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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천 선생 교유록 상세. 목차는 미리 올린 자료 참고

작성자낙민|작성시간11.08.04|조회수451 목록 댓글 0

운천 선생 교유록

 

이 교유록은 운천선생 문집과 타 문집을 참고하여 선생과 관련이 있는 분들을 연령 별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선생과 저의 선조 여헌 선생과는 교분이 있으셨고 여헌 선생이 지은 운천 선생에 대한 만사가 운천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아래 장현광 조 참고), 편의상 교유록이라 하였습니다.

뒤에 선생과 관련된 자료를 첨부하였습니다.   장달수 배

 

                                                                                             인동 장달수 집록

 

학봉선생

*이십오일 낮에 청로역(靑鷺驛)에서 쉬면서 황회원(黃會元) 여일(汝一) 이 지은 시의 운을 차운하여 표질(表姪) 민순원(閔順原)과 조카 용(涌)에게 작별하면서 주다.

비 온 뒤에 산 꽃이 눈 안으로 새로 드니 / 雨後山花入眼新

동군이 먼 길 감을 위로하는 것이리라 / 東君應慰遠遊人

서산 너머 지는 해 무슨 수로 붙잡아서 / 何方住得西飛日

이번 길에 해외의 봄 겸하여서 볼거나 / 此去兼看海外春

경인년(1590, 선조 23) 3월에 길을 떠나서 신묘년(1591, 선조 24) 2월에야 겨우 돌아왔으니, 이 역시 시참(詩讖)이다.

 

[주]동군(東君) : 사계절 가운데 봄을 맡은 신의 이름이다

 

*신공직(辛公直) 및 조카 용(涌)과 더불어 청성(靑城)에서 놀다가 명월청풍(明月淸風)으로 운자를 삼았는데, ‘명(明)’ 자 운으로 짓다.

늦게 금계 나서자 갠 하늘 밝은데 / 晚出金溪霽色明

가파른 산 오르자니 산세 몹시 험하네 / 危岑一上勢崢嶸

중천의 해와 달은 바위 곁을 지나가고 / 中天日月巖邊過

너른 땅 산과 시내 눈 아래에 평평하네 / 大地山河眼底平

(주1)구름 속서 개 짖으니 기국 있는 줄 알겠고 / 雲吠夜聞知有杞

아침 나절 (주2)하표 이니 그 누구의 성이런가 / 霞標朝起問誰城

좋을세라 이내 몸이 속세를 초월하니 / 好將身世超煙火

뜬 이름은 깃털보다 가벼운 줄 깨닫겠네 / 更覺浮名一羽輕

 

[주1]구름 …… 알겠고 : 하늘 위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때 유안(劉安)의 가족이 단약을 달여 먹고 모두 신선이 되어 승천(昇天)하였다. 그때 단약(丹藥)을 달이던 솥이 그대로 유안의 집 뜰에 남아 있었는데, 유안의 집에 있던 닭과 개가 솥 속에 남아 있던 단약을 먹고는 모두 승천하여, 닭은 하늘 위에서 울고 개는 구름 속에서 짖었다고 한다. 기국(杞國)은 기우(杞憂)의 고사에 나오는 나라이다. 《神仙傳 劉安》

[주2]하표(霞標) :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擧而建標]”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붉은 노을을 가리킨다. 《文選 卷6》

*운정(雲亭)에 도착해서 조카 용(涌)에게 보여 주다. 방의 천장에 두보(杜甫)의 율시(律詩) 72수가 씌어 있는데, 둘째 형님이 직접 쓴 것이었기에 느낌이 있어서 읊었다.

 

묵은 자취 어디에서 찾아볼 건가 / 陳迹尋何處

나무로 된 천장에 쓴 시구절 있네 / 銀鉤倒木天

정신이야 해와 달과 빛 다투는데 / 精神爭白日

아름다운 옥 황천에 묻히어 있네 / 奎璧掩黃泉

 

*조카 김용(金涌), 김약(金瀹), 김철(金澈), 유복기(柳復起), 유인영(柳仁榮)에게 부치는 편지 임진년(1592, 선조 25)

국사(國事)가 이에 이르렀으니 통곡이나 할 뿐,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희들은 어버이를 모시고 어느 곳에서 피난하고 있느냐? 청기(靑起) 땅은 아주 깊숙하고 궁벽한 곳이고 또 일위산(日圍山)이 있으니, 생각건대 온 집안의 골육들이 이곳에 모여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알 길이 없으니 애통한 마음이 어떠하겠느냐.

나는 4월 중에 명을 받들고 이곳으로 왔는데, 다행히도 의병들의 힘에 의지하여 10여 개의 고을을 보전하고 오늘까지 이르렀지만, 왜적들이 사방에 꽉 차 있으므로 지탱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을 이미 결단하였으니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오직 너희들이 지역을 잘 골라 피난하여 골육을 보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당(祠堂)의 신주(神主)는 어디에다 봉안하였느냐?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다. 내 처자식들은 서울에서 도망하여 달아난 후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묘연하여 알 길이 없으니, 애통하고 애통하다.

그곳에서는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안집사(安集使)가 불러 모으고 있지 않는가? 열읍에서 도망하여 숨어만 있는 것은 적에게 항복하거나 붙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러다가는 온 나라가 마침내 오랑캐가 되고 말 것이니, 어쩌면 그리도 생각이 얕단 말인가. 본도는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으므로 적에게 대항할 수 있는데, 좌도는 그렇지 못하니, 또한 부끄럽지 않겠는가. 살아서는 열사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이 될 것이니, 너희들도 의당 힘써야 할 것이다.

편지를 쓰자니 망연하여 할 말을 모르겠으므로 이만 줄인다.

 

*제문(祭文) 조카 용(涌)

강직하고 정대한 기운에다가 / 剛大之氣

맑고도 순수한 자질이었네 / 淸純之質

재주는 하늘에서 타고났고 / 才惟天授

덕은 바로 마음속에서 얻었다네 / 德是心得

일찌감치 가정에서 가르침 받아 / 早承庭訓

뜻은 바깥 시끄러움 사절하였고 / 志絶外紛

퇴계 선생 문하에서 종유했기에 / 從遊退陶

배운 학문 연원이 있게 되었네 / 學有淵源

지향하여 나아감이 바른 데다가 / 趨向旣正

실천하여 나아감도 독실하였네 / 踐履又實

임금 계신 대궐에서 대책 올리니 / 對策龍墀

나라의 기둥 같은 신하 되었네 / 作楨王國

한원에서 아름다운 이름 날렸고 / 蜚英翰苑

대각에선 기강을 진작시켰네 / 振綱臺閣

들어가 임금 앞에서 직언을 하니 / 入犯天顔

간사한 무리들의 혼 달아났고 / 姦黨褫魄

나아가서 어사 되어 안찰을 하자 / 出持霜斧

탐오한 자 모두가 벌벌 떨었네 / 貪夫股慄

아, 바른 도를 행하였으니 / 嗟哉直道

용납되지 않은 것이 뭐 억울하리 / 不容何病

백 리에 맑은 바람 불게 되었고 / 百里淸風

삼 년 동안 은혜로운 정사 펼쳤네 / 三年惠政

불쌍한 사람들은 봉양받았고 / 鰥寡有養

강포한 자들 모두 꼼짝 못 했네 / 豪猾無橫

원망 해소시키는 건 공평하였고 / 解寃以公

옥사 심리하면서는 밝게 하였네 / 折獄惟明

알겠구나 군자는 / 乃知君子

어느 경우 처하여도 맘 편안함을 / 隨遇而安

영욕이나 진퇴나 어느 경우도 / 榮辱進退

한결같은 마음 마치 단약 같았네 / 一心如丹

예로부터 어려웁게 여기었나니 / 古難其選

전대하는 말 잘하는 사람 얻는 걸 / 專對之辭

숙부께선 명 나라에 조회 가서는 / 叔父朝天

난새나 봉새 같은 풍채였었네 / 鸞翔鳳儀

우리 임금 품고 있던 지극한 정성 / 吾王至誠

명백하게 중국에다 진달하여서 / 誕敷明白

백 년 동안 내려온 더러운 치욕 / 百年垢辱

지금에야 깨끗하게 씻게 되었네 / 從今始雪

어렵고도 복잡한 일 안 당한다면 / 不遇盤根

날카로운 재주 어찌 구별하리오 / 利器何別

숙부께선 바다 건너 사신 가면서 / 叔父入海

용 깃발에 옥으로 된 부절 들었네 / 龍旗玉節

충성심과 의로운 맘 굳게 지키니 / 仗忠與義

오랑캐들 공경하며 감복하였네 / 獰心敬服

오랑캐 땅에서도 행할 수 있단 / 蠻貊可行

성인의 가르침은 안 틀린 거네 / 聖訓不忒

저들은 그 어떠한 사람이기에 / 彼何人斯

겁먹고서 황당한 말 늘어놓았나 / 恇怯謬悠

명 욕되게 하고서도 수치 모른 채 / 辱命無恥

살아날 길 찾으려는 꾀만 내었네 / 偷生是謀

숫양에서 젖 나오면 나올지언정 / 羝羊可乳

어찌 감히 절개 변할 수가 있으랴 / 其敢有渝

마침내 온전하게 절개 보존해 / 竟全其節

문충공이 외롭지 않게 되었네 / 文忠不孤

슬프다 뭇사람들 지껄여대나 / 吁嗟衆咻

내가 품은 속마음을 그 누가 알리 / 孰知余情

높은 관작 내려 총애 보이었으나 / 寵以高秩

공에게는 영광스런 일 아니었네 / 匪公之榮

반년 동안 성균관을 맡게 되어선 / 半歲國學

선비들이 본받을 바가 있었네 / 士有標的

몇 달 동안 경연에서 임금 모시매 / 數月經筵

임금에겐 병 치료할 약석 있었네 / 君有藥石

조야에서 서로들 경하하였고 / 朝野相慶

조정의 기강 몹시 엄숙해졌네 / 王綱載肅

그러나 어쩌리오 열흘 추운데 / 如何十寒

하루 햇볕 그 무슨 소용 있으랴 / 無賴一曝

아침에는 은대에서 모시었다가 / 朝侍銀臺

저녁에는 바닷가를 지키게 됐네 / 暮戍海關

나랏일에 혼자서만 어질었으니 / 獨賢王事

어렵고 험한 것을 어찌 꺼리랴 / 寧憚險艱

아,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痛哉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서 / 國運不幸

