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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024)

‘사망의 말씀’에 합당한 자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다(왕하 1:1-8)

작성자굿뉴스|작성시간24.06.19|조회수475 목록 댓글 1

‘사망의 말씀’에 합당한 자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다(왕하 1:1-8)

1. 오늘의 말씀 : 왕하 1:1-8

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6 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2. 시작 기도

아버지!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사람을 지으신 여호와가 나를 살피십니다(51:13). 하온데 어찌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생을 두려워하리까? 뭇사람을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게 하소서. 악한 왕 아합이라도 겸비하니 긍휼을 베푸신 주께서 하물며 징계받는 자녀를 어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리까? 일본과 멕시코 사역이 임박했습니다. 낮추시고 겸비케 하시는 주 앞에 엎드립니다. 곤한 영혼이 말씀 앞으로 가오니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소서. 봇물 터지듯 솟아나는 육신의 생각은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내는 바다와 같나이다. 오염된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열왕기서(상하)는 다윗의 말년에서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까지 약 400년간의 왕들의 역사를 기술한다.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는 신명기 사가의 해석대로 언약 준수 여부에서 조명된다. 왕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 안에 거하면 왕과 백성들이 형통하였다. 그러나 왕들이 말씀에 불순종하여 언약을 깨뜨리면 왕과 백성들에게 징계가 따랐다.

 

이것은 왕들이 대내외적으로 이룬 성과와 무관한 평가였다. 특히 열왕기하의 신학을 한마디로 논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께 징계받고 멸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왕기서는 독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 안에 거하도록 하는 교훈을 담고 있다.

 

열왕기서의 중심 부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에 관하여 기록한다(왕상 16:21-22:53; 왕하 1:1-10:31). 오므리 왕조는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의 계보로 이어진다(BC. 885-841). 오므리 왕조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조로 알려졌다. 당시 오므리 왕조는 지중해 연안 국가들 가운데 맹주 역할을 하였다. 또한, 주변 나라 중에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두로와 시돈과 우호 관계를 맺고 그들과 국제무역을 통해 단기간에 나라를 부흥시켰다.

 

오므리 왕조는 국내적으로도 수도를 사마리아로 이전하고 많은 건축사업을 시행하였다. 특히 오므리 왕의 아들 아합과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의 결혼을 통해 두 나라는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런데 오므리 왕조는 영적으로 큰 타락상을 보였다. 아합 왕은 바알 신전을 짓고 바울 숭배를 드러내놓고 조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출중한 선지자들을 일으켜 세워 이들의 영적 타락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다. 바로 이 시대에 엘리야와 엘리사, 미가야 선지자가 활동하였다. 오므리 왕조에 관한 상당 부분의 기록이 이들 선지자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열왕기하 1장은 열왕기상 17장부터 시작한 엘리야의 활동에 관한 마지막 부분이다. 본 장에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질병으로 사망한다. 1절은 아합이 죽은 후 모압이 이스라엘을 반역한 일을 언급한다. 모압은 사해 동편 고원지대에 자리 잡은 나라였다. 다윗은 모압을 쳐서 복종시켰으나 이스라엘이 분열되자 이스라엘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모압은 오므리 왕 시대에 다시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죽자 이스라엘의 약화된 틈을 타서 모압은 이스라엘에 반란을 일으켰다. 3장에서 아하시야의 왕위를 이은 여호람이 모압을 다시 정벌하였다. 아하시야의 질병에 앞서 모압의 반란을 언급한 것은, 아하시야의 통치력이 약했음을 보여준다,

 

아합에 이어 왕이 된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방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2a절). 아하시야는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 태어난 인물로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붙드셨다’이다. 아합과 이세벨은 바알 신전을 건립하고 바알 숭배에 앞장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다’(아하시야)로 지었다. 이것을 보면 아합 왕은 바알도 숭배했으나 여호와도 숭배한 혼합종교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아하시야가 추락한 사마리아의 다락방은 발코니가 있는 위층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그레이). 이 테라스 또는 발코니는 공기만 받아들이고 강한 햇빛과 외부인의 시선을 차단하도록 만들어진 격자문으로 가려져 있었다. 여러 조각으로 연결된 목공예품으로 만든 격자문은 아하시야가 그곳에서 떨어진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쉽게 부러졌다.

