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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묵상

부활 신앙의 확실성, 소망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중 가장 불쌍한 자다(고전 15:12-22)

작성자굿뉴스|작성시간26.06.13|조회수108 목록 댓글 1

부활 신앙의 확실성, 소망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중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다(고전 15:12-22)

1. 오늘의 말씀 : 고전 15:12-22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시험과 질고 가운데 있는 여러 지체를 위해 기도하며 많은 눈물이 났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하늘의 생수로 채워주시길 원하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시대의 왕이시니 그의 길은 의롭고 참되시나이다(15:3). 모든 인생은 주 앞에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에 불과합니다(45:9). 진흙의 실존인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 뜻대로 만드시는 토기장이 되신 주 앞에 어찌 항변하리요! 진노의 그릇이 마땅한데,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셨으니 은혜 입은 자가 무엇을 더 바라리까? 하나님이 정하신 참되고 의로운 길을 따르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게 하소서. 이미 삯을 받았으니 값없이 이름 없이 오직 충성하게 하소서.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오염된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고린도전서 15:3-5은 사도들에 의해 전승된 복음이다. 이 복음은 모든 시대 교회가 전해야 하는 원복음이다. 원복음은 그리스도의 네 개의 구원 사건으로 전승되었다.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 무덤에 장사 되심, 부활하심, 현현하심의 사건이다. 바울은 이 복음을 고린도에 전했고 성도들은 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2, 11절).

 

바울은 네 개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춘다. 12-58절은 부활에 대한 증거이다. 핵심 논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믿는 자의 부활이 어떤 연관성을 지닌 것인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장차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부활한다. 여기서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죽은 자의 몸이 부활하는 것”은 기독교만의 독특한 진리이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물론 인간이 죽음 이후 어떤 세계를 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대체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영혼불멸설이 주류였다. 죽음은 인간을 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사건으로 본 것이다. 이때 정화된 영혼은 피안의 세계로 상승하며, 정화되지 않은 영혼은 다시 하강하여 구천을 떠돈다(골 2:6-15, 굿뉴스 주해 참고).

 

한편, 유대교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의견이 갈렸다.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고,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었다(행 23:8). 바리새파가 믿는 부활 신앙은 역사의 종말에 의인이 부활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보상으로서 부활이다.

 

기독교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에게 종말에 일어나는 몸의 부활이다. 물론 악인도 부활한다. 그러나 악인은 심판의 부활이며,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이다. “이 말에 놀라지 말아라.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요 5:28-29).

 

고린도교회에서는 부활 신앙을 오해한 신자들은 두 부류였다. 하나는 아예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이들이었고(12절), 다른 부류는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지 의심하는 자들이었다(35절). 바울은 이들을 겨냥하여 부활이 확실히 있다는 것과 믿는 자가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가를 증거한다.

 

12-22절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이들에 대한 논증이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다면”이라는 부정의 표현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13, 15-16절).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14, 17-18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권능이다(엡 1:19-20).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은 선포된 복음을 믿음으로써 일어난다. 선포된 복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정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복음 선포는 헛것이며, 그것을 믿는 믿음도 헛것이다(14절). 또 부활의 복음을 전한 바울은 거짓 증인이 되고 말 것이다(15절).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면 믿음의 내용도 부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죄 용서는 자연히 무효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여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17절).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잠자는) 이들은 영원히 망하고 만다(18절). 잠자는 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죽은 자이다. “망하다”는 “구원받다”의 반대개념이다(고전 1:18). 따라서 만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믿고 먼저 죽은 자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기대하는) 삶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이다(19절). 이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논리적 주장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기대하는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상적 삶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는 것이며, 죽음 이후에는 더욱 풍성히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일어나는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죽음 이후 풍성해지며 종말에 완성된다. 바로 그 종말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부활하는 때이다.

 

그러면 왜 믿는 자가 바라는 삶이 이 세상 삶뿐일 때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가? 불신자에게는 이생의 삶이 전부이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이생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생의 목표이다(32절). 그들은 죽음을 부정할 수 없으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버킷리스트)를 만들기도 한다. 원 없이 살다 죽고 싶어서다.

 

반면 믿는 자는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아간다(고후 5:15). 이미 시작된 영생의 삶을 위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다(고후 4:10).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막 8:34). 사명은 보배이나 육체는 질그릇이다(고후 4:7). 무엇보다 이생에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모세처럼 상 주심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능욕에 참여한다(히 11:26).

 

그러나 믿는 자는 죽음과 동시에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대면 교제를 하며 더욱 풍성한 영생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믿는 자에게 주어질 죽음 이후의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죽음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한 개인적 소망은 우리가 약속받은 훨씬 더 큰 실재인 하나님의 공의, 기쁨, 평화, 사랑이 봄날 아침의 비처럼 모든 것을 적시고 길가의 꽃처럼 피어날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하나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들어가 있다. 새 창조 세계를 갈망할 때, 우리의 개인적 소망은 덤으로 주어진다”(<이것이 복음이다>, 156p).

 

20-22절은, “그러나”로 시작하는 반전이다.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아담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22절).