섬오랑캐 갑자기 쳐들어왔네 / 島夷猝發

우리들이 태평에 물든 틈을 타 / 乘我狃安

전갈 같은 독을 맘껏 내뿜었다네 / 肆其蠆毒

여러 진의 장수들이 도망쳐 숨어 / 列將鼠竄

장성이 토붕와해되고 말았네 / 長城瓦裂

임금께서 변방으로 파천을 하고 / 鑾輿塞外

대궐은 무너져서 폐허되었네 / 鳳闕丘墟

팔도에는 사내들 하나도 없고 / 八道無男

만백성들 모두 다 어육되었네 / 萬姓其魚

아아, 우리 숙부 그 분께서는 / 猗歟叔父

충성심은 천성에서 나온 거였네 / 忠出其性

앞장 서서 왜적들을 막아섰나니 / 挺身當賊

강풍 불자 꼿꼿한 풀 알게 되었네 / 疾風知勁

하늘의 꾸지람은 되레 엄하니 / 天譴反嚴

충성스런 신하를 누가 알리오 / 誠臣誰識

얼마 뒤에 용서하는 명이 내리어 / 俄蒙宥命

하늘 해가 마음속을 비추었다네 / 日照衷曲

마음속에 맹세하고 일어나서는 / 誓心而起

각 고을에 격문을 돌리었다네 / 傳檄列邑

충의로운 계책 이미 다 서 있었고 / 忠謀旣立

열사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네 / 烈士爭集

굳세고도 날래었던 곽재우(郭再祐) 장군 / 桓桓郭將

붓 던지고 갑옷을 몸에 걸쳤고 / 投筆荷甲

용감하고 씩씩했던 김면(金沔) 장군은 / 仡仡金公

자기 재산 다 털어서 의병 모았네 / 傾財募兵

기꺼이 목숨 바쳐 싸우려 했고 / 人樂赴死

물러나서 살 생각을 하지 않았네 / 孰思退生

의로운 깃발 한번 내휘두르자 / 義旗一揮

흉적들이 사방에서 꺾이어졌네 / 兇鋒四挫

영명한 소문이 널리 퍼지매 / 英聲遠馳

행재소에선 감격스런 눈물 흘렸네 / 行在感泣

나라 지킬 간성처럼 의지하면서 / 倚爲干城

경상 감사 직임을 떠맡기었네 / 委任方伯

숙부께선 제수 명령 받으신 뒤에 / 叔父受命

더욱더 조심스런 마음 가졌네 / 益自兢惕

각 고을 수령들을 책려하면서 / 策勵守宰

사민들을 불러모아 위무하였네 / 招撫士民

그때그때 임기응변 계책을 써서 / 臨機應變

상황 따라 대처함이 귀신 같았네 / 所在如神

우두령을 넘는 왜적 길을 끊으매 / 截彼牛頭

거창이 이로 인해 진압되었네 / 居昌之鎭

성채를 세우고 깃발 세운 뒤 / 豎柵列幟

그 자리서 적진을 쓸어 버렸네 / 坐鏖賊陣

우뚝하니 높다란 진주의 성은 / 額額晉城

영남과 호남 지방 보장이었네 / 湖嶺保障

병기를 날카롭게 수리한 뒤에 / 修以利兵

이름난 장수 시켜 지키게 하여 / 守以名將

강포했던 저 왜적들로 하여금 / 能使强寇

백 번 싸워 백 번 다 도망케 했네 / 百戰百鈍

처음에는 함락될까 의심했다가 / 始疑鯨呑

마침내는 달아나는 꼴을 보았네 / 終見星遁

숙부께서 세웠던 여러 계책을 / 凡諸義略

그 어찌 하나하나 다 기록하리 / 曷可殫錄

배반했던 자들은 귀순하였고 / 反側歸順

겁을 먹고 있던 자들 뜻을 세웠네 / 頑懦有立

신하의 직분 거의 모두 다하여 / 庶盡臣職

왕업을 회복할 수 있었건마는 / 恢復漢業

그 어찌 알았으랴 군영 위에서 / 那知蜀營

갑작스레 장수 별이 떨어질 줄을 / 遽驚星隕

푸르른 저 하늘은 아득만 하니 / 彼蒼茫茫

왜 그랬나 따져 물을 길이 없구나 / 無從詰問

오랑캐들 기뻐하며 술을 따르고 / 夷人酌酒

해로운 기운 더욱 성하여졌네 / 害氣彌盛

차마 도륙 당하는 걸 그대로 보며 / 忍見屠戮

그 누구도 구원해 줄 생각 안 하네 / 誰知急病

영령께선 죽지 아니하였을 거니 / 英靈不死

눈 감으려 해도 눈을 감지 못하리 / 暝目無地

지리산 기슭에 몸 묻히는 것이 / 葬我衡山

숙부님의 평소 품은 뜻이었으니 / 乃其素志

고향의 선산으로 모셔 오는 건 / 歸之鄕隴

죄가 실로 조카에게 있는 것이네 / 罪在猶子

아,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痛哉

옛날에 우리 집안 조상들께선 / 昔我先祖

덕 쌓아서 집안을 일으키었네 / 積德家庭

제부님들 다섯 형제 분들을 보고 / 諸父五人

사람들은 다섯 개의 별에 비했네 / 人比五星

삼형제가 한꺼번에 과거 급제해 / 搴蓮折桂

나란히 아름다운 이름 날렸네 / 幷美聯馨

잔약한 후손들이 죄를 얻어서 / 孱孫獲戾

화환이 잇달아서 계속되었네 / 禍患相繼

통곡한들 그 무슨 소용 있으며 / 痛哭何歸

부여잡고 가슴 쳐도 미칠 길 없네 / 攀擗無逮

그런 중에 믿을 바가 있었던 것은 / 猶有所恃

숙부께서 살아 당에 계신 거였네 / 叔父在堂

축원하길 우뚝 솟은 저 남산처럼 / 祝以南山

오래오래 사시라고 하였건마는 / 眉壽無疆

어찌하여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 / 胡然今日

나에게 긴 상심을 짓게 하는가 / 使我永傷

나 자신을 돌아봄에 우매하여서 / 顧我顓蒙

남들에 비해 볼 때 훨씬 못났네 / 於人無狀

그런데도 충신과 효제에 대해 / 忠信孝悌

면려하고 장려함을 받았었다네 / 幾承勉獎

한 가지 재행을 보기만 하면 / 見一才行

반드시 착하다고 추켜 주었고 / 必加推美

하나라도 못된 일을 듣기만 하면 / 聞一不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책했네 / 必先責己

조카인 내가 과거 급제하여서 / 姪冒科第

사국에서 직책을 맡고 있을 때 / 待罪史局

공께서는 승문원을 맡고 있었네 / 公掌絲綸

둘이 함께 대궐 안에 들어갔을 때 / 同入禁闥

틈을 타 곁에서 모실 적에는 / 乘間侍側

날 깨우쳐 주는 말 지극하였네 / 誨我切至

받들어 모시면서 주선을 하매 / 奉以周旋

그 말소리 항상 귀에 아른거렸네 / 言尙在耳

조카인 내가 객지 머물러 있다 / 姪臥旅舍

역질에 걸려 병석 누워 있을 때 / 遘癘疫疾

숙부께서 의원을 불러온 뒤에 / 公迎良醫

종시토록 약 달여서 치료하시매 / 終始治藥

지극한 그 정성에 하늘 감동해 / 至誠所感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네 / 回命旣絶

그 은혜는 날 낳아 준 것과 같은데 / 恩同生我

보답을 하려 해도 할 길이 없네 / 欲報罔極

부월을 손에 잡고 가던 즈음엔 / 仗鉞之秋

말 머리를 동쪽으로 돌려 달렸지 / 駟馬東首

영남 서쪽 나눠 맡아 다스리면서 / 治分陜西

낙동강 오른쪽 향하여 갔지 / 旋向江右

이별에 임하여서 내게 말하길 / 臨別謂我

너는 헛된 죽음하지 말라 하셨네 / 爾毋徒死

두 번을 절하고서 그 말 받들고 / 再拜而受

남몰래 나의 기운 북돋았다네 / 竊自增氣

지난해 봄엔 편지 한 통을 써서 / 去春一書

나와 내 동생에게 보내 주셨지 / 貽我及弟

그 편지에 말하기를 난 병들어서 / 曰余憂瘁

앞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 將不久世

우리 집안 일으켜서 세울 희망이 / 門戶之望

너희에게 달려 있다 말씀하셨지 / 汝等是屬

그 무슨 뜻으로 이 말 하셨나 / 何意斯言

이게 바로 영결하는 말이 되었네 / 乃是永訣

부끄럽네 불초한 나는 못나서 / 愧我不肖

이처럼 온갖 재앙 만나게 되어 / 逢此百罹

한 해 넘게 군대에 종사하면서 / 從軍歲餘

변방까지 임금 수레 호위하느라 / 扈駕天涯

염습할 땐 관 곁에 있지 못했고 / 殮未憑棺

장사 때는 여차에 있지 못했네 / 喪未居次

천리 먼 길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 歸來千里

어느 사이 장사한 뒤 일 년 지났네 / 倏經一祀

무덤 위의 묵은 풀은 황량해졌고 / 宿草已荒

따스했던 숙부 얼굴 뵈올 길 없네 / 溫顔莫承

내 마음의 애통스런 심정 말하면 / 余懷之痛

태산이 무너져 내린 것 같네 / 泰山之崩

통곡해도 이내 슬픔 다할 수 없고 / 哭不盡哀

말을 해도 이내 심정 다할 수 없네 / 言不盡情

막걸리로 간략하게 전을 올리니 / 酸醪薄奠

저의 작은 정성을 살펴 주소서 / 鑑在微誠

아,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 嗚呼痛哉

 

* 숙부 학봉선생 언행록

○ 선생께서는 품부받은 기질이 맑고 순수하였으며 마음속이 화락하고 단아하였다. 도를 들은 것이 이미 빨랐고 학문을 강론한 것은 근원이 있었으며, 덕이 혼후하면서도 강직하였고 행실은 독실하면서도 올발랐다. 다른 사람에게서 선을 취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데에 밝았으며, 자신의 허물을 듣기를 좋아하고 의(義)로 옮겨 가는 데에는 용감하였다.

게으르고 나태한 기색을 몸에 나타내지 않았고,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의연하여 범하기 어려운 모습이 있었고, 확연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풍채를 보는 자들은 추하고 사나운 습관을 끊었고, 덕스러운 모습을 보는 자들은 그릇되고 편벽된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이에 사림(士林)에서는 태산(泰山)이나 북두(北斗)와 같이 우러러보았고, 조야(朝野)에서는 주석(柱石)의 신하처럼 의지하였다.

○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 법도가 있었고, 남녀 간에 구별이 있었다. 매번 정초와 동지, 초하루와 보름날 및 집안 어른의 생신날에는 자제들을 당 위에 모이게 한 다음, 남자는 왼쪽에 자리하되 서쪽을 상석으로 하고, 여자는 오른쪽에 자리하되 동쪽을 상석으로 하여, 순서대로 서서 참알(參謁)하게 하였는데, 남자는 두 번 절하고 여자는 네 번 절하게 하였다. 노비들의 경우에는 오직 정초에만 순서대로 서서 한꺼번에 절하게 하였다. 이에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어른을 섬김에 있어서 공손하게 읍하는 예를 알았다.

○ 어느 날엔가 자제들에게 검(劍)을 나누어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가 검을 나누어 주는 뜻을 알겠느냐? 모름지기 이 검으로 의(義)와 이(利)의 빗장을 깨뜨려서 취하고 버릴 것을 구별하기 바란다.” 하였다.

○ 임진년(1592, 선조 25)에 숙부(叔父)께서 우도 감사로 부임할 때 부진(府鎭)에서 나아가 길 옆에서 배사(拜辭)하였는데, 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속히 부진으로 돌아가서 향병(鄕兵)을 일으켜 헛되이 죽지 말라.” 하였다.

○ 숙부의 충효(忠孝)의 큰 절개는 국사에 기록되고 사람들의 입에 전해지는 것이 비록 더러 빠진 것이 있기는 하나, 천 길 높이 봉황이 날아오르고 백일(白日) 아래에서 우레처럼 치달리니, 그 누가 상서로운 세상의 표상이요 하늘까지 울릴 소리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내가 집안에서 평소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으로써 말한다면, 숙부의 선을 향하는 성심과 도를 믿는 독실함은 마치 물이 반드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고 화살이 과녁을 향하는 것과 같아서, 외지고 어두운 곳이라고 해서 혹시라도 방심하지 않았고, 자잘하고 하찮은 일이라고 해서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의리(義利)와 공사(公私)의 구분에 있어서는 털끝만한 것이라도 살피지 아니함이 없었고, 사물을 응접할 즈음에는 정리(情理)가 각각 적당함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옛것을 이어받아 지금에 미루어 나가고, 효성을 옮겨서 충성을 하며, 평상시나 험난할 때나 지조를 지켜 삶과 죽음을 한결같이 하였다. 이것은 진실로 귀신에게 물어 보아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이상은 조카 김용(金涌)의 기록이다.