 

이에 아하시야는 사절단을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보내어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를 물어보게 하였다(2b절). 에그론은 블레셋의 성읍 중 하나로 해안에 있는 아스돗과 예루살렘 사이에 있었다. ‘바알세붑’은 에그론의 신으로 불린다. 바알세붑은 문자적으로 ‘파리 바알 신’ 또는 ‘파리떼의 주’라는 뜻이다. ‘파리’는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재앙이나 병을 치료하는 신적 능력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정중호, <100주년 성서주석 열왕기하>). 이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대적자 사탄을 ‘바알세불(바알의 왕)’로 불렀다(마 10:25; 막 3:22; 눅 11:26).

 

하나님이 이 일에 즉시 개입하신다. 여호와의 천사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나타나 사마리아 왕의 사절단을 만나서 이렇게 전하라고 명령하였다.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다니,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올라가 누운 그 병상에서 일어나 내려오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3-4절). 엘리야는 천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아하시야를 ‘이스라엘 왕’이 아닌 ‘사마리아 왕’으로 부른 것은, 오므리가 사마리아에 왕조를 세운 것을 비판하는 이스라엘의 보수적 입장을 반영한다(그레이).

 

여호와의 천사가 엘리야에게 전하라고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4, 6절). 이 말씀은 아하시야에 대한 ‘사망의 말씀’이다(“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하시야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사절단을 보낸 것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그러므로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왕의 사절들은 가던 길에서 돌이켜서 왕에게 되돌아갔다. 왕이 그들에게 왜 그냥 돌아왔는지를 물었다. 사절단에 대한 왕의 물음은 사절단과 엘리야의 만남이 사마리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사절단은 왕에게 저간의 일들을 고하였다.

 

6절, 엘리야가 사절단에 했던 말(3-4절)을 사절단이 아하시야 왕에게 고한다.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을 만나서 그러한 말을 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냐?”(7절). 아하시야는 자기에게 임한 사망의 말씀보다 그 말씀을 고한 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이것은 선왕 아합이 가뭄의 원인을 선지자 엘리야에게 떠넘겨 그를 잡으려고 한 것과 같다(왕상 17:1-6).

 

사절단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는 분명히 디셉 사람 엘리야다”하고 외쳤다(8절). ‘털이 많은 사람’은 머리가 길고 수염이 난 사람, 혹은 거칠고 털이 많이 있는 외투를 입은 사람을 가리킨다.

 

당시 이러한 복장은 예언자의 표식으로 인정되었고(슥 13:4), 세례자 요한(마 3:4)이나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들도 금욕생활을 위하여 이런 외투를 입었다. 특히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이 같은 복장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그들의 지위를 상징한 것 같다, 엘리야에게 이런 지위가 부여된 것은 말라기 3:25에 근거한다.

 

아합에 이어 왕이 된 아하시야는 불과 2년을 다스렸다. 그의 통치기에 있었던 사건 중 모압이 이스라엘을 반역한 것만 묘사된다. 열왕기서의 저자는 아하시야가 어떻게 통치했는가보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보여준다. 아하시야는 다락에서 추락하였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곤경이다. 문제는 그 곤경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아하시야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다’이다. 그는 곤경에 처했을 때 이름대로 ‘여호와를 붙들어야’ 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왕과 백성들과 함께하신다(“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느냐?”). 그러나 그는 멀리 떨어진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병이 낫겠는지를 묻고자 사절단을 보낸다. 그는 곤경에 처하였을 때 여호와께 더욱 범죄한 것이다.

 

후에 유다의 아하스 왕도 곤고할 때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였다. 그는 곤고할 때 마땅히 여호와를 의지해야 했으나,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도움받기를 고대하였다(대하 28:22).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믿음이 적은 자라도 곤경이 닥치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왕들은 곤경에 처했을 때 도리어 현실적인 도움이 되는 신들을 의지하였다.

