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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이 그리워하고 박경리가 잠든 곳 ㅡ통영

작성자한반도|작성시간26.06.13|조회수72 목록 댓글 0

대한민국이 낳은 가장 천재적인 음악가 윤이상은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통영으로 이주해

 

유년과 청년기를 보냈고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웠으며,공부를 마친 후

 

통영으로 돌아와 교사로도 활동했다. 광복 후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 교가를 작곡했을 정도로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윤이상

 

1957년부터 베를린에 정착해 당대의 거장들과 교류하며 세계적 음악가로 명성을 쌓았지만, 반공을

 

국시로 내건 박정희 정권과는 화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1967년 동베를린(동백림)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그는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후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자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된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이 한국 정부에 항의하는 등

 그의 수감은 국제적 문제로 번졌다.

 

결국 1969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그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 1959년 독일 베를린음악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는 쇤베르크 12음계 기법과

 

우리나라 궁중음악을 결합시킨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며 세계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1967년 박정희 군부때 동백림사건 조작으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었고, 다른 독일 주요

 

교포 인사들과 함께 고문을 당한 뒤 북한의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심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2심과 3심을 거쳐 간첩 혐의는 무죄로 판결나고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동조죄 및 탈출죄)으로

 

징역 10년형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투옥 중 오페라 ' 나비의 미망인'을 완성했고, 악보가 독일로 보내져

 

초연되면서 구명 운동을 위한 국제 여론이 확산되어 1969년 

 

한국 정부가 형 집행 정지를 결정, 서독으로 돌아갔고 1970년 815 특사로 잔형이 면제되었다

박정희 군부에 환멸을 느끼고 독일로 출국 후 사망때까지 한번도 대한민국에 오지 않았다.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베를린 가토우 지방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유족들과 관계자들이 고인이 평소 원했던

 

통영으로 이장을 추진하던 중,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김정숙 여사가 베를린 묘소에 동백나무를 헌화한 것을

 

기화로 드디어 타계 23년 만에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 2018년 3월 20일 통영국제음악당 부지 내에

 

안장되었다

생가터는 도천동  157번로  윤이상이 1956년 고국을 떠난 후 주인이 몇 차례 바뀌면서

 

생가 건물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생가터 맞은편은 ‘윤이상기념공원’이다

윤이상 기념관은 2010년 3월 선생의 생가터 부근 땅에 개관했다.

 

하지만 이름 논쟁 속 선생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지명을 따라 도천테마기념관이라고 썼다

1972년에 모교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작곡과 명예 교수가 되었고, 뮌헨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를 위해 오페라

 

'심청'을 작곡해 초연했다. 서독 외에도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작품이 연주되었고, 1977년에는 서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 '

 

광주여 영원히!' 라는 관현악 작품을 발표했다

오페라 심청

1983년엔 콧대 높기로 소문난  베를린 필하모닉’의 탄생 100주년 기념곡인 ‘교향곡 1번’을 작곡했다.

 

작곡한 오페라, 교향곡 등만 해도 무려 154편에 달한다  유럽의 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작곡가”라고 상찬했다

윤이상 선생의 대한민국 여권과 독일 여권

윤이상 선생이 평소 소지했던 태극기

서양 악기를 가지고 한국 전통 음악을 연주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서양 현대음악 작곡법에

 

불협화음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어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었다. 지금에도 서양의 주요 작곡법 교재에

 

그의 이름 윤이상이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한국에서 보다는 서양(특히 독일)에서 더 유명하다

- 독일에서 받은 훈장

윤이상 첼로

윤이상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약 다섯 달 전에 결혼했는데, 상대는 부산사범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던

 

이수자였다. ,처음에는 윤이상이 결핵 환자였다고 해서 이수자 집안의 반대가 대단히 심했다고 한다. 결혼 직후

 

딸인 윤정이 태어났고 아들인 윤우경은 1954년에 태어났다

윤이상 자신의 악곡 해설문을 보면 핵전쟁의 위협이나 인종차별, 인권유린, 환경오염 등의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내용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독일에서 기증받은 윤이상이 타던 승용차

 

윤이상 기념공원에는 기념관 건물과 윤이상의 베를린 집,

 

가 타던 벤츠 승용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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