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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묵상

복음을 매일 듣는 진리의 경험, 이교 신앙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신앙으로!(고전 15:1-11)

작성자굿뉴스|작성시간26.06.12|조회수99 목록 댓글 1

복음을 매일 듣는 진리의 경험, 이교 신앙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신앙으로!(고전 15:1-11)

1. 오늘의 말씀 : 고전 15:1-11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하늘의 천사들이 심판의 때에 외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배하라(14:7).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러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보다 사람이 만든 것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오늘날 첨단과학이 만든 산물에 빠져들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점차 멀어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라도 마음에 생각이 없고 지각도 없고 총명도 없으면 사람이 만든 것을 우상으로 섬깁니다(44:19). 내 눈을 들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만 영광 돌리게 하소서. 말씀 앞에 엎드립니다. 오염된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고 그 결실로 교회가 세워졌다. 이후 바울은 그곳을 떠나 순회 전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고린도교회의 소식이 접하였다. 이에 그는 서신을 통해 교회 안에 발생한 여러 문제를 처방하고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마지막으로 다루는 문제는 ‘몸의 부활’이다.

 

초대교회는 주의 재림이 임박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죽은 자들이 있었다. 그러자 교회 안에는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은 자들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몸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거나(12절), 또 어떤 사람은 과연 죽은 자가 몸으로 부활하는지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35절). 또한 영적 열광주의자들은 주의 재림이 현재 그들 속에 이미 임재하였으므로 더 이상 부활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주어질 부활을 기다려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 즉 현재 누리는 성령의 경험이 최종적인 완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여 바울은 주의 재림만이 역사를 완성하고 만물을 하나님께로 돌려드린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다양한 문제는 지상적 교회로서 한계를 보여주며, 주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천상의 교회를 내다보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은 고린도전서가 지향하는 목표라고 보았다(바르트).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에서 부활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예시로 믿는 자의 몸이 부활한다는 점을 밝힌다.

 

부활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은 15:12 이후에 시작된다. 바울은 먼저 복음의 내용을 깨우치고(1-5절),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한다(6-11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형제”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전해 받은 복음 안에 서 있기를 바란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1절).

 

만일 그들이 전해 받은 복음의 말씀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 복음을 통하여 그들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2절). 복음의 목적은 구원을 얻는 것이다. 복음을 헛되이 믿는 것은 복음을 듣고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은 미래적 현재이다. 구원은 미래에 완성되나 현재에 보장된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다(롬 1:16). 여기서 구원의 내용은 영원한 생명이다. 영생을 얻는 것(요 3:16)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요 3:17).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복음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 5:39; 3:14-15; 20:31; 딤전 1:16; 딤후 1:10). 복음이 가져오는 능력은 아담 안의 생명(3번 생명)을 일으켜 아들의 생명(1번 생명)으로 나게 하는 능력이다. 곧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일으켜 생명을 주고 하늘에 앉히운 능력으로, 이는 믿는 자에게 베풀어진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다(엡 1:19-20, 2:5-6).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3a절). “받은 것을 전하다”라는 표현은 “전승되다”라는 랍비의 관용구이다. 바울은 복음의 창시자가 아니라 전승을 이어가는 전달자이다. 복음의 창시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행하신 구원의 사건이다(메시아적 행위). 복음을 최초로 전달한 자는 최초의 선포자인 사도들이다. 바울은 사도들에 의해 전해 받은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이다.

 

11절에서는 “나나 그들이나”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그들”은 복음을 전해준 사도들이다. 갈라디아서 1:8에서는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이 전한 복음만이 진정성이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전한 복음”이 아닌 복음은 모두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를 저주하였다(갈 1:8).

 

이 점에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모든 시대 교회가 전해야 하는 ‘원복음’(original gospel)로 불린다. 이 복음은 구원 사건을 공식화하는 교회의 케리그마(선포)로 전승되고 있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네 개의 구원 사건이 단순한 병렬로 연결되어 있다. 네 개의 구원 사건은 그리스어 ‘호티’(that)로 시작하여 ‘카이’(and)로 이어진다. ‘호티’는 ‘~것’이며 ‘카이’는 ‘”~과’로 번역한다. 이 네 개의 구원 사건은 짧으면서도 서로 종속관계에 있지 않은 독립적 진술이다(바레트). 새번역 성경은 원문의 뜻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일으켜지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3b-5절).