 

先生稟質淸純。中心愷悌。聞道旣蚤。講學有源。德渾而剛。行篤而正。樂取諸人而明於責己。喜聞其過而勇於徙義。惰慢之氣。不設於身上。鄙吝之萌。不存於胸中。毅然有難犯之容。確然有不可奪之志。故覩形者。絶麤厲之習。覿德者。消非僻之心。士林仰如山斗。朝野倚爲屛翰。

治家有法。男女有別。每正, 至, 朔, 望及家長上壽之日。令子弟聚會堂上。丈夫處左西上。婦人處右東上。序立參謁。丈夫再拜。婦人四拜。奴婢則惟於正朝序立羅拜。一家之人。皆知事長揖遜之禮矣。

一日。以劍分贈子弟曰。汝等知所以贈劍之意乎。須以此斬斷義利之關。以別其取舍也。

壬辰。赴右監司時。自府鎭往拜辭于道側。叔父顧謂曰。速還府鎭。倡率鄕兵。無徒死也。

叔父忠孝大節。著於國乘。銘諸人口。雖或有所遺載。而鳳凰翔于千仞。轟雷馳乎白日。孰不知爲瑞世之表。掀天之聲也。猥以家庭平日所耳擩而目染者言之。則嚮善之誠。信道之篤。如水必東。如矢注的。不以幽暗而或間。不以細微而或忽。義利公私之分。毫釐不容不察。事物應接之際。情理各得其當。故述古而推今。移孝而爲忠。夷險一節。死生以之者。誠可謂質諸鬼神而無疑矣。以上。從子 涌 錄。

 

이숙량(李叔樑)1519년(중종 14)∼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호조참판 농암 현보(賢輔)의 아들이다.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는데,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필법은 절묘하였다고 한다.

1543년(중종 3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업(科業)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만 치중하였는데, 후일 천거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격문을 지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기도 하였으나 난중에 죽었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매암집

 

* 만사 金涌[雲川]

 

烏鳥私情喜有施, 斑衣相暎碧江湄, 那知換揭堂名處, 愛日情爲抱樹悲,

四仙人會一淸川, 千仞高標洒洒然, 怊悵只今鸞鶴去, 碧囱深鎖白雲篇,

 

조목(趙穆)1524년(중종 19)∼1606년(선조 39).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참판 대춘(大椿)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수익(受益)의 딸이다.

15세 때에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대과(大科)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피선되고,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녕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 및 금산·단양·합천 등의 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뒤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생장하여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이후로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퇴계선생의 문집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고,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 困知雜錄》이 있다.

 

운천집

 

*挽月川艄先生

齒德全來爵又崇。達尊天下孰如公。陶山函丈傳心後。陋巷簞瓢樂道中。

謂應壽星長耀彩。那知楹夢忽成空。前川依舊明寒月。此是先生萬古胸。

 

월천집

 

*次金道源

朋酒醺醺醉。松風陣陣凉。要看消暑地。詩語句冰霜。

 

김부륜(金富倫)1531년(중종 26)∼1598년(선조 31).

본관은 광산. 자는 돈서(敦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아버지는 생원 유(綏)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수홍(粹洪)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 1572년(선조 5)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5년에 전라도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수하고 봉급을 털어 서적 8백여 책을 구입하는 등 지방교육 진흥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또 학령(學令) 수십 조를 만들어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향병(鄕兵)을 도왔고, 봉화현감이 도망가자 가현감(假縣監)이 되어 선무에 힘썼다. 그리고 관찰사 김수(金晬)에게 적을 막는 3책(三策)을 올렸는데, 충심이 지극한 내용이었다.

김성일(金誠一)·이발(李潑)과 도의를 강마하였으며,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설월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다. 《대학》과 《심경》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예학에 대해서도 사우간에 많은 질의가 있었다.

저서로는 《설월당집》 6권이 있다.

 

설월당집

 

*送金道源涌還朝

 

遲遲去魯國。遠遠向秦宮。輕重權衡下。姸媸鑑藻中。

且看天遠大。莫問路西東。飮罷忽分手。馬牛千里風。

 

*別金道源

對榻披襟後。斑荊摻袖時。東風吹入座。西日照臨岐。

恨別腸堪斷。傷時淚自垂。匆匆無限意。都付酒三巵。

 

이공(李珙)1533년(중종 28)∼1583년(선조 1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공보(共甫), 호는 율원(栗園).

숙인(淑仁)의 아들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학문과 실천을 겸비하고 높은 덕과 절의로 당대인의 믿음과 존경을 받았다. 도사·교리·지평 등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당시 정계가 혼란하고 조신들이 당파싸움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음을 보고 이를 거절하였다.

조목(趙穆)·권호문(權好文) 등과 도의의 벗이 되었으며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풍암(楓巖)의 이사(里社)에 향사되었으며 저서로 《율원문집》이 있다.

 

율원집. 운천집

 

*운천선생이 지는 만사

 

輓詞 金涌

爵祿難辭同蹈刃、人間沈醉幾英豪、先生百歲 盤旋地、水自流長山自高、

婚姻之故忝相親、飽德年來若飮醇、草土餘生 遲一拜、郍知此日隔千春、

憶曾牀下拜龎公、叨襲淸風幾滌胸、嗟我未收 東野淚、一杯孤負送仙翁、

 

권춘란(權春蘭) 1539년(중종 34)∼1617년(광해군 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석충(錫忠)이며, 어머니는 함창김씨(咸昌金氏)이다.

백담 구봉령(具鳳齡)·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 등과 교유하였다.

1560년(명종 1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학유·학록을 거쳐 예문관검열·사헌부감찰·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였다.

1595년 정월 사헌부장령을 거쳐, 3월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6월 사간원사간에 임명되었다.

1597년 5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으며, 6월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그 뒤 성균관직강·사간원사간·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었다.

1599년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601년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1604년 홍문관수찬, 1606년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영천군수·홍문관부교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초야에서 글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스승 구봉령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완고(完稿)로 만들었고, 사림에서 구봉령을 모시기 위하여 주계서원(周溪書院)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주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진학도 進學圖》·《공문언행록 孔門言行錄》·《회곡집 晦谷集》 등이 있다.

 

운천집

 

*次權司諫春蘭鑑源亭韻

萬松蒼翠一間堂。虛檻前開半畝塘。天共徘徊雲影滿。溪通淸活玉流長。

高人對滌襟懷地。霽月明無彼此疆。聞道觀書深喩在。請將斯語問從傍。

請將斯語。一作請尋如許。

 

금응훈(琴應壎)1540년(중종 35)∼1616년(광해군 8). 예안 군자리

본관은 봉화. 자는 훈지(壎之), 호는 면진재(勉進齋).

훈도(訓導) 재(榟)의 아들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 1594년 학행에 의하여 영의정 유성룡 등의 천거를 받아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영춘현감과 양천현감 등을 역임하고 1601년 의흥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서애 유성룡과 월천 조목의 요청에 따라 사직하고 《퇴계선생문집》 간행실무자로 참여했다.

외관시에는 선정으로 명망이 높았고, 퇴관해서는 후진교육에 전력해 큰 성과가 있었다.

문집: 일휴 면진제 연고

 

운천집

 

*挽琴勉進齋應壎○二首

賢父兄家至樂全。師門所得又充然。忘憂萱背同姜被。推孝琴堂理宓絃。天豈無知仁有後。人誰不敬德兼年。騎龍此日公何憾。鏡裏飛鸞獨自憐。

鄕里稱賢士望尊。胸襟海闊氣春溫。平生孝友爲家政。暮境安閒絶世喧。山院幾多承謦欬。溪門況又忝姻婚。傷哉考德今何處。耆舊襄陽不復存。

 

김륵(金玏)1540년(중종 35)∼1616년(광해군 8).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

아버지는 진사 사명(士明)인데, 백부인 형조원외랑 사문(士文)에게 입양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8년 검열·전적을 거쳐서 예조원외랑·정언이 되었다.

1580년 전적 겸 서학교수가 되고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다.

이듬해 부수찬·지평·직강 등이 되고, 1584년 영월군수로 갔을 때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를 배알하고 제청(祭廳)·재실(齋室)·찬청(饌廳)을 묘 옆에 짓고 처음으로 ‘노산군’이라는 호칭을 신주(神主)에 써서 부인 송씨(宋氏)의 신위와 함께 모셔 신임군수마다 죽던 변을 막았다.

3년 후에 돌아와 선조로부터 많은 치하를 받고, 교리에 서용되고, 1590년 집의·사간·검열·사인·사성·사복시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안동부사가 되었다가, 경상도 안집사(安集使)로 영남에 가서, 충성스럽고 의기있는 선비들에게 국가의 뜻을 알리고, 왜적을 토벌하도록 장려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이듬해 경상우도관찰사가 되어 전라좌·우도의 곡식을 운반하여 기근이 든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이어 도승지·대사간·한성부우윤·대사성을 거쳐, 1594년 동지의금부사·이조참판·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시무16조〉를 상소하였는데, 모두 치안에 좋은 대책이라는 평을 들었다.

1599년 명나라 장수를 접반하고 형조참판에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612년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남아 있는 것처럼 꾸며 일본의 재침략을 막아 달라는 청을 올려, 명나라로부터 일본에게 재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칙서를 보내게 하고 돌아왔다. 곧, 대사성이 되고 안동부사로 나아가 범람하는 낙동강의 재해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수축하여 후세에까지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고 또 앞서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 별묘(別廟)의 의물(儀物)을 종묘의 의물과 똑같게 하는 것에 반대한 것과 관련되어 강릉으로 유배가게 되었는데, 여러 대신들의 변호로 풀려났다. 영천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백암문집》이 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고, 시호는 민절(敏節)이다.

 

운천집

 

*挽金栢巖玏○三首

 

二品還鄕孰不欽。稀年致仕遂初心。安閒自是身無累。淸白惟應帶有金。

雲寢水寮塵外靜。玉堂銀闕夢中深。莫言庭樹榮枯異。交映孫枝觸目琳。

儀容辭氣德之符。莊重安舒鄙倍無。惟孝友于家政事。盡忠貞耳國訏謨。

溪深臺下靈龜隱。山對軒前瘦鶴孤。誰識傳神長在此。丹靑何必寫眞圖。

追憶陪歡幾展眉。襟懷相照去毛皮。非惟托契潘楊好。自幸忘年管鮑知。

歲在龍蛇嗟不淑。官縻驪馬淚空垂。傷心昔日西亭別。卽是今生永訣時。

 

김우옹(金宇顒)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성주(星州) 출신.

본관은 의성.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아버지는 삼척부사 희삼(希參)이다.

남명 조식(曺植). 퇴계 이황(李滉)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역임하고,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오랫동안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 1583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속강목(續綱目)》 15권을 찬(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으로서, 서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에 대하여만은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동강선생 연보

十七年己丑先生五十歲十一月。謫會寧府。時鄭汝立以逆誅。株連之禍。濫及搢紳。先生爲白惟咸所構陷。亦不免。是行。仲氏開巖公自尙州馳到榮川。臨別贈詩。有唐公淮水舟何泊。韓子潮州馬不前之句。發行之日。無所乘。將未免徒行。雲川金公涌以書生在餞席。脫驂以進

 

홍진(洪進) 1541년(중종 36)∼1616년(광해군 8).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희고(希古). 호는 인재(訒齋)·퇴촌(退村).

명유 인우(仁祐)의 아들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가 되고 검열을 역임하였다.

1573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유선록(儒先錄)에 실린 조광조(趙光祖)의 시가 몇 수 안 되었는데, 5수를 찾아서 교서관에 보내 이를 보완하였다.

이듬해 홍문관박사가 되고 부수찬·정언을 거쳐 1576년 헌납이 되었는데, 너무 빠르게 승진하였다고 인혐(引嫌: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함.)하였다.

1583년 용담현령으로 나갔다가 1589년 응교가 되어 때마침 여역(癘疫)이 만연하자 충청도에 파견되어 치제(致祭)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좌부승지에 오른 뒤 우승지·좌승지로 선조의 측근에서 뒷바라지를 하였다.

1593년 9월 환도(還都)하기에 앞서 ‘경중인(京中人)의 진휼(賑恤)에 전력을 다하라.’는 특지(特旨)를 받고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환도 후 염철사(鹽鐵使)를 겸임, 경기·황해·충청·전라도 해변의 소금을 전국 각지에 보내 기민(饑民)을 구제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듬해 진휼사를 겸하여 겨울 동안 동사자(凍死者)가 나타날 것을 우려, 왜적이 소장하였던 피복을 나누어줄 것을 진언하였다.

