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3일 (토) 촬영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 국보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가 3.3m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사자 조각이 올려져 있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석등의 구조는 8각의 지대석에서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 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으며 다른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 현지 설명문 -
8각의 바닥돌
팔상전을 바라보며,
대웅보전과 사천왕 석등입니다.
법주사 대웅보전 / 보물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산 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고쳐지었으나 임진왜란 시 불타 버린 후 인조 2년(1624)에 벽암 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적이 402.80입방 미터, 높이가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이 건물과 같은 수법의 건물로 금산사 미륵전이 있다.
내부에는 높이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보물 1360호 법주사 소조비로자나 삼불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 현지 설명문 -
대웅보전 내부에 모신 소조비로자나 삼불 좌상
법주사 소조비로자나 삼불 좌상 / 보물
법주사 소조비로자나 삼불 좌상은 법주사 대웅보전에 모신 삼신불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이 놓여 있다.
인조 4년(1626)에 현진, 청헌, 연묵, 양묵 등이 만들었으며 영조 23년인 1747년에 새로 금칠을 했다.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은 목조 불상과 소조 불상이 주류를 이룬다. 대부분 네모반듯한 모양의 장중한 형태이며
신체의 굴곡이 거의 없다. 법주사 소조 비로자나 삼불 좌상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고
제작 연대가 확실하여 조선 후기 불교 조각의 기준이 되는 불상으로 평가된다.
대웅보전 계단 양옆에는 원숭이 상이 있는데,
예부터 있던 원숭이 상은 많이 마모되었는데다,
도난 우려도 있어 현재는 성보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원숭이 상은 복제품입니다.
원숭이 석상 / 조선, 1626년
법주사 대웅보전 앞의 삼계 보도 계단 위 양쪽에 세워져 있던 원숭이 석상이다.
부처님이 수행할 때 숲속의 원숭이들도 따라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는데,
"부처님을 따라 흉내만 내어도 천상락을 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잡스러운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도 있다. - 박물관 설명문 -
대웅보전에서 본 사천왕 석등
법주사 사천왕 석등 / 보물
법주사 사천왕 석등은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는 석등으로 팔상전 서쪽에 있다.
사천왕은 불교에서 수미산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을 뜻한다.
석등은 높이가 3.9m이며 받침돌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받침돌은 밑 받침돌과 위 받침돌이 대칭을 이루도록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화사석은 여덟 면으로 되어 있는데, 한쪽 네 면에는 창을 내고 다른 쪽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두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간 형태이며 꼭대기에는 보주를 두던 받침이 남아 있다.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 양식으로 조각된 것으로 보아
신라 혜공왕 때 진표 율사가 법주사를 고쳐지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현지 설명문 -
사천왕 석등의 4면에 새긴 사천왕의 모습입니다.
대웅보전의 좌측면입니다.
대웅보전의 좌측에 있는 삼성각과 명부전입니다.
삼성각의 내부.
명부전입니다.
명부전의 내부
명부전 아래에는 진영각이 있습니다.
진영각의 내부.
진영각에서 본 원통보전.
진영각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 보물
보살상은 전체 높이 213cm 규모로 크게 신체,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가로 네모반듯한 모양의 받침돌을, 그 위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몸통을 세워 고정시켰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룩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 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되었다.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 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 옷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 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시기인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 현지 설명문 -
희견보살상이 있는 곳에 있는 보리수 열매.
희견보살상을 보호하는 전각과 원통보전.
법주사 원통보전 / 보물
법주사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셨기 때문에 관음전이라고도 하며,
중생의 고뇌를 씻어 주는 권능이 모든 곳에 두루 통한다고 하여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인조 25년에 새로 지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된 목조 기와집으로 측면보다 정면이 약간 크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주심포식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다포계와 익공계 수법이 혼용되어 있다.
지붕은 꼭대기를 중심으로 네 개의 지붕면이 뻗어 있는 사모 지붕이며,
지붕마루의 가운데에 세워진 항아리 모양의 장식은 마치 석탑이나 석등의 꼭대기 부분처럼 보인다.
법주사 원통보전은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나 고대 불전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건물로 평가된다. - 현지 설명문 -
원통보전에 모신 관세음보살.
대웅보전의 우측에는 출입이 금지된 스님들의 공간이 있고,
그 아래에 선희궁 원당이 있습니다.
선희궁 원당은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 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건물입니다. 영빈 이 씨는 사도세자의 어머니입니다.
법주사 선희궁 원당 /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원당은 특정 개인의 사당과 같은 성격의 건물이다.
법주사 선희궁 원당은 조선 영조 41년(1765)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 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구조로 장대석 기단 위에 덤벙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운 형태이다.
공포는 내출목이 두 개, 외출목이 한 개로, 익공 형식과 주심포 형식이 혼용된 주심포 형식으로 되어 있다.
외부로 뻗은 두 개의 제공 위아래에는 연화와 연봉 무늬를 조각하였고, 공포 위에는 봉황 머리 장식을 더했다.
원당은 정문에 솟을 삼문을 두고 주위로는 담장을 둘렀다.
자연석 담장은 아래에 2단의 화강암 장대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들을 이용해 쌓았으며,
담장 앞면에는 여러 가지 길상무늬와 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원당은 한국 전통의 담장과 솟을 삼문을 두어 대웅보전 앞면 동측에 다른 건물과 독립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향교, 서원 등에 자주 사용된 전형적인 유교 건축 형식이다. - 현지 설명문 -
선희궁 원당
내부 모습입니다.
영조대왕 위패
영빈 이 씨 위패
솟을삼문 안쪽의 모습입니다.
선희궁 담장 너머로 대웅보전이 보입니다.
선희궁의 돌 담장.
돌담에 길상무늬를 넣었습니다.
선희궁 앞에 있는 석등
선희궁 앞에 있는 약사전입니다.
약사전의 내부.
범종각
이제 법주사를 나섭니다.
팔상전의 우측(동쪽)에 있는 석등
법주사 철솥 / 보물
철솥은 법주사 공양간 근처에 있던 것으로 규모는 높이 1.2m, 지름 2.7m, 둘래 10.3m에 두께 10cm, 무게는 20톤에 달한다.
큰 사발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철솔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로
법주사에 전하여 오는 말로는 법주사가 한창 번성하여 3,000 승도가 운집하여 있을 때 장솥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없어 제조 연대 제작자 및 제작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 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 현지 설명문 -
1. 대웅전 2. 석조 희견보살입상 3.원통보전 5. 쌍사자 석등 6. 사천왕 석등 14. 철솥(철확) 18. 선희궁 원당.
작성자 : 칠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