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저주하지 말라(전 10:16-20) 45강

작성자프토코스|작성시간26.06.17|조회수3 목록 댓글 0

45 저주하지 말라(전 10:16-20)

 

16.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17.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18.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19.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20.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오늘 본문에 왕이 등장하는데 두 사람입니다. 한 왕은 어린 사람이고 다른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왕이 어리면 나라를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많겠지요. 그렇게 되면 대신들이 득세를 하고 대신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정치를 해가면서 나라가 엉망이 되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16.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대신들이 아침부터 잔치를 한다는 것은 자기들 기쁨을 위해서 먹고 마시는데 정신이 팔려있다는 거죠.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고생을 하겠지요.

17.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귀족들의 아들이니까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고 또 귀족들이 세력이 되어서 왕을 도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대신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왕의 지시를 따라서 일을 해야겠지요. 그런 나라는 잘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왕을 백성들이 원하지 않지만 부왕이 죽게 되면 자연히 어린 왕이 이어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 경우에 섭정을 하게 되는데 섭정을 해도 나라가 흔들리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어쨌든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왕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 통치를 잘 해서 우리가 잘 살게 해달라는 것인데 왕은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맞추어주면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또 백성들이 잘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자들로 골라서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라가 잘못 되고 백성들이 힘들게 되면 백성들은 불만이 있게 되죠. 나이도 어린 왕이 통치를 잘못해서 백성들이 힘들게 되었다고 불만이 쏟아지는 거죠. 백성들 입장에서는 자기들 잘못이 아닌데 고생을 하게 되니까 불만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백성들 입장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왕만 바꾸면 잘 될 것이라고 역적모의해서 왕을 바꾼다고 해서 나라가 잘 될 것이라는 것은 아니죠.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현실을 대하고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대통령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나 또 기대가 충족 되지 않았을 때에 정치를 잘못해가지고 우리가 못살고 힘들다고 욕하는 것이나 다 같은 겁니다. 이런 것들이 자기들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죠. 그런데 이상한 것은 대통령이 잘못해서 갈아치우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괜찮다 잘한다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대한 것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다 다른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기대를 맞추어주지 않으면 잘못된 대통령이라고 하면서 갈아치워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을 믿는 인간의 현실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대를 잘 맞추어주고 좋으신 하나님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죠. 왜 나를 힘들게 하냐고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결국 어느 시대에서나 인간은 똑같이 자기중심으로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좋은 대로 돌아갔으면 좋겠지만 문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 마음대로 일하신다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실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가는 일이 우리가 힘들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가운데에서 배워가야 하는 것은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자인데 우리가 잘 안 되는 것이죠. 내가 그렇게 해야지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런 신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내 기대 충족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시고 그것을 배우고 감사할 수 있는 신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실감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은 무엇보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주어야 좋은 왕이라고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왕이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목사에 대한 기대도 내가 속한 교회가 내 마음에 드는 좋은 교회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죠.

 

내가 교회에 와서 즐거움을 느끼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교회로 만들어 주면 능력 있는 목사로 인정하겠다는 생각으로 목사를 바라보는 것이죠. 목사에게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거죠. 그런 기대가 어긋나면 목사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되죠. 오늘 죽어도 구원 받은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신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늘 죽어도 천국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으로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라져 버리고 현실에서 자꾸 내 믿음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죠. 이런 것들이 엉터리인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엉터리인 것을 알아야 하나님께서 어떤 취지로 어떤 일을 하실까? 이것을 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네가 엉터리이고 네가 실패자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시작하자 그래야 너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내가 일하는 모든 것이 너에게 은혜인 줄 알게 될 것 아니냐는 겁니다. 은혜를 높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취지인데 우리는 내가 실패자인 것도 관심 없고 내가 엉터리인 것도 관심 없으면서 내가 기대하는 것을 자꾸 채워달라고 요구하면서 그런 가운데에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절대 볼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는 것이고 그게 소경인 것이죠. 그런 우리의 현실과 실상을 알아가면서 배우고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이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되면 신자의 길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만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4.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와서 이방 나라와 똑같이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서 왕이 다스리게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까지 왕은 없었는데 왕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왕을 구하는 이유는 사무엘 당신이 늙었다는 겁니다. 당신은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을 따르지 않으니 못 믿겠다는 거죠. 그렇게 왕을 구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사무엘 너를 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요구를 한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나를 버렸다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버렸다고 한다면 그들이 인정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왕을 구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당신 실패자이고 엉터리라고 하면 왜 내가 엉터리입니까? 이렇게 반문할 것이라는 말이죠. 이게 무엇이냐 하면 왕을 구하는 가운데에서 자기들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을 버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죄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내 입장에서 당연한 요구를 하고 있고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그 생각만 하고 있는 겁니다. 교인들이 교회 부흥을 위해서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합시다 했을 때에 그게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는 것을 인정 안 합니다. 교회를 잘 되게 하자는데 왜 이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까? 이렇게 반응한다는 것이죠.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 말 하나하나가 하나님과 원수로 행한다는 것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패자라는 말을 도무지 인정을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에도 반발이 나오는 것이고 믿음이 없다고 해도 인정을 안 하는 것이죠. 믿음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까이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전광훈 목사라는 사람이 되도 안한 말 “하나님 까불지 마” 그런 말을 해가지고 사람들이 놀라가지고 신성모독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만 신성모독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모두가 신성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만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도 엉터리이다 라고 하면 그 말을 받아들이겠느냐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늘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이것을 게을리 하면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정말 그냥 교회를 다니는 것이지 교회를 와서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고 돌아가는 그런 은혜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 말고 왕을 구한 것은 자기들 목적과 자기들에게 맞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세웠고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었고 다스리고 가르쳐왔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이 세상을 바라보려면 내 생각과 한 마디 말까지 드러나고 있는 죄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못 보죠. 그냥 남을 비판했다거나 무언가 큼직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내가 죄를 지었구나 이 정도이지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죠. 때문에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지금 당장 내가 살 이유도 없고 가치도 없고 내가 당장 지옥에 들어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 마음이 나오지 않는 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실로 다가오지 않으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천국의 백성으로 세우신 이런 은혜를 모르게 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또 하나님의 간섭으로 산다 이런 실제적인 고백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실제 내가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시각이 아니면 나를 살게 하는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나는 오늘 이렇게 살고 싶다는 희망만 앞세우는 그런 삶을 살면서 그것이 왜 죄가 되는 것이고 불의함이 되는지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한계입니다. 그런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런 나에게 어떻게 일하실까 하나님의 일하심에 시선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살면서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 나는 이렇게 되고 싶은데 안 되는 이런 현실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현실 속에서 나보다 잘 되는 사람을 보면 시기가 나오고 그럴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이죠.

