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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024)

참된 성전은 영원한 생명, 재림 신앙에 깨어 파레시아를 붙들라(막 11:11-19)

작성자굿뉴스|작성시간24.02.02|조회수189 목록 댓글 1

참된 성전은 영원한 생명, 재림 신앙에 깨어 파레시아를 붙들라(막 11:11-19)

1. 오늘의 말씀 : 막 11: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본질상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는 값없이 의롭게 됩니다.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게 하시나이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5:6). 옳은 일을 위해 죽는 자가 있기는 하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세상에 없나이다. 만일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랑을 우리에게 행하셨습니다. 오늘도 이 사랑에 붙들려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 영혼을 보혈로 정결케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사 우둔한 자로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무리가 환호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를 따랐다. 무리는 예수를 ‘다윗의 나라’로 불렀으나 예수는 그들이 바라는 다윗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삼일만에 살아나사 죄사함과 영생 얻는 구원을 성취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뜻이며, 구약성경에서 증거한 그리스도의 길이다.

 

마가복음 11:11부터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의 활동을 기술한다. 마가복음에서는 연대기에 주목한다.

 

① 첫째 날(종려주일) :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을 둘러보신다(11:11).

② 둘째 날(월요일) :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다(11:12-19).

③ 셋째 날(화요일) : 예수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고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 지도자들과 논쟁하시며 여러 가지로 가르치신다(11:20-12:44).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며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신다(13장).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온 후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그의 장례를 준비한다(14:1-11).

④ 넷째 날(수요일) : 기록이 없다.

⑤ 다섯째 날(목요일) :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체포당하신다(막 14:12-72).

⑥ 여섯째 날(금요일) : 예수께서 새벽에 공회의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넘겨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신다(15장).

⑦ 일곱째 날(토요일) : 안식일이다. 안식일이 지난 이튿날 새벽 예수께서 부활하신다(16:1-8).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신다. 그는 성전에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후 날이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신다(11절). 주목되는 단어는 “둘러보시고”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때 성전에 가셨다. 그때 그는 이 성전을 “아버지 집”이라고 하였다(눅 2:49). 이 성전은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다(17절).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집에 왔으니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예수는 기도하거나 예배드리지 않으시고 그저 “둘러보시고” 나가셨다. 그가 성전을 둘러보신 것은 막연히 구경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위한 둘러봄이다(Kelber, 박수암). 그의 둘러봄은 다음에 소개되는 성전 청결 사건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이후 마가복음에서 성전은 항상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이 성전은 스룹바벨에 의해 지어진 2성전(1성전은 솔로몬 성전)으로 헤롯이 리모델링한 것이다. 헤롯은 에돔 출신으로 유대인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는데,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고자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성전을 재건하였다.

 

헤롯이 주도한 성전 재건은 BC 19년부터 시작하여 헤롯이 죽은 후 AD 64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화려하게 재건된 성전은 불과 6년 만에 로마 군대에 의해 불살라진다. 한편 예수의 공생애 당시 성전 재건은 46년간 진행되고 있었다(요 2:20;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12-19절은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한 지 둘째 날의 일을 기록한다. 예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12-14절), 전날 둘러보신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다(15-19절). 20-26절에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대로 마르고 예수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저주가 이루어진 말씀 사이에 성전 청결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전형적인 서술 방식인 샌드위치 기법이다. 샌드위치 기법은 양편의 이야기를 통해 중앙에 있는 이야기를 부각시킨다(막 5:21-43; 8:22-10:52 참고). 그러므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강도의 소굴로 변하여 기능을 상실한 성전에 대한 저주를 예시한다.

 

예수와 제자들은 전날 묵었던 베다니에서 나왔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께서 시장하셨다(12절). 예수가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다. 그런데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는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3절).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14절).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시장함을 느끼신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육체적 굶주림을 채우려는 시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그닐카). 열매를 기대했던 예수는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실망하신다. 무화과나무와 그 열매에 대한 상징적 설명은 구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맏물 무화과’로 부른다(호 9:10). 예레미야는 환상 중에 두 개의 광주리를 본다. 한 광주리에는 아주 좋은 무화과가 가득하고 다른 광주리에는 먹을 수 없는 나쁜 무화과가 가득하다(렘 24:1-10). 좋은 무화과는 심판을 받아들여 바벨론으로 간 백성들이고, 나쁜 무화과는 심판을 거부하며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다.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하며 탄식한다. 이 탄식이 예수의 무화과나무의 저주와 가장 가깝다. “아, 절망이다! 나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과일나무와도 같다. 이 나무에 열매도 하나 남지 않고, 이 포도나무에 포도 한 송이도 달려 있지 않으니, 아무도 나에게 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는구나. 포도알이 하나도 없고,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무화과 열매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없어졌구나. 이 땅에 신실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만,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과, 이웃을 올가미에 걸어서 잡으려고 하는 자들뿐이다”(미 7:1-2).

