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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가람옷 ‘비로도처매’에 얽힌 사연
(작성 중)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비로도처매’라는 ‘가람치마’가 있었다. ‘가람치마’란 뜻은 앞쪽 파일에서 소개한 것처럼 ‘외출복(外出服) 치마’라는 뜻이다. 또한 ‘비로도’는 ‘비로드’를 말하고, ‘처매’는 ‘치마’라는 뜻의 우리 고향 사투리이다.
‘비로드’는 또 ‘빌로드’라고도 하는데, 첨모직의 하나로 천의 한 면 또는 양면에 ‘고’를 내거나 그것을 절단(切斷)해서 ‘보풀(종이나 헝겊 따위의 거죽에 부풀어 일어나는 몹시 가는 털)’이 일도록 한 직물로 ‘우단(羽緞)’이라고도 한다. 이하에서는 ‘비로드’로 통일한다.
비로드 치마

‘비로드’란 포르투갈어인 ‘velludo’와 에스파냐어(스페인어)인 ‘vellu- de’가 와전된 말로 전해지고 있으며, 영어(英語)로는 ‘벨벳(velvet)’이라고 한다.
‘벨벳’은 이탈리아의 ‘벨루티가(Velluti 家)’에서 발명한 것이라 해서 이탈리아어로 ‘벨루토(velluto)’라 하는데, 특히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복식재료(服飾材料)로 생산되었으며, 유럽 각국에 보급되었다.
벨벳 원단

이 직물(織物)은 특이한 광택과 촉감 및 외관 등으로 진귀하게 여겨졌는데, 종교적(宗敎的) 의복에 많이 쓰였으며, 왕이나 귀족들의 의상이나 실내장식용(室內裝飾用)으로 많이 쓰였다.
보온성(保溫性)이 우수하고, 우아한 광택이 나는 고급스런 소재로 감촉(感觸)이 부드럽고 두터우며, 빛의 반사에 의해 얼룩이 생겨 흰빛을 띄기도 한다.
용도(用度)는 커튼, 로만쉐이드, 의류용(衣類用)으로 바지와 자켓, 쇼파커버, 각종 쿠션과 커버링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비로드 커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비로드’가 들어 왔을 때는 그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히사시’ 머리에 ‘비로드’치마면, 최첨단(最尖端)의 신여성을 뜻하였던 시절이 있었을 만큼 ‘비로드’는 고급 천으로 많은 여성이 소망했던 옷감이었다.
위에서 말한 ‘히사시 머리’는 일제(日帝) 당시에 ‘히사시까미’ 또는 ‘까미머리’라고 했는데, 비녀를 꽂지 않고 머리 뒤를 둥글게 마무리하는 헤어스타일을 말한다. 비녀를 꽂기 위해 쪽을 트는 대신 뒷머리를 모아서 '까미'라는 걸 틀고 다녔다.
자그마하고 반달같이 생긴 속틀을 집어 넣고, '까미' 핀으로 쫑쫑 찔러 동그랗게 만든 머리로 아래 사진 중 오른쪽에 앉은 여인의 머리가 '히사시' 머리다.
히사시 머리

긴 댕기머리나 쪽찌고 비녀 꽂던 머리를 자르고, 뒤로 동그랗게 말아 올려 핀으로 고정시킨 머리를 말하는데, 당시 그런 머리를 한 여자는 대개 짧은 통치마에 구두를 신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쪽 찌고 긴 치마 입은 구식(舊式) 여자에 비해 훨씬 멋쟁이라는 점에서 신여성(新女性)이라고 이름 하였다. 1930년대 도시에서 신교육(新敎育) 받은 여성들 사이에서 특히 유행했었다.
히사시 머리 일본여성

당시의 신여성(新女性)이 되려면 머리도 비녀로 쪽을 찌는 대신 ‘히사시까미’로 빗어야 했고, 옷도 종아리가 나오는 까만 ‘비로드’ 통치마를 입고, 뾰죽구두에 ‘한도바꾸(핸드백)’를 들고 다녀야 했었다.
그 시절 한도바꾸

