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도솔산 선운사. 선(禪)에 들고 구름에 눕다 1부.

작성자버벅이|작성시간26.06.07|조회수0 목록 댓글 0

2026년 5월 30일 (토) 촬영

2026년. 불교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시 기간 2026. 4. 22 ~ 7. 31)

도솔산 선운사 선(禪)에 들고 구름에 눕다.

꽃무릇과 동백꽃이 철마다 향기를 전하는 도솔산 자락에는 깊은 법향(法香)을 간직한 선운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는

한때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요사를 갖추어 산중 곳곳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었던 유서 깊은 도량입니다.

선운사는 예로부터 지장 신앙의 성지로 추앙받아 왔습니다. 그 신앙의 결정체인

선운사 지장보궁, 참당암 지장전, 도솔암 내원궁의 세 지장 보살님은 자비로운 미소로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넵니다.

정유재란이라는 역사의 거센 풍랑 속에서도 선운사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전란의 상처를 딛고 일어난 선운사는 오늘날까지 우리 불교문화유산을 가장 화려하고 역동적으로 꽃피우고 있습니다.

동국사 대웅전 소조 가섭, 아난존자 입상 / 보물, 응매 스님 등, 조선 1650년, 흙, 동국사 대웅전,

동국사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우에는 제자인 가섭과 아난존자가 시립해 있습니다.

가섭존자는 노련한 수행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고, 이에 반해 아난존자는 합장한 채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어 정적인 평온함을 자아냅니다.

<발원문>에 따르면 불상의 조성 불사에는 벽암 각성(碧巖覺性) 스님과 호연 태호(浩然太浩) 스님이 참여했으며,

수조각승 응매(應梅) 스님을 필두로 6명의 스님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이 존상들은 응매 스님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는 유일한 성보입니다.

선운사 대웅보전 목조 불패 / 조선 후기, 나무, 선운사 대웅보전

선운사 대웅보전의 중심에 비로자나 삼불 좌상과 함께 봉안된 <목조 불패>는 불단의 엄숙함과 화려함을 더해줍니다.

패두, 패신, 패좌로 구성된 조선 시대 불패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줍니다.

용과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 구름 등을 섬세하게 새긴 투각 기법과 화려한 단청은 당시 불교 공예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선운사 대웅보전 목조 범천, 제석천상 대좌 / 조선 후기, 나무, 선운사 대웅보전

선운사 대웅보전 비로자나부처님 좌우에 봉안된 <범천, 제석천상>의 대좌입니다.

입상의 범천, 제석천상은 17세기의 존상으로 추정되는 반면, 대좌는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어 시기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대좌는 불상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로, 본래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자리를 상징합니다.

선운사 팔상전 석조 천불좌상 / 조선 후기, 돌, 선운사 팔상전

본래 천불전에 봉안되었으나, 전각 소실 이후 현재는 팔상전에 100여 존이 남아 있습니다.

천불 신앙은 <현겁경>과 <관약왕약상이보살경,觀藥王藥上二菩薩經> 등에 근거한 다불 신앙으로 시방삼세(十方三世)에

수많은 부처님이 상주한다는 내용과 연결됩니다. 재료는 불 석을 사용하였으며,

머리 크기가 전체 높이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조선 후기 소석 불상(小石佛像) 특유의 신체 비례가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선운사의 창건과 역사

선운사는 577년 백제의 검단선사(黔丹禪師)께서 창건한 이래, 오랜 세월 불법이 머무는 수행의 도량으로 자리해 왔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자복사(資福寺)로서 지정될 만큼 드높은 위상을 자랑했습니다.

비록 15세기 후반 일부 석탑만이 전할 정도로 사세가 위축되기도 했으나,

행호(幸浩) 스님의 간절한 원력과 조선의 제7대 국왕인 세조의 아들 덕원군의 후원에 힘입어 중흥의 전기를 맞이했습니다.

1473년을 전후로 이루어진 중창은 선운사의 법통을 한층 공고히 세운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때 깃든 신앙의 힘은 오늘날까지 선운사의 공간마다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검단, 의운 양대 화상도 / 석초 스님, 일제강점기 1915년, 면에 채색, 선운사 산신각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黔丹) 스님과 참당사를 창건한 의운(義雲) 스님을 그린 불화입니다.

