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우매자의 입술(전 10:12-15)
12.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13.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14.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15.우매한 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 그들은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지혜자와 우매자 이 두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이 우리를 삼켰다는 경험을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말들을 골라서 하기 때문에 내 말이 나를 삼켰다 이렇게 생각될 그런 일은 없겠죠. 자기를 삼킨다는 것은 자기를 망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매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당연히 우매한 말 미련한 말일 텐데 지혜가 없고 지혜를 모르는 자를 우매한 자라고 합니다. 그런 우매자에게서 지혜의 말이 나올 수 없겠지요. 그런데 아무리 우매자 미련한 자라고 할지라도 내 말이 나를 망하게 할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아마 입을 다물 겁니다.
그런데도 우매자의 말이 자기를 삼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는 말이 나를 삼키는 아주 위험한 말이라는 것을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자와 우매자의 다른 점을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볼 수 있느냐 하면 지혜자의 말은 은혜로운데 우매자의 말은 자기를 삼킨다는 것이죠. 그러면 지혜가 있다는 것은 무엇이 은혜로운 말이고 무엇이 자기를 삼키는 말인지를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매하다는 것은 내 말이 나를 삼키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은혜로운 말인가를 모르는 자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은 단순히 말실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이 말 한마디 잘못해서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있지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도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말실수 하나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부부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고요. 그런데 말실수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내 말이 나를 삼켰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삼켰다는 것은 먹혔다는 것이고 먹혔다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내 말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런 의미가 되는데 우리가 어떤 말을 한 것 때문에 내가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될 일은 없다는 거죠. 그렇게 보면 우매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말실수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2.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13.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우매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시작이 우매고 결말은 미친 것이다. 즉 우매로 시작해서 미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우매자의 말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우매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어떤 말이기에 이 정도까지 시작은 우매고 마침은 미친 것이라고 까지 이야기하는지 궁금하지요.
2.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여 예언하되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겔13:2,3)
여기 보면 어리석은 선지자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어리석은 선지자 우매한 선지자 같은 말입니다. 이 선지자를 무엇 때문에 어리석은 선지자라는 말을 듣는가 하면 자기 마음대로 예언을 한다는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예언을 한다는 것은 본 것이 없이 자기 마음을 따라 예언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고 그런 선지자에게 화가 있다고 합니다. 화가 있다는 것은 너 잘못했으니까 벌 준다 다치고 사고당하고 이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히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대로라면 어리석은 선지자가 자신이 예언하는 말에 삼킴을 당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말을 조심히 하고 말을 주의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런 내용을 보면서 내 입술이 나를 삼키고 나에게 화가 되는 우매한 말이 나올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우리가 안 합니다. 내 입술에서 그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도 안 하죠. 사람은 모두 자기편이고 자기에 대해 관대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매한 자가 아니고 나를 삼키게 되고 화가 되는 그런 말을 안 한다고 자기에 대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 대해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 말씀 안에서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말씀 안에 들어갔는데 자기를 보지 못한다. 그 증거가 나는 우매한 자이고 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나를 삼키고 화가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말씀 안에서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그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세상과 자기를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내 기준과 세상 기준으로 나에게 좋은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좋은 점만 생각하고 우매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말씀 안에 들어가 자기를 보게 되면 자기를 그렇게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말씀이 주어질 때 우리에게 선포 되는 것은 화 있을 진저 이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어져서 순종하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로 구분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말씀 앞에서 나는 말씀에 순종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설령 누군가 나는 말씀에 순종했다고 자신 있게 나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착각이고 위선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는 누구나 심판의 대상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늘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가 볼 것은 그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라고 했는데 여기서 본 것이 없다는 것은 심판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으로 심판을 받을 것인데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심령을 따라 마음대로 선포한 것입니다. 만약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우리가 심판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보게 되면 그 심판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그냥 아무에게나 베풀어지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심판 받을 대상에게 자비하심과 사랑입니다. 이게 아니면 사랑도 은혜도 모르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안에 있게 되면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도 가치도 없다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에서 볼 것을 제대로 보았을 때 나타나는 열매라는 것이죠. 일단 사람은 말씀에서 자기 심판을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라는 말도 듣기 싫어하고 내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싫어합니다. 말씀을 잘 지켜서 어떻게 복을 받을 것인가 이런 궁리만 하는 것이지 심판이나 죄를 보라는 말을 정말 듣기 싫어합니다. 그리고 은혜도 사랑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도 싫어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랑 받을 가치도 없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반발을 하죠.