어쨌든 이때부터 ‘비로드’치마를 두고 “치마면 다 치마냐”라는 속담(俗談)이 생겨났고, 개화기(開化期) 때는 여학생들 간에 미모에 등급을 매기는 은어(隱語)로 둔갑하기도 했었다.
두드러지게 예쁜 아가씨를 ‘비로드치마’, 보통 예쁜 아가씨를 ‘비단치마’, 덤덤한 아가씨를 ‘무명치마’, 미운 아가씨를 ‘삼베치마’로 부르며 구분한 것이다.
비로드 치마급 아가씨
그 만큼 ‘비로드’는 고급 천이었다. 그래서 ‘비로드’의 한역(漢譯)을 ‘천아융(天鵝絨)’이라고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아융’은 하늘에 사는 거위의 털로 짠 ‘베’라는 뜻이다.
부드럽기론 이보다 더한 ‘베’가 없기에 ‘부드럽다’는 대명사(代名詞)로도 많이 쓰였었다. 유난히 착한 마음씨를 “비로드 같은 마음씨”라고 한다.
삼베 치마급 여인

1950년대 한때 ‘비로드(veludo)’가 한복 유행을 휩쓴 적이 있었다. 혼인하는 색시가 채단(綵緞)으로 남색과 포도주색 ‘비로드’를 받으면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비로드’는 그 특유의 색상이 매혹적이긴 하나, 앉았다 일어나면 엉덩이가 번들거리고 주름이 잘 펴지지도 않고, 다림질도 어려워 실용성이 없었다. 게다가 값이 너무 비싸 유행이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의 ‘비로드’치마 한 감은 대학 한 학기 등록금(登錄金)을 뛰어넘는 25만 환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비로드치마 입은 그 시절 신여성들

(왼쪽 세 여성은 '빠마'를 했고, 오른쪽 여성은 '히사시까미'머리를 했다)
이러한 이유와 새로운 섬유의 발명에 따라 ‘비로드’의 전성시대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새로이 발명된 ‘나일론’의 실용성(實用性)이 널리 소개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일론’은 올이 거미줄처럼 가볍고 철사처럼 질길 뿐 아니라, 빨면 쉽게 마르고 다림질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비로드’를 물리치고 최고급 옷감 노릇을 했다.
나일론 치마

‘나일론 66’이라는 천으로 만든 블라우스는 6.25전쟁 이후 직장여성들에게 폭발적(爆發的)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나일론’은 습기(濕氣)를 흡수하지 못하고, 통풍성(通風性)이 떨어져 우리나라 여름 기후에는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깔이·망사 등 섬세(纖細)하고 우아한 직물이 계속 쏟아져 들어와 멋 부리고 싶은 여성들의 욕구(欲求)를 충족시켜 주었다. 나일론의 전성시대(全盛時代)가 열린 것이다.
1956년 디자이너 노라노의 첫 패션쇼

그리고 1955년 이후부터는 당시 하나 뿐이었던 여성잡지『여성계(女性界)』와 10월에 발간된 『여원(女苑)』이 여성패션 발전에 적극성을 유도하였고, 195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내 패션쇼가 동화백화점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여성들에게 양장(洋裝)에 대한 관심도를 높인 중요한 이정표(里程標)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여 원

얘기가 나왔으니 나일론치마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보탠다. 그 무렵 나일론 옷감은 최신 옷감으로 사람들에게는 꿈의 옷감이었다. 때문에 나일론 바람은 태풍처럼 몰아쳐서 온 나라에 유행했었다.
지금은 거지들도 입지 않을 나일론 치마저고리가 그 무렵 여인들에게는 최상(最上)의 나들이옷으로, 나일론 옷이 전국을 뒤덮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를 ‘나이롱’이라고 했고, 이 말 또한 전국을 휩쓸었다. '나이롱'이란 '나일론'의 일본식 발음인데, 상당수 국민들은 이를 경상도사투리라고 왜곡하기도 했었다.
물색 나일론