1595년 대사헌이 되고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겸하였고, 이후 동지중추부사·지춘추관사 겸 이조판서·예조판서·우참찬·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뒤 1600년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었다. 이어서 좌참찬·형조판서를 거쳐, 1604년 판의금부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09년(광해군 1) 관상감제조가 되었으나 북인이 집권하자 사퇴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퇴촌유고》가 있다. 시호는 단민(端敏)이다.

 

운천집

 

*挽唐興府院君二首○丁巳

先人正學有淵源。令子移忠自孝門。扈聖艱危功茂著。推恩崇顯寵彌敦。

家無一物惟淸白。身備三稱是達尊。莫道庭前瓊樹折。孫枝連璧又生孫。

早歲隨吾叔父肩。三淸接武共騰騫。頭簪彩筆嘗垂槖。手廢瑤琴晚絶絃。

位滿只祈延鶴算。賢亡其奈在龍年。通家小子偏驚慟。素幔丹旌此北阡。

 

류성룡(柳成龍) 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공작(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569년(선조 2)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감찰, 전적 등의 벼슬을 거치고 양관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도학과 문장과 덕행을 겸했다 하여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시호는 문충(文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운천집

 

*龜鶴亭。次西厓先生韻。三首

異境凡區路自賖。重重煙樹亦從遮。雙屏活畫流光動。一帶晴虹落照斜。松作老龍驚變化。

蓮爲淨友謝浮誇。一作松骨到天龍欲化。荷莖出水玉堪誇。龜年鶴算公兼有。始信生涯未有涯。

層巖面面露奇姿。遠岫凌空晚對宜。閒愛孤雲舒又卷。靜馴雙鹿放還騎。

溪心月白風來夜。屋角松寒雪落時。獨抱瑤琴懷渺渺。峨洋一曲有誰知。

蓬壺何必遠求仙。龜鶴亭中臥亦賢。展却玉屛皆翠嶂。拂來明鏡卽淸淵。

湖山長放時藏六。城郭方歸歲閱千。卜築已知終恊吉。羽衣應入夢蹁躚。

 

*挽西厓先生三首

受全河岳氣。聞早退陶門。美質金無雜。端容玉不言。

忠兼孝兩至。爵與德俱尊。慟矣斯文喪。埋光此一原。

狂瀾回既倒。大廈柱將傾。更待文星耀。那知木稼驚。

摧樑多士慟。失哺小民情。竹帛應輝映。功高德又明。

痛哭吾安仰。西厓今又頹。惟餘精舍在。無復太人陪。

月掛謙巖缺。沙回遠志堆。王家猶有福。蘭玉滿庭栽。

 

이정회(李庭檜) 1542년(중종 37)∼1613년(광해군 5).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직(景直), 호는 송간(松澗).

아버지는 참봉 희안(希顔)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증승지 예범(禮範)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 1) 천거에 의하여 수의부위(修義副尉)가 되었다.

1581년 친부시해사건으로 안동부가 안동현으로 강등되자 유운룡(柳雲龍)·안몽열(安夢說)과 협의하여 상소복호(上疏復號)하였다.

1586년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가 되고, 이듬해 진사정사(陳謝正使) 배삼익(裵三益)의 보좌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0년 사온서주부(司醞署主簿)를 거쳐 사헌부감찰로 옮겼으며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서훈되었다.

이듬해 행성현감으로 나가 학교를 수리하여 학문을 진흥시키고, 군사를 훈련하여 비상시에 대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아 여러 곳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군자판관(軍資判官)이 되었으며, 1597년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의흥현감이 되어 난리수습에 공이 많았다. 뒤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세워 스승 이황을 제향하고, 지남서당(芝南書堂)을 지어 후진을 교육하였다.

1609년 선조의 구언에 따라 6조의 소를 올려 시폐의 개정을 건의하였다. 정구(鄭逑)가 지남서당에 들렀다가 학생의 수가 너무 많아서 다 수용하지 못한 것을 보고 물자를 지원하여 송간재(松澗齋)를 지어 학자들을 수용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송간문집》 3권이 있다.

 

운천집

 

*挽李橫城庭檜

眞安萬葉李。叔也是宗英。剖竹風塵路。鳴琴矢石城。

忠勤當職事。慷慨救民生。驥足終難展。稀年一夢驚。

 

이봉춘(李逢春) 1542(중종 37)∼1625(인조 3).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근회(根晦), 호는 학천(鶴川).

아버지는 처사인 희성(希聖)이고, 어머니는 양근김씨(楊根金氏) 어모장군(禦侮將軍) 세필(世弼)의 딸이며, 익성군(益城君) 이갱(以戡)의 손녀이다. 이황(李滉)의 족자(族子)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75년(선조 8)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로 임명되어 전적(典籍)에 이르렀으나 오랫동안 친환(親患)을 돌보느라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1581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 후 벼슬에 뜻이 없어 오랫동안 산림에 묻혀 살았고, 영덕현감(盈德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만년에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으나 스스로 세인과 어울리지 못함을 알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에 전렴하였다. 그는 성품이 대범하고 관대하여 평생 동안 이론을 제기해 높은 체하거나 시속을 따라 지조를 더럽히는 일이 없었다. 저서로는 ≪학천유집≫ 1책이 있다.

 

운천집

 

*李伯憲敬遵,宜仲義遵慶席。吟呈兩老座下。

달수 주) 광해군 4년 학천(鶴川) 이봉춘(李逢春)의 아들 이경준(李敬遵)과 사촌 이의준(李義遵)이 같이 소과에 합격하여 축하연에서 지은 시이다

 

瓊筵彩服爛生光。二朶蓮開二老堂。何似謝家多寶樹。惠連康樂早聯芳。

兩君以從兄弟。同年占科。而堂上皆有鶴髮椿老。兩家同設慶筵。可謂稀世之事也故云。

 

이율(李嵂) 1543(중종 38) 번남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사첨(士瞻)

아버지는 퇴계 이황의 큰 아들 이준(李雋)의 둘째인 이순도(李純道).

별좌

 

운천집

 

 

*挽李別坐嵂○三首○乙卯

有美先賢裔。淸標與俗殊。祥鸞停翠竹。彩鳳峙高梧。

已矣斯人也。傷哉是命夫。彼蒼猶可必。蘭玉映庭隅。

可惜騎鯨李。曾爲奉檄毛。萱堂辭鶴髮。衣局製龍袍。

禍福天難詰。彭殤數莫逃。忍看舟返處。丹旐泝風濤。

憶我聯先葉。高堂奉大春。天倫成異姓。蘭契托同人。

暼眼雲俱盡。回頭跡已陳。韓公三世哭。安得不傷神。

 

배응경(裵應褧)1544년(중종 39)∼1602년(선조 35).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회보(晦甫), 호는 안촌(安村).

무선(茂先)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정랑을 거쳐 청도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여 싸웠다.

군사 1,000명을 모아 ‘야격군(野擊軍)’이라 하고 박경전(朴慶傳)을 대장(代將)으로 삼아 왜적 수백명을 포획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595년(선조 28) 순천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천거로 나주목사가 되어 금산을 수비하였다.

이때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요청으로 후퇴하는 적의 퇴로를 막아 분쇄하려 하였다.

그러나 감사 황신(黃愼)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우찬성 심희수(沈喜壽)와 부마(駙馬) 서경주(徐景霌) 등의 상소로 곧 석방되었다.

1601년 대구부사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였다.

그뒤 영천(榮川)에 머물며 김륵(金玏)·김우옹(金宇顒)과 《반야심경》을 강론하는 등, 제현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안촌집》이 있다.

*운천 선생과는 사돈으로 사위 도사 배상익(裵尙益)의 아버지이다.

 

安村先生文集

 

*送金獻納道源之京城

憂患叢中歲月侵。春來無日不傷心。今朝又値西歸客。薄采汀蘭贐好音。

 

김택룡(金澤龍)1547년(명종 2)∼1627년(인조 5).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시보(施普), 호는 와운자(臥雲子).

아버지는 양진(楊震)이다.

월천 조목(趙穆) 문인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거쳐,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였다.

1595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 선조 앞에서 《주역 周易》을 강의하였다. 같은해 헌납·성균관직강을 거쳐 이듬해 지평·세자시강원 겸 사서를 역임하고, 전라도 광양·운봉에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공적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00년 전적을 거쳐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운천집

 

*寄元戎幕僚金施普澤龍

誅亂臨湖右。征倭出海關。英謀推亞幕。妙譽濯淸班。

怒髮衝冠壯。飛霜拂劍寒。殘酋一髠首。不足掛旗竿。

 

홍이상(洪履祥)1549년(명종 4)∼1615년(광해군 7).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인상(麟祥). 자는 군서(君瑞)·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

부사직 수(修)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를 거쳐 157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뒤 예조와 호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수찬·지제교·병조정랑 등을 두루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이어 이조정랑을 거쳐, 호당(湖堂)에 있을 때 왕이 유신(儒臣)들을 선발하여 경서(經書)를 교정(校正)할 때는 꼭 참여하였다.

그뒤 집의·응교를 역임하고,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었다가 사간과 사인 등을 거쳐, 황해도안무사(黃海道安撫使)가 되었다.

1591년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고,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 옮겨 왕을 호가(扈駕)하여 서행(西行)하였고, 곧 부제학이 되었다가 성천에 도착하여 병조참의에 전임하였다.

1593년 정주에서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가 곧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비변사와 긴밀하게 연락하여 일본의 장군 고니시(小西行長)와 가토(加藤淸正) 사이의 이간을 계획, 추진하기도 하였다.

1596년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으나, 영남의 유생 문경호(文景虎) 등이 성혼(成渾)을 배척하는 상소를 반박하고 성혼을 두둔하다가 안동부사로 좌천되었다.

1607년 청주목사가 되고, 1609년(광해군 1) 대사헌이 되었다가 1612년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의 일파에 몰려나서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모당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운천집

 

*挽洪留守君瑞二首

高名碩德冠朝紳。介福如公又絶倫。群玉滿庭多妙選。兼金橫帶益淸貧。

九天鸞鳳登崇日。平地神仙退老身。年倍顔回非不幸。所嗟猶未壽斯人。

春風坐接太和杯。別後星杓問幾回。花府二天深雨露。松京一札重瓊瑰。

日望儀表還朝右。誰料音塵隔夜臺。牢鎖直廬孤執紼。欲書情素又難裁。

 

권위(權暐)1552년(명종 7)∼1630년(인조 8). 조선 중기 문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회(叔晦)이고, 호는 옥봉(玉峯).

아버지는 권심행(權審行). 부인은 순흥안씨(順興安氏).

타고난 성품이 후덕하였으며, 행동거지는 늘 무게가 있었고, 기쁨과 분노를 얼굴에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또 공부를 시작한 후로 공부에 게으름을 피운 일이 없었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유일재(唯一齋) 김언기(金彦璣)·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른 나이에 동당별시(東堂別試)를 한 번에 통과하였으나 남성시(南省試)에서 낙방하였다. 늦은 나이에 다시 도전하여 1601년(선조 34)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은 공조좌랑(工曹佐郞)·해미현감(海美縣監)·형조좌랑(刑曹佐郞)·호조좌랑(戶曹佐郞)·예조좌랑(禮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수성찰방(輸城察訪)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이 어수선하자 나아가지 않았으나, 1616년(광해군 8) 동경교수(東京敎授)에 제수되자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이어서 바로 나아갔다. 그 후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1687년(숙종 13) 안동 북후면(北後面)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유고로 산천을 유람하고 읊은 《동경일록(東京日錄)》이 전한다.

