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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재난(전 10:5-7) 42강

작성자프토코스|작성시간26.06.07|조회수2 목록 댓글 0

42 세상의 재난(전 10:5-7)

 

5.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 6.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들을 얻고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7.또 내가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종들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5절에 보면 재난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재난이라고 하면 생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주는 그런 사고나 자연재해 등을 떠올리겠지요. 며칠 전에(6년 전 설교입니다) 백두산이라는 영화가 개봉이 되었는데 영화처럼 화산이 폭발해서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우리가 재난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전도자는 재난이라고 말할 것도 없는 사소하고 가볍게 보이는 그런 일을 가지고 유난을 떠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주권자의 허물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재난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권자는 왕을 말하죠. 왕의 허물과 잘못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왕의 허물이 재난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을 보면 주권자의 허물이 그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5.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 6.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들을 얻고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주권자의 허물로 언급 되는 것이 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는다는 것과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주권자에게 나오는 허물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7.또 내가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종들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종들이 말을 타고 고관들은 종들처럼 땅을 걸어 다닌다고 하는데 마치 신분이 뒤바뀐 것 같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그런 것들을 주권자의 허물로 인한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것을 해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재난이라고 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죠.

 

그러니까 우매한 자가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 것을 왜 주권자의 허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보아도 주권자 왕의 허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치판이나 어디나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신분이 뒤바뀐 것 같은 본문 내용들을 오히려 세상이 바뀐 바람직한 일로 개혁되었다고 비칠 수가 있지요. 종이 말을 타고 고관들이 걸어다닌다. 마치 세상에서 정의가 실현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런 사람들에게 세상이 뒤바뀌어야 돼. 약자들이 너무 고통을 받으니 뒤바뀌어야 돼.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만약에 왕으로 인해서 종이 말을 타고 고관이 걸어다니는 이런 세상이 되었다면 허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왕이라고 말하겠지요. 세상을 변화시킨 왕이라고 우리가 볼 수가 있겠지요.

 

사람들의 심리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부자로 살지 못하면 부자들이 많이 누리는 복을 보기 싫어합니다. 내가 낮은 자리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을 누리는 것도 보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관용차를 개인적으로 사용한다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하죠. 그래서 부자나 고관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교도소에 갇히고 재판 받고 낮아지는 것을 보면 심리적으로 기뻐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우매한 자가 높은 지위를 얻게 되고 부자가 낮아진다고 해서 세상이 정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세상은 세상 그대로입니다. 우매한 자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또 부자가 낮아진다고 해도 여전히 세상에는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따져보면 우매한 자가 높은 지위에 앉는 것이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높은 지위에 앉는 것이 세상에 재난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높아지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낮아지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 된 것으로 보는 그런 시각들도 사실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고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대게 시비를 거는 대상이 큰 대형교회를 대상으로 합니다. 지방에 조그마한 교회는 관심도 없습니다. 작은 교회보다 대형교회가 바르게 되는 것이 기독교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오히려 작은 교회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죠. 결국 개혁을 외치면서 대형교회를 바라보고 너희들 이런 것들을 고치라고 하면서 오히려 큰 교회 작은 교회를 차별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형교회가 개혁이 되어야 하고 그런 교회의 세습을 반대하고 그러는 것들이 대형교회를 오히려 높여주고 있는 것이 됩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영향력 있는 교회이니까 바꾸어져야 된다고 하는 것들이 오히려 그들을 높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되고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정치 개혁과 경제 체제가 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 많은데 그들을 진보라고 하죠. 경제 개혁을 외치는 것도 가난한 사람도 잘살게 하자는 것이죠. 지금의 경제 체제로는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게 되니까 바꾸어 보자는 겁니다. 그게 마치 종들이 말을 타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것과 같은 말이 되죠. 정치를 개혁하자는 것도 우매한 자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그런 공평한 기회를 주자는 그런 취지가 있는 것이죠.

 

낮은 자리는 높아지고 높은 자리는 낮아지라는 그런 발상이 있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부자는 낮아지고 높은 자리에 있는 자는 걸어 다니게 하고 그런 것으로 비추어질 수가 있는 거죠. 그런 개혁이 상대적으로 낮은 자리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희망적으로 들리죠. 그러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들이 낮아지게 되는 민감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충돌이 생기는 거죠. 보수와 진보가 충돌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쪽에서는 지금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것이고 진보는 자기 이념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그런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주권자 왕이라는 것도 무언가 개혁적인 사람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매한 자가 높은 지위에 앉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으며 종은 말을 타고 고관은 걸어 다니는 이런 정상적이 아닌 거꾸로 흘러가는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현실이 부당하니까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다른 현실로 바꾸어보려고 하는 개혁을 실현하는 왕이 아닐까 주권자가 등장하는 그런 시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왕의 생각이 바르다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르고 정의이며 공평일까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이죠. 전도자는 그런 것을 주권자에게 나오는 허물이라고 합니다. 그 허물을 보고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허물을 재난이라고 합니다. 이게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우리가 볼 때 왕 같은 왕이고 개혁적인 왕인데 주권자의 허물이라고 하고 그것을 재난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권자에게서 허물이 나온다고 하니까 악한 자로 이해하기가 쉽죠. 개혁을 이룬 그런 주권자라면 그것을 두고 주권자의 허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더군다나 재난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히려 칭송 받을 수 있는 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주권자의 허물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그런 문제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성경에서 늘 벗어나게 됩니다. 성경 안에서 이야기하는 허물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이 말세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말을 많이 하죠. 또 교회를 향해서 교회가 참 많이 타락했다고도 이야기 합니다. 교회가 자기들 건물만 크게 짓고 세상을 위해서는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비판을 하죠. 교회가 썩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사람은 믿음이 바르고 성경을 아는 사람인가 보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저는 교회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고 해서 목사가 권위를 내세우거나 세습을 하거나 이런 것에 비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믿음이 바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누구를 비판하든 비난하든 그 비판과 비난 속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썩었다고 비판할 때 나도 썩었다는 것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 교회가 썩었다고 하는 것은 나는 안 썩었는데 너희가 썩었다는 이 차원이죠. 그게 잘못된 것이고 그게 허물입니다.