나일론 옷감이 의류계(衣類界)에 일대 돌풍(突風)을 몰고 온 이유는 옷감이 질기고 손이 덜 가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재래의 무명이나 명주, 삼베와 모시는 잘 헤지고 너무 손이 많이 갔다.
그런데 나일론 옷감은 질길 뿐 아니라, 세탁(洗濯)도 간단해서 세탁 후 물을 뺀 다음 한두 시간이면 다림질하지 않고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복(韓服) 손질에 시달렸던 주부들에게는 꿈의 옷감이었다.
나일론 치마
그래서 나일론은 쓰이지 않는 데가 없을 만큼 온통 나라가 나일론 판이 되었다. 나일론 양말, 나일론 스타킹, 나일론 팬티 등 그 종류도 헤아릴 수 없었다.
‘나이롱’이라는 사투리 발음(發音)도 온 나라를 뒤덮었다. 쉽고 편리한 것에도 ‘나이롱’이라는 말이 붙었고, 가짜, 얌체, 요령꾼을 이르는 말에도 ‘나이롱’이라는 말이 붙었다.
비로드 양장

군대에서 ‘나이롱’ 환자(患者)는 교육받기 싫어 일부러 아픈 척하는 병사를 이르는 말이었다. 어쨌든 1950~60년대에 걸쳐 이러한 화학섬유(化學纖維)의 열풍은 이 땅에 뽕나무를 사라지게 했고, 목화(木花)나 삼 재배도 자취를 감추게 했다.
화학섬유(化學纖維)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 같은 화학섬유에 명주(明紬)나 무명이나 삼베 옷감은 값이나 생산량(生産量)에서 도저히 경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롱 뻥

자연히 뽕나무를 베고, 목화나 삼 대신에 다른 작물(作物)을 심고, 베틀은 아궁이나 박물관(博物館)으로 갔다. 더는 베를 짜려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화학섬유(化學纖維)로 온통 몸치장한 사람들이 화학섬유의 단점에 눈 뜨게 되면서 그 열풍(熱風)은 서서히 걷히게 되었다.
이제는 화학섬유는 저질에 값싼 옷감이 되었고, 자연섬유(自然纖維)인 명주나 무명, 삼베나 모시가 고급 천연섬유(天然纖維)로 대접받는 시대가 되고 있다.
비로드 치마 입은 소녀(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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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드’치마에 대한 밑천이 모두 떨어져 그 옛날 우리들의 선대(先代) 여인들이 입던 ‘치마’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 더 보탠다.
흔히들 봄은 여인네들의 치맛자락에서부터 온다고 한다. 화사한 봄날, 봄볕을 머금은 봄 치마 자락은 겨울의 투박함에서 깨어나 알맞은 중량감(重量感)을 실어 신체의 각선미(脚線美)를 따라 흘러내리는 자태가 참으로 아름답다.
비로드 양장

손수건만한 지금의 ‘하의실종(下衣失踪) 패션’이나 미니스커트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릎 아래로 깊숙이 내려오거나, 발등까지 가리는 전통(傳統) 한복치마를 말한다.
돌나물이며 냉이, 씀바귀의 풋풋한 향기(香氣)를 머금고, 아지랑이의 몽실몽실하고 아른거림의 추임새를 받으면,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아름다운 것이 한복(韓服)치마다. 내 딛는 발자국 마다 낭창낭창 춤을 추기도 한다.
그 시절 한복 치마

갓 깨어난 하얀 나비, 노랑나비가 함께 어우러지면 더욱 환상적(幻想的)이다. 봄바람의 짓궂은 장난에 속살이라도 살짝 들어낼 듯 춤사위가 격해지면, 긴장감(緊張感)마저 더해져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다.
여인네들의 가슴속에 서리는 한(恨)이 많아서인지 치마의 가지 수도 수도 없이 많다. 한 겹으로 된 ‘홑치마’, 안을 넣어 겹으로 바느질한 ‘겹치마’, 양쪽으로 선단이 있어 둘러 입게 된 치마는 ‘풀치마’라고 한다.
겹치마
양쪽 선단이 없이 통으로 지은 치마는 ‘통치마’, 금박무늬의 ‘스란’을 대어 궁중(宮中)이나 일반 여인들의 예복(禮服)으로 입는 치마는 ‘스란치마’라고 한다.
그리고 부엌일을 할 때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앞에 두르는 치마는 ‘앞치마’, 겉치마 밑에 받쳐 입는 치마는 속치마, 정장(正裝)차림을 할 때 치마 바로 밑에 입는 ‘속치마’의 한가지이며, 홀수인 3층․5층․7층 등으로 길이와 색깔이 각각 다르게 만든 치마는 ‘무지기치마’라고 한다.
앞치마