20세기에 활동한 석초 봉영(石蕉琫榮) 스님이 그렸습니다.

검단 스님과 의운 스님은 바위와 소나무에 걸 터 앉아 서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에는 익살스러운 호랑이와 과일을 든 동자가 스님들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진영임에도 산신도의 형식을 취하고 산신각에 봉안된 점이 독특합니다.

선운사 대웅보전 신중도 / 오봉 스님 등, 조선 1807년, 비단에 채색,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선운사 대웅보전에 봉안되었던 이 <신중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신중을 그린 불화입니다.

1807년 오봉(鰲峯), 보월(寶月), 완월(玩月), 환익(環益), 민선(敏詵), 학윤(學允), 복순(福順) 스님이 함께 조성하였으며,

수화승 오봉 스님의 유일한 불화라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화면은 상단과 하단의 2단 구성을 이루며, 상단 중앙에는 제석천과 범천이 서로 마주한 채 합장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정면을 향해 합장한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중, 사금강, 동자가 좌우에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용문사 천불도 / 보물, 도문 스님 등, 조선 1709년, 비단에 채색, 용문사 성보 박물관.

<용문사 천 불도>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천불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1709년 조성되었으며,

붉은색의 바탕 위에 부처님의 형상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가로 44위, 세로 23위로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배치하였고,

다만 상단의 첫 번째 줄 중앙의 4위가 비어 있어 전체 존상 수는 1008위입니다.

가사의 착의 방식이나 수인 등을 달리함으로써 미묘한 조형적 변화를 주었습니다.

화기를 통해 도문(道文) 스님을 비롯하여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 스님 등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용문사 천불도의 일부분입니다.

선운사 천불도

천불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무량하게 존재하는 부처님을 표현한 다불(多佛) 사상에 근거한 불화입니다.

선운사에서는 1476년 천불대광명전을 조성했으나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1618년에 천불전을 창건하였으며, 1668년에 천불상과 천불도를 조성하였습니다.

현재의 천불도는 1668년에 조성한 천불도가 낡자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운사 천불도>는 이백십 불회도 2폭, 이백오십오 불회도 2폭으로,

<동운암 천불도>와 함께 천불을 구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시대 천불 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선운사 동운암 천불도 /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고창 동운암(석전기념관)

대승불교의 발전과 함께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무수한 세계의 부처님을 신앙하는 다불신앙이 등장하였으며,

특히 천불은 숫자를 넘어 무수히 많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현겁경> 등 여러 경전에 나타났습니다.

<동운암 천불도>는 석가모니, 약사, 아미타부처님 세 분과 과거의 일곱 부처님을 포함한 130위의 부처님을 그렸습니다.

회기가 소실되었으나, 화면 구성과 화풍 등을 살펴보았을 때

1754년 <선운사 천불도>와 함께 하나의 구성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천불도는 총 다섯 폭 중 주불도로 추정됩니다.

선운사 천불도 / 성옥 스님 등, 조선 1754년, 비단에 채색, 동국대학교 박물관

<선운사 천불도>는 1754년에

성옥(性玉), 설심(雪心), 회현(會玄), 사인(思仁), 체일(體一), 도경(道敬), 돈영(頓英) 스님이 조성했습니다.

<선운사 천불도>는 1668년에 조성한 천불도가 낡자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짐작되며,

현재 이백십 불회도 2폭, 이백오십오 불회도 2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용문사 천불도>와 더불어 조선 시대 천불도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례입니다.

선운사의 선지식

선운사에는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 등

문중의 조사(祖師)를 비롯하여 여러 선지식(善知識)의 진영이 내려옵니다.

특히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 백파 긍선(白坡亘琁, 1767~1852) 스님은

선운사에서 수행의 기틀을 다졌으며, 조선 후기 불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여러 스님들의 활동을 통해 선운사의 교학(敎學)의 깊이와 선풍(禪風)의 기개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 선운사를 지탱하는 단단한 정신적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불조도(佛祖圖) / 조선 말, 종이에 먹, 석전 기념관

선운사에는 3점의 불조도가 전해지며, 행과 열에 맞춰 부처님과 역대 조사의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불조도 1, 2>의 앞면 상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한 과거의 일곱 부처님, 서천(인도)의 28조사, 중화의 28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우리나라 고승의 법호와 법명이 적혀있습니다.

