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알아듣는 다섯 마디 예언을!(고전 14:14-25)
1. 오늘의 말씀 : 고전 14:14-25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어제 세네갈에서 복음생명을 전하던 정선교사 가정과 만나 교제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지를 옮겨 필리핀의 선교사 훈련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사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그의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십니다. 새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일은 독생자를 보내사 만민에게 생명을 주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죄와 사망과 어둠에 속한 자가 독생자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고 풍성히 누립니다. 오늘도 아들의 죽음으로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다. 말씀 앞에 엎드리오니, 내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풍성했으나 도리어 문제를 초래하였다.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이 나누어준 것이다(12:4, 11). 은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하려면 ‘사랑’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은사 자체보다 그것을 잘 사용하는 사랑의 길(방식)이 더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성령의 은사 자체를 경히 여겨서도 안 된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특별히 문제가 된 은사는 ‘방언’이었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께 아뢰는 은사이다. 교회 안에서는 기도와 찬송과 감사가 방언으로 이루어졌다(15-17절). 방언은 성도 개인에게는 영적으로 유익하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에 덕을 세우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여 바울은 방언에 비해 예언이 더 큰 은사라고 하며,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은사로서 예언은 장래 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14장에서는 예언과 계시가 상호교차 하면서 불린다. 계시는 비밀이 드러나는 것이며, 그 비밀은 창세전 하나님의 약속인 영생이다. 교회는 복음을 통해 생명을 전하는 예언에 충실해야 하며, 성도 각자는 이 은사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14-25절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하나님과의 관계(14-19절)와 불신자와의 관계(20-25절)를 통해 비교한다.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단이다. 곧 신자는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축복한다. 그러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방언하는 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따라서 마음으로 열매 맺지 못한다.
14-17절에서 바울은 예언과 방언의 관계를 그것이 이해할 수 있는 은사인지, 아닌지의 관점에서 비교한다. 여기서 “나의 영”과 “나의 마음”이 대비를 이룬다. 그렇다고 ‘나-양식’이 바울 자신만을 말하지 않는다. 방언하는 모두를 대표하여 ‘나-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주체는 “나의 영”이다. 물론 나의 영은 성령이 아닌 사람의 영이다. “나의 마음”은 문자적으로 “나의 이성”(누스)이다(‘마음’의 헬라어는 ‘카르디아’임). 나의 영, 곧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이성은 기도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다.
방언 기도(영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지만, 이성은 그 기도의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의 결정을 내린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영)로 기도하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성)로 기도하겠다고 한다(15절).
여기서 강조점은 후자, 곧 이성으로 기도하는 것에 있다. 16절에서 바울은 방언하는 자에게 권면한다. 만일 신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으로 감사하면 알지 못하는 자(갓 믿기 시작한 사람 또는 은사가 없는 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감사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하겠는가? 비록 그가 훌륭하게 감사 기도를 했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 않는다(17절).
다시 바울은 방언과 예언에 있어 자기 입장을 분명히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더 많이 방언을 하였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18절). 바울의 이 말은 그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해서 방언을 예언보다 낮게 취급한다는 고린도 교인들의 비판을 대비한 것이다. 바울은 누구보다 더 풍성한 방언의 은사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는 교회 안에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한다(19절).
“일만 마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다섯 마디 말”은 깨달은 이성(누스)으로 가르치는 예언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in the church)는 방언을 자제해야 한다(19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일만 마디보다 다섯 마디라도 이성적인 언어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 특히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을 위해서 방언의 은사는 자제되어야 한다.
20-25절은 방언과 예언의 역할을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비교한다. 이를 위해 어린아이와 성숙한 자를 대비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20절). 개역개정에서 “지혜”의 헬라어 ‘페렌’은 정신적, 영적, 활동력의 장소인 ‘생각’을 뜻한다(새번역, “생각”). 즉 생각에 있어 성숙하고 온전한 사고를 지니라는 말이다.
방언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자는 생각이 어린아이같이 유치한 자이다. 어린아이(네피오스)는 미성숙한 자를 뜻한다(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어린아이는 ‘파이디온’임). 악에는 어린아이같이 되라는 것은 생각에 있어 성숙한 자가 되라는 말과 대립한다. 곧 성숙한 자는 은사를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자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이 된다.
바울은 방언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이사야 28:11을 인용한다(21절). “율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방언을 하는 사람의 혀와 딴 나라 사람의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은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21절). 이사야서의 배경은 이렇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말씀에 늘 불순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특이한 언어(하나님의 언어)를 가지고 말씀하셨어도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방언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언어를 거절하여 심판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방언은 심판의 표징(표적)이 된 것이다.
