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물 위에 던져라(전 11:1-3)
1.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2.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3.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하고 또 신앙생활 잘하는 것을 대게 복이나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과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런데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어쨌든 교회 생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을 주일 성수나 기도하고 성경 보고 봉사하는 이런 생각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지요. 그런데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기독교인들이 자꾸 신앙에 대해서 그런 생각들로 기울어지는 것은 행함 실천의 문제와 연결 되어 있지요. 선한 일을 하고 봉사와 구제를 하며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으로 사는 것이 성경과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마트에 가보니까 여자 아이들의 장난감 인형이 있는데 어떤 것은 옷 신발 악세사리들이 들어있는 인형이 있더라고요. 아이들이 인형에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악세사리를 끼워주면서 노는 거죠. 인형에 아무리 좋은 옷을 입힌다고 할지라도 인형은 인형이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죠. 인간이 그러는 겁니다. 인간이 본래 죄인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은 죄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도무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다가도 다른 선한 것 착한 것에 생각이 기울어집니다. 예를 들어 구제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고 하지요. 구제를 하게 되면 구제한 나는 선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자연히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의를 행한 신앙을 실천한 것처럼 자기를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구제나 그밖에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들을 실천하는 것들은 마치 인형에 옷을 입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죠. 우리가 구제를 하고 다른 선한 일을 하고 선교를 했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를 시키거나 가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지 못합니다. 구제나 봉사 선교 같은 일을 그 행위 자체가 선한 일과 신앙적인 가치 있는 행위라고 굳어져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제하는 것과 직장에서 일하는 것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구제는 남을 도와주는 선한 일이지만 내가 직장에서 일하고 돈을 버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구제하는 일처럼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구제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게 맞지만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보는 대로 보지 않습니다.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10:1~4)
이런 내용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은 고넬료에게 기도와 구제라는 복 되고 가치 있는 그런 행함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넬료가 마음이 드셔서 천사를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상달 되는 신앙이 있다고 주장을 하죠.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이런 표현 때문에 하나님께 기억 되고 상달 되는 신앙 행위가 있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죠.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이 기독교인들이 신앙적인 실천을 하면서 복을 기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신앙 행위는 열심인데 상대적으로 가치가 약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실천에 소극적이죠. 그런 것이 무엇이나 하면 하나님도 몰라 성경도 몰라 다 몰라 이런 것입니다.
1.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이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어렵지 않은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떡(빵)을 우리가 먹는 간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그날의 양식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떡을 물 위에 던지라는 것은 우리가 하루 세끼를 먹는 그런 음식을 물 위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 음식을 물위에 던져버리면 그날은 가족들이 전부 굶어야 된다는 것이 예상되죠. 떡을 물 위에 던지는 것은 그 떡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물에 빠지면 먹을 수 없는 것이고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 육신을 살게 하는 소중한 양식을 던지라고 하는 것은 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소중한 양식을 물에 던져버릴 사람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던졌더니 몇 배 더 많은 양식으로 돌아온다고 하면 던지겠지만 그런 일은 없지요. 이 말씀 보면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 후에 그것을 찾으면 더 많이 불어날 일도 없지만 그대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떡을 물위에 던진 보상이 없다는 것이죠. 물 위에 던지라고 해서 던졌고 그 말씀대로 실천했는데 나중에 찾는다면 찾지도 못하는 그런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사람은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계산 굴려보고 손해다 싶으면 안하는 것이 사람이죠.
문제는 신앙에 대해서나 하나님과 관계에 대해서도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산을 하고 대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인간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계산이 다 들어있는 겁니다. 믿음과 신앙 안에서도 손해 보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이익이 되는 신앙만 찾게 되는 겁니다. 신앙에 이로움이 되고 좋은 것이 있어야 믿는다고 하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신앙 행위를 이렇게 하면 복이 되고 유익한 신앙이 된다고 가르쳐주지요. 그런 신앙은 우상이고 우상을 섬기는 종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에 드러나는 문제입니다.
