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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her(2012.1~2021.1)

죄인됨을 아는 자만이 믿음의 의로 구원받는다.(롬 9:25-33)

작성자Esther|작성시간20.08.14|조회수355 목록 댓글 0

2020814일 금요일 묵상(9:25-33)

 

[죄인됨을 아는 자만이 믿음의 의로 구원받는다.]

 

1.본문 말씀(9:25-33)

25.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주께서 땅위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닐

33.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2.시작 기도

아버지, 진노가운데 지나가는 인생을 진멸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아들됨의 영광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땅의 먼지요 티끌이요 헛것같고 안개와 같은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창세전 약속인 영생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신실하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나이다.

매일 자고깨는 일상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시오니 그 은혜가 참으로 크나이다.

오늘도 영원에서 허락된 하루를 맞이하며 말씀앞으로 이끄시니 아버지의 성실하심이 다함이 없나이다.

오염된 영혼을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하사 새 영과 새 마음이 되게 하소서.

영생의 말씀을 듣고 믿어 순종하여 참신앙에 이르게 하소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아들됨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본문 주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영혼구원에 있다.

이는 아들 안의 생명, 곧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됨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비록 땅의 먼지로 지음받은 피조물이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언약적 교제의 존재로써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됨의 존귀와 영광을 얻을 자였다.

그런데 첫사람 아담이 영생을 얻기 전에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사람은 불의하였으나 불의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은 영생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으로 예표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구원의 전략(경륜)을 펼치시며 역사를 주관하셨다.

아벨, 에녹, 노아에 이르는 제1경륜시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말라기에 이르는 제2경륜시대에 이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언약을 성취하여 지금까지의 제3경륜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듯 구원의 주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

그리고 구원은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약속을 성취하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아들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였다.

율법의 의를 주장하는 그들에게 바울은 오직 믿음의 의를 통해 구원받음을 말한다.

구원은 육신적 혈통에 의존하지 않으며 성령으로 난 약속의 자녀에게 주어진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 진노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그분의 영광을 계시하신다.

진노의 그릇을 긍휼의 그릇으로 바꾸심은 아들에게 모든 진노를 쏟으신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오직 믿음의 의로 구원받는다.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다루시는 방식은 그분의 택하심을 따른 뜻’(11)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구약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25-2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포함시키신 것을 설명하기 위해 호세아에서 두 본문을 인용하며, 27-29절에선 유대인들 중 남은 자들만을 포함시키시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의 두 본문을 인용한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과 결혼하는 것과 신실하지 못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이름을 지닌 세 자녀가 그 인용문의 배경이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들의 두 번째 자녀인 딸을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지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

또 하나님은 그들의 세 번째 자녀인 아들을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로 부르라고 하셨다.

더욱이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못할 것이기’(1:9) 때문이라고 덧붙이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거부의 상황을 역전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23)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1:10)

 

하나님의 약속은 이방인을 포함시켜 복음적 성취를 이루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2:12-13,19).

이방인들이 포함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운명이 놀랍게 역전됨을 의미한다.

외인들이 내부로 맞아 들여졌으며, 외국인들이 시민이 되고, 낯선 사람들이 이제는 사랑받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이방인이 포함되는 것에서 유대인이 남은 자들 외에는 다 배제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 본문의 역사적 배경 역시 주전 8세기경의 민족적 배교 중의 하나이다.

이는 남왕국 유다와 관련된 것이다.

범죄한 나라는 여호와를 버렸으며, 앗수르의 침략을 통해 심판받았다.

그래서 온 나라가 황폐해지고 겨우 조금만이 살아남았다(1:4이하).

하지만 하나님은 이어서 앗수르가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징벌받을 것이며, 믿는 남은 자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하신다(10:12 이하).

실로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은 이러한 약속을 상징한다. 스알야숩이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7:3).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12:22-23)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1:9)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것이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었다.

하늘의 별과 같고모래알과 같은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에 비해 오직 남은 자, 이스라엘 안의 이스라엘(참 이스라엘)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6).

29절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완전히 멸망하는 가운데 롯과 그의 두딸만이 목숨을 건졌다.

 

그러면 우리가 결론적으로 무슨 말을 할 것인가?(30-33)

이스라엘 대다수 사람들의 불신과 믿는 이스라엘인이 소수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듣고 믿어 의롭다 함을 얻었다(30).

그러나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도달하지) 못하였다(31).

이스라엘이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를 추구한 유대인들은 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인들은 그것을 붙잡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32)

유대인들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했으나 이방인들은 바로 믿음에 의지해서 의를 붙잡았다.

유대인들은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쌓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32).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 된 것은 십자가는 자기 의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2:21).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다면 십자가는 불필요하며, 그의 죽으심은 무의미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자신을 낮추는 이런 고백은 부딪힐 돌에 부딪히는것이다.