 

그 허물이 심판에 이르게 합니다. 나는 썩지 않았다고 하는 관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상실하게 하는 거죠. 그게 허물이 되고 재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비판하려고 하면 내가 비판 받아야 할 대상이고 교회가 부패했다고 하려면 내가 부패한 자로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위 교회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하는 사람들입니다. 난 믿음이 있고 심판 받지 않게 바르게 복음대로 살고 있는데 너희가 다 엉망이라고 하는 이런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바로 그런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보지 못하는 이런 인간의 속성이 지옥에 해당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보지 못하고 교회의 부패만 외치는 사람에게 구원되지 못하는 허물과 재난이 되는 겁니다.

 

지진 같은 재난이 아니고 나를 구원 받지 못하게 하는 그게 그 사람에게 재난입니다. 왕이 개혁을 해서 낮은 자가 높은 지위에 앉게 되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게 되며 종이 말을 타고 고관이 걸어 다니게 되는 그런 나라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런 것들이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나라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나라이죠. 그렇게 이상적인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도 개혁자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개혁자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세상을 바꾸는 개혁자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 계층의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활동하신 개혁자라고 하는 것이죠. 그들은 믿음의 목표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이들이 모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몰라요.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개혁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이 말을 보면 아모스가 마치 개혁적인 선지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모스가 말하는 공의와 정의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해방 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는 것 높은 데에서 끌어내려 낮은 자리에 앉게 하고 이런 것을 하나님의 정의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의로 오신 예수의 피가 세상을 덮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서 강자나 약자가 없이 모두가 죄인으로 서게 되는 것이 정의 실현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힘으로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실현시키겠다고 하고 이루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하는 허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자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죄 있는 자로 용서 받지 못한 자로 심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개혁을 외치면서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 허물이고 재난이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불의를 보지 못하는 것이 크나큰 재난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말하고 별 것 다 이야기 한다고 할지라도 결정적으로 자신의 불의를 보지 못하는 것이 허물이고 재난입니다.

 