<불조도 3>은 상단에 서천 28조사, 중국 28조사, 우리나라 12조사를 언급하고, 고승 72분의 법호를 기록하였습니다.

설파 상언(雪坡尙彦) 스님과 백파 긍선(白坡亘琁) 스님을 직계로 배치하며

20세기 초 선운사의 문중 의식과 정체성을 강하게 표출하였습니다.

부용당 대선사 진영(芙蓉堂大禪師 眞影) /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선운사 성보 박물관

조선시대 선지식인 부용 영관(芙蓉靈觀) 스님의 모습을 그린 진영입니다.

부용 스님은 좌측을 바라보며 가부좌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양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습니다.

푸른색 장삼에 붉은색 가사를 수하였으며, 금구 장식으로 가사 끈을 고정하였습니다.

부용 스님의 진영은 선운사에만 현존하고 있어 의미가 있습니다.

청허당 대선사 진영(淸虛堂大禪師 眞影) /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선운사 성보 박물관

서산대사로 유명한 청허 휴정(淸虛休靜) 스님은 선과 교를 두루 겸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 팔도의 승군을 이끄는 팔도도총섭으로써 호국 정신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스님은 옅은 푸른색의 장삼을 걸치고 붉은색 가사를 수하였으며, 오른쪽을 향하고 의자에 앉아 왼손으로는 불자를 들었습니다.

화엄종주 설파당 진영(華嚴宗主 雪坡堂 眞影) /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석전 기념관

설파 상언(雪坡尙彦) 스님은 고창 출신으로,

19세에 선운사에 출가하였으며 1739년 용추사에서 15차례에 걸쳐 화엄경 강의를 할 정도로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영찬에는 화엄학에 뛰어났던 스님을 화엄종 제4조인 청량 징관(淸凉澄觀) 스님에 빗대어 그 행적을 찬탄하였습니다.

이를 보여주듯 스님의 뒤로는 화엄경 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금봉당대종사 진영(金峯堂大宗師 眞影) /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선운사 성보 박물관

금봉 대종사는 선운사에 전하는 불조도를 통해 18세기에 활동했던 금봉 청감(金峯淸鑑) 스님으로 추정됩니다.

금봉 스님은 1781년 도화주로써 선운사의 불상 개금과 시왕도 조성 불사를 이끌었습니다.

왼손으로는 요우와 불자가 달린 주장자를 쥐었으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올렸습니다.

스님의 우측에는 경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 <미타경>을 올려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였습니다.

묵담대화상 진영(默湛大和尙 眞影) /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선운사 성보 박물관

묵담 전해(默湛典海) 스님은 대흥사 13대 강사로 이름이 높았던 호암 체정(虎巖體淨) 스님의 8세손입니다.

1809년부터 1840년까지 선운사에서 석상암 중수, 영산전 조성 등 다양한 불사에 참여하며, 사중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았습니다.

묵담 스님은 진영에서 푸른색 장삼과 붉은색 가사를 수하고 오른쪽을 향한 채 의자에 앉아있으며, 양손으로 긴 염주를 쥐고 있습니다.

설송당대종사 진영(雪松堂大宗師 眞影) /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선운사 성보 박물관

설송대종사는 불조도의 설송 의홍(雪松義弘) 스님으로 추정됩니다.

왼손에는 주장자, 오른손에는 염주를 들었으며 몸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닥에는 화문석이 깔려있고, 의자의 오른쪽에 위치한 경상에는 <미타경>이 올려져 있어,

< 화엄종주 설파당 진영>. <금봉당대종사 진영>과 유사한 형식입니다.

설송 스님의 얼굴은 다른 진영보다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선운사 영산전 목조 제석천상 및 복장 유물 / 삼우 스님 등, 조선 1681년, 나무, 선운사 영산전

제석천상은 상투를 높이 틀고 높은 보관을 썼습니다. 방형에 가까운 얼굴은 두 볼의 양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간결한 착의와 장식의 절제, 문양 없는 원형 대좌 위에 선 형식 등에서 절제된 조형감을 보여줍니다.

