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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묵상

“날마다 죽노라”, 종말의 희망으로 깨어 의를 행하고 복음을 전하다(고전 15:23-34)

작성자굿뉴스|작성시간26.06.14|조회수145 목록 댓글 1

“날마다 죽노라”, 종말의 희망으로 깨어 의를 행하고 복음을 전하다(고전 15:23-34)

1. 오늘의 말씀 : 고전 15:23-34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오늘은 제주생명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교제합니다.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소서. 사람들이 금과 은을 도금장이에게 주어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고 고난에서 구원하지도 않는 물건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46:10). 진실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나이다. 하나님이 위하시는 사람은 하나님 밖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입니다. 그곳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 남아도 안전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 엎드립니다. 오염된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바울은 고린도 교인 중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확실성을 논증한다. 그가 고린도에 전한 복음의 정점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의 부활을 보증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가 전한 부활의 복음은 헛것이고 그것을 믿은 믿음도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도 부활한다.

 

만일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삶이 전부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20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다(부활할 것이다)(22절).

 

15:23-34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현실적 의미를 다룬다. 역사적 의미는 역사의 종말에 신자의 부활이 일어날 것이며(23-28절), 현실적 의미는 부활 신앙에 근거한 이생의 삶으로써 복음 증거의 삶과 경건한 삶이다(29-34절).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 그다음은 그가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 믿는 자의 몸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일어난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는 종말의 때이다. 23-28절은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일을 계시한다. 신학계에서 이 단락은 종말론의 근거가 된다. 종말에 일어날 사건은 다음과 같다.

 

① 믿는 자의 몸이 부활한다(23절).

②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멸하고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친다(24-25절).

③ 최후로 사망의 세력이 멸망한다(26절).

④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27-28절).

 

첫째, 종말에 구원받은 신자의 몸이 부활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은 35-58절에 이어진다.

 

둘째,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친다.

통치와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지배하려는 반신적인 세력이다(골 2:15 참고). 반신적 세력은 하나님의 모든 원수이다(25절).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는 모든 반신적 세력(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을 다스리는 주가 되신다(엡 1:21).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다스리신다(25절).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25절).

 

종말이 오면 이런 반신적 세력(모든 원수)이 다 멸망한다. 그리스도에게 더 이상 통치할 대상이 없어진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위임받은 통치권(나라)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통치권)은 그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주어진 한시적인 권한이다. 종말이 오기 전에는 그리스도가 한시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다(골 1:13).

 

셋째,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나 사망의 세력은 종말의 때에 멸망한다, 이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는 사망의 세력이 현존하며 활동한다.

 

사망의 세력은 불신자를 자기 수하에 두고 그가 구원받는 것에 방해한다(고후 4:4). 영적 전쟁은 사망의 세력에 속한 불신자를 건져내어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것이다(골 1:13). 또한 사망의 세력은 믿는 자에게도 역사한다. 즉 모든 방법(간계)을 강구하여 믿는 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지 못한다(롬 8:38-39). 사망의 세력은 이것을 속이는 것이다. 또 사망의 세력은 믿는 자를 밤낮으로 참소하며 죄책감을 갖게 하고 하나님과의 분리를 시도한다(계 12:10). 그러므로 사망의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영적 전쟁은 계속된다. 전쟁은 치열하지만, 최종 승리는 이미 주어졌다.

 

넷째,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시편 8:6을 인용한 것이다. 시편에서 이 말씀은 피조물을 다스리는 인간의 주권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게 하셨다(26절).

 

이렇게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게 하신 하나님은 만물에 속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신다(롬 9:5; 엡 4:6). 이제 만물이 하나님의 주권을 받은 그리스도께 복종을 다 할 때 아들 자신도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어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하나님께 복종한다(28절). 그리하여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하신다(28절). 여기서 만유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 전체를 가리키며 만물과 동일한 의미이다.

 

하나님은 종말에 이르러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계 21:5).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임하고 새 창조가 완성된다(벧후 3:13; 계 21:1). 이때 영생 얻은 자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고전 15:51),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하나님과 어린양을 대면하며 섬긴다(계 22:3-4). 주와 더불어 세세토록 왕노릇한다(계 22:5).

 

1960년 이후 서구 기독교는 “신이 죽었다”라는 사신 신학이 득세하였다. 크게 두 가지 사건, 정통 기독교 국가인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청교도 국가인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가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일군의 신학자들은 종말에 만유가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희망 신학으로 사신 신학들 돌파하였다(<기원복음생명> 50과 참고). “종말의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게 하며, 이것은 죽은 것을 그대로 붙잡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바랄 수 있게 한다”(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

 

진실로 그러하다! 믿는 자에게 종말은 완성의 날이다. 세상의 역사가 완성되며 우리의 신앙이 완성되며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다. 부활 신앙은 이 같은 종말의 빛 아래에서 현재를 살게 한다. 다시 말해 부활 신앙은 막연한 미래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규정한다.

 

29-34절은 종말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천명한다.

한편, 고린도교회에는 관행적으로 죽은 자를 위한 세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신자를 대신하여 친구나 친척이 세례를 받곤 하였다. 이런 관행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 관행을 지키는 것은, 신자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관행에 대한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을 천명한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 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정말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29절).

