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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에 얽힌얘기]외동읍 사투리 ‘도리구찌’ 에 얽힌 사연들

작성자이용우(괘릉, 영지/외중 7회)|작성시간09.08.15|조회수2,679 목록 댓글 2

 

 

 

 

 

 

 

 

외동읍 사투리도리구찌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도리구찌’라는 말이 있었다. 흔히들 경상도사투리로 알고 있으나, 우리말도 경상도사투리도 아닌 일본말이다. 그리고 ‘도리구찌’는 ‘도리우찌’가 경상도지방에 전해지면서 잘못 변형된 말이다. 이하에서는 고유명사적 용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도리우찌’로 통일한다.

 

 

 

 

도리우찌

 

 

 

 

 

 

일본어 ‘도리우찌(とりうち ; 鳥打)’는 ‘도리우찌 보우(とりうちぼう ; 鳥打帽)’의 준말로 모자의 앞창이 새의 ‘부리’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된 명칭이다. 영어로는 ‘헌팅캡(hunting cap)’이라고 하며, 일본에 들어오면서 모자의 모양을 따라 ‘도리우찌(鳥打 또는 鳥撃)’라고 바꾼 말이다.

 

이를 우리말로 바꾸면 ‘새잡이 사냥꾼의 모자’라는 뜻이 된다. 이를 줄인 말로 다듬는다면 영어의 ‘hunting cap’과 같이 ‘사냥모자’라는 뜻으로 되돌아 온다.

 

 

 

 

새 주둥이 같은 ‘도리우찌’의 앞창

 

 

 

('오리주둥이' 비슷하게 생겼다)

 

 

 

 

 

그런데 이 모자의 이름은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용도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일정(日政) 때 악질적인 고등계(高等係) 형사(刑事)나 그 하수인인 정보원들을 ‘도리구찌(도리우찌)’라 이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고등계(지금의 정보과) 형사들이 ‘도리우찌’를 쓰고 다녔기 때문에 이들의 별명(別名)을 ‘도리구찌’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형사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소위 ‘형사끄나풀’이라는 조선인(朝鮮人) 보조원들도 이 모자를 쓰고 다니며, 조선인들을 괴롭혔다 해서 그들도 함께 ‘도리구찌’라고 불렀다.

 

이들이 ‘도리우찌’를 쓴 것은 이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면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언행을 예리(銳利)하게 감시하고 관찰(觀察)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리구찌

 

 

 

 

 

또 다른 이름은 ‘개똥모자’라는 것이었다. 검정색 계통 ‘도리우찌’의 경우 벗어서 탁자위에 놓으면, 커다란 ‘개똥무더기’ 같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당시 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일본인 형사들과 조선인 보조원(補助員)들이 워낙 ‘개똥같은 인간’들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개’ 같은 인간들이 쓰고 다니니 ‘개똥모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교묘하게도 이 ‘개똥모자’를 해방이후 북한(北韓) 공산정권의 충성분자들인 노동당(勞動黨) 간부들이 쓰고 다닌 경우가 많았는데, 필자는 아직까지 그 연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저들 역시 반동분자(反動分子)들에 대한 감시 관찰의 용이성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개똥 모자(겨울용 가죽 도리우찌)

 

 

 

 

 

 

얘기가 나왔으니 당시 경주지방에서 일제(日帝)에 빌붙어 고등계 형사를 지낸 악질 ‘도리구찌’ 두어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외동읍의 바로 이웃인 울산(蔚山) 출신이고, 한 사람은 경주읍내(慶州邑內) 사람이었다.

 

먼저 울산출신 ‘도리구찌’ 노덕술(盧德述, 1899∼?)을 소개한다. 노덕술은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로 대표적인 친일파(親日派) 인물이었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현 울산시의 두동면은 당시의 경주부(慶州府) 외남면(外南面)이었다. 그 당시는 경주시란 뜻이다. 그의 일생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고등계 형사 노덕술

 

 

 

 (왼쪽 첫번째)

 

 

 

 

 

그는 울산보통학교(蔚山普通學校) 2년을 중퇴한 뒤 울산에서 일본인(松垣米作)이 경영하던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주인의 추천을 받아 일본 홋카이도에 취직하려 단신으로 도일(渡日)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귀국하고 말았다.

 

귀국한 그 해 역시 주인의 추천으로 경찰관을 지원하여 경남순사교습소(慶南巡査敎習所)를 졸업한 뒤 경상남도 경찰부(警察部) 보안과를 거쳐, 그의 고향인 울산경찰서 사법계에 근무하였다.

 

이어 이 경찰서 순사부장(巡査部長)을 거쳐 1924년 12월에는 경부보(警部補 ; 지금의 경감)에 승진하고 의령·김해·거창 등 각 경찰서(警察署) 사법주임(司法主任)을 역임하였다.

 

1928년 9월 통영경찰서 사법주임에 전근되어 경부(警部)에 승진하여 서울 본정(本町:현재의 명동)·인천·개성·종로 등 각 경찰서 사법주임을 역임했으며, 1934년 9월에는 평안남도 수송보안과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27년간 고등계(高等係) 사무에 속하는 사상관계 사건을 취급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훈7등 종7위의 훈장을 받았다. 그는 특히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에게 혹독한 고문(拷問)을 일삼아 악명이 높았다.

