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회마을에 온 손님들 ㅡ
1999년 충효당을 방문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ㅡ 허회마을에 온 손님들 ㅡ
2009년 8월 3일 부시 전대통령 하회마을 방문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초가 와 와가(瓦家·기와집)가 잘 보존된 곳이다.
2010년 7월 하회마을과 경주양동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들어가는 글>
이땅에 사는 사람치고 누구나 하회마을 한두번 가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을 모르면
그것은 하히마을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1980년 후반부터 먼지가 풀풀나는 황토길을 걸어 하회마을을 다녔습니다
그동안 하회답사를 다니면서 제일 먼저 찿아간 분은 하회마을에
살고 계시는 연세 드신 어른입니다 그 어른한테 막걸리를 대접하면서
별신굿 탈놀이의 구심점이기도 한 서낭당과 성황당도 알게 되었고
거목실과 행개골도 찿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알게 된 사실은 하회마을은
철저하게 풍수지리사상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지금의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과 함께
평시나 난시에도 오래 살수 있는 제일 길지로 꼽았다고 합니다
그런 풍수에 따라 하회마을의 담장들은 돌담을 하지 않고 모두 흙담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마을 중앙에는 600년 묵은 느티나무인 삼신당이 있는데 삼신당 중심으로 토담길이
방사형으로 나있으며 집들의 방향이 각기 다른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회마을의 예스러움의 백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방법은
마을의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은후 이른 새벽 낙동강이 만들어내는 안개비를 맞으며,
천천히 고샅길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우러진 문화적 전통이 숨쉬는 곳으로 초대합니다
한국의 민속촌이 옛모습을 재현해 놓았다면
하회마을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현재까지 실제의 살림집으로 사람이 살고있다
그런데 왜? 하고 많은 탈중에 하회탈이 유명할까?
12개의 탈중에 떡받이/별채/총각등 3개의 탈은 일제시대
삼파이길이 가져갔다고 하는데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
하회의 상민들이 하회탈춤을 추고 놀았다면
양반들은 매년 7월의 밤에 낙동강에서 선유줄불놀이를 하고 놀았다
선유줄불 놀이란 무엇일까?
하회사람들은 마을의 예스러운 분위기를 지키기 위하여
전깃줄은 모두 지하에 묻었다
그리고 하회사람들은 함부로 우물을 파지 않는다
그래서 낙동강변에서 물을 길어 먹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왜일까?
옛날 양반들이 밤공부 하다가 출출하면 가난한 상민들에게
미안하니까 오늘이 제삿날이라고 거짓말하고 <헛제사밥>을
만들어 먹었다는 재미있는 유래를 가진 안동속에 하회로
이런 저런 궁금증을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풍산 류씨 입향 시조인 전서공이 심었다고 전해지며, 이 나무를 잘못 건드리면 재앙을 입는다는
토속신앙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풍수지리상 마을의 혈에 해당하는 곳으로 하당으로 불리며,
정월과 대보름에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지낸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 배나무가 많아 "이화촌"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지금도 충효당. 양진당.북촌댁.남촌댁.뒤뜰에 오래된 배나무들이 서있다
우리가 지금 가는 북촌댁은 지중추부사 류사춘이 1797년 처음으로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건립한 뒤
1862년 류사춘의 종손 류도성이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을 건립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화천(花川)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해서
위쪽을 북촌, 아래쪽을 남촌이라고 부른다.
북촌의 양진당과 북촌댁,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은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였고, 2008년 한류스타 배용준이
이곳 중사랑인 화경당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사랑채 정면에는 북촌유거(北村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북촌댁(北村宅)이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ㅡ노비들에게 초가집 지어주고, 동네 사람들과 나눔 실천한 '북촌댁'ㅡ
큰사랑채 '북촌유거'를 짓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목재를 홍수 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죄다 밀어넣고, 남은 것은 불을 붙여 주위를 밝히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담장 밖으로 화장실을 내어 급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이용하게 한 점이나
노비들이 머무는 행랑채를 없애고 인근에 그들만의 초가를 지어 노비들에게도
밤 시간만큼은 가족끼리 지내도록 배려한 점, 소작인들과 수확을 반반씩 나눈 점 등은
그 시대에서는 분명 파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사랑채에서 부인이 머무는 안채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동할수 있도록 문을 낸 것,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아이가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몸집에 맞는 작은 문을 내어준 것 등은 가족간의 따뜻한 사랑이 느꺼지게 한다
집은 사람을 닮는다고 한다
집주인이 살아온 일생은 집에 그대로 드러난다
양반의 올곧은 정신이 그대로 배어 있는 하회마을은 건축에서도 참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그래서 하회를 살아 있는 고건축의 박물관이라고 하는것 같다
양진당(보물 제306호)
조선 명종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立巖 류중영과 맏아들 류운룡이 살던 종택으로 풍산 柳씨의 종가다.