 

신약성경에서 복음은 두 차원으로 정의된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며(롬 1:2-4), 그의 메시아적 행위이다(고전 15:3-5). 그의 메시아적 행위는 ‘종말의 구원자’(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네 개의 구원 사건이다. 특히 복음이 독립적 진술로 표현된 것은 각각의 사건이 고유한 복음으로 정의되는 것을 뜻한다. 곧 복음은 그리스도가 죽으신 십자가 복음, 무덤에 묻히신 장사 복음, 부활 복음, 현현의 복음이다. 이 복음은 사도들에 의해 전승된 복음이며, 다른 복음은 없다!

 

”그가 무덤에 묻히셨다“라는 장사 복음은 사뭇 생소하다. ‘후커’(Hooker)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놀랄 일이다. 무덤에 묻히심이 케리그마에 포함된 것은, 그것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필요한 단계였고 더욱이 양자의 현실성을 확증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바레트,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재인용).

 

골로새서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덤에 그와 함께 장사 될 때 비로소 그의 부활은 효력을 발휘하여 우리가 일으킴(생명)을 얻는다고 말한다(골 2:12). 따라서 장사 복음은 복음의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음이며 간과해서는 안 될 복음의 핵심 요소이다. ※ 네 개의 구원 사건으로서 복음과 그 효력은 <기원복음생명>, 30~41과 참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의 사건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으로 살게 한다. 로마서 6:4는 처음 세 개의 구원 사건을 통해 새 생명(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다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롬 6:4).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는 사도들이 전승한 복음의 가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메시아가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으며, 살아나셨고, 나타나셨다. 이것을 제거하면 기독교는 무너지고 만다. 이것을 제자리에 놓으면 온 세상이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그 소식(복음)이다”(<이것이 복음이다>).

 

또한 20세기 복음주의의 대표적 신학자인 ‘존 스토트’는 사도들이 전승한 복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사도가 동의하는 복음은 오직 하나의 복음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모퉁잇돌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15:3-5, 소위 메시아적 행위의 복음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진리이다. 이 복음은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이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창세전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딛 1:2; 딤후 1:10).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영생 얻게 하는 복음,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는 무너진다. 이것이 없으면 성경적인 기독교는 무너지고, 잡다한 이교가 기독교의 자리를 꿰찬다.

 

하나님의 심판은 은혜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의를 기초로 다시 세우기 때문이다(시 94:15). 교회가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을 저버릴 때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신다. 그리고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을 기초로 다시 세운다(고전 3:11).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을 전하는 한 교회는 희망이다. 이때 교회는 복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영생의 공동체로 자리매김을 한다.

 

6-11절은 부활의 증인을 열거하고 바울 자신도 그들 중에 있음을 변증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와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다(5-6절). 그 후에 야고보(예수의 형제)와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다(7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에게도 보이셨다(8절).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때가 차기도 전에 태어난 아이로 비유한다. 만삭되지 못해 난 자는 허약하고 결점이 많으나 역시 ‘사람’이다.

 

바울은 다른 사도에 비해 허물과 약점투성이나 여전히 사도이다. 실로 그는 사도로서 자격 없는 자였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9절). 그러나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도보다 더욱 충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도 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10절).

 

바울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도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다. 그는 무엇을 위해 그리도 열심히 일하였는가? 그는 향방 없이 달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일, 사도들이 전승한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믿어 생명 얻게 하는 그 일을 위해 경주를 다 하였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11절).

 

기독교 진리의 본체는 복음을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늘에서 오신 인자는 땅에서 들리셨다(요 3:13-14). 그가 땅에서 들리신 것은 복음이며, 네 개의 구원 사건으로 전승되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 3:15). 이렇게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은 영으로 주어지는 ‘진리의 경험’이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진리의 경험에 대해 논하였다(<진리와 방법>). 그에 따르면 고전, 예술, 성경을 통해 직접 경험한 진리는 그것들에 대한 학문적 의식과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 작품을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진리와 미학을 비교하였다. “미학이 수행하는 ‘학문적 연구’는 ‘예술 체험’을 대체하거나 능가하지 못한다.”.

 

가다머는 예술 작품을 통해 직접 경험하는 진리는 미학적 지식으로는 대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진리로 검증된 고전이나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통찰에 의하면, 성경으로 직접 진리를 아는 것은 성경에 대한 학문적 의식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도리어 성경을 통해 진리를 아는 것은, 성경에 관한 학문적 연구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가장 강력한 경고이다.