 

아담과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규정하는 인격적 총체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사망이 왔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사망에 이르렀다(롬 5:12). 그리스도는 그가 죽으실 때 모든 사람을 그의 죽음으로 이끄셨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요 12:32).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고후 5:14).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아담 안의 모든 사람이 죽었다. 날 때부터 죄인이 죽은 것이다. 이것은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이 행하신 진리이다. 이 일을 받아들인 자는 아담 안의 실존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사는 은혜는 ‘모든 사람’이 그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이 은혜를 입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나(딤전 2:6, 만인속죄설), 오직 믿는 자에게 대속의 효력이 나타난다(살후 3:2, 제한속죄설). 그러므로 22절,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는 모든 사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인생에서 관념과 현실의 불일치는 부조리이다. 인생은 꿈과 현실이 다르다. 인생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는 신을 요청한다. 이 신은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낸 우상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신이 숭배된다(포이어바흐). 자기 소원과 욕망을 신에게 투사한다. 단회적 인생을 뛰어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한 우상을 섬긴다.

 

“다만 이생뿐이면...”, 복음은 이생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다. 영생을 얻은 자는 자기를 위해 사는 아담의 본성에서 해방된 자이다. 그런 사람은 이생뿐인 인생들의 눈에 어리석고 미련해 보인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죽기 전에 이루어야 할 소원도 없다. 버킷리스트에서 자유롭다. 도리어 그의 지상적 삶은 미완성으로 끝난다.

 

광야 생활이 끝나고 가나안에 이르듯, 이생의 여정을 마치고 하나님의 공의, 기쁨, 평화, 사랑이 봄날 아침의 비처럼 적시는 영원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고 미완성의 삶은 완성된다. 불시에 임할 종말,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감격적으로 해후한다.

 

 

4. 나의 묵상

누구나 한 번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사야 45:5에서는 인간의 실존이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이라고 말한다. 그 조각을 다루는 토기장이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으로 눈을 뜬 자만이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지 않으면, 한 번뿐인 인생, 세상에서 원 없이 살고자 한다.

 

나 역시 그런 인생을 위해 달음질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내 인생은 거꾸러졌고 의외의 방향으로 향하였다. 20대 초반, 은행에 취직해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평판을 얻고 내 인생을 즐기고자 하였다. 명예를 얻고자 학업을 계속하였다. 10년을 넘게 다녀도 승진이 되지 않는 은행을 퇴직하고 증권회사로 승진하여 이직하였다. 당시 증권시장은 지금처럼 활황이었다. 실력 없고 경험 없이 탐욕에 눈멀다 보니 속히 망하였다.

 

그제야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의 통치 은혜를 받은 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었다. 그러나 내가 ‘확실히’ 믿은 하나님은 이생에서 잘되게 하는 이 세상 신이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특히 교회에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고, 목사 말을 잘 들으면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 그런 신이었다. 이생에서 가장 불쌍하게 되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믿었다.

 

하나님을 믿으며 가장 두려워한 것은 이생에서 비참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이 되는 자리는,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을 때라고 하였다.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자리라고 하였다(롬 8:31). 그리스도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이생에서 가장 불쌍한 자리요, 비참한 자리이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려고 불순종의 자리에 가두어두신 자리다(롬 11:31).

 

아, 욥의 탄식처럼 내가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났다(욥 3:25). 가혹한 심판의 자리,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님밖에 없는 자리에 이르렀다. 이생에서 가장 불쌍한 자요, 심히 비참한 자가 되었다. 공포의 심연, 심판의 블랙홀에 생명의 목자가 계셨다. 무덤에서 생명의 표적이 나타났다.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을 현재에서 누린다. 나를 영생으로 인도한 전승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생명을 주는 영의 직분은 실로 영광스럽다. 그러나 그것을 담지한 나는 질그릇이다. 하여 날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그리스도께 보냄받은 사도는 이생에서는 여전히 불쌍한 자로 현존한다. 사도의 사표인 바울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고 한다(고전 4:13). 제자가 스승 같으면 족하다. 유일한 스승은 그리스도이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못하다. 바울도 그랬고 나도 그렇게 되기를 사모한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그리스도께 내 눈을 고정하며 오늘도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를 드린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 복음은 사도들이 전승한 복음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되심과 부활하심과 나타나심의 네 개의 구원 사건입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못하셨다고 논증합니다. 또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복음은 거짓이고 복음을 믿는 믿음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여... 만일 믿는 자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일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의 삶이 전부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가 되고 맙니다. 더 낫고 더 충만한 삶이 기다리고 있기에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삶은 존귀합니다. 저는 뭇 인생처럼 이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었어도 이 세상에서 잘되는 신앙생활을 구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비참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버지... 욥처럼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50대 초반, 심판의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참으로 남은 그것은 하나님밖에 없는 자리였습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었습니다. 그의 무덤에서 생명의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70이요 강건하면 80인 인생이 영원한 생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나의 부활을 믿나이다. 부활의 확실성은 주를 위해 가장 비참한 자로 사는 것을 넉넉히 감당하게 합니다. 생명을 전하는 영의 직분을 주셨으니, 날마다 내 육체를 예수의 죽음에 넘기고 예수 생명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제자가 스승처럼 되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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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답터 | 작성시간 26.06.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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