자기의 믿음이 자기의 열심과 모든 신앙 행위들이 너무 무시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말을 싫어하는 겁니다. 그것을 선지자가 알죠. 심판을 이야기하면 인기가 떨어질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주는 선지자가 되고 싶어서 자기의 뜻을 따라서 자기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예언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데 죄가 빠지고 심판도 빠진 말씀 아닌 자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매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선지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나 말을 하는 것이 자기 심령을 따라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 그대로 우리가 판단 받는다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게 우리의 본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판단되면 그 판단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말은 하나입니다. 심판 받을 자 화있는 자 저주 받을 자 그게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자 복을 받을 자 믿음 좋은 자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거죠. 내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혜자와 우매자가 어떻게 구분 되는가 하면 우매자는 자기 심령을 따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게 나에게 심판받을 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알지를 못하고 결국 그 말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죠. 그래서 늘 말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기 심령을 따라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우매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지혜자는 자기 심령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런 것들이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자기 심령을 따라 사는 자가 어리석은 우매자이고 그게 어리석은 선지자라면 자기 심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지혜자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역시 자기 심령을 따라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자기 심령을 따라 살지라도 나는 내 심령을 따라 살지 않겠습니다. 한 마디로 믿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거든요. 나는 그렇게 안 하겠다는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죠. 자기에 대해 장담했다가 큰 코 다친 사람입니다. 베드로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지요. 그리고 보기 좋게 실패했죠.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를 버리지 말라는 그 의도가 아닙니다. 그 뜻이 아니고 너희는 모두 다 너희 마음을 따라서 자기를 위해 사는 그런 인간들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불리해지면 나를 버릴 거다 그것을 아는 겁니다. 너희는 그런 인간들 밖에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주를 버릴 자가 아니라 주를 끝까지 지키는 그런 제자로 남겠다는 것이죠. 믿음 좋은 제자로 인정받고 남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기 심령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자인지 알지 못하고 파악을 못하니까 나는 안 그럴거라는 장담이 나오는 거죠.
그러면 지혜자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내 심령을 따라 사는 화 있을 자입니다. 나는 내 마음을 따라 사는 화 있을 자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지혜자라고 하는 것은 너는 네 마음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네 마음을 따라 사는 자가 너라는 것을 알라 그게 지혜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심령을 따라 사는 자이고 내가 심판 받을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지혜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네가 말씀에서 본 것이 있구나 하신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본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는 것이 미래까지 아는 것이 됩니다. 14절에서 말씀합니다.
14.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의 말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장래 일에 대해서 말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장래 일을 1년 후 10년 후 이런 것을 생각하고 내가 세상에 살아있을 때까지라고 생각하는데 죽은 후에 장래 일이 있지 않습니까? 죽은 후의 세계가 진짜 우리의 장래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그 문제이죠. 그 문제가 우리에게 진짜 장래 일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 장래 일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매한 자는 그런 장래 일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진짜 장래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의 장래만 생각하는 것이죠.
저희가 복을 이야기하는 것도 죽음 이후의 복을 꿈꾸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 있을 동안의 장래에 누릴 복 그것에만 관심을 두지 않습니까? 진짜 장래를 모르는 것이죠. 결국 교회가 심판이라고 하는 장래를 자꾸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장래 이것만 잘 되면 되는 것으로 늘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우매자의 현실에 똑같이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매자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듣기 좋은 말만 한다고 할지라도 시작은 우매로 시작해서 결론은 미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자의 말은 은혜롭다고 이야기 하죠. 지혜자도 우매자도 말을 하는데 지혜자도 사람이니까 자기 심령을 따라 할 겁니다. 우매자도 자기 심령을 따라 이야기 하는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자의 심령이 본래의 심령이 아니라는 겁니다. 옛사람의 심령이 아니고 지혜를 알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자의 심령은 진리로부터 간섭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성령의 간섭을 받는 거죠. 그래서 말의 시작이 화가 있을지어다 이런 말이 지혜자의 말이 되는 겁니다. 생각해봅시다. 우매자의 말은 시작이 우매라고 했습니다. 우매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시작점에 놓고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말로 시작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혜자의 말은 말씀 안에서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압니다. 그래서 인간을 향해서 화 있을진저로 시작을 하고 저주받을 자로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게 다른 점입니다. 심판 받을 자로 시작해서 그 결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심판을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결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게 지혜의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의 본래 심령이 시켜서 하는 말이 아니고 지혜가 시켜서 나오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그게 성령의 간섭에서 나오는 신자의 말이죠. 저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마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지혜자는 이 모든 내막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심판받을 자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주의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게 성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하고 성경에는 이렇게 하면 너희에게 복이거나 너희에게 천국에서 상급이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실감하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속에서 믿음을 핑계 삼아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은 너희의 뜻과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배우고 깨닫고 실감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지난주에 계획과 다른 결과에 대해서 설교했는데 내가 이렇게 하면 복주겠지 하는 예상들을 다 깨뜨려버리시면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언가를 하고 있으면 이것 때문에 뭔가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데 하나님은 내가 저주 가운데 있구나 그것을 느끼게 할 만큼 아픔과 고통을 주시면서 일하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일하십니까? 이런 질문에 하나님은 너희 생각과 너의 계획을 믿지 말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대로 이루어질 것이니 너희 계획을 믿지 말라는 것이죠. 그것을 아는 자체가 지혜라는 것입니다.