 

바울은 죽은 신자를 위한 세례의 관습을 인용할 뿐 그런 관습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죽은 신자를 위해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들이 부활을 기대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들이 이런 관습을 행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죽은 신자가 부활하지 않으면 굳이 그런 관행을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30-32절에서 바울은 종말의 빛 아래에서 사명을 다하는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제시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30-32a절).

 

바울은 자전적으로 고백한다. 만일 종말에 도래할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겠느냐고. 그는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며 복음 증거를 위해 투혼하고 있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씀은 복음의 사변적 증언이 아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실제 죽음을 경험하는 증언이다.

 

바울의 고백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실제 죽음의 위협에 맞닥뜨리고 있음을 말한다. 바울은 부활을 믿으나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 맹수와 같은 과격한 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그가 에베소에서 당한 위협과 고난을 상기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1:8-9).

 

그러나 바울이 사망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한 것은 어떤 인간적 동기가 아니었다. 그는 죽은 자의 몸이 부활하는 종말의 빛 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굳이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내일 죽으니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32b절).

 

33-34절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죽은 자가 부활하는 종말의 빛 아래에서 살기를 촉구한다.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내가 이 말을 합니다만, 여러분 가운데서 더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라는 말은 당시 그리스 시인 ’메난데르‘의 ‘타이스’라는 작품에 나오는 글이다. 바울은 이 말을 인용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거부하며 이생에서 방탕한 삶을 정당화하는 이들을 경고한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자는 이생에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종말론은 철저한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 출범한 종말론으로 제시된다. ‘철저한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미래에 도래한다는 사상이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의료선교를 한 ‘알버트 슈바이처’가 주장하였다. ‘실현된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여 완성되었다는 사상이다. 영국의 ‘찰스 헤롤드 다드’가 주장하였다. ‘출범한 종말’론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상이다. 이는 ‘오스카 쿨만’, ‘조지 래드’, ‘헤르만 리델보스’, ‘요아킴 예레미야스’ 등 다수의 건전한 신학자가 주장하였다. 한편, 고전 15:24-28의 내용은 출범한 종말론과 일치한다(<기원복음생명>, 571-572p).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종말의 빛 아래에서 현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깨어 죄를 짓지 않는 경건한 삶을 살아가며, 다른 한편으로 복음 증거에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은 “날마다 죽는 삶”으로만 실천 가능한 삶이다.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계시며, 이렇듯 종말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신자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마 28:20).

 

 

4. 나의 묵상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고, 따라서 우리의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 중에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이다. 내가 바로 거기 속한다. 풍요로운 시대, 나의 인생을 얻고자 두리번거리며 이 세대를 본받고 살았음에 틀림없다. 그런 사람이 보기에 지금 나의 인생은 허망하고 무익한 수고를 하는 것이 틀림없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아무말대잔치, 아첨의 말, 축복의 말을 남발하며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 자들이 즐비한 종교 시장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 와중에 혼동을 경계하며 오직 복음을 전한다고 하며 외길을 고집하는 나는 누구인가? 20년이 다 되어가도 변변한 조직 하나 없는 선교회 사역은 확실히 사람들이 볼 때 조롱과 의구심의 대상이다. 그렇다고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지상적 삶이 주는 한계상황이다.

 

눈을 들어 종말의 희망을 바라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교회 안의 부조리는 모두 새롭게 되면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 종말의 희망은 부활의 현실적 의미를 가져온다. 그것은 악한 동무와 어울리지 않고, 깨어 의를 행하며 힘을 다하여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희망은 현재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게 하며, 전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것, 꺼져가는 심지 같은 것을 그대로 붙잡게 하며,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바랄 수 있게 한다. 오늘도 동일한 희망을 부여잡고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이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한다. 우리 안에 부활의 현실적 의미를 주는 종말의 소망이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고린도 교인 중에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이고 그 안에 있는 우리도 부활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때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종말의 날입니다. 그날에 그리스도는 한시적으로 받은 통치권을 아버지께 돌려드립니다. 불신자를 통치하고 믿는 자를 미혹하는 사망의 완전히 멸망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만물 안의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부활 신앙은 바로 종말을 현재로 살게 하는 의미를 줍니다.

 

아버지여... 저는 부활 신앙을 고백했으나, 그 내용이 이처럼 놀랍고 압도적이고 충만한 것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교리로만 부활을 알았고, 부활절을 기념하는 정도였습니다, 사도가 받은 부활과 종말의 계시가 참으로 눈부십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그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이 영광스럽게 변화된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믿나이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나 나의 현실은 약하고 비천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신실할 수 있는 힘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도래하는 종말의 소망에 있습니다.

 

아버지... 보이는 것으로 인한 미혹을, 혼동을 경계하게 하소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아무말대잔치, 아첨의 말, 축복의 말을 남발하며 자기 배를 채우는 이들이 있나이다. 그런 자들이 펼쳐놓은 종교의 시장바닥은 문전성시를 이루며 소동합니다.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이지만 기쁨으로 가는 것은 종말의 소망으로 인함입니다. 꺼져가는 심지와 같으나 그대로 붙잡으며 충성하는 것은 내 몸이 부활하는 종말의 희망으로 인함입니다. 날마다 죽은 자 되어 의를 행하고 힘써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오늘도 종말의 소망을 품고 함께 복음을 전하는 지체들과 예배드리고 교제하니 감격을 금할 수 없나이다.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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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답터 | 작성시간 26.06.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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