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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묵상

마라나타, 주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복음)을 전하게 하소서!(고전 16:13-24)

작성자굿뉴스|작성시간26.06.19|조회수81 목록 댓글 1

마라나타, 주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복음)을 전하게 하소서!(고전 16:13-24)

1. 오늘의 말씀 : 고전 16:13-24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2. 시작 기도

아버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들의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면서 학대자의 분노를 두려워하였습니다(51:13). 이스라엘은 이렇듯 주를 잊었으나 주는 그들을 잊지 아니하신 것은, 어미가 젖먹이 자식을 잊지 않은 것보다 더하십니다. 주의 자비와 긍휼을 입어 시온으로 돌아오는 자는 영원한 기쁨이 그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납니다(51:11). 슬픔과 탄식의 세상에서 내가 거할 곳은 저 높은 곳, 아버지 집입니다.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없는 그곳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나아가오니 나를 받아주소서. 오염된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근대 철학의 대상은 무한자로서 ‘신’이다. 계몽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는 11세기 안셀름 이후 지속되어 온 신인식의 담론을 종결하였다. 칸트는, 인간의 이론적 이성(순수 이성)은 경험한 세계만을 지각하며 그 너머의 신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시공간에도 불변하는 정언명령을 지키는 것이 실천적 이성으로서 자리매김을 한다.

 

정언명령과 대립하는 가언명령은 시대와 나라마다 다른 도덕률이다. 반면 정언명령은 산상수훈과 같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도덕률이다. 대표적으로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 7:12)라는 명령이 정언명령이다. 그러나 인간은 오롯이 정언명령을 지킬 수 없어 절망에 이르며, 정언명령을 지키기 위해 신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이론적 이성의 인식 대상이 아니라. 실천 이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할 뿐 하나님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김균진, 헤겔의 역사철학, 162p).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의 신인식론을 극복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의 뿌리는 사유와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관”에 있다고 하였다. 직관은 하나님이 인간 안에 심어놓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이다. 이것은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불린다. 절대 의존의 감정은 흔히 오해하는 대로 인간적 감정이 아니라, 신을 아는 직접적 의식이다. 그렇다면 신인식은 보편적이고 객관적 영역에서 개인의 주관적 직관(감정) 영역으로 밀려난다.

 

프리드리히 헤겔은 칸트와 슐라이어마허를 모두 극복하면서 ‘정신’(영)으로 보편적 신인식 개념을 정립하였다. “인간의 유한한 정신은 관찰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로 고양된다.”(헤겔의 역사철학 233~241p). 하나님을 향한 정신(영)의 고양은 사유의 영역에서는 물론 세계 현실의 영역에서 관찰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중요한 말은 ‘관찰한다’이다. ‘관찰한다’의 일반적 개념은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자신과 상관없는 대상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인식하는 과정으로서 ‘관찰하는 것’은 “깊은 사랑 안에서 바라보는 것, 사랑하는 자에 대한 참여와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엄마가 자기의 품에 안긴 아기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 아기와 내적으로 하나 되어 아기에게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 인식에서 ‘관찰하다’는 “내가 대상(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이며, 이를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의 주체성을 포기하며 대상(하나님) 안으로 자신을 침잠시킨다.

 

복음적으로 해석하면, 관찰하는 것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침잠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삶에 참여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

 

구약시대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자기 백성을 책망하셨다. 그 핵심은 헤겔이 말한바 ‘관찰하다’와 관련이 있다. “그는 많은 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귀가 열려 있었으나, 귀담아 듣지 않았다. 주님은 백성을 구원하셔서, 의를 이루려고 힘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율법과 교훈을 높이셨고, 백성이 율법과 교훈을 존중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지금 그의 백성은 약탈과 노략을 당하였으며, 그들은 모두 구덩이 속에 갇혀 있고, 감옥에 갇혀 있다. 그들이 약탈을 당하였으나, 구하여 주는 자가 없고, 노략을 당하였으나, 노략자들에게 '돌려주어라' 하고 말해 주는 자가 없다”(사 42:20-22).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귀하고 존귀한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그들은 귀가 열렸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헤겔의 표현으로 하면 그들은 ‘관찰’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주의 길로 다니기를 원치 않았다(사 42:2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렬한 진노를 퍼부으신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복음이다(마 5:17; 히 1:1-2).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이다(롬 1:2). 신약성경은 구원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다. 이 점에서 신약성경도 복음이다. 복음의 목적은 생명을 얻는 것이며(요 20:31; 딤후 1:10), 생명의 교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요 17:24). 신구약 성경을 통해 성도가 궁극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비참한 존재의 발견과 그런 자를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복음)이며, 복음을 통해 생명의 본질인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요 1:14).