 

아하시야는 이미 엘리야를 알고 있었다. 사절단들이 엘리야의 차림새를 알려주자 즉시로 그가 엘리야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미 사망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15절에서 엘리야가 아하시야에게 가는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아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하시야에 임한 사망의 말씀은 그대로 집행되었다.

 

엘리야가 아하시야에게 전한 말씀은 사망의 말씀이다. 그리고 곤경에 처했을 때 여호와께 범죄한 아하시야에게 사망의 말씀은 합당하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예시한 그리스도는 사망의 말씀이 합당한 죄인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신다. 하늘로부터 오신 아들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아들이 주는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아담 안에 속한 모든 자는 죄의 삯으로 사망에 처해진다.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사망의 말씀이 선고되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자이다(롬 1:32),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고, 모든 사람을 그리로 이끄셨다(요 12:32-33).

 

사망의 말씀에 합당한 인생이 아들의 죽음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로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이다. 이 사랑을 아는 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요 3:16).

 

 

4. 나의 묵상

다락에서 추락하여 곤경에 처한 아하시야에게 여려 선택지가 있었다.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었다면, 탕자를 맞이한 아버지처럼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셨으라. 그러나 아하시야는 지극히 현실적 해법을 강구하였다. 재앙과 질병을 낫게 해준다는 파리떼의 왕(바알세붑)에게 의지하였다. 그는 곤경에 처했을 때 여호와께 더욱 범죄하였고 그에게 사망의 말씀이 선포된다. 그는 다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김으로써 죽는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이 한계 상황에 처하면 주로 3가지 방안을 강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허무주의, 과학적 합리주의, 그리고 무한자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말씀 앞에서 곰곰이 묻는다. 예기치 않은 곤경 앞에서 나는 어느 길을 택하는 자인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적 상황에서 나는 어느 길을 택하는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진다. 자기가 선택해놓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주체적 삶을 저버린 미성숙하고 유아기적 삶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의 징계를 받을 때 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교훈한다. 하나는 가볍게 여기지 말고, 다른 하나는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히 12:5). 내게 주어진 곤경의 상황, 관련된 사람들의 배후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다. “너희 중에 하나님이 없어서 다른 생각을 하느냐?” 모든 상황과 그 과정과 결과를 하나님의 행동하심으로 받는 겸비함을 구한다. 환난을 자랑하는 것은, 그것을 인내함으로 도키모스를 이루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사망의 말씀이 집행되었어야 할 자였다. 그런 자에게 말도 안 되는 생명의 말씀이 임하였다. 이후로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말로만 덤으로 산다고 할 것이 아니라, 실제에도 그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구한다. 내게 임한 곤경이 주를 믿는 자들, 생명으로 사는 이들을 실족게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의로운 자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한 아합 왕에게 재앙이 선포되었다. 하나님이 아합의 겸비한 것을 보시고 재앙을 유보하셨다(왕상 21:29). 하물며 아들을 값으로 주고 사신 자녀일까 보랴! 오직 겸비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를 간구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아하시야가 다락에서 추락하여 다쳤습니다.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 대처방식입니다. 그는 엘리야도 알고 하나님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처를 합니다. 재앙과 질병을 면해준다는 파리떼의 왕, 바알세붑에게 사절단을 보냅니다. 그에게 사망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는 다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의지하여 죽습니다.

 

아버지... 사망의 말씀을 받을 자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엘리야는 악인에게 사망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예시한 그리스도는 죄인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모든 사람을 그리로 이끄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생명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은혜가 나 같은 자에게 임하였습니다.

 

아버지... 여전히 사망의 말씀에 합당한 자입니다. 곤경에 처한 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보다 현실적인 해결 방안을 찾습니다. 곤경에 처했을 때 범죄하지 않게 하소서. 어둠 속에서 행할 때 나의 횃불을 피우지 않게 하소서. 그것은 고통에 고통을 더할 뿐입니다. 사람과 사건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행동하심 앞에 겸비하여 긍휼을 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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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답터 | 작성시간 24.06.22 아멘 ~ 예상치 못한 곤경 앞에서나 넉넉한 풍요의 즐거움 중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의 비참함과 겸비하여 은혜를 구하는 자로 서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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