다시 고넬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고넬료 이야기를 적용하게 되면 기도와 구제라는 고넬료의 실천에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고넬료라는 인물은 우리 관심 밖입니다. 고넬료의 행위에 관심 있지 고넬료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 없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는 그 기억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구제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를 기억하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기억하셨다고 하는 것 때문에 고넬료가 얻은 이득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라면 무슨 보상이나 이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낼료는 사도행전 10장에서 한 번 등장하고 사라진 인물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천사까지 보내셔서 고넬료를 만나게 했다면 이름이 뒤에도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습니다. 이방인이 그 정도이니 얼마나 써먹기 좋습니까? 10장에 한 번 나오고 안 나오는 겁니다. 고넬료에게는 어떤 보상이 따른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만난 것이 전부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져온 것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대 기독교에서 말하는 보상 차원의 문제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주신다면 이런 것을 주시겠지 하는 기대하고 바라는 그런 것은 고넬료 이야기에서 전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는 그것만 기억하고 자기에게 무언가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성경대로 합시다 그런 말을 하는데 성경대로 하자는 의미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안에서 하나님을 말하자는 겁니다. 우리 욕심으로 성경에 없는 내용으로 소설 쓰지 말고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의미대로 하자는 겁니다. 고넬료는 다른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베드로에게 말씀을 듣고자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게 고넬료를 기억하신 하나님이 베푸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고넬료를 기억했다는 것과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것에만 초점을 두는 거죠.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신앙하고 구제하고 기도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것이라면 고넬료는 공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제한 보람이 없는 것이죠. 고넬료가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돈을 많이 썼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손해 보지 않겠다는 심보로 살고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 고넬료와 같은 일은 아무 결과가 없는 것이 되고 말죠. 그러면 고넬료는 바보 같이 산 사람입니까?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에게 주어진 복이죠. 그래서 다른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고넬료에게는 하나님이 복이고 하나님이 상급이고 하나님 자체가 보상이지 다른 것을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고낼료가 기도하고 구제한 것도 보상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나의 실천이 무언가 가치 있고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보상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고넬료의 신앙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신앙과 다르다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도 없고 기억되는 것도 없는 것이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모든 열심을 다해서 온갖 신앙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따른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는 그냥 인간 행위로 남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해도 해야 합니다. 신자가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무언가 기대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행위를 기억한다는 뜻이 됩니다. 내 행위를 의식한다는 거죠. 내 행위를 내가 기억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네 행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셨다는 것은 고넬료가 자기 행위에 대해서 전혀 기억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2~4)
구제할 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은 구제하는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구제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지 하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기 구제 행위를 의식하고 하는 것이죠.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를 기억하시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도 자기의 구제를 의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억하지 말라고 해서 기억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했는데. 그런 말이 아니고 의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식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이런 일을 했으니까 그에 따른 어떤 대가나 보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나 기대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밀하게 하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하라는 뜻으로 생각을 합니다. 남이 모르게 하는 것을 참된 구제와 선한 일로 생각을 하는 거죠. 남이 모르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상을 주신다는 그런 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남이 모르면 뭐합니까? 내가 알고 있는데. 남은 모르지만 내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하라는 것은 내가 한 구제나 선한 일을 의식하지 말라는 것이고 내가 의식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의식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새겨진 말씀이 하시는 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본성이라는 것이 있고 자연히 본성을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런데도 본성인 죄를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처럼 매 순간 순간 늘 나에게 유리하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쫓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게 저와 여러분입니다. 말씀을 보면서 손해가 따른다고 할 때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네 떡을 물위에 던지고 여러 날 후에 찾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이렇게 하면 내가 손해다 이런 의식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것이 너희라는 뜻입니다. 이게 인간의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신앙을 강조하고 선행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선행도 내게 이익이 되어야 선행이 나오는 것이지 손해가 되면 안 할 자가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선행을 앞세워서 어떤 결과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선행을 했으니까 하나님이 복 주시겠지 그런 결과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나는 어떤 손해가 온다고 할지라도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런 분 계십니까? 인간성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 말씀이 나에게 불리하고 손해가 되고 힘이 들면 안합니다.
이것이 말씀이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하겠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 안에서 만나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사라지고 교회 안서만 만나게 되면 다른 것이 보이게 됩니다. 저 사람은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하지 저 사람은 봉사를 얼마나 하지 이렇게 보면서 사람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 안에서 만나게 되면 행함과 무관하게 모두가 자신을 위해 사는 죄인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사는 것이 서로 다르겠지만 말씀 안에서 만나고 악수하고 인사하고 그렇게 하면 모두가 똑같은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동일한 인간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됩니다.
모두가 동일한 죄인으로 보게 되면 누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고 그런 것을 보지 않게 되고 자기 자신도 모자란 부분이나 부족한 것에 대하여 자책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죠. 다 같은 죄인이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기도 안 하고 성경 안 보는 것을 마음 편히 가지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신자는 관계가 우리의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맺어진 관계라는 사실을 알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에 메이지 말자는 겁니다.