 

따라서 ‘관찰’하지 않은 채 성경을 100 독, 1000 독하고 필사하고 외워도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도리어 그것은 자기 의의 탑을 높이 쌓으며 교만에 이르게 한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성경을 외웠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외우는 ‘선지자의 말’을 알지 못하였다(행 13:27). 이에 선지자들이 증거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예수를 정죄하였다. 그들이 외우는 성경 말씀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성경을 관찰하는 것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주해이다.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성경에 대한 역사적 상황적 이해가 필요하다. 무턱대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이런 부분은 전승되어 온 주석의 도움을 받는다. 현대 해석학의 최고 권위자인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전승을 무시한 해석을 거짓으로 규정하였다.

 

이차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속에 담긴 저자의 개성과 특성을 아는 것이다. 말을 이해하는 것은, 말 자체보다 말하는 이의 개성과 특성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것은 형식화된 문헌에 나타나 있는 문구나 그 내용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사람이나 글을 쓰고 있는 저자의 개성과 특성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슐라이어마허, 소기천, <훅스와 에벨링>에서 인용). 따라서 성경의 주해는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충분조건은 진리의 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고전 2:10, 16). 하여 동일한 주해를 보아도, 각자마다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범위는 다르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사적인 언급으로 마무리된다(5-24절). 그는 장차 고린도를 방문할 것이라고 말하며(5-12절), 명령형식으로 마지막 권면을 한다(13-14절). 5개의 명령이 연속적으로 주어진다.

 

① 깨어 있으라

깨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 사건, 곧 주의 재림(종말)에 대비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종말을 대비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는 것을 경고한다. 종말을 대비하는 삶은 깨어 의를 행하고(15:34), 결코 헛되지 않은 수고인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이다(고전 15:58).

 

②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

이 말은 바울이 그동안 가르친 복음의 터 위에 신앙을 바르게 세우라는 권면이다. 복음의 터 위에 세운 믿음은 그 자체로 흔들리지 않은 터전이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태도가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의미한다.

 

③ 용감하라

그리스 철학에서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등 4대 덕목을 제시하였다. 당시 용기는 무모하게 싸우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분별하여 행동하는 것이었다. 신약성경에서 용기는 두려움 없이 진리에 순응하는 삶이다(고후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

 

④ 강건하라

그리스 철학에서 ‘강함’은 단순한 힘보다는 용기와 자기 절제를 의미하였다. 또 고난을 견디는 정신적 능력(강인함)을 뜻하였다. 신약성경에서 강건함은 신자 개인의 강함이 아니라,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함 뜻한다(엡 6:10).

 

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수행해야 함을 밝혔다. 그는 마지막 권면에서 다시 사랑으로 행할 것을 언급한다. 신앙생활은 총체적으로, 사랑으로 사는 삶이다.

 

15-18절은 고린도의 첫 개종자인 스데바나와 관련된 문안이다. 스데바나의 집은 바울이 아가야에서 맺은 첫 열매이며,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이다(15절). 아가야 지방의 중심도시는 아테네와 고린도이다.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 지방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뿐 아니라 성도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스데바나의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것을 명한다. 또 그들과 더불어 일하며 함께 수고하는 각 사람에게도 순종하라고 한다. 바울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자기에게 온 것을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만나지 못했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아쉬움을 채워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울의 영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18절). 이들은 교회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성도 각 사람은 차별 없이 동등하다. 하지만 교회 질서를 위해 특정한 위치에서는 순종이 요구된다. 고린도 교인들은 스데바나는 물론 그와 더불어 일하는 사람에게고 순종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쳐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은 다른 교인들에 의해 존중받고 순종 받고 인정받는 것이 마땅하다.

 

19-20절은 아시아에 있는 교회가 고린도교회에 전하는 문안이다. 바울은 아시아 지역에 있는 에베소에서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과 함께 그곳에 머물고 있다. 이들을 포함한 아시아의 형제자매들이 다 주님 안에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고린도교회에 문안한다.

 

21-24절은 바울의 개인적 문안이다. 바울은 친필로 문안한다. 바울은 주로 편지를 대필하게 하였다. 로마서는 더디오가 대필하였다(롬 16:22 참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필로 서명하면서 문안 인사를 하였다(갈 6:11; 골 4:18). 그리하여 편지의 진정성을 부여하였다.

 

바울은 문안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저주를 경고한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 ⑤마라나-타, 우리 주님, 오십시오. / ⑤이 아람어를 달리 마란-아타라고 읽으면, '우리 주님 오셨다'가 됨”(22절, 새번역).