복장 유물 조사 과정에서 <원문>이 발견되었으며, 1681년 삼우, 준계, 학련 스님 등이 조성에 참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조각승들의 유파 계보와 활동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선운사 영산전 목조십육나한상 / 삼우 스님 등, 조선 1681년, 나무, 선운사 영산전

선운사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나한상들은 제각각 다른 표정과 미묘한 자세 변화를 통해 수행자의 생동감을 드러냅니다.

모두 나무로 만든 암좌 위에 앉아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인 정면 자세를 기본으로 일부는 측면으로 기울어 조형적 변화를 더합니다.

상호는 넓은 이마와 다양한 표정이 특징으로 옅은 미소를 띠거나 입을 벌려 빠진 앞니가 드러나는 등 소박하고 무구한 인상을 보입니다.

또한 머리까지 가사를 덮은 복두의를 착용하고 소매로 두 손을 감싼 표현, 서수(瑞獸)를 안은 모습 등에서 각 존상의 개성이 잘 드러납니다.

선운사 명부전 목조동자상 / 조선 1676년, 나무, 선운사 명부전

선운사 명부전의 동자상은 보살님 또는 시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존재입니다.

관모를 쓰거나 댕기머리, 쌍계 머리를 한 채 아이 특유의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선운사 명부전 목조사자상 / 조선 1676년, 나무, 선운사 명부전

선운사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삼존상을 중심으로 시왕, 귀왕, 판관, 동자, 사자, 장군 등 총 27존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사자는 망자의 죄를 판별하는 전령(傳令)이자 집행자로

조선 후기 명부전의 사자상은 대개 감재(監齋), 직부(直符) 사자 형식이 주를 이룹니다.

장대와 문서를 지니고 관복 차림과 절제된 표정을 통해 공정한 집행자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선운사 삼 지장보살상 세 가지 미소로 빚어낸 자비의 서원

선운산에는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세 분의 지장 보살님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선운사 금동 지장보살좌상>, <도솔암 금동 지장보살좌상>. <참당암 석조 지장보살좌상>은 이른바 '삼지장'으로 일컬어지며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한 사찰 내에 이처럼 격조 높은 지장 보살님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은

선운사가 지닌 역사적 위상과 한국불교조각사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삼 지장보살상>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귀족적이고 세련된 조각의 정수를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단정한 얼굴에서는 지장 보살님의 자비로운 서원이 느껴지며 안정감 있는 신체 비례와 가슴 위를 장식한 정교한 영락 표현 등에서는

당대 최고 장인의 뛰어난 기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각각 독창적인 모습이면서도 모두 좌상의 단독상이며

머리에 두건을 착용하고 있다는 공통된 도상을 공유하고 있어, 선운사에 전개된 독특한 지장 신앙의 특수성을 잘 보여줍니다.

도솔암 내원궁 금동 지장보살좌상 / 보물, 고려 14세기, 금동, 도솔암 도솔천 내원궁

고려 14세기를 대표하는 이 지장 보살님은 당당한 체구와 엄숙한 조형미에서 비롯되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정면을 향해 결가부좌한 채 상체와 하체가 균형 잡힌 비례를 이룹니다.

왼손에 든 법륜(法輪)은 억겁의 세월 속 중생의 악업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자비로운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머리에 쓴 사실적인 두건은 수행자인 성문(聲聞)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원만한 얼굴 위로 흐르는 장중한 이목구비와

세련된 손끝 등의 표현을 통해 고려 불상 조형의 높은 완성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운사 지장보궁 금동 지장보살좌상 / 보물, 고려 말 조선 초, 금동, 선운사 지장보궁

창의적인 도상과 뛰어난 예술성을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장보살상입니다. 신체의 안정된 구도와 온화한 얼굴,

사실적으로 표현된 두건과 가슴의 영락 장식, 가늘고 긴 손가락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불상 양식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특히 왼팔의 가사 끈과 이를 묶은 금구(金具) 장식이 인상적입니다.

손바닥에 중생의 번뇌를 깨뜨리는 법륜(法輪)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936년 일본으로 도난되었으나,

도난범들의 꿈에 지장 보살님이 나타나 꾸짖는 등 영험한 기운을 보여준 끝에 1938년에 기적적으로 환수되었습니다.

법륜(法輪)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손바닥에 흔적이 조금 남아 있네요.

참당암 지장전 석조 지장보살좌상 / 보물, 조선 15세기, 돌, 참당암 지장전.