 

미가 선지자가 환멸을 느낀 것은, 경건한 자들과 신실한 자들이 그 나라에서 사라지고 모든 백성이 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고 권세자는 탐심을 채우며 서로 결합한다(미 7:3).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다. 그들에게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그들이 소동할 것이다(미 7:4).

 

예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 부패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 그 심판은 바로 성전에서 시작한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이유문,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3b절)라는 말씀은 난해하다. 무화과나무의 철이 되지 않아 열매 맺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예수가 철이 되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유명한 무신론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 이야기를 두고 기독교를 비난하였다. 예수가 세상과 만물의 창조주였다면, 어찌하여 스스로 창조(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며 때가 되지 않아 열매 맺지 못한 나무를 저주했냐는 것이다(<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하지만 러셀은 무신론을 변증하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당시 갈릴리에서는 연중 10개월이 무화과나무의 철에 해당하였다. 그보다 기후가 험한 예루살렘에서는 그 철이 좀 더 짧았을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익기 전 45일 동안 잎사귀를 달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맏물 무화과는 5월 말경, 늦게 나오는 무화과는 8월 중순경에 열리게 된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화과의 철(때)이 아니라, 열매 없음이다. 성경에서 창조의 이야기가 과학적 지식이 아니듯, 이 이야기 역시 식물학적 지식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무화과의 철이 아니다”라는 이유문은 무화과나무가 표상하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때를, 곧 자신의 종말론적 때를 놓쳤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자기 때에 열매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반면 무화과나무가 때가 아닌데도 열매를 맺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게 종말의 때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때는 긴박하고도 예기치 못하다.

 

무화과나무는 예수가 시장할 때 열매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이 임하실 때 열매가 없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아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한다. 존재 의미를 상실한 무화과나무는 언약을 저버려 존재 의미를 상실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효력도 끝이 났다. 그들에 대한 구원은 만민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15-19절은 존재 의미를 상실한 이스라엘에 대한 형벌을 예고하신다. 그것은 예수의 성전 청결로 예시된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한 첫날 성전을 둘러보셨다. 이튿날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신다(15절).

 

예루살렘 성전 청결에 대한 예수의 행위는 극히 간결하게 서술된다. 당시 성전의 열린 시장은 희생 제사를 위해 필요한 짐승들과 물건들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순례자와 경건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희생 제사에 필요한 짐승을 사서 올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이 같은 매매 활동은 성전 당국에 의해 묵인되었을 뿐 아니라 일부는 독점되기까지 하였다(빌러벡).

 

매매 활동의 예로 환전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이 언급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세를 납부하기 위해 고대 히브리 화폐를 사용해야 했다. 사람들은 이방 화폐를 내지 않기 위하여 이 화폐로 바꾸었다. 랍비들의 전승에 따르면, 성전의 환전상들은 돈을 바꾸어줄 때 2.1%~4.2%의 수수료를 챙겼다(빌러벡).

 

예수는 성전 뜰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또한,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 나르는 것도 금하셨다(16절). 여기서 언급한 들고 다니는 물건은 일상적인 짐이 아니라 제의에 필요한 성전 기물이었을 것이다(그닐카). 성전의 기물에 대한 이동 금지는 성전 시대의 종국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다(박수암). 그것은 성전의 제사장직에 대한 금지이다.

 

예수는 성전 청결을 행하신 후 그 의미에 관하여 가르치신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7절).

 

17절은 2개의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울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사야 56:7의 인용이다. “강도의 소굴”이라는 말씀은 예레미야 7:11을 인용한 것이다. 성전의 긍정적 기능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고, 부정적 의미는 그곳이 강도의 소굴로 변한 것이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자는 성전의 장사꾼만 아니라 유대교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자기들을 가리켜 하는 것으로 알고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는다(18절).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정곡을 찌른 예수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18절). 게다가 무리가 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자 예수와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아마도 베다니로 갔을 것이다(11, 12절).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기능을 상실한 성전의 운명을 보여준다. 존재 의미를 상실한 성전과 더불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은 구속사적 역할도 종결된다. 예수의 성전 청결은 낡은 제의를 폐지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새로운 것의 도래를 예시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을 향한다. 그와 함께 기존의 성전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성전 시대가 열린다.

 

요한복음에서 성전 청결 사건은 새로운 성전 시대를 예시한다.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이 있고 난 뒤 유대인들이 표적에 관하여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청결 이상의 것을 요구하신다.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성전을 짓기 위함이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 2:18-19).