 

옥봉집

 

*岐陽書堂次雲川韻[柳聖瑞所築]

方塘上下鑑澄明、靜對晴窓鳥不鳴。借問主翁何所事、籝金不換一函經。

*金道源[涌]以奉常正趨朝贈別

春日離亭楊柳新、楊花愁殺去畱人。可憐鄕友盡傾蓋、何處老翁來愴神。

會合從今知不易、風雲自此浩無津。爲言別後相思地、莫惜音書問病身。

 

*祭金道源文 옥봉집. 운천집

惟靈 稟陽之氣。養以淸和。學究淵源。家傳詩禮。名登桂籍。華聞顯揚。選入淸要。曰自翰苑。天官郞署。秉筆惟公。諫院玉堂。霜臺烏府。人稱鐵面。鶴峯遺風。時事漸移。不大厥施。爲養州郡。琴鶴自隨。誠以愛民。嚴以律己。廉明之治。到底推先。頂玉晩年。差强人意。分曹騎省。豈其素心。一病沈綿。四年藥物。庶幾痊愈。余望益深。豈意數旬。竟至不淑。氷霜操節。金玉精英。世未再逢。今其已矣。代奠菲薄不盡心情。不忘者存。庶幾降格。

 

박홍구(朴弘耉) 1552년(명종 7)∼1624년(인조 2).

본관은 죽산(竹山). 초명은 홍로(弘老), 자는 응소(應邵).

영의정 원형(元亨)의 5대손이며, 도정(都正) 난영(蘭英)의 아들이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2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때 김우옹(金宇顒) 등과 같이 김응남(金應南)의 제주목사 임명을 도로 회수하기를 청하였다.

1590년 사헌부장령, 1593년 홍문관교리가 되었으며, 군량미조달을 위해 전라도에 조도어사(調度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다시 교리가 되었고, 1595년 홍문관응교로 승진하여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으며, 우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부족한 군량미의 확보에 진력하였으며, 1597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대사성·도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다녀와 1599년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고, 이어서 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 대사헌, 이어서 호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돌아와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황화집류 皇華集類》를 편찬하였다.

1603년 행대사헌·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05년 형조판서, 이듬해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는데, 형조판서로 재직 때 피죄관노(被罪館奴)의 추국(推鞠)을 철저히 하지 않고 성급히 매듭지은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07년 병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가 되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와 지경연(知經筵)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호조판서에 이어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좌찬성에 승진하여 가례도감제조(嘉禮都監提調)를 겸하였다.

1618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시약청도제조(侍藥廳都提調)를 겸하였다. 이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삭직당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仁城君)을 추대하려 한다는 복위음모와 관련되어 역모죄로 사사(賜死)되었으나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되었다.

 

운천집

 

(달수 주) 1598년 운천선생이 독운어사로 나가서 지은 시이다.

*贈平壤方伯朴公應邵

愁病連旬滯一城。出門人訝繡衣行。多君每下陳蕃榻。愧我曾無孺子名。

雪帶北風催去意。煙含西日惱離情。前期迢遞今宵短。更約襟懷共月明。是時。方呈吿欲歸故云。

 

 

여대로(呂大老)1552년(명종 7)∼1619년(광해군 11).의병장.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위수(渭叟)·성우(聖遇), 호는 감호(鑑湖).

아버지는 정자 응구(應龜)이며,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권응성(權應星)과 함께 금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권응성을 가장(假將)으로 삼고 의병장 김면(金沔)과 협력하여 지례·금산의 적을 거창 부근에서 격파하여 공을 세웠다.

적을 격파하고 군량을 관장한 공으로 지례현감·예조 및 병조좌랑·대구판관·사헌부지평·합천군수 등을 지냈다.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경양사(鏡陽祠)에 봉향되었다.

문집: 감호집

 

운천집

 

*挽吕陜川大老

期期笑語亦天然。坦湯襟懷不飾邊。百里仁聲馳郡縣。十年眞樂在林泉。

酸醎嗜好世相反。出處行藏身自全。餘慶從今應有大。眼前瓊樹幾枝連。

 

장현광(張顯光)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4세 때인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배웠고 18세 때 〈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란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번씩 사직을 청하였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하였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郞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郞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하였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몇 달 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하였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하여 사은하였고 계속하여 사헌부대사헌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공조판서·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가 되어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효종 8)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道德博聞曰文 淵源流通曰康

여헌선생의 생질 경암 노경임은 운천선생의 손자 경와 김휴의 장인이고

경와공은 여헌선생의 문인이다.

 

여헌선생 연보    장달수 편

0 1618년(광해군 10 무오) 65세

* 봄 선산 송정(松亭)에서 서담(西潭) 홍위(洪瑋). 운천(雲川) 김용(金涌),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경암(敬菴)노경임(盧景任) 등과 회합하다. 서담(西潭) 년보에서

 

*輓詞[張顯光]

訓奉家庭早義方。又從溪上襲餘芳。行身不欲同塵路。處世須當作夜光。

令望夙推儀鳳日。淸名重著割鷄鄕。年來善類偏凋落。聞窆寧禁淚溢眶。

 

유복기(柳復起)1555년(명종 10)∼1617년(광해군 9).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서(聖瑞), 호는 기봉(岐峯).

인의(引儀) 윤선(潤善)의 손자이다.

외숙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구(鄭逑)와 더불어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근시재 김해(金垓) 등과함께 의병을 일으켜 예천 등지에서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망우당 곽재우(郭再祐)를 따라서 화왕산성(火王山城)을 지켰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굶주려 방랑하는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힘썼다.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이르렀으며, 안동의 기양리사(岐陽里社)에 제향되었다.

 

운천집

 

*次表兄柳岐峯復起岐陽書齋韻

聞說西山一谷明。溪流觸石玉鏘鳴。碩人事業藏修在。此地何如抱聖經。

*岐峯壽席口號 壬子

園廬溪上好。樂事此中多。況値靈均度。欣聞康樂歌。

深斟延壽酒。滿泛制頹花。爲問斑衣子。陪歡意若何。

 

*輓柳岐峯兄

 

爲人誠信善。稟性本眞淳。隱德鄕隣服。儒風士友親。

雙蘭餘閫馥。群玉滿庭珍。必壽天應定。逢蛇奈運屯。

 

*祭外兄柳岐峯文

 

惟靈受氣精明。稟質純慤。雍容愷悌。惻怛慈祥。待人之誠。奉先之孝。早失怙恃。泣血號天。弟兄二人。零丁孤苦。兄來龜尾。先人是依。我於其時。亦在親側。坐必促膝。行必比肩。載寢載興。言笑晏晏。日久年深。情義彌篤。中年阻闊。事與心違。白日孤眠。靑草一夢。世故有力。喪患弘多。未得源源。徒白痛恨。歲在癸未。先人遺堂。三子繼夭。又鮮兄弟。白首餘命。所恃惟兄。謂兄熾昌。當享遐壽。那知一疾。遽隔重泉。不壽斯人。天何無眼。有德無位。時邪命邪。膝下諸男。四鳳過二。竹鸞梧鵠。藍玉海珠。詵詵衆孫。或長或幼。有子如此。兄其不亡。上天報施。其不在是。昔兄在世。言及舊遊。曰我二人。無異同胞。爲兒嬉戲。未嘗相離。如何怪來。別多會少。俟君投紱。永擬同隣。我將罷官。優游繫表。山居勝事。期與兄同。白雲春花。寒松秋月。佳辰令節。宰牛烹羊。和樂且湛。以終餘齒。今其已矣。萬事歸虛。追惟舊情。淚落沾袖。我多獲戾。又喪長兒。雖勉延吳。能不傷毀。沈綿一疾。倐忽二年。軒冕無心。林泉有契。仙庵東畔。有谷曰枝。有山巖巖。有水㶁㶁。水有白鳥。山有閒雲。爰卜我居。可以棲息。是營是度。將結數椽。兄不在玆。誰與同樂。兄言在耳。耿耿難忘。他日泉途。倘成前計。日月流邁。再朞已臨。舊痾未痊。不得往哭。潛思分義。愧負幽明。謹遣孫兒。奠此薄具。嗚呼哀哉。

 

조정(趙靖)1555년(명종 10)∼1636년(인조 14).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

광헌(光憲)의 아들로,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약봉 김극일(金克一)의 사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1599년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또한, 한강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검간문집》과 《진사록 辰巳錄》이 있다.

 

운천집

 

*柳氏姑壽席。次趙安仲靖韻。

幔亭高宴酌霞觴。簫鼓嘲轟舞作行。大姥當筵開一笑。曾孫喜氣溢雙眶。

縱未相呼共一觴。當年雁序自聯行。傷心此日惟姑在。我淚如何不迸眶。

伯父藥峯先生詩云。

令弟開樽勸我嘗。嘗多不覺醉頹床。季妹與我生同日。

恨未相呼共一觴。乃戊辰年是日作也。感傷揮涕而書之。令弟卽先君也。

 

검간집

 

*輓詞[趙靖] 운천집. 검간집

口出何嘗錯一端。律身嚴密與人寬。當官益礪氷霜操。遇遯惟堅鐵石肝。

止酒中年尤寡過。投簪晩景亦多閒。豈言天意終冥漠。旋遣衰翁發蕙歎。

 

검간선생년보

*○임진 10월。到安東府內。金翰林 涌方爲守城將來見。因論陣事。

*○계사 2월 歷見金道源 涌 于景出寺。道源亦爲義兵將。方留陣于此寺矣。

 

이형남(李亨男)1556년(명종 11)∼1627년(인조 5).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가중(嘉仲), 호는 송계(松溪).

아버지는 이제(李濟)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출세의 뜻을 끊고 송계(松溪)에 숨어 살며 독서와 수양에 힘을 기울였다. 임진란 때에는 창의하여 향병정제장(鄕兵整齊將)이 되어 안동을 지키기에 진력했다. 1600년(선조 33) 경릉참봉(景陵參奉)을 제수했으나 부임치 않고 도산서원에서 《퇴계집(退溪集)》의 교정에 참여하여 족보와 함께 간행하였다.

여강서원의 원장이 되어 원우의 중건에 진력하고 광해정란 때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고 자정하였다. 저서로는 《송계선생문집(松溪先生文集)》이 있다.

 

송계집

 

*輓金道源[涌]

同降丙丁地又同。早年同逐好同風。雲泥相望心長憶。魚鴈稀傳意幾忡。

沈病數年傷白髮。殊程今日遽玄宮。却將欲寐無吪痛。淚向雲鄕恨不窮。

 

배용길(裵龍吉) 1556년(명종 11)∼1609년(광해군 1). 임진왜란 때의 의병·문신.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 또는 장육당(藏六堂).

관찰사 임연재 삼익(三益)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594년 세마(洗馬)의 직을 받고 이어 시직(侍直)·부솔(副率)을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화의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16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후 예문관의 검열과 대교(待敎),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한 뒤 1608년 충청도도사를 지냈다.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어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남치리(南致利) 등을 사사하였다.

천문·지리·율력(律曆)·병전(兵典)·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금역당집》이 있다.