그뿐인가. 질감(質感)에 따라서도 그 이름이 각기 붙여진다. 무명치마, 옥양목(玉洋木)치마, 삼베치마, 명주치마, 비단치마, ‘비로드’치마, ‘율똥’치마 등 갖가지 이름이 있다. 이상의 내용과 그 외의 다른 치마를 도표(圖表)로 소개하면 아래 표와 같다.
치마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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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이름 |
치마의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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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치마 |
검정빛의 천으로 지은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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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 치 마 |
여러 겹으로 입는 치마 중 가장 겉에 입는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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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 치 마 |
① 안을 받쳐 겹으로 지은 치마
② 폭이 넓게하여 겹쳐 입을 수 있게 지은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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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치 마 |
① 여자들이 맨 겉에 입던 치마
② 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게 지은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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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동치마 |
여자들이 입던 짧은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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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스란치마 |
쪽빛의 비단으로 지은 스란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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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치 마 |
① 남빛의 치마
② 여자 예복의 하나로 남빛의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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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치마 |
누벼서 만든 치마로 옷감의 안팎을 맞추어 그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이 지게 촘촘한 바느질로 누벼서 만들거나, 솜을 넣지 않고 면포(綿布)만 두 장 이상 겹쳐서 면사로 누벼 만듬.
재봉틀이 없던 옛날에는 일일이 손끝으로 누벼야 했기 때문에 누비질은 바느질 중에서도 가장 부담이 큰일이었으며, 누비는 방법에 따라 줄누비·잔누비·오목누비·잔주누비 등이 있어 적재적소에 맞추어서 치마 등 옷감은 대부분 잘게, 이불은 굵게 누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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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치마 |
다홍 빛깔의 치마 : 홍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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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치마 |
무지기 속에 입는 풀먹인 짧은 치마<옷이 동그랗게 펴지게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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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치마 |
① 다리가 드러나도록 짧은 치마
② 치맛단이 무릎에 오는 은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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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룽치마 |
여자들이 집에서 입는 막치마의 한 종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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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빵치마 |
허릿단에 두 개의 멜방을 달아 양쪽 어깨에 걸치게 지은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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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치마 |
몹시 모자라서 아주 짧게 된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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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치마 |
무명으로 지은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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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지 기
치 마 |
한복으로 정장차림을 할 때 치마 바로 밑에 입는 ‘속치마’의 한가지로 홀수인 3층, 5층, 7층 등으로 각기 길이가 다른 여러 개의 치마를 겹쳐서 한 허리에 이어 붙여 만듬.
각 단 밑 부분에 각각 다른 색으로 물을 들이며, 가장 긴 것이 무릎 아래에 이르고 차차 짧아지므로 ‘무지개’ 색을 이룬다 하여 ‘무지기’라는 이름이 붙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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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물치마 |
반물 빛의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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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물치마 |
‘밤물치마’는 검정색 염료로 염색한 ‘검정치마’를 말하는데, ‘미영베’나 ‘삼베’ 또는 광목(廣木)에 검정물을 들여 만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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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치마 |
분홍빛으로 된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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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로 드
치 마 |
첨모직의 하나로 천의 한 면 또는 양면에 ‘고’를 내거나 그것을 절단해서 보풀이 일도록 한 ‘비로드’로 지은 치마를 말함.
‘비로드’란 포르투갈어인 ‘velludo’와 에스파냐어(스페인어)인 ‘vellude’가 와전된 말로 전해지고 있으며, 영어로는 ‘벨벳(velvet)’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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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치 마 |
‘겉치마’ 밑에 받쳐서 입는 치마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 조끼허리에 ‘겉치마’와 비슷한 치마폭을 이은 것과 ‘겉치마’ 폭이 푸하게 퍼지도록 하는 ‘무지기치마’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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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치마 |