우매한 자는 그것을 모릅니다. 늘 고집부리고 있는 것이 어떤 복 받을 수 있는 통로와 구멍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 신앙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보겠습니까? 없지요. 여러분도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말씀을 본다. 내가 말씀에서 무엇을 보고 보는 것이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세요.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디를 펼쳐보아도 인간은 저주와 심판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저주로 집어넣고 시작을 하는 것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기대할 만한 인간이 못 된다는 것을 제발 좀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할 만한 인간이 없다면 우리는 나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기대도 접으시고 교회에 대한 기대도 접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대를 접으려고 해도 안 될 겁니다. 우리가 나에 대해서나 교회에 대해서 기대할 것이 없고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우매한 짓이구나 그렇게 알아가자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를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 자신과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나 생각이 있으면 그게 미련한 자이고 우매한 자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우리가 기대를 둘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 내 속에 남게 되는 그 자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만 아는 이것만 덩그러니 남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알아가도록 늘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으로 시작을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십시오. 여러분은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맨날 같은 말만 한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저는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정말 같은 말을 하고 있다면 설교 준비할 필요가 없지요. 오전 설교한 것 또 하면 되니까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복음을 잘 안다고 생각이 든다면 아마 설교하기가 곤란해질 겁니다. 복음을 아는 분들인데 같은 말을 하면 싫어하지 않을까? 새로운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힘들어지죠.
그러나 저는 여러분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딱 하나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들어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 밖에 안 하고 그런 생각밖에 안 들고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말이지만 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믿음만 이야기 하지만 늘 새롭고 다르게 들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알고 복음을 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저주 받을 자라는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에 대해서만큼은 늘 초보라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심판 받을 저주 받은 자로 나오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말이 복음 이야기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지 못하면 복음이 맨날 같은 말 지루한 말과 싫증나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듣기 싫은 말 현실을 사는 일에 필요도 없는 말 이익도 안 되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지만 내가 이런 존재밖에 안 되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이런 인간으로 보게 되었을 때 다른 것은 다 생각이 안 납니다. 나에게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뿐이죠. 내가 무엇을 못 보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복음이구나 그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으로 이끌려 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의 작업이죠.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열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품이나 자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피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저주가 우리의 저주를 보여주면서 구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죄도 관심 없고 심판도 관심 없으면서 천국 간다고 하는 것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는 우매자 어리석은 생각이고 얄팍한 생각입니다. 시편에 보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도 않는다는 말이 있지요.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도우시고 지킨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져 있는가를 여실히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 말이 자기를 삼킨다는 것도 모르고 그게 우매자이죠. 이것이 시작은 우매이고 결말은 심히 미친 것으로 맞아 떨어지는 거죠.
13.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14.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15.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전2:13~15)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뛰어나고 지혜자는 빛 가운데 다니는데 우매자는 어둠속에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자나 우매자나 당하는 일이 같다고 합니다. 지혜자가 뛰어나다고 해서 당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죠. 그래서 솔로몬이 내게 지혜가 있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유익이 되느냐는 말은 세상사는 일에 도움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나 믿음이 이 세상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도 헛되다는 겁니다. 지혜가 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인생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인생에서 뭔가 달라질 것을 기대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늘 다른 길에 서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내가 예수를 알고 믿음으로 내 인생이 파묻혀간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일은 우매자와 다르지가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말을 다 들어보아도 인간의 근본은 죄와 저주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말하고 있을 뿐인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덮어버리고 자기의 심령을 따라 말하는 세계가 종교인의 세계이죠.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고 또 보면서 내가 내 마음을 따라서 살고 기대하는 것이 헛되고 잘못 된 것이고 우매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서 인간의 근본은 저주아래 놓인 자라는 것을 생생하게 새기면서 그 죄와 저주의 자리에서 발견 되는 십자가의 구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기쁨이 되는 자리로 이끌려가는 것이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신앙이고 예수를 아는 것이구나 이것이 결말을 알고 사는 지혜자의 지혜이구나 그런 것들 하나하나 알아야 되고 그런 것들이 내 속에 자리하는 것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결국 문제는 그것입니다. 늘 나를 놓지 않으려고 하고 말씀에서 보아야 할 것을 보아야 하는데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여러분의 근본이 무언지 깊이 알아가면서 여러분의 근본의 그 자리에 생생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깨닫고 그것이 기쁨이 되는 경험을 하고 실감이 되는 그런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신윤식 목사 설교 편집- 산골편지 원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