 

성경을 통해 진리를 아는 것은, 그 정점이 복음을 통해 생명을 아는 것이다, 나아가 날마다 복음을 통해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진리의 경험이다. 이 같은 진리의 경험은 어떤 탁월한 신학이나 설교로도 대체 불가능한 살아있는 신앙이다. 나아가 진리를 경험하는 것은, 진리의 경험 없이 신학하고 설교하고 신앙생활 하는 이들의 한계를 드러내며 경고한다.

 

이 같은 경고는 영으로 생명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직접 대하며 영으로 알지 못한 채 목사가 설교하고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신자들이 설교 듣고 신앙 서적을 읽는 모든 행위가 한계에 이른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이것은 역설적으로 성경을 통해 진리를 경험한 신자는 신학자나 목사의 한계를 넘어선 영적인 자임을 말해준다. 신앙의 학문적 연구인 신학을 하지 않았어도 복음을 깨닫고 그 목적인 생명으로 사는 자는 신앙의 한계를 초월하는 은혜와 기쁨과 평강을 누린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진리를 경험하는 일상’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를 느낀다. 그렇다면 매일 말씀 앞에 나아가 진리를 직접 경험하는 신자가 얼마나 복된지 모른다. 그는 복음의 진리로 자유하다. 그는 자신과 세계가 주는 한계를 거뜬히 넘어선다. 그 진리의 핵심은 사도들이 전승한 복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4. 나의 묵상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전하였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며, 사도들은 친히 목격하였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그러나 이 복음을 들은 고린도교회는 잡다한 이교에 영향을 받았고 그로 인해 교회는 온갖 시험에 봉착하였다. 이 교회에 대한 바울의 근본적인 처방은 그들이 들었던 복음을 다시 전하고, 그들이 받은 복음에 서 있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시대 복음은 불완전하게 전해지기도 하고(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또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라도 왜곡될 수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서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랐다(갈 1:6). 불완전한 복음을 접한 교회는 필경 사도들이 전한 복음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설령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들었을지라도 이교 신앙에 물든 교회라면 들었던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복음이 아닌 말, 곧 거창한 말(그럴듯한 말)과 축복하는 말(아첨하는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이번에 출간하는 <로마서 주해 묵상>에서 이 부분에 대한 바르트의 해석에 매우 공감하였다. “이 부분은 로마교회를 향한 절박한 요청이다. 혼동을 경계하라,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가장 경계하라. 으리으리한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종교적 시장을 경계하라! 그 이유는 너희가 바로 그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자들로부터 빠져나오려면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함’(롬 15:15) 외에 다른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하라, 너희 자신을 경계하라! 우리가 여러 가지 의견의 혼잡함 속에서 완전히 잠겨 익사하지 않게 해 주는 것, 곧 (비본질에 대한) 지혜로운 개방성과 (본질에 대한) 우직한 폐쇄성의 힘은 ‘다시 생각나게 함’(복음) 속에 있다.”

 

이미 복음을 알고 생명을 누리는 우리도 경계할 것이다. 매일 복음을 듣는 진리의 경험에 신실할 때만 우리는 혼잡한 이교에 익사하지 않고, 살아있는 신앙으로 도약할 것이다. 그들이 모인 공동체가 얼마나 복된지! 오늘은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사도들이 전승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현실은 복음에 합당한 신앙이 아니라 강력한 이교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에서 오는 분파, 고린도 사회에 팽배한 음행, 고발 등으로 교회가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 내적으로도 예배와 은사의 문제로 시비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이 들었던 복음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복음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며, 영생을 얻고 누리게 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습니다.

 

아버지여...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네 개의 구원 사건으로 구성됩니다.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 장사되신 것, 성경대로 삼일만에 살아나신 것, 믿는 자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마다 영생 얻는 구원에 이릅니다. 저는 이 복음에 무지하였습니다. 당연히 전할 수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아첨의 말과 축복의 말로 신자들을 미혹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안다고 자부했으니 깨닫고 보니 심히 비참한 자였습니다.

 

아버지... 공의로 심판하시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알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눌립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그 목적인 생명을 누리기보다 혼잡한 이교 신앙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서도 그렇고 고린도전서도 동일하게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날마다 복음을 듣는 진리의 경험만이 이교에서 벗어나게 하고 살아있는 신앙으로 살게 합니다. 적은 무리이지만, 주님이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이런 공동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끝까지 신실하도록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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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답터 | 작성시간 26.06.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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