 

그러나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어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할 것이다’(33, 28:16; 8:14).

하나님은 견고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으셨다(118:22; 고전 3:11).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놓으신 이 반석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삶의 기초로 삼으며 그 위에 건축할 것인지, 아니면 그 반석에 부딪혀 살갗이 벗겨지고 걸려 넘어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만민이 구원을 얻고 진리 가운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구원의 내용이 영생을 주는 것이었으나,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는 죄사함과 영생이 구원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 얻는 것은 영생의 약속을 믿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구원의 전략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고 언약관계를 유지하는 은총의 수단으로 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의를 다하는 중심’, 율법을 행하는 내면의 상태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이제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시고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구원을 얻는 새언약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새언약의 시대에 모든 자,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오직 믿음의 의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됨을 철저히 아는 데서 시작되며 죄인된 자를 위해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아는 것이다.

자기 의를 버리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여전히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되고 걸림돌과 부딪히는 반석이 된다.

결정은 오직 죄인된 자가 하되, 자신이 죄인됨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긍휼히 여기심으로 된다.

 

 

4.나의 묵상

나는 나의 죄인됨을 알지 못하였다.

행위적인 죄들을 짓는 것은 분명하였기에 죄인임을 알았으나 죄의 세력으로 인하여 죄의 종노릇하며 범죄하는 자,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난 죄인됨을 알지 못하였다.

교회에서 예배드릴때마다 반복적인 회개기도를 하였으나 세월이 갈수록 죄책과 정죄감이 늘어갈뿐 구원의 감격은 없었다.

다만 구원을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 알았다.

언약에 무지하고 영생에 무지한 자, 만물위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의 전통을 따라 율법의 의를 이루고자 하던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의도 무엇인지 모르니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무지함 속에서 답답하여 죽을 것 같았다.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부르짖었어도 알지 못하였다.

혹시 신학을 하면 알수 있을까 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한때 번영신학에 혹하여 말씀을 골라 먹으며 하나님까지 이용하던 패역한 자이다.

하나님이 창세전 약속인 영생을 위해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을 알지 못하니 혼돈 그 자체였다.

땅의 먼지에 불과한 자가 어찌 만물위에 계신 하나님을 알며 그분과 교제를 하겠는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베푸셨다.

내가 원하는 인생이 무너진 자리에서 하늘의 하나님을 갈망하는 깊은 목마름을 주셨다.

하나님 외에 구할 것이 없는 가난한 심령을 주셨다.

진멸받아야 마땅한 자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관용을 베푸시고 긍휼의 그릇으로 삼아주셨다.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은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나에 대하여 확증된 사랑이었다.

십자가를 구경만 하던 자였는데, 내가 아담안의 죄인으로 살면서 죄의 세력 아래에 놓인 죄의 종이며 사망을 삯으로 받는 비참한 운명임을 알게 하셨다.

그런 나의 나의 죄인됨에서 건져내어 아들의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됨의 영광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내게도 이루어진 것이다.

복음을 듣고 믿어 순종하여 참신앙에 이르는 생명의 길을 알게 하셨다.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날마다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신다.

비로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감이 참된 복임을 알게 하신다.

 

율법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던 불신을 하나님이 깨뜨리셨다.

그리고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아들을 믿어 의롭다 여김을 받고 아들됨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신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나의 비참한 실존, 죄인됨을 보게 하시고 나도 용납할 수 없는 나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다.

그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됨과 부활에 연합되어 새생명을 얻는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였으나 아들 안에서 언약백성 삼아주신다.

사랑하지 아니한 자였으나 아들 안에서 아들됨의 영광을 얻고 그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버림을 받고 진멸될 자를 구원하여 언약 안에 거하게 하시니 감사감격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담 안의 실존됨을 알게 하시고 오직 아들을 믿음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

어찌 나같은 자에게 이런 은혜를 주셔서 긍휼을 베푸시는가?

그크신 사랑 다 표현할 수 없으나 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임을 안다.

 

5.묵상 기도

아버지, 죄인됨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던 무지한 자였습니다.

아들됨의 영광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 십자가를 구경만 하던 패역한 자였습니다.

언약에 무지한 자, 언약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였으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구원을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 오해하던 자, 소돔과 고모라에서 유황불에 멸하여질 자였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것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한 연고였습니다.

율법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갈수록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바리새적 종교인으로 전락해갔나이다.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기에 절망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 그런 나를 어찌 진멸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복음, 아들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하시고 이제 나의 복음이 되게 하시나이까?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은혜로 부르시고 긍휼을 베푸신 크신 사랑으로 인함이옵니다.

그 인자와 신실하심으로 하루하루 살게 하시니 날마다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감이 가장 큰 기쁨이요 영광이옵니다.

오늘도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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