사랑채는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가지며,
안채는 조선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 고려와 조선의 건축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이다
양진당은 하회마을 풍산류씨 대종가로 600여 년 전 이 마을 입향조인 류종혜가 자리잡은 곳이다.
그의 5대손인 류중영이 학자와 정치가로 자리를 굳히면서 두 아들인 운룡과 성룡도
중앙정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이 시기에 현재의 양진당이 지어졌다.
.
요즘도 전국에서 한옥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델로 삼기 위해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고택이다
입암(立巖) 류중영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 또는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른다.
사랑채 북쪽벽에 걸린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인 류영의 호에서 따왔다
양진당은 하회 류씨의 대종택이며 겸암 류운룡의 종가입니다.
흔치 않은 조선 전기의 주택으로 하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남향을 하고 있다."
양진당 종택에서는 류중영과 그의 아들 류운영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종택 뒤편으로 류중영의 신주를 모신 사당과 류운용과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불천위를 같은 장소에 모시지 않는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부친인 류중영을 모신 사당을 별도로 건립한 것이다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하회마을에 들어와 최초로 지은 집이기 때문에 유서가 깊은 곳이다
한국의 전통고택은 저마다 개성과 톡특한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구례 운조루는 툭 터진 전망을 즐기기 위한 루가 특징이고,
, 논산의 윤 증 고택은 사랑채 담장을 일부러 설치하지 않았고,
해남의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의 방향이 서로 다르고,
봉화의 충재 고택은 거북이 형상의 돌 위에 자리잡은 청암정이 일품이며
하회마을의 양진당은 정면에 보이는 저 쪽문을 통해 사랑채에서 안채로 연결되는 통로가 독특하다
두 번째로 눈여겨 볼것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은 점이다. 2층 집인 셈이다.
이렇게 2층으로 지은 것은 양진당이 위치한 곳이 상습적인 침수지역이라 낮고 습한 땅 위에
기단을 만들지 않고 기둥을 높여 건물을 지은 것이다 .
또 건물 주위에 난간을 둘러 누각처럼 만든 것도 이채롭다
세 번째로는 기단을 유심히 보면 행랑채 ㅡ안채 ㅡ사랑채
기단 높이가 각기 달리하여 이 집 가장의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忠孝堂(보물 제414호)
조선 중기에 세워진 건물로 서애 선생의 종택이다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그 손자와 제자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집이라고 합니다
서애 류성룡의 종가로 남촌을 대표하는 집입니다.
본래 단출한 살림집이던 것을 후손들이 조금씩 확장,중수하여
지금처럼 대규묘의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안채
폐쇄적으로 지어진 입 구(口)자형의 건물이다. 안채 대청마루 아래에는 1999년 4월,
충효당을 방문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마루에 오를 때 사용한 자그마한 판자 계단이
부설되어 있다 현재 종부되시는 분은 경주 최부자집 둘째 따님이시다
서애종가 종택의 당호인 '충효당(忠孝堂)'은
평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서애 선생의 증손인 류의하가 지은 것이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이 한국을 찾았을 때 직접 하회마을 충효당을 찾았을 만큼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와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 종가이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가문을 이어오는 전형적인 동성 부락이다.
이 마을이 2010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조선시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그의 동생이자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의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낙동강을 배경으로 사대부집에서 초가까지 300~500년 된 고가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서다
앞면 6칸, 옆면 2칸의 사랑채는 가운데 4칸을 대청으로 쓰고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왼쪽의 방에 세살문을 단 것과 달리 오른쪽은 판문을 달았다. 사랑채가 서향이다 보니,
여름의 강한 햇빛과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전체가 방인 왼쪽과는 달리
오른쪽에는 마루와 방이 각기 하나씩 있다
충효당은 조선 숙종 때 명필 미수 허목의 전서체이다
류성룡이 평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비롯되었다
서애 류성룡의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영모각
하회마을에는 국보 2점과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0점 등을 비롯한 문화재들이 보관돼 있다.
2010년 7월 30일 유네스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영모각에는 서애 선생의 유물 90여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이곳에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 등을 기록한 징비록이 보관되어 있다
하회마을 안쪽의 고택들을 돌아본 후에 강변쪽으로 나와서
강변을 따라 걷다보면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초가집들이 기와집과
어우러져 있는 곳이 하회마을입니다.하회마을의 초가집들은 주로 종가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이나 소작인들이 살던 사림집입니다
만 송 정 :천년기념물 제4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