 

바울이 주를 사랑하지 않은 자에 대해 저주의 경고를 하는 것은 교회의 제반 문제가 결국 주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한다. 그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며 모든 일에 절제하며 공동체를 세운다.

 

바울은 저주의 경고에 이어 “마라나타”를 외친다. 마라나-타는 예수 당시 사용하던 “아람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성경도 “마라나-타”로 읽는 것이 좋다(새번역). “마라나-타”는 “마라나”(우리 주님)-“타”(오다)의 뜻이다. “마라나타”는 독법에 따라 두 가지 뜻이 있다. 마라-나타로 읽으면 “주께서 임하셨다”라는 신앙고백이다(새번역 주해 참고). 마라나-아타로 읽으면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문이다(계 22:20).

 

초대교회는 예배 시 공동식사를 하였다. 그들에게 공동식사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전하는 성만찬이었다(11:17-34). 성만찬은 주님이 영으로 임하시는 의식이다. 또한, 성만찬은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재림)까지 전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만찬 직후 “마라나타”로 서로 인사하였다. 그들은 다시 오실 주님이 성만찬을 통해 자신들과 함께 임하였음을 고백하며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담대히 주의 죽으심을 전하였다.

 

모든 시대 교회는 주의 죽으심(복음)을 전하며 성도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파송된다. 우리 역시 “마라나타”를 고백하며 세상을 향해 증인으로 파송된다. 다시 오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 모든 족속을 제자 삼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삶의 중심인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기원한다(23절). 그리고 바울 자신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과 함께하기를 축원한다(24절).

 

 

4. 나의 묵상

40여 일에 걸쳐 네 번째 고린도전서의 주해와 묵상을 마쳤다. 신생 고린도교회는 사도들이 전승된 복음을 들었어도 쓰나미 같은 이교의 물결을 견디지 못하였다. 교회 개척자로서 바울은 여러 경로를 통해 들려오는 교회 소식에 거룩한 부담을 느꼈고, 사안마다 목회적 권면을 하였다. 하나님의 기준, 복음의 기준으로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형편없는 함량 미달이지만, 바울은 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교회가 복음 위에 견고히 서기를 바라며 서신을 기록하였다.

 

이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고린도 교회가 다시 부흥했다거나 바울의 서신을 받고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었다는 보도는 없다. 다만 교회를 향한 사도의 간절함을 담은 서신은 영원한 진리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 것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드려졌다. 하여 고린도에 보낸 서신은 오고 오는 교회에 영원한 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외형적인 고린도교회는 사라졌지만, 마라나타의 고백과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사명은 영원하다. 초대교회가 만날 때마다 했던 고백, 마라나타는 이중적 의미, 곧 다시 오실 주님이 여기 임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임하신 주님은 만물의 통치자이시다. 그 주님 안에 거할 때 나는 깨어 있으며 복음의 터전 위에 서 있으며 강건하며 용감하며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한다. 그 일은 나 자신에게는 의를 행하는 것이며,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오늘도 마라나타를 외치며, 온 맘 다해 주의 죽으심(복음)을 전하기를 간구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고린도전서를 은혜중에 주해하고 묵상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의 표상인 바울이 직접 전승된 복음을 전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신생 교회는 거대한 이교의 물결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이 들은 복음은 무력하였고 세상의 음행, 사람의 지혜, 교회 내 무질서, 은사의 오남용, 부활 신앙의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턱없이 함량 미달인 교회, 그러나 바울은 그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권면하고 권면하며 다시 복음을 기억나게 합니다. 마지막에는 저주의 경고를 하며 마라나타 신앙을 촉구합니다.

 

아버지여... 2,000년 기독교 역사로 보면 한국교회 역시 신생 교회나 다름없습니다. 초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세상 문화의 영향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순전한 복음보다는 토속신앙에 영합한 종교 현상이 교회 안에 팽배합니다. 눈먼 자들 사이에 눈을 뜬 자의 고통이 있나이다. 하오나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 오직 보냄받은 이의 일에 순종하게 하소서.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아버지... 마라나타! 다시 오실 주님이 여기 계십니다. 주님 안에서 깨어 있으며, 복음의 내용을 굳게 붙들며, 진리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나의 연약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강함이 되게 하소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게 하소서. 교회 질서를 존중하며 주님이 세우신 종들을 존중하며 내게 주신 직분에 신실하게 하소서. 곧 발간될 로마서 주해 묵상을 통해 이 땅의 교회들에 다시 복음이 들려지게 하소서. 그것만이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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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답터 | 작성시간 26.06.21 new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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