 

금역당집

 

*襄陽使君金道源 涌壽母生朝。次心源 澈韻。

花山自古號雄州。座上雙難第一流。今日萱庭叨末席。不妨淸酤凸瓊舟。

*出山。馬上口占。嘲金道源。

淸凉嶺外號仙區。彷彿楓岑萬二奇。自有英靈爲窟宅。故敎松檜作藩籬。

賢能不憚輸多算。川岳寧嫌失舊姿。可笑相公饞幕客。又驅村酒入詩脾。

時道源爲都體察從事官。方蕫淸凉山城故云

 

*答裵明瑞龍吉

書來。奉想侍安。良慰良慰。弟今年厄甚。右頰生腫。杜門龜縮。鍼藥度日。不知紅殘綠暗已久。他尙何言。不意盛問遠及於聾瞽。豈兄以我爲有知識邪。有見聞邪。第勤示如此。不得不復。萬一所論。尙論前賢則是矣。而必欲非陞祀之議。以沮今日尊道學者。何意邪。嗚呼。陞祀與否。實無損益於兩賢。而當此橫生異議。詆斥先師之日。豈意吾兄又生一論。以短我東方道學之人邪。若我先生之言。則不過惜先正罹於世患。不得積累於中。晚而大備。嘆後學無從考問道統之的傳而取述也。至於從祀事。儒生等輕易上請不可云者。其時公論未定。亦懼其四賢一時從祀。或有後議於其人。則所關非輕故耳。若在今日。則其不拒從祀之請無疑矣。而況先生答盧仁甫書曰。金先生道學淵源。固非後學所敢測者。以先朝推奬之意推之。斷然以爲道學之宗也云云。則以吾東道學之宗之賢。不可陞於文廟乎。答李子發書曰。今此各主偏主之見。互相爭論。決無歸定之日。必有大賢君子能以公道爲宗師者出而處此事云云。則論前輩。豈後生所敢易爲邪。方人尙不可。況大賢邪。大槪兄之所見如此。則只可以非毀斥兩賢之意分疏可也。而今乃多費辭說。至冐托先生之言而捃摭諸賢之短處。其可乎哉。雖不知兄之本意。而衆論朋興。則決不得以口舌防之也明矣。而何乃詬辱諸生至此甚邪。釋私憾之謂者。又何言邪。嗚呼。兄其不思之甚也。痛惜奈何奈何。所懷千萬。泓穎不能盡人意。幸惟尊察。來伻立督。胡草不宣。

 

*答裵明瑞

兄不遺賤慵。再辱垂示。感荷。但弟之所喻。非以兄之尙論前賢爲非也。只以兩賢不可陞祀之論爲不安耳。大賢君子出而處此事。先生猶不敢自當。吾兄敢容易爲定論邪。大槪君子。聞人之責我。必自反求諸己。而彼若不知吾之實。則亦可發明吾之所見而已。何乃反脣叱辱。如鬪者之相角。罵者之以庸言爲哉。兄不見孟子自反之言乎。年少士子輩或有過激之論。自可付之一笑而已。何可以口舌相爭乎。前日答鄕校之書。若只以兄之所見分疏而已。則諸生亦必解釋。而以料外之言。反加於諸生太甚。諸生之心。何如邪。似聞通文列邑。大會同議云。此必欲發明。非一人釋私憾之爲也。弟則病縮日久。舍弟亦不得相見。而如掌議等處。每以姑置勿論之意。反覆力言。而未知果以老殘之言爲當也。知復奈何。伏惟尊兄平心恕察焉。漁人之利之言。弟豈不悟乎。弟則久已悟之。故所喻如此耳。

 

황여일(黃汝一)1556년(명종 11)∼1622(광해군 14). 평해 출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응징(應澄)의 아들이다.

귀봉 김수일(金守一)의 사위로 운천 선생과 남매간이다.

운천 선생의 생질 황중윤(黃中允)은 여헌 선생 문인이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 검열이 되었는데, 하번사관(下番史官)임에도 불구하고 출입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얼마 뒤 도원수의 허락을 받고 일시 귀가하여 도원수와 함께 추고(推考)당하였다.

1598년 사서에 이어 장령이 되고, 이듬해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천군수가 되고 1606년 전적을 역임, 1611년(광해군 3) 길주목사, 1617년 동래진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조천록 朝天錄》·《해월집》 14권 7책이 있다.

 

운천집

*送陳奏書狀海月黃會元汝一○二首

急病是臣子。辭難非丈夫。身輕極毛羽。義重辯讒諛。白日人皆覩。蒼天我獨呼。何時聞瀝血。雪盡此冤誣。一言欲持贈。情迫不堪聞。何意浮萍會。飜爲落葉分。心飛海上月。目斷嶺中雲。共是思親客。休將去住云。

 

*次黃會元韻時寓仙庵○二首

天入鏡中闊。路從屛裏盤。解官尋靜侶。乘興倚高欄。

團桂排巖老。層水滿壑寒。夜深靈藾寂。凝對月明巒。

又辭煩劇郡。還入窈深盤。不厭惟蒼壁。長憑是靜欄。

故人勤手札。新歲問暄寒。怊悵琴堂遠。難同桂樹巒。

 

*還家寓懷。寄會元。

無雙江夏士。第一穎川治。俗已鳴琴化。民誰佩犢爲。君平從世棄。元亮可來追。

何日開靑眼。樽前說喜悲。松菊森猶在。田園穢可治。關門聊自適。出世復何爲。

此是欣方覺。前非悔莫追。永陽知我未。離別轉堪悲。

 

*出城與黃海月同行

十月揮鞭出漢城。暮天寒事足歸程。關雲釀雪低前嶺。塞雁嘶風下遠汀。

鞍馬未過丹月驛。夢魂先繞白雲亭。同行賴有吾兄在。到處開襟且少停。

 

*次黃會元寄惠近體一律

層標高竝月松松。鬱鬱亭亭凌遠峯。若構明堂時則可。何嫌匠石晚相逢。

人稱天與棟樑具。我愛歲寒氷雪容。東海終難臥一柱。莫思山月與林鐘。

 

권욱(權旭), 1556(명종 11)∼1612(광해군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초(景初), 호는 매당(梅堂),

심언(審言)의 아들이다.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나아가 주서(朱書)와 『심경(心經)』에 대해 질문하였으며,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란에 창의(倡義)하여 의병들과 문경 지역을 방어하였다.

1602년(선조 35)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물가에 작은 집을 짓고 매화를 심어 ‘매당(梅堂)’이라 칭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벗들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운천집

 

*挽權奉事景初旭

吾愛常眉白最良。昂昂獨鶴出鷄場。中心款款先開笑。儀表溫溫幾襲芳。

早未展才誠可歎。今亡好學益堪傷。私門別有難看處。對鏡孤鸞哭影傍。

 

김안계(金安繼) 1556(명종 11)~1599(선조 3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순백(順伯) 호는 매은(梅隱)

고조부는 한계(漢啓). 조부는 원(鵷). 아버지는 형윤(亨胤)

군자감 주부

 

운천집

 

*挽族叔金順伯安繼

早歲同閭井。肩隨問幾春。襟期元不隔。笑語每相親。

鷄黍從君具。杯樽爲我陳。只今那復見。秋思益沾巾

 

서경(徐競) 거: 풍기

본관은 화원(花園). 자는 민보(敏甫)

아버지는 生進 양시 천일(千一) 진사 긍(兢)의 아우.

진사. 벼슬은 참봉.

 

운천집

 

*與徐敏甫約遊黃山寺。邀月彈琴。

黃山古寺欲重尋。非要禪房聽梵音。好是月明人靜夜。無絃琴和有絃琴。要。一作爲

*對月聽琴。吟贈敏甫。

碧殿鳴琴坐。中庭影半沈。微雲隨意捲。皎月盡情臨。

萬籟山俱寂。三更夜已深。龍吟非故壯。爲有舊知音。

 

임흘(任屹)1557년(명종 12)∼1620년(광해군 12).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탁이(卓爾), 호는 용담(龍潭).

소고 박승임(朴承任)· 월천 조목(趙穆)·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종개(柳宗介)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문경전투에서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그 공으로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이 되었으나 동인과 서인의 격심한 당쟁에 실망하여 그들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광해군 때 동몽교관으로 기용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 일당이 나라를 망치리라 하여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운천집

 

*贈任卓爾 屹

長劍一杯酒。男兒方寸心。謫仙千載句。今日爲君吟。

 

*仙遊亭。次謝任卓爾韻。

亭在玉潭上。窓開明鏡中。奇巖藤老大。沙步來淸風。舞鶴峯最高。岧嶤隱琳宮。劃然峽門坼。銀瀑懸層空。念昔先伯仲。侍我靑溪翁。雅無適俗韻。此地回靑瞳。雲霞結爲棲。石澗飮長虹。自擬地仙遊。人稱龐德公。高懷咏水石。輸入琅玕筒。日月曾幾何。俛仰心忡忡。紗籠壁間句。玉索光玲瓏。叔父繼前蹤。更卜仙遊東。萬松在圓嶠。寒標跨蒼穹。嗟哉志未就。舊址廢簾櫳。遭世雖艱虞。大節還崇崇。同聲垂釣子。慕義仍褒忠。長篇光萬丈。起我開顓蒙。丈夫有不朽。誰言如過鴻。願言刻此詩。名與山俱雄。

 

한준겸(韓浚謙)1557년(명종 12)∼1627년(인조 5). 서울 출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아버지는 경성판관 효윤(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진사시에 합격, 1585년 태릉참봉에 제수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해 예문관검열이 되어 홍문록에 오르고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주서·봉교·전적을 거쳐, 1589년 금천현감(衿川縣監)이 되었는데 선조가 그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다. 이해 겨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발각되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일로 연좌되어 옥에 갇혔다가 수개월 만에 풀려나 원주로 이사하였다.

1592년 다시 서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강원도도사·사서를 역임하고 원주목사가 되어 유망민(流亡民)을 초집(招集), 진휼하는 데 힘썼다.

1595년 내직으로 지평·필선·정언·교리를 역임하고,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 검상·사인·부응교·사간·집의를 지냈다.

1597년 좌부승지에 올라 명나라 도독 마귀(麻貴)를 도와 마초와 병량의 보급에 힘썼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우승지·경기감사·대사성을 거쳐, 다음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의 알력으로 파직당하였다. 다음해 병조참판을 거쳐, 내외의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605년 호조판서에 특진되었고, 그뒤 대사헌·한성부판윤 및 평안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소학》·《가례》 등의 책을 간행, 보급하여 학문을 진흥시켰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전리방귀(田里放歸)되고, 1617년 충주에 부처되었으며, 1621년 여주에 양이(量移)되었다.

이해 오랑캐 침입의 위험이 있자 이에 대비할 적임자로 뽑혀 유배지에서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오도도원수가 되어 국경수비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그의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영돈령부사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 돌아와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로 《광해군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자를 전주에 시종하였다. 예학(禮學)과 국가의 고사(故事)에 밝았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유천유고 柳川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운천집

 

*次韓柳川韻柳川。韓西平浚謙號。○二首

驪水南門別。東風動客衣。年華添鬢髮。酒興減籌巵。

歸夢迷初路。停雲鎖舊扉。江頭捐玉佩。持以慰相思。

三春抱羸疾。江上一披衣。有眼看花柳。無心擧酒巵。

故人吟澤畔。幽處杜荊扉。誰採驪珠至。吾今見所思。

 

권언신(權彦信)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망오재(忘吾齋)

 

운천집

 

*次贈權彦信

明珠只在淵。不求將如何。肉走五十年。已矣空悲嗟。故人能自警。淸詩起余多。

庸言與庸行。必謹期靡他。願言共孜孜。舜跖由毫差。先正不我欺。寶琴有遺歌。

 

정사신(鄭士信)1558년(명종 13)∼1619년(광해군 11).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부(子孚), 호는 매창(梅窓) 또는 신곡(神谷).

두(枓)의 아들이며, 현감 사성(士誠)의 아우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저작·박사·감찰·정언·예안현감·병조정랑·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전적·예조정랑·수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지평으로서 왕을 따라 평양으로 피난중 반송정(盤松亭)에서 이탈하였다 하여 삭직당하였다.

그뒤 강원도 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많은 왜적을 무찌른 공으로 1594년 경상도도사, 1595년 선산군수가 되고 1609년(광해군 1)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선계변무(璿系辨誣)의 공으로 광국원종(光國原從)의 훈(勳)에 책록되고, 장례원판결사·밀양부사 겸 경상도중도방어사에 이르렀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매창집》이 있다.

 

운천집

 

*鄭子孚士信道味別業。次西厓韻。

谷口躬耕處。高齋結構新。松寒陶逕夕。花暖謝山春。

道咪鏖塵念。仙居絶俗鄰。倘能分一半。容我小烏巾。

 

신홍립(辛弘立) 1558(명종 13)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공원(公遠)

아버지는 양정재(養正齋) 신내옥(辛乃沃). 처부는 권비(權棐)

광해군(光海君) 4년(1612) 55세로 문과급제.