반면 신약시대의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표적이다(22절). 불신자에게 방언이 표적인 것은, 그들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방언을 이해할 수 없는 불신자는 회개할 수 없게 되어 결과적으로 심판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방언은 불신자에게 심판의 표적이다.
반대로 예언은 불신자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표적이다. 여기서 표적은 심판의 표적이 아니라 은혜의 표적이다. 믿는 자는 계시의 수단인 예언을 듣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간다. 물론 믿는 자라도 예언을 거절하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11:34 참고).
23-25절에서는 방언과 예언이 불신자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설명한다. 23절은 방언을, 24-25절은 예언에 대한 적용이다. 온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고 있으면, 초신자나 불신자가 와서 듣고 그들을 미쳤다고 하지 않겠는가?(23절) 그들은 방언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도리어 교인들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예언을 말하고 있으면, 초신자나 불신자가 와서 듣고 그들로부터 질책을 받고 심판을 받아 그 마음속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된다(24절). 그래서 그는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라고 밝히 말하게 될 것이다(25절).
은사를 주시는 이는 성령이다. 성령의 은사는 주님이 주시는 다양한 섬김을 수행한다. 하나님은 은사로 섬기는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방언은 개인이 하나님과 교제할 때는 확실히 유익하다. 그러나 다른 성도나 특히 초신자와 불신자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회개의 길을 막아 심판의 표적이 되고 만다. 그러나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예언은 초신자나 불신자들이 알아듣고 회개하도록 이끈다.
교회는 이중의 목적을 지향한다. 안으로는 신자의 성숙을 도모하고(엡 4:13), 밖으로는 영혼 구원의 사명을 수행한다(마 28:18-20). 이에 교회의 목적은 성숙한 성도를 세워 그들을 통해 영혼 구원의 사명을 수행한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궁극적으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영혼 구원의 사명과 관련시킨다. 교인들끼리만 알아듣는 말은 방언이다. 계시는 초신자나 불신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해져야 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철학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알아듣는 말을 하는 예언의 은사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철학의 언어는 ‘이성’으로 깨달은 말로 신앙의 내용을 표현해 왔다. 헤겔은 종교적 표상(신앙의 언어) 속에 숨어있는 진리 자체를 보편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철학적 사유와 사상과 개념’에 있다고 하였다.
본문 20절, ‘생각’(지혜)은 ‘사유’에 해당한다. 생각(사유)의 과정을 통해 ‘사상’이 형성된다. 사상의 집약체로서 ‘개념’이 생성된다. 개념이란 진리의 내용을 감성적 표상 없이 순수하게 파악하고 이를 하나의 단어나 명제로 집약하여 나타낸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철학은 (교인들끼리만 통하는) ‘종교적 표상’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의 내용을 순수한 ‘사상과 개념’으로 나타낸다.
“철학은 개념적 사유를 통해 종교적 표상 속에 숨어있는 진리의 내용을 파악하고 이를 보편타당하게 실현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철학과 신학과 종교는 관찰 방법 또는 형식에 따라 구별되지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내용과 목적에 있어’ 일치한다”(<헤겔의 역사철학>, 145p).
기독교 역사에서 종교개혁은 100년도 채 안 되어 쇠락하여 죽은 정통으로 변했다. 이후 독일의 경건주의와 영국의 청교도 신앙은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 그러나 그것도 다시 100년이 지나면서 교조적 신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교회는 서구정복사와 마녀사냥에서 보여준 만행이나 지동설의 거부 등 비이성적 모습으로 인하여 이성적 사고를 지닌 이들에게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18세기 들어서 지성인들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종교적 표상) 자체를 거부하였다. 실제 교회 안에서도 진리에 관한 언어들은 화석화된 죽은 언어가 되고 말았다. 종교의 표상, 곧 진리의 언어들은 심히 오염되었다. 이후 기독교의 선각자들은 진리의 내용을 철학적 개념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하나님을 ‘절대자’, ‘무한자’, ‘절대 지’(知), ‘궁극적 실재’, ‘궁극적 관심’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후 200여 년간 이들의 노고로 기독교는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20세기 들어 두 번의 세계대전이 기독교 세계인 서구에서 일어났다. 이는 기독교 역사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 무덤은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그리스도의 무덤 안에서 생명의 역사가 태동하였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가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이다. 이들은 이전의 200년간의 철학 사상을 토대로 신학을 전개하였다. 바르트는 성경을 중심으로 진리의 내용을 설파했으며(교회 교의학), 틸리히는 철학의 개념으로 진리의 내용을 설파하였다(조직신학).
한국교회의 역사는 일천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볼 때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난 선각자들에게 빚진 자이다. 현재의 한국교회에서도 종교의 표상은 상당히 오염되었다. 구원, 복음, 영생이라는 진리의 언어는 심연을 건드려야 진리가 된다(틸리히). 복음이라는 말, 생명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언어는 닳고 닳은 타이어처럼 화석화된 언어, 죽은 언어이다.