치마에 금박무늬의 ‘스란’을 댄 치마로 옛날에 궁중이나 일반 부녀자들이 입었던 예복용 치마로 폭이 넓고 길어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음.
왕비는 용무늬, 세자빈은 봉황무늬, 공주나 옹주는 꽃과 글과 무늬, 일반 부녀자들도 꽃과 글자무늬를 놓아 만드는데, ‘스란’을 두층 댄 것을 ‘대란치마’라 함.
* 스란 : 레이스. 너비 20cm쯤의 무늬 넣은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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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개치마 |
여자들이 나들이를 할 때 머리로부터 몸의 윗부분을 가리어 쓰던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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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치 마 |
부엌일을 할 때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앞에 두르는 작은 치마로 ‘행주치마’, 또는 ‘에이프런’ 이라고도 함.
가정에서는 흰색이나 밝은 색의 무명천이 많이 쓰이고 그밖에 음식점, 생선가게, 정육점 등 에서는 가죽제품이나 고무제품 등으로 만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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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치마 |
여자 양복의 아랫도리인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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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치마 |
위가 좁고 자연적으로 주름이지며 아래쪽이 양산처럼 넓게 펴지는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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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치마 |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부녀자들이 즐겨 입던 긴 일자형 통치마로 대체로 화려한 색깔로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었으며 허리에는 고무줄을 넣었음.
당시 월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선물용으로 사와서 ‘월남치마’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길이가 긴 스커트로 일반 여성들에게 크게 유행했으며, 때와 장소의 구분 없이 입던 ‘월남치마’는 그 후 시골에서 농사일을 할 때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치마로 애용되었고, 일본여성들의 복식인 몸뻬바지와 함께 크게 유행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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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똥치마 |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미국 동부의 ‘뉴톤’이라는 도시에서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누에를 쳐서 그 고치실로 천을 짰던 것이 ‘율똥’의 시작이며, 이 옷감이 일본에 들어가면서 ‘뉴똥’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 옷감이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갖가지 이름이 만들어졌음.
본래의 이름은 그 천을 만든 도시의 이름을 따서 ‘뉴톤’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일본식 발음으로 ‘뉴똥’이 되었고, 이 말이 다시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뉴똥’ ‘유동’ ‘유똥’ ‘윳동’ ‘윳똥’ ‘율똥’이라는 이름으로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이 만들어져 정착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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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끼치마 |
조끼허리가 달린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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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치마 |
잔주름을 배게 잡은 치마의 한 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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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치마 |
진솔로 지은 모시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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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치마 |
짧게 지은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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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치 마 |
발등을 덮어 땅에 질질 끌리도록 만든 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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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치 마 |
한복치마의 한 가지로 양쪽으로 선단이 있어 둘러 입게 된 치마로 치마폭이 통으로 된 통치마에 상대되는 것으로 한복치마의 기본이 됨.
띠허리나 어깨로 치마허리를 만들고, 치마폭과 치마허리를 맞추어 주름을 잡으면서 치마허리와 치마폭을 붙여 박음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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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치 마 |
한복치마의 한 가지로 양쪽 선단이 없이 통으로 지은 치마로 띠허리를 달아 뒤로 여며 입는 ‘풀치마’와는 달리 통으로 박아 주름을 잡은 치마폭에 조끼허리 또는 어깨허리를 담.
조끼허리의 앞은 여미게 되어 있으며, ‘풀치마’에 비해 간편하고 활동적이며, 길이에 따라 ‘긴 통치마’와 ‘짧은 통치마’로 구분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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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치마 |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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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란치마 |
스란을 댄 붉은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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홑단치마 |
한겹 옷단으로 지은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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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얘기한 치마는 우리나라에서 면면히 이어온 전통한복(傳統韓服)으로서의 치마의 종류이고, 수많은 우리들 선대여성들의 애환(哀歡)이 서려있는 치마이기도 하다.
월남치마
그러나 유구(悠久)한 전통을 가진 이들 치마도 196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대신 이름도 모를 수많은 양장치마가 줄을 이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에 그 당시 윤 모 여가수가 미국(美國)에 다녀오면서 허벅지를 다 드러내 놓아 벌거벗은 듯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한 때를 시작으로 ‘양장치마’가 도입 되면서부터 모양과 형태에 따른 치마의 종류는 더 이상 나열(羅列)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미니스커트

