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의 금관총 주변의 모습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진을 향하고 있는 나라(신라)가 있으니 눈부신 금은채색이 그 나라에 많다고 되어 있다
12세기 때 아랍의 알 이드리시가 쓴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신라에는 금이 너무 흔해서 개의 목걸이도
금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금관총 ㅡ128호분(사적 제39호)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는 역사서 `<일본사기>`에 기록된
“경주는 일본에게 예를 바치며 항복한 나라”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
임나일본부설은 3세기 일본의 진구왕후가 오진 일왕을 임신한 채 한반도에 출병해 신라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해진다. 그리고 진구왕후의 일본군이 영일만을 거쳐 신라 땅에 상륙하자
당시 신라 임금이던 파사 이사금이 스스로 몸을 묶고 나와 말과 마구 등을 바치며 항복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시대 엽서속의 봉황대 옆의 기와집이 성덕대왕 신종이
걸려 있던 종각으로 1915년 이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진구왕후의 정벌에 뒤이어 고대 한반도 남부 임라(가야·마한) 지역이 신라군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의 남부 지역인 가야 지방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근 200년간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진구왕후의 정벌과 임나일본부 설치로
백제, 신라의 강역은 일본 땅이 됐으나, 이후 당을 끌어들인 신라의 배신으로 결국 일본에서 떨어져나가
잊혀진 영토가 됐다는 그들만의 일방적인 일본의 고대 한반도 지배 역사를 내세우며
일제강점기 경주시 노서동의 금관총은 `한반도 식민지배의 정당성과 근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의 `고적 조사사업` 와중에 예기치 않게 찾게된 고분 중 하나다.
일제강점기 때 금관총
사진에서 보다시피 경주에는 많은 옛 왕릉들 바로 옆까지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당시에는
대부분 단순한 언덕 정도로 치부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경주시 노서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이 장사가 잘돼 집 증축 공사를 하였는데 그때 아이들이 흙속에서 구슬들을 발견하여
가지고 노는 것을 지나던 일본 경찰이 우연히 보았고 . 뒤뜰을 파자 장신구류·
무기류 등 4만 여점의 화려한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경주보통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왼쪽) 경주박물관 초대관장 모로가 히데오(오른쪽)
이틀 후 비전문가들인 모로가 히데오와 오사카 긴타로가 나흘 만에 유물만 수습하고 발굴을 마쳤다
일제는 “금관총 황금유물은 1877년 중앙아시아에서 확인된 옥수스 출토품을 능가한다”면서 “‘
우리 일본 영토’에서 처음 발견됐고,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두드러진 고분 발견의 예”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사지왕’이 새겨진 금관총 큰칼
1921년 조선총독부가 4~5세기의 고분으로 알려진 경주 금관총을 발굴했을 떄 '발굴된
큰칼에는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무덤에서 왕명이 발견된 건 처음이다.
이사지왕(爾斯智王)''이란 명문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금석문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는 어떤 왕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
금관총에서는 금관 뿐 아니라 금제관모, 관식, 금제 허리띠는 물론 허리춤에 찬 환두대도까지 확인됐다.
피장자의 지위가 최상위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금관총을 비롯한 황금유물은 신라시대 대규모 적석목곽분이 유행했던 마립간 시대의 산물로 여겨진다.
마립간 시대라 하면,.
이사지왕’이 새겨진 금관총 큰칼
17대 내물(재위 356~402년)~
18대 실성(402~417)~
19대 눌지(417~458)~
20대 자비(458~479)~
21대 소지(479~500)~
22대 지증(500~514년) 사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이 6명의 마립간 가운데 한 명일 가능성으로 추정한다
신라는 ‘신라=황금의 나라’였다. 중세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알 이드리시(1099~1166)는 “신라에서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천애갈망자의 산책>)고 했다
. <일본서기>도 “일본의 진을 향한 나라(신라)에는 눈부신 금은채색이 많다”고 기록했다.
<삼국유사> ‘진한’조는 “신라에는 39곳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고 전했다.
신라에서 군주의 칭호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으로
신라 256년 제17대 내물왕이 왕위에 오르자 임시 사용하던:"이사금"이란 왕호 대신 가장 높은 지위란 뜻의
마립간(麻立干) 으로 바꾸었다 . "'마립'"이란 말뚝을 의미하며, '간'은 몽골의 '칸'과 같이 왕이나 우두머리를
뜻한다. 궁궐 마당에서 왕의 말뚝이 가장 높은 곳에 놓여있었던 데서 '마립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다 22대 지증왕 503년에 나라 이름을"신라"로 정하고 마립간에서 중국식으로 "왕"으로 바꾸었다
이와 함께 고대국가의 기틀이 갖춰졌다
마립간 시기의 돌무지덧널 무덤은 규모가 크고 부장품이 화려하였다 이것은 현실에서의 지위나 권세가
사후에도 이어진다는 믿음을 반영하였다 이후 불교의 수용과 돌방무덤의 도입은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돌을 다듬어 무덤을 만들면서 이전에는 없던 장식적인 조각기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금관총은 고신라 최고 지배층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널 내부에는 금관·귀걸이·팔찌·반지·허리띠·신발 등의 장신구로 치장하고 머리를 동쪽에 둔 유해가
1구 안치되어 있었으며, 관의 둘레에는 수백 개의 덩이쇠와 주조철도끼가 부장되어 있었다
금관총은 475년에서 500년 사에에 축조된 무덤이다
금관총 금관과 금제 허리띠(국보)
금관총에 묻힌 이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등을 차고 있었다
머리 위쪽 부장품을 담은 상자에는 그릇 장식품 말갖춤 등 많은 보물들이 담겨 있었다
금제 허리띠(국보)
금제허리띠(국보 제88호)
사상 처음으로 확인된 신라금관
봉황대의 주인공과 ‘금관총’ 주인공은 어떤 관계일까?