 

해방 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搜査課長)을 역임한 뒤 1949년 1월 24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라 한다)’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될 당시에는 서울시 경찰국 정직(停職) 총경이었다.

 

 

 

 

일경(日警)의 독립투사 고문

 

 

 

 

 

 

그러나 반민족 행위자의 처벌보다는 멸공과 치안을 중시하였던 당시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국회 반민특위위원장이던 김상덕(金尙德) 등을 불러 그의 석방을 종용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결혼 당시 모습) 

 

 

 

 

 

 

그러나 당시 노덕술은 이른바 수도청 고문치사사건(拷問致死事件)으로 수배를 받아왔으며, 그의 체포를 계기로 또 다른 음모사건이 폭로되기 시작하던 중이었다.

 

즉, 일경(日警) 출신 경찰간부 수 명이 항일(抗日) 테러리스트 백민태(白民泰)를 시켜 반민특위 소속 요원을 암살하려던 사건인데 이 사건에 노덕술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未遂)에 그치고 말았다.

 

이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은 이 사건의 하수인인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하여 그 음모를 모두 폭로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국회(國會)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은 범법자로서의 노덕술의 석방요구는 법률위반이라며, 대통령의 석방요청을 거부했다.

 

 

 

 

국회 반민특위 회의광경

 

 

 

 

 

 

그러나 노덕술은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주선으로 옥에서 풀려났고 4·19혁명 뒤에는 민의원(民議院)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왜 일제(日帝)의 고등계형사이자 독립투사들에 대한 고문기술자였던 노덕술을 그토록 비호하고 석방시키려 했을까. 국가기록원(國家記錄院)의 기록을 살펴보자.

 

1949년 1월 28일 국무회의록(國務會議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가 보증’을 해서라도 친일경찰 노덕술을 석방하라고 지시했고, 같은 해 2월 11일 국무회의록에는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反民特委) 관계자를 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지시하기까지 했다.

 

1949년 2월 9일에는 대통령이 정책당국자(政策當局者)에게 직접 지시하는 ‘의명친전(依命親傳)’ 형식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反民法) 제5조 해당자인 정부 안 친일파를 비밀히 조사해서 선처하라는 통첩을 내린다.

 

여기에서 말하는 반민법(反民法) 제5조 해당자란 “일본 치하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公訴時效)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고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반민법(反民法) 제5조 해당자들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취약한 권력기반을 떠받치고 있던 친일 헌병·경찰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반민특위에 잇따라 체포되는 걸 보고 이대통령은 상당한 정치적(政治的)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서울시 시경국장(市警局長)으로 노덕술의 후견인인 고문왕 김태선과 전 수도청장(首都廳長) 장택상은 뛰어난 고문 기술자에다가 좌익세력 색출에 남다른 ‘기술’을 보유한 노덕술이 경찰로서는 꼭 필요하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이 체포당한 지 이틀 만에 반민특위 위원들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의 석방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1949년 2월 2일과 15일 두 차례 담화(談話)를 발표한다.

 

담화의 주요 내용은 “경찰의 기술자들을 아직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며, 따라서 기왕에 반공투쟁(反共鬪爭)이 격렬할 때에 경찰기술자들이 직책을 다하여 치안에 공효가 많을 때에는 장공속죄한다는 성명이 여러 번 있었으므로…… 조사위원들은 신중히 조처하라”는 것이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일제로부터 독립한 신생 대한민국의 대통령(大統領)이 어떻게 일제의 고등계형사로 수많은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을 고문하고 잡아가둔 매국노적 친일경찰을 풀어주기 위해 이렇듯 안달을 할 수 있었는지 기가 막힐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은 경북 경찰부(警察部) 고등계 형사로서 가장 악명 높았던 당시의 경주읍(慶州邑) 출신 ‘도리구찌’ 서영출(徐永出 ; 1906-1975)과 관련한 얘기다.

 

서영출은 경북 경찰부(警察部) 고등계 형사와 경주경찰서장(慶州警察署長)을 역임한 친일경찰의 표본이었다.

 

그는 1943년 ‘동아흥산사 사건’, 1944년 미국 라디오 방송 청취를 통해 일제의 패망에 대비해 건국을 준비하다 적발된 ‘원대동 사건’, 1945년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면서 신사 건물을 파괴한 종교단체 ‘시온산 사건’ 등을 일으키며 각종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체포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에게 ‘비행기 고문’, ‘잠수함 고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가해 그 휴유증(後遺症)으로 사망하는 자가 속출할 정도로 고문을 가하던 고문기술자였다. 그는 이런 악명으로 인해 ‘귀신 잡는 경부(警部)’로 알려지기도 했었다.

 

 

 

 

독립투사 전기고문

 

 

 

 

 

 

우리들의 고향 경주지방에서 악질 고등계(高等係) 형사들이 많았던 이유는 우리들의 고향에 친일인사(親日人士)들이 그만큼 많았던 탓이라고 본다. 친일인사들끼리 일제에 대한 충성경쟁이 다른 지방보다 월등하게 촉진되었기 때문이다.