말이 나온 김에 요즘 여성들이 입는 스커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모양과 개요(槪要)를 게시해 본다.
스커트의 종류

타이트 스커트

지금은 이토록 다양한 스커트가 거의 모든 여성들의 예쁜 몸매를 장식(裝飾)하고 있지만, 옛적 가난한 서민여성(庶民女性)들의 치마는 너무나 볼품이 없었다.
그 시절 우리들 어머니들께서 입으시던 치마는 몇 번씩이나 헤진 곳을 바느질로 깁고, 검정 물을 들인 ‘미영베치마’, ‘삼베치마’가 아니면, ‘광목치마’였다.
속치마

‘겉치마’의 남루함으로 미루어 보아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한 겨울 추위에도 따뜻한 ‘속치마’ 하나 변변히 입어 보지 못하셨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남루한 ‘홑치마’는 아늑한 우리들의 바람막이가 되기도 했고, 견고(堅固)한 방패가 되기도 했었다.
핏덩이 갓난애 시절에는 그 치마폭으로 온 몸을 감싸서 냉기(冷氣)와 온기를 가려 주었고, 아장아장 발자국을 떼며 앞마당에서 노닐다 청개구리라도 만나 무서움에 떨 때면 얼른 그 치마폭에 숨어 화를 면해 보려 했었다.
어머니의 치마
칼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 십리 먼 길 학교에라도 다녀 올 때면 어느새 어머니의 치맛자락은 금방 얼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포근히 감싸 녹여 주었고. 고뿔이라도 걸려 콧물을 훌지럭 거릴라치면, 치마 폭 훌렁 걷어 콧물을 훔쳐 주기도 하셨다.
탐나는 물건이 있어 욕심(慾心)이 생길 때에는 치맛말기가 벗겨질 정도로 매달리면 뭐든지 해결(解決)되기도 했었고, 엄하신 아버지의 불호령 앞에서는 어머니의 치맛자락 만큼 견고하고 든든한 방패(防牌)도 없었다.
열두 폭 치맛자락
그러나 어머니의 그 치마폭에 싸여 그 은혜(恩惠)로 잔뼈가 굵어 왔으면서도 우리들의 거의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제 스스로 자란 줄만 알았다. 여기에서 다시 김종상의 ‘어머니 무명치마’를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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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무명치마
김종상
구름 넘어 고향 두고 그리움을 앓던 나날
어머니 무명치마는 구비구비 푸른 산자락
언제나 내가 쉴 곳은 거기 두고 있었네
괴로움의 그늘에도 즐거움을 기르시고
미움도 어루만져 사랑으로 가꾸시는
어머니 높은 산맥에 나 하나는 무얼까
때로는 바람 맞고 눈비에 지친 날에도
그 품에 깃을 풀면 꽃이고 잎이었지만
끝내 그 높은 뜻은 헤아리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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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무명치마

‘비로드’ 얘기로 돌아간다. 필자가 수도권(首都圈) 변두리의 허름한 대학원석사과정(碩士課程)을 졸업할 때였다. 졸업식(卒業式) 날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 시간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지도교수님이 기다리는 강의실(講義室)에 들려 졸업장을 받았다.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전해주신 졸업장(卒業狀)은 뜻밖에 부드럽고 붉은 고급 ‘비로드’의 하드 양장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비로드’ 양장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으니 졸업의 기쁨과 교수(敎授)님께 감사하다는 생각보다 먼저 젊은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로드 졸업장

농삿일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을 보살피며 ‘가람옷’ 한 벌 제대로 없었던 어머니께서 어느 날 부산(釜山) 에 시시던 이모님에게서 ‘비로드’ 옷감 한 감을 선물로 받으셨다.
위로는 엄격하기 이를 데 없었던 시부모(媤父母)에 아버님과 형제들을 위해 밤낮으로 농사짓고 빨래하며, 밥하던 가난한 촌부(村婦)에게 이런 귀한 옷감을 언감 생각이나 하셨을까.
농사일에 파묻힌 어머니

