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의 신단

작성자버벅이|작성시간26.06.15|조회수1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6일 (토) 촬영

금성대군 신단의 외부 측면 모습입니다. 토석 담장이 신단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가 유명해지며,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금성대군 신단의 정문입니다.

금성대군 신단은 순흥에 안치되었던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순절한 의사(義士)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마련된 제단이다.

금성대군 신단은 전, 후 두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남측은 제향(祭享)과 관련된 제청(祭廳, 관리사) 공간인데

토석담장으로 구획되어 동쪽에는 재실(齋室), 서쪽에는 제청(관리사)이 위치한다.

북측 단소 공간에는 금성대군단, 부사 이보흠단, 제의사단,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가 세워져 있다.

금성대군 신단 인근에는 순흥 고을의 흥망성쇠를 같이한 '충신수'라고 불리는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 현지 설명문 -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 錦城大君 神壇) / 사적

신단은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려는 목적으로, 흙이나 돌로 쌓아 올려 주변보다 높게 만든 단(檀)을 말한다.

금성대군(1426~1457)은 조선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단종의 작은아버지이자 세조의 동생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조선 세조 2년(1456)에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순흥부사 이보흠 및 지역 사람들과 함께 다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거사를 추진했던 사람들과 같이 죽임을 당했고 순흥부도 폐지되었다.

조선 숙종 9년(1683)에 이르러서야 순흥부가 다시 설치되었고 금성대군을 비롯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신분도 복원되었다.

그리고 숙종 45년(1719)에는 순흥 부사 이명희의 요청으로 사건과 관련된 옛 터인 유허지(遺墟址)에 제단을 설치하였다.

이곳 단소는 돌로 만든 3개의 제단을 품(品) 자처럼 배치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

앞의 동쪽 제단은 함께 죽은 선비들을 추모하는 단이고, 서쪽 제단은 이보흠을 모신 단이다.

마지막 중앙 뒤쪽에 있는 제단이 바로 금성대군 신단이다.

당시 순흥에서는 금성대군을 신령처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단에는 신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조선 영조 18년(1742)에는 경상 감사 심성희가 요청하여 제사를 모시는 단소를 정비하였다.

1980년 무렵에는 단소 앞에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인 제청(祭廳)과 재실(齋室)을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까지도 봄과 가을에 유림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금성대군 신단은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18세기 탕평 정치가 활발하였고 왕에 대한 의리를 다시 강조하는 정치적 분위기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조선 시대 사람을 신격화하여 만든 제단이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이 제단은 당시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현지 설명문 -

* 사육신(死六臣)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여섯 명의 충신

* 복위(復位) - 폐위되었던 왕이나 왕의 아내가 다시 그 자리에 오름

* 사림(士林) -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 유림

* 제단(祭檀) - 제사를 지내는 단

* 단소(檀所) - 제단이 있는 장소

* 탕평 정치(蕩平政治) - 조선 영조 때 당쟁의 폐단을 없애려고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치

금성대군 신단의 외문으로 들어서면

서쪽에는 관리사, 동쪽에는 재실이 있고 전면인 북쪽에는 단으로 통하는 내문이 있습니다.

동쪽에 있는 재실입니다.

동쪽 재실의 출입문입니다.

'ㄱ'자 모양의 재실은 네 개의 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재실 마루에는 제향의 순서를 기록한 현판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재실의 관리가 부실한 듯하여 마음이 짠했습니다.

마루에서 보면 건너편의 제청(祭廳, 관리사)도 보입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윤기 없는 마루.

덤벙 주초 위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서쪽에 있는 제청(祭廳, 관리사)입니다.

제청은 문이 닫혀있어 밖으로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습니다.

화장실.

제청은 별도의 토석담으로 쌓았습니다.

제청에서 본 재실.

제청에서 본 재실과 외문.

이제 금성단 내문으로 들어갑니다.

내문에는 '금성단(錦城壇)'이라고 새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내문에서 본 외문입니다.

쓸쓸하다기보다, 잊힌 곳같이 보이는군요.

내문으로 들어가면 品 자 모양의 단과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단종의 복위 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거사를 추진했던 금성대군과 함께 죽임을 당한 부사 이보흠과 선비들의(1457년) 단과

금성대군의 비석입니다. 물론 순흥부도 폐지되었습니다.

조선 숙종 9년(1683)에 이르러서야 순흥부가 다시 설치되었고

금성대군을 비롯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신분도 복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숙종 45년(1719)에 순흥 부사 이명희의 요청으로 사건과 관련된 옛 터인 유허지(遺墟址)에 제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왼편에 있는 단입니다. 금성대군과 함께 죽임을 당한 부사 이보흠을 모신 단입니다.

부사 이보흠의 단

오른편에 있는 단입니다. 금성대군과 함께 죽임을 당한 여러 의사들을 모신 단입니다.

諸義士之位(제의사지위)라고 새겨 있는 단입니다.

두 단의 뒤에는 금성대군을 추모하는 비와 신단이 있습니다.

신단입니다.

신단에는 錦城大君之位(금성대군지위)라고 새긴 돌의 뒤에 장방형의 오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금성대군의 단을 신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시 순흥에서는 금성대군을 신령처럼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有明朝鮮 端宗朝忠臣 錦城大君 成仁神壇之碑(유명조선 단종조충신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

뒤에서 본 금성대군의 신단입니다.

금성대군 신단 앞 공원

금성대군 신단

민박집.

신단 건너편에는 숙수사 절터에 세워진 소수서원이 있습니다.

소수서원에 입구에 있는 돌다리.

금성대군신단 인근에는 새로 창건한 숙수사와 순흥향교도 있습니다.

        작성자 : 칠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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