성현찰방. 홍문관교리.

 

운천집

 

*성현도 찰방으로 나가는 신홍립을 송별하다(送辛公遠弘立爲省峴丞南歸二首)

金風蕭瑟蕙蘭腓。憀慄那堪又送歸。嗟我客蹤萍共泛。羡君鄕興雁同飛。

雨晴前路塵埃掃。霜晚南關錦繡圍。平地作仙今日見。莫言官繋馬曹微。

高秋三五夕。大嶺一千程。共是思鄕客。難爲送子情。

楓光映杯滿。歌曲遏雲淸。且莫催分袂。留看好月生。

 

이영도(李詠道)1559년(명종 14)∼1637년(인조 15).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성여(聖與), 호는 동암(東巖).

퇴계 황(滉)의 손자이며, 군기시첨정 준(寯)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을 거쳐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안동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다.

이듬해 연원도찰방으로 나가 전재민(戰災民)구호와 군량미를 조달하여 명관으로 이름을 떨쳤고, 1594년 충청도판관을 겸직, 피난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여 전란중에서도 수만석의 양곡을 생산하였다.

1596년 한때 좌천 당하였다가 유성룡(柳成龍)의 상소로 복직된 뒤,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를 따라 많은 군량미를 조달, 수송하여, 그 공으로 1597년 호조좌랑이 되고 다시 호조정랑이 되어 남정양향사(南征糧餉使)로서 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현풍현감이 되어 치적이 뛰어나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그 다음해에는 김제군수에 승진되고, 4년 후에는 청송부사에 승진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사복시첨정·군기시부정·영천군수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익산군수를 거쳐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내섬시정·원주목사를 역임하고, 1636년 군기감정에 올랐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운천집

 

*與李聖與詠道。乘舟訪甓寺。

催棹春江興不勝。渚淸沙白水如凝。潭心花映紫霞落。巖面雲開靑琰升。

驚起驪眠吹鐵笛。幽尋石記問胡僧。萬千氣像俱收拾。來倚東臺第一層。

 

이준(李埈)1560년(명종 15)∼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수인(壽人)의 아들이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문인,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하였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으며, 그 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천명을 모집하여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 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위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의 국정운영에서의 잘못 등으로 인하여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하여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를 베풀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하였으며, 그뒤 부응교·응교·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각각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집권 서인세력이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의 일원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하여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당시의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 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운천집

 

달수 주) 창석 이준은 1604(선조 37)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 이때 운천선생은 사헌부 집의로 재임 중이였다.

*送李叔平埈以封世子奏請書狀。赴燕京。

國本在儲貳。荃心宜奉行。公家辭命重。身世別離輕。

閶闔排風入。琅玕向日呈。竚看天冊下。朝野共歡聲。

 

*輓詞[李埈]

高名騰白屋。逸翮上靑霄。家受詩書業。人稱玉雪標。鳳來期再覩。鶴去逈難招。老我芝焚歎。殘魂一半消。鶴叟餘風在。鵷行雋望優。中心眞有守。外物本無求。奏事霜飛簡。傷時雪滿頭。死生恒道耳。全孝得天遊。

 

창석집

 

*秋日遊島潭。贈同來三子。兼柬金道源。

丹山八月秋風起。十里紅林照江水。中流蕩澲二三人。靑瞳紺髮虬髯紫。

蘭舟桂棹恣幽賞。鐵笛瑤徽角淸壯。屛間雲母障成金。顧陸丹靑亦難狀。

盤中飣餖雜珍饌。紫霞香滿琉璃盞。醉來起舞玉鏡中。如御冷風遊汗漫。

夜宿松寮夢初覺。此身渾疑幻鷗鳥。起看朝日昇嶺東。五色煙霞石門曉。

揮毫題罷長短句。彷彿坡翁赤壁賦。高吟欲和小海唱。數聲驚撼魚龍府。

茲區從古少風埃。非有道氣那得來。退溪的源雲臺逸。錦老綺語山谷才。

視篆朞年政化流。仙驂一去今㡬秋。潭邊風月猶無恙。留與吾曹拚勝遊。

君不見金剛崒嵂二萬峯。未有絳河流其中。又不見洞庭平湖七百里。未有三島擎層空。何如赤城之郡買浦口。波心露出珊瑚三玉樹。糢糊變爲萬仞石。倒揷晴空久不朽。样雲四匝鳳留雛。其上多生九節蒲。一服頓覺通仙靈。揮斥直欲凌蓬壺。獨立絶頂經千劫。調笑日月輕喬偓。我欲分出刀圭餘。持贈永嘉修眞客。餌之能令凡骨換。兩腋翩翩生羽翰。手携鳳節朝紫皇。坐閱河淸與海晏。歸時如過句漏令。何以餉之丹滿鼎。不須飄然還下方。至今海宇未乾淨。此間留作五仙子。眼看三島爲平地。借問句漏令何人。酉川中隱身姓李。

 

*遊蚕頭。次金道源韻。

鰲首䀚空不可干。巍然欲逼鶴天寒。手中太乙靑藜杖。脚底仙人白玉壇。

落日煙波乘雨去。懸厓鐵畫捲蓬看。淸詩剩得輸奇勝。字字明珠落玉盤。

 

*與金道源

西厓先生始卒所豎立。可卓冠近代。而身殁二十年。尙未擧易名之典。公議之鬱鬱久矣。今得追賜謚號。而與傑然大節相契。豈非以左右在此地之力也。可見君子之立朝。必有輔於世道。而吾輩自此死猶無遺恨矣。

 

*答金道源

頃有南來人報道爲治之道。其恩如慈父。其敎如嚴師。明足以發摘而不自衒。剛足以撃斷而主於和。政聲洋溢。非一人之私言。此無非自一編規約中出來。而可見君子所蒞。本立而道自行。如水走壑而火燎原。無往而不逹也。生。病蟄窮鄕。百事頽然。惟雪屋靑燈。書味尙無恙爾。有悼逝一念愈苦於孤寂中。發諸吟咏者。漫錄寄去。觀此可想此間情況也。

 

*答金道源

愚老之逝。悲豈一人。暮境失依。世念益涼涼。卽承遠書。南嶽新摧天柱峯。豈惟古人有此慟也。頃聞滌籀未久。一境懽然。君子所蒞。固應如此。今見規約節目。益信其抱負之偉。非後世臨民者之所可彷彿也。大學新民之治。不見於世久矣。世之俗吏。却將分内興學一事視爲何物。而甚至於雪日之吠。自非所見之正。所守之篤。焉能辦此一段事於絶無之餘乎。嗟歎之不足。敢附一語於後。蕪拙爲可愧也。

 

홍사고(洪思古) 1560년(명종 15)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택정(擇精)

아버지는 현령 홍덕수(洪德壽)

선조(宣祖) 12년(1579) 생원시 합격

함창현감. 선천부사. 동래부사를 역임. 영남 사람들과 가까웠다.

어우당 유몽인과 내외종 간이다

 

운천집

 

* 次洪擇精芧齋韻

誰將會稽勝。付與碩人閒。琴鶴六年後。茅茨數畝間。

捲簾惟碧水。當户盡靑山。願結平分約。容吾一半安。

 

강홍립(姜弘立)1560년(명종 15)∼1627년(인조 5).

본관은 진주. 자는 군신(君臣), 호는 내촌(耐村).

참판 신(紳)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검열(檢閱) 등을 거쳐, 1605년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이해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8년(광해군 즉위) 보덕(輔德)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서 1614년 순검사(巡檢使)를 역임한 뒤 1618년에는 진녕군(晋寧君)에 봉해졌다.

이때 후금(後金)이 명나라 변경을 침입하는 등 세력이 확장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하여왔다. 조선 조정은 이때 새로 일어나는 후금을 의식하면서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출병을 결정하였다.

강홍립은 오도원수(五道元帥)가 되어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1619년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과 관전(寬甸)방면에서 합류하여 동가강(佟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하였다.

이들 조·명 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여 앞뒤에서 적을 협격하기로 하였으나, 작전에 차질이 생겨 부차(富車)에서 대패한 뒤 강홍립은 적진에 통하여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하였다. 이는 출정전에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조선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투항한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그는 김경서 등 10여명과 계속 억류당하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 후금군의 선도로서 입국하여 강화(江華)에서의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가 사후 복관되었다.

 

운천집

 

*宣川公館。謝姜君信來訪。

濃淡山如畫。寬閒野似枰。天低雲意密。簷逈鳥言輕。

微倦易成睡。細斟難解酲。此時君信至。一笑話平生。

 

안경창(安慶昌)

호는 사내(四耐)명종 선조때 평양의 승려로. 시를 잘 지어 당대의 시인인 최경창. 간이 최립. 상촌 신흠등과 교유하였다. 80세가 넘어도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운천집

 

*戲贈安四耐

長歌聲激烈。亂舞影崚嶒。躶體猶非狖。冠顚不是僧。

華髥松雪鶴。淸思玉壺氷。一笑却飛杖。仙山又幾層。

 

조우인(曺友仁)1561년(명종 16)∼1625년(인조 3). 예천 출생.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頤齋).

우부승지 계형(繼衡)의 증손. 아버지는 몽신(夢臣). 이열도(李閱道)의 사위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 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고궁(故宮)이 황적유폐(荒寂幽閉)함을 보고 감회일장(感懷一章)을 지어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필화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문집 《이재집》과 가사집 《이재영언》이 있다.

 

운천집

 

輓詞[曺友仁]

觸目時艱已可驚。善人何事日凋零。淸氷苦蘗平生節。粹玉精金間世英。

南國漸看元氣鑠。北風愈助太陰獰。老夫此哭非私哭。夙昔交情未暇評。

 

김윤안(金允安)1562년(명종 17)∼1620년(광해군 12).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

아버지는 현감 박(博)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 때 김해(金澥) 휘하에서 형 윤명(允明)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604년 생원으로 상소를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가 이언적(李彦迪)의 사적에 미심쩍음이 많다고 하여 부당하다는 전교를 내렸다.

1612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대구부사·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특히 대구부사로 있을 때, 백성을 관대하게 다스리고 권세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정온(鄭薀)이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제주로 유배될 때에는 시를 지어 그를 위문하였다. 문집: 東籬先生文集

《동리일기(東籬日記)》에 “학봉 선생이 일본에 사신으로 갈 적에 상향(桑鄕)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내가 못난 시를 지어서 바쳤다. 그러자 선생이 손을 들어 읍하면서 이르기를, ‘조정의 사대부들이 이별하면서 지어 준 시가 수백 편이나, 어느 한 사람도 박제상의 일에 대하여 언급한 사람이 없는데, 그대의 시에서만 이를 언급했다.’ 하였다.

 

운천집

*送金而靜赴達城 好去金而靜。炎風路八盤。覉懷傷感易。老境別離難。

寵極雄城宰。光生晝錦還。長齋太常客。只益鬢毛斑。

 

*次金而靜泛舟洛江韻二首

이시는 운천선생이 선산부사로 재임 중 여헌 장현광. 경암 노경임.(성주목사 손자 경와 공의 장인) 동리 김윤안과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지은 시이다

聞說船遊洛水淸。難禁歸思忽然生。不知醉裏爭酬唱。何似愁邊獨坐行。

燕子灘分蘭渚碧。龍門山出玉霄明。驪江氣像還千萬。只欠吾兄一笑迎。

何處蘭舟泛泛淸。芧簷一嘯百憂生。自憐病客孤人牧。天放遊仙共地行。

神勒寺前蒼石老。月波亭下白沙明。勝觀絶致遙應似。誰約遨頭載酒迎。

間與一善倅及張德晦,盧弘仲諸公同遊。有感復次。

 

동리집

 

*次金驪州道源[涌]淸字韻

十月驪江江水淸。帆檣簇簇任波生。茅簷太守但坐嘯。琴鶴歸舟何日行。

彭澤靑衫二載久。雲川白鳥一雙明。豐年秔稻足爲酒。莫負柴門僮僕迎。

洛水塵纓可濯淸。輕舟時趁晩風生。休來樾下當陰靜。閒傍蘆叢把釣行。

南澗題詩吟子厚。東籬採菊醉淵明。江湖浪迹都如此。誰我將之誰我迎。

 

*與金道源[涌]

贒孫來。伏領令惠近體二首。足朁隔年顔面。令人欣慰誦味之無已。卽玆初寒。令體何如。慕仰無量。老人証候。想已平復無憂耳。僕飄轉竆甚。靡有底止。百年過半。生理草草如此。可笑奈何。拙和呈上。伏惟令粲。奉拜無涯。爲民珍愛。

 

금 개(琴愷)1562(명종 17)∼1629(인조 7).