‘비로드’ 옷감은 그 시절 최고급(最高級)으로 유행하던 때였으니 단연 집안과 가난한 온 동네의 화제(話題)가 되기도 했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당시의 ‘비로드’치마 한 감은 그 당시 대학(大學)의 한 학기 등록금(登錄金)을 뛰어넘는 25만 환이나 되었다.
그 ‘비로드’ 옷감은 며칠 되지 않아 곧바로 고운 감색 한복(韓服)으로 바뀌었고, 이웃집 아주머니들 앞에서 입어보이며, 옷맵시를 뽐내던 모습은 필자가 기억(記憶)할 수 있는 어머니의 가장 젊었던 모습이었고 행복한 한 때였다.
비로드 치마

그러나 그 옷을 입고 매일 호강할 것 같았던 생각도 잠시뿐, 아끼신다며 고이 장롱(欌籠)에 넣어 두시고, 정작 그 옷을 입고 외출하시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계절(季節)이 바뀔 때마다 시어른들의 동정을 갈아 드리면서, 정작 당신의 고운 ‘비로드’ 한복(韓服)의 동정은 바꾸어 달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시절 월남치마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들도 월남치마를 집에 갖고 가서 아내에게 입혔다)
자식이 많아서 기쁜 일이 많아야 했건만 평생의 짐처럼 얹혀살았고, 시부모(媤父母)와 자식들의 바라지만 하고 사시느라 정작 늙어 가신 어머니는 한 시름으로 평생을 보내셨던 것이다.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봉양(奉養)하셨고, 층층이 6형제를 하나 둘 출가(出家)시키고, 말년에 아버님의 병수발을 들다 손수 저 세상으로 보내셨으며, 결국 당신까지도 병마(病魔)에 시달리며 일생동안 호의호식(好衣好食) 한 번 제대로 못하시고 고생만 해 오신 것이다.
비로드 양장 치마

그런 어머니에게 그 때의 그 ‘비로드’ 옷을 입으시고, 그토록 행복(幸福)해 하시던 환한 웃음을 찾아 드려야겠다는 생각은 왜 한 번 제대로 못했는지 그 시절 그 ‘비로드’ 졸업장(卒業狀)은 비수가 되어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다가왔었다.
여기에서 다시 그 시절 어머니의 까만 ‘비로드치마’를 연상(聯想)하는 김연곤의 ‘바람 속에는’을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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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에는
김 연 곤
훈훈한 봄바람 속에는
만경 뻘 뚝길을
걸어가며 휘날리는
여인의 까만 ‘비로드’ 치맛자락이
들어있다.
시원한 여름바람 속에는
좁다란 마당 빨랫줄 위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돌배기 아들놈의 무명 기저귀들이
들어있다.
서늘한 가을바람 속에는
토요일 오후의 텅 빈 교정 위를
데굴데굴 굴러가는
샛노란 고목나무 은행잎들이
들어있다.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는
유리판처럼 푸른 창공을
색색으로 수놓는
방패연 가오리연 등의 향연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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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밤낮 없이 입으셨던 그 시절 치마들의 정취(情趣)가 사라진 세태가 너무나 아쉽고 그리워 그 시절을 함께 살아온 필자의 눈에 비쳤던 어머니의 치마를 다시 한 번 예찬(禮讚)하며 파일을 덮을까 한다.
비로드 미니스커트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인종(人種)의 무리가 많은 나라를 이루고 살고 있지만, 여성(女性)들은 대개 치마를 즐겨 입는다. 왜 여자들은 옛 부터 치마를 입어왔을까.
필자는 치마를 입은 여성을 보면 제일먼저 어머니가 떠올려진다.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는 언제나 검정 물을 들인 ‘미영베(무명)치마’를 입으셨는데, 시골아이라서 숫기가 없었던 필자는 낮선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부끄러워서 언제나 어머니 치마 뒤에 숨곤 했었다.
치마 뒤에 숨는 아이

이웃 형에게 얻어맞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 때도 어머니는 치마 자락으로 닦아 주고, 감싸주시며 달래주시곤 했었다.
앞 동네로 ‘마실’ 가신 아버지를 기다리는 별빛이 총총한 밤, 툇마루에 앉아 아들아이들을 양 무릎에 누이고, 당신의 치맛자락으로 덮어주며 자장가나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던 때도 그 ‘미영베’ 긴치마였다.
자장가 불러주시는 어머니