 

예수께서 삼일만에 짓는 성전은 그가 죽으시고 장사된지 삼일만에 살아나신 그의 몸이다(요 2:21). 또한, 성전은 그의 장사됨에 연합하여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은 성도이다(골 2:1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은 그리스도의 일이며, 곧 복음이다(고전 15:3-5).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창세전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롬 6:4; 딤후 1:10). 영생을 얻은 자들의 모임, 곧 영생의 공동체도 성전이다(고전 3:16).

 

사람이 태어나면 사람의 생명을 얻는다, 사람의 생명은 가족의 돌봄 속에서 양식을 먹고 자란다. 살지 못하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영생 얻은 자는 생명의 교제를 통해서 그 생명을 살아낸다. 살아내지 않은 영원한 생명은 무용지물이다. 영생을 살아내는 것은, 생명의 거주지(공동체) 안에서 생명의 교제를 하는 것이다.

 

만일 영생을 얻은 성전이라도 살아내지 못하면 기능을 상실한 성전이다. 때가 되지 않아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았듯이, 예기치 않을 때 오시는 주님은 기능을 상실한 성전을 심판하신다. 날마다 생명으로 사는 삶은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지속해야 하는 일상이다. 생명의 교제는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파레시아’다. 우리가 파레시아를 버리지 말 것은, 주님이 지체하지 않고 오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확신(파레시아)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 확신에는 큰 상이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오실 분이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가 뒤로 물러서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히 10:35-39).

 

 

4. 나의 묵상

말씀을 떠난 채 선례 답습 식이었던 신앙과 목회는 내게 어떤 의미나 효력도 없었다. 특히 나는 보이는 성전을 성전으로 오해하였다. 건물 지하에서 개척한 교회를 지상으로 올리는 것이 1차 목표였다. 내 안의 성령은 탄식하며 ‘이게 아닌데’라는 사인을 주었으나 말씀이 부재하니 다수가 따르는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였다.

 

한번은 내가 담임하는 교회의 지방회 감찰장(시찰회장)이 자청하여 부흥회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교단 내에서 부흥사로 알려졌고 개인적으로 나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부흥회 첫날부터 성도들이 시험에 들었다. 나는 위선을 떠느라 헌금에 대해서는 설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부흥사는 성도들이 헌금한 봉투를 흔들어내며 책망하듯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가 개척한 지 몇 년인데 아직도 지하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느냐고 다그치면서 지상으로의 성전(?) 이전을 촉구하였다. 부흥사를 예우하느라 나도 동조의 발언을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수치로 얼굴을 감쌀 일이다.

 

한 달 전 교제하는 목사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호형호제하는 후배 목사가 지방 어떤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기존 성도들과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선배 목사를 형으로 부르며 와서 부흥회를 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흥회 내용까지 주문하였다. 성도들이 담임목사의 말을 잘 듣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목사는 후배 목사의 그런 말을 씁쓸하게 여기며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생명을 알지 못하는 목사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참된 성전을 알지 못하니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을 세우려고 안달이다. 보이지 않는 참된 성전을 짓는 실력이 없는 자들은 보이는 성전에 집착한다. 기가 막히는 것을 기존 건물로도 충분한데 또 새로 짓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무모함과 무지에서 벗어나는가?

 

그것은 심판을 통해서 사람이든 건물이든 무너져야 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다시 세우리라! 심판의 처소가 그리스도의 무덤이 될 때 참된 성전이 지어진다.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짓는 성전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다. 이 성전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을 얻은 자, 재림 신앙에 깨어 파레시아를 붙든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예수께서 성전을 그저 둘러보십니다. 이는 심판의 둘러봄입니다. 기능을 상실한 성전은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참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와 함께 장사된 자는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짓는 성전은 영원합니다. 그의 무덤에서 짓지 않은 성전은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아버지여... 말씀의 검증 없이 남이 알려준 대로 믿는 신앙, 남이 알려준 대로 하는 목회는 참담했습니다. 주께서 이미 무너뜨린 성전을 고수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여전히 무지와 무모함으로 내달렸을 것입니다. 요즘 성전에 대해 무지한 교회를 보면 공포를 느낍니다. 아, 하나님의 심판을 어찌 감당하랴! 어떤 교회는 성도 숫자에 비하면 기존 건물도 충분한데 새 건물을 짓는다고 합니다. 더 큰 건물을 지어야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생명 없는 신앙과 목회는 이렇듯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런 자가 긍휼을 입었나이다. 나 같은 자에게 임한 긍휼이 저들에게도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재림 신앙에 깨어 있게 하소서. 예기치 않을 때 임할 주의 재림 앞에서 파레시아를 계속하게 하소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아니면 내가 주님께 가는 그날까지 파레시아를 붙들게 하소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들의 믿음, 전능한 믿음을 구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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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답터 | 작성시간 24.02.05 아멘~거룩한 주님이 거하시는 참된 성전으로 지어져갑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강도의 소굴을 만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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