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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2. 영해박씨(寧海朴氏)

작성자삼 형제|작성시간10.12.07|조회수62 목록 댓글 0

192. 영해박씨(寧海朴氏)

【시조】박제상(朴堤上)

【인구】25,189명 (2000년 현재)

【주요파】▲보은파 ▲서천파 ▲옥천파 ▲회인파 ▲예산파 ▲안동태파 ▲봉화파 ▲안동파 ▲안동시파 ▲양동파

▲간성파 ▲영해파 ▲울진파 ▲진보파 ▲영양파 ▲금화파 ▲양구파 ▲고성파 ▲회양파 ▲통천파 ▲백천파 ▲용인파

▲문천파 ▲부천파 ▲곽산파 ▲지평파 ▲길주파 ▲덕원파

 

 

 영해박씨는 신라 5대 파사왕의 후손이다.

눌지왕 때의 이름난 충신 박제상을 시조로 한다.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9세손인 갈문왕의 손자다. 따라서 신라박씨에서 분관된 것이다.

시조의 26세손인 박명천이 고려 때 공신으로 영해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영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영해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의 지명이다.

 

박제상이 벼슬에 오르던 눌지왕 시절 신라는 약소국가였다.

그래서 왕의 두 아우인 복호와 미사흔이 각각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417년 박제상은 단신으로 고구려 장수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구출한다.

이어 정치적인 망명객을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포로가 된다.

일본 왕이 그를 회유하자 "왜의 신하가 되느니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되겠다"며 충절을 지키다 불에 타 죽는다.

한편 그의 부인 김씨는 두 딸과 함께 동해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다.

그녀의 넋은 새가 되어 남편의 넋을 고국으로 모시고 왔다고 전해진다.

민요 "강강수월래"는 당시 "김씨가 남편을 기다리며 불렀던 구슬픈 노래"라고 영해박씨 문중은 주장한다.

그녀의 수심가 "간간수월래(看看水越來…보아도 보아도 물만 넘쳐 흐른다…임은 오지 않고)가

오늘날 강강수월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박제상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가 바로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百結)선생이다.

백결의 이름은 박문량이다.

벼슬을 마다하고 청빈하게 살았던 그는 너무 가난해서 옷을 겹겹이 기워 입었기에 백결선생이라 했다.

어느 해 섣달 그믐께 이웃집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가 나자 그의 아내가 시름에 잠겼다.

이때 백결은 거문고로 방아찧는 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한다.  세상사람들은 이를 방아타령이라 했다.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박헌영
지주의 서자로 태어나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 같은 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국내침투를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했고,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25년 4월 17일 김약수·김재봉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어 공산당을 조직했고, 18일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해 책임비서를 맡아 조직활동을 전개하다가 구속되었다.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1928년 소련으로 탈출했다. 1929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교육을 받은 후 1932년 12월 상하이로 돌아와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하다 1933년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국내로 압송,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1939년 출옥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한 조직인 '경성콤그룹'의 책임자로 추대되었다. 1940~41년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당 재건에 실패하자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에 있는 벽돌공장의 인부로 위장해 은신하던 중 8·15해방을 맞이했다.
8·15해방직후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여 장안파와 재건파를 통합하여 조선공산당 중앙기구를 구성, 당 책임비서가 되었고,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연합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자 10월 23일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참여했으나 친일세력의 처리문제로 탈퇴했다. 1946년 2월 남한 좌익세력의 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여운형·허헌·김원봉·백남운 등과 함께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1946년 9월 남한을 탈출, 입북하여 1946년 11월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의 부위원장을 맡아 당을 지도하면서 금강정치학원에서 남파간첩을양성했다.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1950년 남조선노동당의 핵심인물인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어 활동이 현저히 약화되자 운동의 주도권을 북조선노동당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결국 1953년 김일성에 의해 이승엽 등이 체포·기소되고, 이후 주도권을 완전히상실한 채 1955년 '미제의스파이'라는 죄목으로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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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한국참풍수지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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