교회에 그 어떤 열심을 다 쏟아 붓는다 해도 자신의 불의를 보지 못한다면 허물이고 재난입니다. 목사나 그 어떤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세상의 개혁을 외치고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데모를 하든 다 좋은데 그것을 가지고 제발 믿음과 하나님의 정의로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세습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또 목사들이 그것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데 무엇을 하든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와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정의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인데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죠. 피켓 들고 시위하는 당신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만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 이념이나 신념과 버무려서 내 것으로 늘 만들어내는 허물을 보이면서 그게 자신의 허물과 재난이라는 것을 눈치를 못채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참 어리석은 모습들이죠.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여러분이 정말 신자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상한 심령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가볍게 여기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구하시는 것이지 교회를 개혁하고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데 열정을 다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은 개혁자의 편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상한 심령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허물이고 재난이라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 아니라 떳떳한 심령으로 임하는 것이 허물이고 재난입니다. 세상의 재난이야 몸이 다치거나 재산을 잃거나 죽거나 이것이 전부이죠. 세상의 재난으로 지옥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하시는 상한 심령이 아니라면 그것은 지옥입니다. 상한 심령은 죄 가운데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지옥 갈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의로운 것이 나올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의를 이루신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재적으로 죄인임을 안다면 내가 무엇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게 죄인임을 아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사회 정의를 외치고 개혁을 외치는 것 좋은데 여전히 죄 가운데에서 주의 피가 아니면 구원 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심령에 두지 않는다면 진노의 자식으로 끝날 뿐입니다. 주의 피로만 구원이 됩니다 이 사실이 살아있는 심령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본문에 주권자가 왕이 우매한 자가 높은 지위에 앉고 종이 말을 타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그렇게 이루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 이상적인 세상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주의 피만 바라보는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고 존재하는 것인데 그런 교회는 개혁이라는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 자신이 교회를 이렇게 만들겠다고 하는 자기 비젼과 생각을 교회를 위해서 집어넣으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민주적인 교회를 만들겠다거나 헌금 강요 않고 십일조 없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겠다는 그런 생각들이 목사에게 나오는 것이 허물이고 재난입니다. 그런 생각들이 자기를 위한 생각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원하신 적도 없고 기뻐하시겠다고 하신 적 없고 자기 생각일 뿐인데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넘겨 집고 그렇게 연결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만큼 나는 하나님을 높여드린다고 하는 자기 과시를 하고 싶은 것이죠. 목사다운 목사가 되겠다는 것이죠.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교회다운 교회 신자다운 신자 목사다운 목사 이런 것들을 따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내가 부활 생명에 참여되었다는 그 사실이 항상 기쁨으로 남기를 소원하면서 주만 바라보는 모임이 되는 겁니다. 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 존재를 생각하면 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로 드러난 복음만 전하면 되는 것이지 목사다운 목사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목사다운 목사 되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목사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세상에서 인정 받고 칭찬 받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중요한 문제는 고민도 안 하고 다 안다는 거죠. 세상에서 목사답다고 하는 그런 조건과 틀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틀을 갖추면 하나님께서 목사라고 인정하시지 않겠는가? 자기 멋대로 답을 내려버리는 것이죠.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늘 시작하는 말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스스로 사도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뜻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것이죠. 바울은 사도다운 사도 그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오직 십자가만 전한 것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가는 것이 사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인간이 교회를 위해서 구상을 하고 이런 교회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막는 것이 사도입니다. 목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무엇이 악과 죄인지 가감없이 전달해주는 것이 목사가 할 일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달라고 하는 그런 발상들을 차단시키면서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 목사입니다. 목사도 주 앞에서 가해자가 되어 함께 주만 바라보자고 말하도록 그게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게 목사에 대한 저의 생각이기 때문에 목사로서 포부나 계획 꿈 그런 것이 저에게 없습니다. 다만 늘 저에게 생생하게 굳어지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날까지 전하다가 조용히 사라지면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오히려 목사답지 않게 보일지 또는 목사로서 너무 안일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고민과 염려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목사답지 않고 안일한 목사로 본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지장이 되지 않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저는 복음만 전할 생각이고 그게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성경을 보고 또 보고 보아도 하나님은 인간의 정의나 인간의 개혁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오히려 인간이 자기의 정의로움과 착함으로 교회를 개혁하고 바꾸고 싶어 하지만 자기들이 교회답게 만들겠다는 그런 시도를 하나님은 허용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터 위에 세워져서 성령의 일하심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이끌어가시는 대로 가면 됩니다. 그 방향이 그리스도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확인할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 하고가 아니고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세상인가 이것을 점검하셔야 되죠.

 

하나님과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되는 것이 교회인데 오늘 날 교회가 이것을 모르니까 사람이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니면서 교회라고 나서는 것이 지금 교회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상한 심령은 죄를 알게 되고 회개가 있는 심령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으로 함께하는 것이 교회인 것이고 이런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많은 죄가 탕감 받은 놀라운 은총이 넘치면서 그 은혜 속에서 세상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참된 교회에서 인간의 정의를 가지고 교회를 새롭게 만들어 세우겠다는 발상이 오히려 은혜를 훼방하는 교만이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늘 교회를 그렇게 바라보기 때문에 믿음은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다고 나오는 겁니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지요. 이것을 인용해서 나온 노래가 있지요.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예전에 이 노래를 엄청 불렀는데 제가 생각할 때는 이 노래 부를 때마다 죄만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사도 바울의 말을 묘하게 바꾸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여요. 이게 중요한데 능력이 되시는 주 하나님이 할 수 있다고 했다고 바꾸어 버린 거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게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바꾸어야 하는데 할 수 있다를 할 수 없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능력이 되시는 주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것이 됩니다. 복음성가들이 하나 같이 인간을 부추기고 선동하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런 노래도 재난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재난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이 재난인 것이죠. 우리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할 수 없다가 진짜 성경의 내용입니다. 개혁을 말하려면 이런 개혁을 말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개혁을 외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있다면 또 기적인 것이고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이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와 사람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반문하는데 맞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교회 사람이 앞서 일하는 그런 것을 부정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정하십니다. 예수님이 부자에게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지요.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했지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부정하고 인간을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고 신자는 그렇게 너 자신을 부정하라고 불러낸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많은 일을 시키려고 신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고 자기를 부인할 자로 불러서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신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세상 모든 사람은 자기를 긍정하고 살아갑니다. 신자는 그 속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할 자로 불러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좋은 교회 만들라고 세우신 것이 아니고 너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 높이라고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회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이런 교회 저런 교회 좋은 교회 나쁜 교회 이런 생각 다 버리시고 주께서 십자가를 통해 베푸신 구원만 바라보시면 됩니다. 교회는 그것이면 되고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허물만 드러내고 재난을 피할 수 없는 자로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로 이루신 주의 용서가 취소 되지 않습니다. 취소 되지 않고 방해 받지 않으면서 우리를 끝까지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이 믿음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그런 교회를 뭐가 흔들겠습니까? 아무것도 흔들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참된 교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의 십자가만 바라봅시다.(신윤식 목사 설교 편집-산골편지 원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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