 자마다 창세전 약속인 계시를 드러내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할 것이다. 우리가 모두 특별히 예언하기를 사모할 것이다. 생명 얻은 자는 생명을 전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할 것이다!

 

 

4. 나의 묵상

1990년대 한국교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인 방언의 은사가 유행하였다. 어떤 교단에서는 대놓고 방언하지 않으면 구원의 증거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그래서 방언 받기가 한동안 유행이었다. 무지하고 무모하던 신학생 시절, 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많이 하였다. 그중 하나가 내가 아는 지인들을 모아놓고 방언 은사 집회를 한 것이다. 동료 신학생 중에 영험 있는 형님으로 통했던 나는 동기생들을 데리고 어느 기도원을 갔다.

 

신학교 동기생들은 무아지경의 통성 기도를 하였다. 모인 지인들에게 안수하며, 그들이 혀가 뒤틀려 이상한 소리를 내면 방언을 받은 것이라고 하며 법석을 떨었다. 끝까지 방언이 터지지 않으면 ‘할렐루야’를 거꾸로 부르게 하여 억지로 방언 흉내를 내게 하였다. 그러면서 영성 있는 전도자로 거들먹거렸다. 지금은 그런 모임조차 하려는 열정이 없지만, 하여튼 잘못된 열심이었다,

 

또 신학생 동료들을 대상으로 예언을 한다고 소동을 부렸다. 내가 방언을 하고, 내가 스스로 통역을 하며, 동기생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였다.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그런 말들은 모두 나의 자의식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도 동기생들은 감격하여 예언(?)을 받으며, 나를 특별한 은사자로 대하였다. 정작 내게는 곤고함이 밀려왔고, 성경 말씀도 학업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즉시 중단하였다.

 

대체 무엇을 배우러 신학교에 갔는지 모른다. 목회 현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다. 철저히 육에 속한 자로 사역하였다. 당연히 썩어질 것을 거두었다. 공의의 심판으로 육에 속한 자가 죽었다. 심판의 무덤에 창세전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예비된 지혜, 계시로 비밀을 알게 되었다. 바울이 말대로 계시로 비밀을 아는 자가 전할 때 다른 사람도 알게 된다. 이후 기회를 다하여 계시로 알게 된 비밀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복음을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이 더욱 더 큰 은사인 예언이다.

 

그러나 계시로 알게 된 비밀을 전해도 하나님의 영으로 깨닫는 자만 알 수 있다. 그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래서 비밀을 맡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다.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고전 4:1-2). 오늘도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충성을 다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고린도교회 안에 은사가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지 몰라 도리어 교회 안에 혼란이 왔습니다. 특히 알수 없는 말을 하는 방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방언은 자의식을 넘어 황홀경에 이르게 하며, 신적 체험을 했다는 자부심을 안겨줍니다. 저 역시 30대 신학생 시절 방언을 하였습니다. 뜻도 의미도 알수 없는 말을 하며 은근히 자랑하였습니다. 무모하고 무도한 시절, 심지어 이런 것을 받게 해주겠다며 은사 집회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선물로 주시는 은사를 임의로 받고자 했는지, 그것이 신성모독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버지여... 방언의 은사는 개인에게 덕을 세우나 예언의 은사는 공동체에 덕을 세웁니다.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오해합니다. 예언은 비밀을 드러내는 계시의 수단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장래 일을 알아맞히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나 하는 것을 감히 은사의 이름으로 하곤 합니다. 오, 주여! 저도 무지했을 때 그러하였습니다. 철저히 육에 속한 자로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까지 하였습니다. 돌아보니 참담합니다.

 

아버지... 육체에 속하여 썩을 것으로 심던 자, 썩을 것으로 거두었습니다. 주께서 공의로 심판하셨으나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심판의 자리에 비밀이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만 아는 창세전의 세계를 알게 하시고 거기로부터 주시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계시로 비밀을 알게 된 자, 이제는 비밀을 맡은 자가 되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기회를 다하여 계시로 알게 된 영생을 전하게 하소서. 종은 충성할 뿐, 결과는 나를 보내신 주님만이 아십니다. 오늘도 맡은 자로서 충성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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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답터 | 작성시간 26.06.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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