 

 

 

 

독립투사 물고문

 

 

 

 

영남지역의 친일파로 대표되는 인물은 박중양(朴重陽 ; 경상북도 관찰사 출신), 문명기(文明琦), 서병조(徐丙朝), 장직상(張稷相)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장직상(張稷相, 일본식 이름 : 張元稷相, 1883년 ~ 1947년)은 구한말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으로, 관찰사 장승원의 아들이며 우리나라 초대 수도경찰청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張澤相)의 둘째형이었다.

 

이들은 막강한 경제력(經濟力)을 이용하여 일제에 충성하면서, 자신들의 영혼을 일제에 팔아넘긴 민족반역자(民族反逆者)들이었다.

 

 

 

독립투사 처단

 

 

 

 

 

 

 

진짜 ‘도리우찌’ 얘기로 돌아간다. 한 가지 아니러니 한 것은 당시의 경우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려면 일본 순사복장(巡査服裝)을 하라는 말이 은연중 회자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복형사(私服刑事) 차림을 말한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제 때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의 사진을 보면 거의가 한복(韓服)에 두루마기 차림이 아니고, 언제나 일본 사람들이 즐겨 입는 복장이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모자도 주로 일본형사(日本刑事)들이 쓰고 다닌 ‘새 주둥이 모자(도리우찌)’를 썼고, 바지는 무릎 밑으로 조여서 단추를 잠근 ‘닭다리 바지(단고쓰봉, 당꼬쓰봉)’를 주로 입었다. 이런 복장을 하고 있으면, 불심검문(不審檢問)이나 조사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도리우찌 차림 독립군

 

 

 

 (러시아지역 독립군으로 모두 '나까오리'와 '도리우찌'를 쓰고

있다. 만주나 국내 침투시 일본인으로 오인케 하여 가급적이면

일본 경찰이나 정보원의 불심검문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옛적에는 또 ‘도리우찌’가 젊은 청년층(靑年層)에 있어 엄청난 매력일 때도 있었다. ‘도리우찌’를 뒤로 제껴쓰고 두루마기를 걸치고, 명주 ‘마후라’를 뒤로 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일부러 극장 앞에 세워두고 권연(捲煙 ; 담배) 한대를 쭉 피워 물고 있으면, 극장구경을 마치고 나오던 동네 처녀들이 침을 질 질 흘린 정도였다고 한다.

 

 

 

 

‘도리우찌’와 자전거와 아가씨들

 

 

 

 

 

 

‘도리구찌’와 ‘도리우찌’에 대한 밑천이 짧아 별로 어울리지는 않지만, 박은규가 쓴 동시 ‘빵모자’를 감상하면서 파일을 접는다.

 

왜놈들의 행패가 너무나 자심했던 그 시절을 잊기 위해 광복군 노래를 게재하여 감상한다.

 

 

 

 

 

 

 

 

 

빵모자

 

 

 

박은규

 

 

 

빵집 아저씨는 요술쟁이

커다란 모자 쓰고

빵을 만든다.

네모난 빵

동그란 빵

곰보빵

어디에서 왔을까?

그속에서 나왔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산타 할아버지

이 다음 선물은

빵모자로 주세요.

 

 

 

 

 

 

 

 

 

 

 

 

 

 

 

 

 

 

 

 

 

 

 

음악은 표시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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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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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우희곤 (우삿갓) | 작성시간 09.08.16 몰랐던 숨은 얘기가 많군요....최소한 소극적인 참여정도는 용서될수 있겠으나...적극적으로 일제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맞을 것이고....더구나 완장 하나 찾다고 더 날뛴 사람들은 가만 두면 안되겠지요....이대통령이 왜 그랬는지...정치적 상황과..국제 정세상...혹시 빨갱이 떼려 잡는데 필요했는지....알수 없으나....역사는 그렇게 기록되지 못한 진실들이 많이 묻혀져 있는거 같아요...좋은 자료 잘 보고 옛 애국자님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나 공감하고 갑니다. 저희들은 정말 너무 편하게 살아온거 같아서....역사 앞에서는 언제나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 작성자신용태 | 작성시간 09.08.29 그당시 그사람들이 고급 정보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활용할수 밖에 없엇지요.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 도리구찌가 형사로만 알앗지 그런 악당들인줄 몰랏지요, 그시절이 지나서는 그차림이 사냥꾼의 정식 차림인줄 알앗고 그모습이 멋있게도 보엿지요,..도리구찌 쓰고, 당꼬바지에 와라지 신고 엽총을 어깨에 걸치고 사냥개 몰고 가는 그모습이 부럽기도 했고,...요즘은 또 예술가들이 즐겨 쓰는걸 보았는데,...꼭지가 달린 빵모자도 화가들의 전유물 갇기도 하고,...암튼 제밋는 역사를 읽었읍니다,,.선배님의 수고로 제밋게 잘 보고 있읍니다, 항상 건강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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