아들자식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百方)으로 다니던 중 눈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낫선 읍내(邑內) 버스대합실 ‘쪽의자’에 아들을 누이고, 치마폭으로 덮어 잠들게 하고 당신은 긴 밤을 앉아서 새우셨던 어머니의 그 시절 ‘미영베’ 긴치마는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시절 어머니들의 한복(韓服) 치마는 열두 폭이라고 했을 만치 넉넉한 폭과 길이로 만들어 여인의 전신(全身)을 감싸고 남을 만 했었다.
엄마 무릎에 잠든 아이

서양(西洋)의 드레스도 길이는 길지만, 폭은 그리 넓지는 않을 것이다. 여인의 긴 치맛자락은 부드러움과 정감(情感)이 넘치는 마음과도 같아 섬세한 행동과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포근한 심성(心性)이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아니면 평생 두세 번 입어보는 한복에서만 연출(演出) 될 뿐 생활하기 간편(簡便)한 바지나 손수건만한 치마에 떠밀려 사리지고 있다.
열두 폭 치맛자락
정인(情人)의 열 두 폭치마자락에 자연의 풍광과 연모(戀慕)의 글을 붓 가는 대로 써내려갔던 옛 문인들의 멋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여자의 치마길이가 짧아진다는 속설(俗說)에 묻혀 사라지고 없어졌다.
짧은치마에는 여유도 없고 후덕(厚德)함도 없다. 급하고 각박(刻薄)해진다. 그리고 긴 치마가 없는 지금의 어머니들에게는 그늘이 없어 어린자식들이 비집고 들어 갈만한 안식처(安息處) 자체가 없다.
지금의 스커트

아이들의 바람막이도 안 되는 짧은치마나 바지는 어린아이를 포근하게 덮어줄 수 없어 그 치마를 입은 엄마의 마음도 빈약(貧弱)하기 이를 데 없다. 어린자식의 콩닥이는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가려줄 어머니의 여유(餘裕)가 없기 때문이다.
배가 아프다면 배를 쓰다듬어주고, 머리가 아프다면 머리를 만져주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빨리 병원(病院)에 보내고, 배가 고프다면 빵 사먹으라고 천원짜리 한 장 던져주고, 놀고 싶으면 게임방이나 TV 보라고 하면 된다.
아이들에게도 용돈이나 많이 주고 커서는 재산(財産)이나 많이 물려주면 잘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죽기 살기로 돈벌이에만 매달린다.
자장가 불러주는 엄마

어린자식을 무릎에 누이고 자신의 치마 자락으로 덮어주며, 볼록한 배를 따듯한 손으로 쓰다듬고 어루만져주면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시절 어머니의 모습은 이제 정말 옛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얘기가 되어버렸다.
세상살이 조금은 나아져 윤택(潤澤)하게 산다고는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월같이 치마폭이 좁아지고, 치맛자락이 짧아진 지금의 어머니들은 언제나 바쁘기만 하다.
입시(入試)만을 위주로 공부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메마른 정서(情緖)와 부족한 애정을 채우지 못한 가슴에 공부로 채워 넣어야 하는 아이들은 오늘도 남부럽지 않은 풍요(豊饒) 속에서도 허기를 느끼며 소란과 소음(騷音) 속에 고독을 씹으며 외롭게 자라고 있다.
지금의 몽당치마

(아무리 뜯어 봐도 아기가 파묻히거나, 아기를 덮어 줄 치맛자락
자체가 없다. 제 것도 제대로 가리지를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배경음악은 한풀 간 대중가요(大衆歌謠)이긴 하나,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을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오늘은 경음악으로 들어본다.
낙동강 강바람에 치마폭을 흩날리며, 군인 간 오라버니 대신 늙으신 부모님 모시고 살아가는 처녀 뱃사공의 억척스런 모습에서 그 시절 우리들 어머니들의 잔영(殘影)을 함께 그려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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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뱃사공
노래 : 황정자
작사 : 윤부길
작곡 : 한복남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 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낙동강 강바람에 앞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어머님 그 말씀이 수줍어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낙동강 강바람이 내 얼굴을 만지면
공연히 내 얼굴은 붉어만져요
여학생들이 웃으며 서양말로 소근거리면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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