<참당암 석조 지장보살좌상>의 오른손에 쥔 선명한 보주(寶珠)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자비로운 위상을 상징하며,

두건을 쓴 모습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유행한 지장보살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상체에서 느껴지는 풍만한 양감과 높게 형성된 하체가 절묘한 균형을 이룹니다.

엄숙한 인상과 단단하게 표현된 손의 묘사, 그리고 왼팔의 O자형 옷 주름 등은 조선 전기 지장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고창 선운사에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지장 보살님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살상에는 가슴 아픈 수난의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1936년 여름, 지장보살상은 일제에 의해 도난당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지장 보살님의 '영이(靈異)'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보내다오"

일본인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신 지장 보살님

이를 무시한 소장자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원인 모를 병마가 집안을 덮쳤습니다.

보살상이 옮겨가는 곳마다 우환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소문은 퍼져나갔습니다.

마지막 소장자는 두려움 끝에 고창 경찰서에 자수하며 모셔갈 것을 간청합니다.

1938년 11월, 도난 2년 만에 선운사 스님들과 일행은 일본 히로시마로 향합니다.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온 지장 보살님

그날의 기쁨은 한 장의 사진과 기록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와 편액(靜窩扁額) / 이광사, 조선 후기, 나무, 선운사 선방

청색 바탕에 글자를 양각하여, 흰색으로 칠하고 홍색 테두리목에 흰 덩굴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이 편액에는 '원교(圓嶠)'라는 두인(頭印)과

'이광사인(李匡師印)'이라는 성명인(姓名印)이 찍혀있어 원교 이광사가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광사는 1755년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신지도로 유배되었고,

유배 생활 중 쓴 편액이 호남 지역의 사찰과 고택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정와는 고요한 처소라는 의미이며, 서체는 중후하면서도 바르고 변화가 있습니다.

백파율사비 탁본(白坡律師碑) / 흥선 스님, 2020년, 종이에 먹, 불교중앙박물관

1858년 백파 스님의 업적을 기리고자 제자들이 조성한 비의 탁본입니다.

불교 교리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던 김정희가

스님의 학문적 깊이를 인정하며, 만년의 독창적인 필치와 완숙미가 집약된 서체로 직접 비문을 짓고 썼습니다.

비신의 전면에는 제명을,

후면에는 스님의 삶과 사상에 대한 찬탄을, 우측면에는 법맥을 이은 제자들의 명단을 새겼습니다.

백파 스님의 행장과 사상을 전하는 소중한 기록이자, 조선 후기 불교 사유의 확장과 유불 교유 양상을 잘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백파율사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스님은 고창 출신으로 선운사에 출가하였으며

화엄학의 대가였던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 스님에게 사사하여 선(禪), 교(敎), 율(律)을 두루 겸비하였습니다.

<작법귀감>을 통해 불교 의식문을 교정, 정비하였고, <선문수경>에서는 선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특히 <선문수경>은 백파 스님과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 스님 간의 선 논쟁을 촉발하였으며,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이에 가담하면서 논의가 확장되어 한국 불교사의 이론적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의 선사 진영(草衣禪師 眞影) / 전 허련,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조선 후기 문인화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허련이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진영 속 초의 의순(草衣意恂) 스님은 왼쪽을 향해 앉아 양손에 염주와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지긋이 응시하는 눈빛, 굳게 다문 입매, 깊게 패인 주름 등에서 단단한 기풍과 오랜 수행의 세월이 느껴집니다.

탁자 위에 놓인 책과 다구는 다성(茶聖)으로 추앙받았던 스님의 삶과 정신을 상징합니다.

진영 상단에는 스님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던 신헌(申櫶)이 화상찬을 써넣어 스님의 학문과 인격을 기리고 있습니다.

추사 시첩(秋史 詩帖) / 김정희,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선운사 성보 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자연관과 일상의 정취, 그리고 19세기 문인 사회가 공유했던 사상적 지향과 정서적 풍류가 담긴 시첩입니다.

서체는 굳세면서도 유연하며, 고법에 바탕을 두면서도 독창적인 추사체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해서와 행서로 쓰였음에도, 한나라 예서에 천착하여 완성된 특유의 획법이 돋보입니다.

이는 문인으로서의 학문적 깊이와 예술가로서의 감각이 조화를 이룬 학예 일치 서예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작성자 : 칠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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