2.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것도 보면 애매모호한 말인데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많이 구제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구제를 많이 했는데 뒤에 재앙이라는 말이 나올까요? 구제를 많이 했으면 뒤에 복 받는 이야기가 나오면 좋은데 재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도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예상을 따른다면 우리가 구제를 많이 했을 때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두 말 할 것이 복입니다. 내가 착하게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지 하는 것이죠. 그런데 난데없이 무슨 재앙이 임할지 네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슨 재앙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앙이 임한다는 것이죠. 구제를 많이 했는데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분이 이 말씀을 기가 막히게 해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참 감탄을 했는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재앙을 만날지 모르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구제를 많이 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재앙이 없고 평안할 때 구제를 많이 해놓으면 재앙이 임할 때 나에게 도움 받은 사람들이 나를 도울 것이 아니냐 그렇게 해석을 하더군요.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나중 일을 모르니까 보험용으로 구제를 미리 많이 해놓자는 그 뜻이죠. 그런데 도움 받았다고 해서 나중에 도움 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해석을 합니까?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 뒤에 어떤 말씀이 나오면 좋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말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구제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19:17)
이런 말씀을 보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풍족하여 질것이요 갚아주시리라 이런 말씀이 눈에 확 들어오죠. 풍족해지고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말씀이 눈에 확 들어오고 얼마나 좋게 들립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죠. 구제해서 그렇게 되면 구제도 할 만한 장사입니다. 구제라는 것은 본래 내 손에 있는 것을 흩어버리는 것인데 흩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진다면 그런 구제 안 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느 날 구제를 조금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1억으로 갚아주신다고 하면 구제 안 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면 하나님은 신용이 좋으니까 분명히 받을 것이고 이자는 몇 프로나 될까요?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국 구제하면서 구제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제보다 구제해서 내게 돌아올 이득에 더 관심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구제하는 것 우리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구제는 선한 일이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거죠. 그게 아니면 내가 착한 일 했으니까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생각도 하는 거죠. 그러니까 현재의 나의 선한 일을 해서 나중에 나에게 돌아올 것을 자꾸 예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닌데 우리는 기대를 하고 예상을 하는 거죠.
그런데 무슨 재앙이 임할는지 너는 알지 못한다는 말이 왜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모르고 열심히 구제했다고 합시다. 구제했는데 재앙이 임했다면 하나님 재앙이 웬 말입니까? 하소연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내용에 기대하고 구제했다면 속았다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인간의 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이 늘 지금의 나의 선함 실천 행함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나중 일 결과까지 예상을 하고 하나님을 그런 틀 속에 집어넣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죄인이라고 하면서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고 나갈 것이 없습니다. 그게 죄인의 의미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것은 선한 것이라고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죄인이라는 말을 달고 살아도 죄인 됨을 모르는 겁니다. 단지 듣고 배워서 나오는 말일 뿐입니다. 실제 성령이 새긴 말씀에 의해서 내가 죄로 드러나는 그런 경험이 없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 행위의 가치를 못 버리는 것이죠. 죄를 모르니까. 내가 여덟 사람을 구제했으니 하나님이 알아주시겠지 그렇게 내 행위에 맞추어서 나중 일도 기대하는 것이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꾸어드린다는 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기독교인이라면 99.99%가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것으로 이해를 할 겁니다. 꾸어드린다는 것은 문장대로라면 내 것을 하나님께 빌려준다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에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내 것으로 주장하고 살고 있지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주인은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제하시는데 나에게 빌려서 구제하신다는 말이 말이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채무자 우리는 채권자가 되는 것입니까? 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갚아주신다고 생각하고 이런 모순 된 내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누군가에게 1억을 빌렸다고 합시다. 돈을 빌렸다는 것은 그 후부터 그 사람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꾸어드린다는 것은 관계적인 면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가난한 자는 외부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 즉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신자에게 이런 긍휼의 마음이 있을 때에 모든 지체들을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지옥 갈 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게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착한 일을 했든 안 했든 상관 없이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긍휼히 여기신 것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진정한 구제가 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을 하나님이 자기백성에게 심어놓은 것이고 그런 신자를 기뻐하시면서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꾸어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죠.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자기 행함을 기반으로 하나님이 무언가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안 합니다. 내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을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이 감사함으로 남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백성과 떨어지지 않으십니다. 이게 하나님께 꾸어드린다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3.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구름에 비가 가득하다 가득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죠. 나무가 쓰러진다 쓰러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시고자 하는 일을 우리는 바꿀 수가 없다는 겁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자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당연한 삶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나에게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비가 쏟아지고 비를 맞든 나무가 쓰러지든 우리가 넘어지는 모든 것들은 당연함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와 지금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임합니까?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지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일도 내 뜻에 맞게 바꾸고 싶은 것으로 인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를 했는데 재앙이 임했다 그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모든 인간이 저주에 처할 죄인 된 존재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당연한 삶을 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박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만 우리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부당하고 불의한 일은 없는 겁니다. 어떤 일이라도 마땅한 일입니다. 이렇게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신자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는 내가 가치 있게 여기고 붙들고 싶은 것이 없어야 합니다. 무엇을 한다고 할지라도 늘 십자가 앞에서 주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이 사실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늘 여러분들이 무엇을 해도 여러분이 행한 것을 보지 마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주님의 행하심만 생각하시고 감사하면서 늘 은혜를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신윤식 목사 설교 편집- 산골편지 원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