지하철에서 여전히 천국과 지옥을 외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용기에는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세인들은 그런 사람을 비웃는다. 교회의 어떤 설교는 진리의 내용이 분명하나 초신자나 불신자에게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 방언으로 들린다. 알아듣지 못하니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심판의 표적이 된다.
계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진리의 내용을 철학적 개념으로 나타내는 시도가 요구된다. 선각자들이 사유한 정신적 영적 유산을 활용하여 진리의 내용을 전해야 한다. 이로써 교회가 전하고자 하는 신앙의 표상은 더욱 명료해지고, 신앙의 표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 사유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도리어 성숙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이 시대 철학적 사유와 사상과 개념을 촉구한다.
4. 나의 묵상
어제 세네갈 선교사 가정과 교제하였다. 그들은 지난주일 선교관 근처 교회에 출석하였다. 상당히 규모가 있는 교회였고, 설교 전까지는 순서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정작 설교 시간에는 세상 문화센터에서도 들을 수 있는 가정, 부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성경을 이야기하지만, 그리스도나 복음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부부 갈등의 해법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교회가 거기뿐이겠는가! 목사가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서 우격다짐 식으로 설교를 한다. 특히 선포자는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만 마디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각성해야 한다. 교인들끼리 알아듣는 말은 방언이다. 초신자나 불신자를 깨닫게 할 수 없다. 오늘날 방언은 교인들만 알아듣는 종교적 표상이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게 하려면 개념화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시대정신을 읽는 기독교 철학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적어도 4년 전만 해도 철학의 맹인이었다.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 성경 보고 기도하고 사역하기에 바쁜데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 파리 지부장 손장로님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틀간 교제하면서 나의 무지가 드러나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30년 넘게 신학, 철학 등 책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후 철학에 관심을 두었고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기원복음생명 책은 계몽주의 이후 등장한 철학적 비판을 복음으로 응답한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이 책은 “복음은 철학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빛 안에서 포월한다”고 소회를 밝혔다(이승민 박사).
한편, 손장로님은 목사들도 소화하기 어려운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12권)을 원서로 구입하여 6년간 완독하였다. 지난달 군산에서 작업 중인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로마서 주해 묵상>이 출간되는 것을 알고, 바르트의 <로마서>를 영어, 불어, 한글판을 비교해 가면서 정독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내가 속한 목요목회자 성경공부에 그를 초대하여 말씀을 들었다. 목사 한 명이 그에게 질문하였다. “장로님은 사역자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방대한 신학 철학 독서를 하느냐”고 물었다. 장로님의 대답은 간단하였으나 강력하였다.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화가로서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기법 이전에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였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교회가 말하는 신앙의 표상은 방언으로 들린다. 그들에게 깨닫는 말 다섯 마디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개념화된 언어이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세상에 있는 영혼 구원이다. 이번에 출간되는 <로마서 주해 묵상>은 바르트의 로마서와 함께 한다. 인쇄를 앞두고 디자인된 원고를 읽어가는데 강력한 복음의 터치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이번에 여덟 번째 책을 내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복음은 유치한 어린아이같이 한번 듣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의 부요함은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복음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확신하기는 복음의 부요하이 담긴 <로마서 주해묵상>이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폭탄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저자를 울리지 못하는 복음이 어떻게 독자를 울리겠는가? 이 책이 복음의 다섯 마디 깨닫는 말이 되어 초신자든, 불신자든, 기존 신자든 그들을 주께로 돌이키게 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나은 것은, 불신자와 초신자들이 듣고 깨달아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방언을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자에게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요, 그들을 구원해야 할 교회의 사명과 무관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듣고 깨닫는 다섯 마디 예언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말이 어떻게 영혼을 구하겠나이까?
아버지여... 교회 안에서만 알아듣는 종교적 표상은 불신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개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종교적 표상에만 매달렸지, 그것을 개념화하는 세상 학문이나 철학에 대해서 문외한이었습니다. 깨닫게 하는 다섯 마디를 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정한 때에 공동체의 지체를 통해 부족함을 채우셨습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 무지의 지가 참된 지혜입니다. 여전히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동역자들이 많이 있나이다. 그들을 깨워주소서.
아버지... 다음 세대, 청년 세대, 세속화된 세대를 사는 이들에게 언제까지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를 하겠나이까? 사는 동안 맡겨진 일에 신실하게 하소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오실 그리스도를 전하며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폈듯이, 오신 그리스도(복음)를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피게 하소서.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와 높이가 얼마나 풍성한지요! 이번 출간되는 로마서 주해 묵상을 통해 복음의 풍성함이 이 땅에 들려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