 

그런 것들 하나하나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이고 그 용서가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헌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거죠. 그런 은혜에 머물 때에는 내가 누구를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죠. 사람이 어떻게 산다 할지라도 분명하고 확고한 사실은 하나님의 용서를 모르는 자는 영원한 심판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장래 일이고 그 장래 일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12.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13.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14.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전10:12~14)

지혜자와 우매자의 차이는 장래 일을 알고 모르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장래 일을 아는 지혜자는 은혜로운 말을 하고 우매자는 장래 일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삼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매자가 말을 많이 하고 멋있는 말을 하고 재미있게 말할지라도 결론은 시작은 우매이고 결말은 미친 것이라고 합니다. 가치 없고 정신 나간 그런 말을 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로서 장래 일을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간섭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매자들이 도무지 장래 일과 하나님의 은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2:2:28)

여기서 장래 일은 우리가 공부해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알 수 있는 것이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장래 일입니다. 성령을 받아야지요. 성령이 임하면 장래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으면 답은 간단하죠. 능력 받는 것과 상관없고 장래 일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우리는 간단하게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이 영으로 우리 마음에 새겼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의해서 드러나는 죄를 보게 됩니다.

 

죄를 볼 때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죄를 볼 때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 사랑으로 마음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마치 강력한 자석처럼 끌려가는 겁니다. 내가 사랑을 알아야지 하는 우리의 의도에 의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알았을 때 자연히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이런 것이었구나 이렇게 끌려가고 그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며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장래 일이 무엇으로 굳어지느냐 하면 그 죄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보지 못한 자는 영원한 심판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 된 우리를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게 우리의 장래 일이죠.

 

그래서 우리가 장래 일을 알게 되면 잠깐 동안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무엇을 누리고 살았는지 이런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살면서 힘든 일이 주어지면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하고 흔들리는 것도 있겠지요. 그런데 염려가 염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염려 속에서 또다시 나의 믿음 없음을 보게 하시면서 지옥 가기에 마땅한 나에게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는 그 자리로 우리의 마음이 끌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문제가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 사랑과 은혜를 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실제 삶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은혜와 사랑은 멀어지고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래 인간은 지옥 갈 자인데 그런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사랑을 알게 해주신 것을 조금씩 보게 해주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장래 일에 그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가 영광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지금 이 세상 우리 기대에 맞게 무언가 누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더라 이런 결론을 가질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내용이고 방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장래 일을 보지 못하면 모두가 우매자이고 우매자에게 나올 것은 현실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매자끼리는 서로 말이 통합니다. 그런데 지혜자와는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장래 일을 알지 못하는 우매자는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서로 말이 통합니다. 그러나 장래 일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전부이기 때문에 우매자와 말이 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에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부르는 자와 신이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르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름을 부르는데 여호와의 신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호와를 부르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겁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어달라고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죠. 내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해서 부르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사람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죄를 용서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주를 믿게 하신 것 등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이루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신자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하고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 이루어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도무지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데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죠.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게 성령이 임한 신자이고 성령이 임한 신자는 왕도 부자도 시기하고 저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잘 살고 못사는 것에 미련 두지 말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의 세계에 마음을 두고 살자는 겁니다. 그런 신자 됨을 위해서 하나님이 간섭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성령으로 장래 일을 알게 된 지혜자로 사는 겁니다. 나는 장래 일을 안다고 하면서 현실의 문제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것은 장래 일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거죠.

 

20.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왕을 저주한다면 이유는 무엇일까요? 16절의 상황처럼 왕과 신하들이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서 나에게 해가 미쳤다고 생각될 때일 것입니다. 대통령을 욕하거나 칭찬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내 뜻에 맞게 정치를 하지 않을 때 나에게 손해가 되는 정책을 펼칠 때 대통령을 욕하는 것입니다.

 

결국 왕이든 부자든 저주를 하게 되는 이유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이 예측한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주어졌을 때 그에 대한 불만이 저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불행과 아픔의 이유를 왕이 정치를 잘못한 것에 두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왕이 정치를 잘했으면 내가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것이라는 또 다른 예측이 불만을 낳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도 교인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예측을 합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해주면 교회가 부흥되고 교인들 모두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예측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 그에 대한 불만은 교인을 저주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열심히 봉사하지 않고 교회 일에 게으르면 복 받지 못하고 징계 받는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일을 두고 예측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산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미래 일을 예측하는 것이나 예측대로 되지 않아 불만이 있게 되는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심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장래 일을 생각해보십시오.(신윤식 목사 설교 편집 –산골편지 원기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