금관총의 주인공은 여자인가. 남자인가?
여자라면 봉황대 왕의 ‘왕비’일까?
곱은옥과 다양한 달개는 생명력과 영원성을, 황금빛은 절대 권력과 부를 나타냈다
금관총 금관(국보)
최초로 금관이 발견되어 금관총이라 한다
금관은 실용관인가 장례용인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바로 금관총 금관의 서툰 마무리이다.
이 금관의 관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구멍들이 상하 2줄로 촘촘히 뚫려있다. 원래 달개나 곡옥 등을 매달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유는 몰라도 미리 만든 2줄 구멍에 장식을 매달지 않고 새롭게
3줄 구멍을 뚫어 곡옥과 달개를 달았다. 관테를 만드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그런데 왜 다시 만들지 않고,
실수한 부분을 그냥 둔 채 3줄 구멍을 다시 뚫었을까. 만약 왕이 생전에 사용했다면 이런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다시 새 재료를 썼을 것이다.아무리 임금이라도 장례용이기에 약간의 실수에도 그냥 넘어간 게 아닐까.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전시중인 금관총 유물
최초로 발견된 신라금관-ㅡ금관총 금관(국보)
금관의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 세움 장식은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체를 형상화했다.
새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전령으로 여겨진다
학계에서는 항공사진에서 드러나는 고분들의 분포를 볼 때 금관총이 봉황대의 '딸린무덤(陪塚·배총)'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배총은 부부나 형제, 군신 관계의 시신을 근처에 묻는 것을 말한다. 봉황대와 가까운 금관총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도 근거가 된다. 만약 재발굴에서 금관총과 봉황대를 잇는 묘도
(墓道·묘 사이를 잇는 길)가 나오면 무덤의 주인이 봉황대 피장자의 아내일 수 있다는 추정을 했다
금령총은 1924년에 일본인 "우메하라"에 의하여 발굴된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부장품 가운데 특이한
금제 방울이 들어 있어서 ‘금령총’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고분의 연대는 6세기 초반에 조성된
걸로 추정된다. 이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금령총 금관, 금제 허리띠, 감옥팔찌 등의 장신구를 위시하여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채화칠기, 유리용기 등 많은 유물들이 있었다
금령총(127호 고분)
금관이 최초로 발견된 금관총과 금령총은 불과 50여 미터 떨어져 있다..
그러나 금관총은 집을 짓던 중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무덤의 형태나 금관이 어떻게 출토되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일제의 고고학자는 조선총독부 총독을 설득해서 남아 있는 무덤 중에 봉분
일부가 훼손된 두 무덤을 발굴하게 된다. 이 무덤이 금령총과 식리총이었다. 결국 금관총에
이어 두 번째로 금관이 출토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금령총 (127호 고분) 발굴 작업 현장 모습(조선총독부 유리건판)
이 금령총과 식리총은 무덤 주체부가 도굴당하지 않은 경주 고분의 첫 번째 학술적 발굴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보고서도 그 수준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금령총 금관(보물)
금관총 발굴 다음 일제는 3년 뒤(1924년) 봉황대(125호)에 딸린 고분을 정식발굴한다.
그것이 금령총(127호)이다. 이 고분의 주인공은 ‘5~6살 어린 왕자’(6세기 초)로 특정된다. 왜냐하면
.
금령총에서는 금관·귀고리·허리띠·목걸이·팔찌 등 금제 장신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주인공이 누워있던 자리에서 노출된 장신구로 키를 재보니 90~1m 안팎이었다.
금령(금방울)
금령총은 피장자의 허리 부근과 출토된 금관의 드리개에 특이하게 금으로 만든
방울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금제허리띠
피장자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금 귀걸이와 허리띠를 했으며 허리에는 칼을 찼다. 유물이 화려해서
신라 왕족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가는고리 귀걸이와 칼을 찼으니 남자로 추정된다
특이한 점은 금령총의 허리띠 길이가 다른 것과 달리 무척 짧고 금관도 다른 금관에 비해 작아서
어쩌면 무덤 주인은 어려서 죽은 왕자라고 추정한다
유리그릇
식리총, 금령총, 금관총 등의 발굴탐사 결과로 미루어볼 때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을
살았던 왕 또는,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측된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금령총 출토 목걸이
배모양 토기
신라왕실의 주전자, 도제기마인물상토기
하늘로 주인을 안내하는 듯, 하인상이 주인상 앞에 놓인 채로 발견되었다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 허리띠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가 출토됐는데,
피장자 머리맡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가 특히 유명하다
도제기마인물상 토기(국보 제91호)
도제’는 잿물을 덮지 않은 진흙으로 구워 만든 토기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초기는
아직 유약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이 무렵 토기는 잿물을 바르지 않고 구워 대부분 표면이
반들반들하지 않고 다소 거칠었다 말 등에는 깔때기처럼 생긴 구멍이 있어 액체를 넣고,
말 가슴에는 대롱이 있어 액체를 따를 수 있다. 이 토기는 신라 왕실에서 술이나
물을 따르는 데 쓰던 주자(注子-주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