본관 봉화(奉化). 자는 언강(彦康). 호는 망월헌(望月軒).

아버지는 월담(月潭). 난수(蘭秀) 월천 조목(趙穆) 문인.

1591년 진사시 합격. 1601년 문과 급제.

승문원부정자. 봉상시직장. 예조정랑. 금산군수. 여주목사(驪州牧使) 역임.

저서:망월헌유집(望月軒遺集)

 

운천집

 

*琴君彦康愷構堂齋。屬余求一言久矣。白首風埃。佳思敗盡。而厚意不可虛辱。聊綴荒拙錄呈。

晨昏當日視無形。風樹如何莫暫停。祿未逮榮嗟歲月。志惟能繼美門庭。

靑山碧澗開仙洞。淨几明窓讀聖經。曰不棄基寜墜業。堂名肯構足聞聽。右肯構堂

聞君最樂者何居。君曰無如讀我書。兩耳不聞時俗語。一心惟與聖賢攄。

正墻面處芧方塞。開竹扉來日已舒。未讀書應難擇善。若人知是舜徒歟。右最樂齋

引領層軒耿未眠。中天皎月滿前川。秋晴夜久群喧息。風定雲收十倍圓。

萬斛金精明且浴。一毫塵累淨如湔。古人不見心猶見。誰把瑤琴理絶絃。右望月軒

 

김기선(金幾善)

본관은 예안(선성). 아버지는 백암 김늑 (金玏). 소고 박승임의 사위

 

운천집

 

*挽金察訪幾善

玉樹辭椿府。萍蹤寄漢陽。那知逢我地。轉作哭君坊。

素幔飄江遠。丹旌繞嶺長。吾兒歸可見。爭奈斷猿腸

 

이 창(李瑒):생몰년 미상.

본관 예안(禮安). 자는 국보(國寶). 아버지는 대인(大仁)

권대기(權大器) 문인. 학행이 있었다. 장사랑(將仕郞)

 

운천집

 

*挽李國寶瑒○二首

與子交情老不衰。同鄕同趣又同時。通家早結潘楊好。在世寜論管鮑知。

準擬高堂先燕賀。驚聞舊壑已舟移。只應天意終陰騭。庭畔森森有玉枝。

憶我遙從驪水迴。鄕堂逢別疾如雷。空垂東野徹泉淚。不把韓公除事杯。

朽木固宜生蠧蝕。猗蘭何遽被霜摧。人間好會知難復。一笑他時底處開。

 

이응타(李應鼉):생몰년 미상.

본관 영춘(永春). 자는 계부(季孚).

응주(應鼈)의 동생. 권대기(權大器) 문인.

생원시 합격. 임란에 의병으로 활약. 典餉有司에 제수되었다

 

운천집

 

*雲亭。謝諸彦來會。時李季孚孫伯善 及權宅甫(권환),柳尙之(우잠),李光遠與柱兒約會。

多謝諸君子。從兒自遠來。同登白雲舍。亂酌紫霞杯。

水月中秋滿。松窓半夜開。披襟不盡意。醉起獨徘徊。

 

*손유남(孫有男) 1562(명종 17)

본관은 일직( 一直). 자는 백선(伯善).

아버지는 진인(盡仁). 1616년 생원시 합격.

 

조존세(趙存世)1562년(명종 17)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선계(善繼), 호는 청호(聽湖).

좌참찬 사수(士秀)의 손자로, 지(摯)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0년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예문관봉교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1604년 선천군수로 재직시에 평안감사로부터 포상대상자로 상신되었다.

2년 후 성균관사예를 거쳐, 한성부우윤·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장례원행판결사를 지냈으며, 1618년에는 공조참판이 되었다.

 

운천집

 

* 贈府伯趙善繼二首

달수 주) 조존세는 1612(광해 4) 안동부사로 부임하였다.

德望仁聲夙所欽。分憂何幸我東臨。松岡儀表存依舊。淸獻風流繼至今。

百里雖非大賢路。三年恰得小民心。自慚臥轍終無計。歸思飄然鶴與琴。

龍鍾自與世相疎。不是高情恥曳裾。數畝田荒愁樂歲。三間屋破歎離居。

空思槐院從遊忝。豈意花山惠澤餘。喪死養生無有憾。方知召杜號非虛。

 

최현(崔晛)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訒齋).

아버지는 심(深)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희좌(熙佐)의 딸이다.

남악 선생 사위.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鄭逑)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공을 세웠고, 1598년 그 공으로 원릉참봉(元陵參奉)이 되었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8년 예문관대교에 제수되었다. 같은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은자대학연의소대전 銀字大學衍義昭代典》을 받았고, 1612년(광해군 4) 실록청 겸 춘추관에 들어가 《선조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예부종사관을 거쳐 형조참의·부제학·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1627년 횡성사람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숙종 때 선산의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인재집》이 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간(定簡)이다.

 

운천집

 

*祭文[崔晛]

嗚呼。我昔弱齡。鼓篋河汾。共登龍門。濟濟如雲。輩行三十。公獨超倫。鸞停碧梧。鶴倚霜筠。儀表端雅。內植精純。神淸而瑩。氣剛而溫。挺然梧檟。匠石之園。材良理純。繩斵何煩。見聞家庭。親切陶薰。行惇孝友。學就多聞。惟我朽木。託公風斤。資以麗澤。劘以學文。切磋相規。古義猶存。然此鷃翼。敢擬鵬鶱。公登雲漢。我滯江濆。我忝鵷班。公宰南藩。燕去鴻留。出處無群。一違芝室。久隔淸芬時聞柏茂。聊慰停雲。公時于仕。文物昌殷。翺翔鳳池。曳佩修門。弘謨館閣。振彩臺垣。名聲日逐。謙恪愈勤。世好朋徒。齪齪斷斷。公不詭隨。平正持論。世慕榮寵。曲趨徑奔。公忘得喪。不爲戚欣。世耽權柄。悅譽市恩。公執銓衡。孤介無援。昇沈任數。世道翩反。乞郡榮養。五州憂分。單父鳴琴。渤海理紛。淸操如一。不衒而聞。中遭百罹。奇禍萃門。蘭摧璧碎。剔骨消魂。斷懸投紱。歸臥山樊。庶幾優游。亦保天眞。那意神明。不佑善人。嗚呼。酸梨多實。芝蕙不蕃。瓦礫善全。白璧多痕。昔人所歎。矧今何言。公在床席。我亦沈綿。奔問未果。夢想徒頻。往歲東林。一覩精神。形容羸悴。言辭諄諄。共敍悲歡。相對霑巾。秋日易夕。江水無津。後會何時。惻惻慇懃。詎知此別。幽明之分。却悔當時。遄回征軒。嗚呼。廬江有廟。先正有魂。君民一念。無間九原。公其歸拜。何以詢只。民生計極。胡不忍只。道義晦盲。胡不新只。邦其厄窮。胡胥淪只。敷袵以跪。請申申只。攬子之蕙。涕淚沄沄。嗚呼痛哉。已矣何云。平生契許。白首情親。臨穴一哭。我獨後人。代奠綿酒。哀抱莫伸。神其不昧。鑑此精禋。

 

이수광(李睟光) 1563년(명종 18)∼1628년(인조 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아버지는 병조판서 희검(希儉)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선조(宣祖) 18년(1585) 문과에 급제.

대사성. 도승지. 대사간. 이조참판. 공조참판. 이조판서를 지냈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지봉집》 31권, 부록 3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운천집

 

*南館。次李芝峯晬光韻。

南昌快閣擅雄奇。誰拓宏規占地宜。山斷海門開浦溆。水連農畝達城池。

八窓簾捲風生易。千堞雲收月隱遲。形勝每來看不厭。催衙畫角莫頻吹。

 

장흥효(張興孝)1564년(명종 19)∼1633년(인조 1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

팽수(彭壽)의 아들이다.

처음에 학봉 김성일(金誠一)· 서애 유성룡(柳成龍)을 사사하고, 뒤에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관계진출을 단념하고 후진의 교도에 전념하여 제자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특히,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여 호방평(胡方平)의 《역학계몽통석 易學啓蒙通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를 보고 오류된 것을 의심, 이를 고증,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추연(推演)하였다.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일원소장도 一元消長圖〉라 하였는데, 여헌 장현광(張顯光)이 이를 보고는 “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라고 극찬하였다.

문하에 존재 이휘일(李徽逸) 등 유학자가 있다.

1633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죽었다.

뒤에 지평에 추증되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경당문집》이 있다.

 

경당집

 

*挽金道源 涌

憶昔同遊長者門。從知家學有淵源。美聲早徹凝旒下。玉管曾傳翰苑尊。

元老臥山非國福。長星墮地奈民冤。如公存沒當儀世。淸白流傳立懶頑。

 

이부분은 운천집에 미수록

白雲亭上一片雲。悠悠出山悠悠還。其出其還儘悠悠。淸風與之俱閑閑。

雲乎何不長棲息。忽隨仙鶴升天間。落月凄凄滿屋樑。僾然猶疑見容顏。

 

이정구(李廷龜)1564년(명종 19)∼1635년(인조 13). 운천 선생과 문과 동방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또는 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세조 때의 명신인 석형(石亨)의 현손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던 현령 계(啓)의 아들로,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문장가문에서 출생, 가학을 통하여 성장하였다.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가 되었는데, 1593년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것이 《대학강어 大學講語》로 간행되었다.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에 가고, 다음해인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키자, 〈무술변무주 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그뒤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였고, 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장(章)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이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의 전범(典範)을 보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 68권 22책이 전한다.

 

운천집

 

달수 주) 1598년 운천 선생이 독운어사로 평양에 머물 때 진주사 부사로 가는 월사에게

지어준 시

*送陳奏亞使月沙李聖徴廷龜之燕京二首○戊戌

彼狡銷金口。吾王瀝血衷。分明奏丹陛。號泣徹玄穹。薪膽煙灰裏。綱常日月中。敢將毫髮隱。皇鑑赫臨東。王事方靡盬。嚴程又未偕。君歸萬里遠。我役四時皆。江上不相送。客中旋卽乖。龍川一夜抱。已是隔年懷。

 

*驪江約勝亭。次巡相李月沙韻。二首

이시는 운천 선생이 여주목사 재임 중 월사 이정구에게 지어준 시

麗日淸江上。風和雨乍晴。遨頭隨意出。公牒沒人呈。

山遠雲蔥鬱。舟遲浪穩平。琴堂小如斗。勝槪甲寰瀛。

芧簷朱夏產風涼。照席澄流拂鏡光。厭領簿書時拄笏。耽看奇勝屢移床。

晴空遠岫排濃淡。晚浦孤帆點渺茫。若使淸心樓可起。神仙不必在蓬方。

 

이광윤(李光胤) 1564년(명종 19)~ 1637(인조 15) 거: 청주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讓西). 진사 잠(潛)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2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서천군수· 장령

성주목사. 우통례를 지냈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양서집이 있다.

 

운천집

 

*送李草溪克休

달수 주) 이광윤은 1613(광해군 5) 7월 초계군수로 나갔다.

問爾謫仙子。何時踰嶺陽。深秋八溪郡。遙夜一琴堂。

訟息禽來砌。簾垂月透床。想應淸夢罷。詩思繞江鄕。

 

박재(朴榟)1564년(명종 19)∼미상.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정(子貞).

대용(大容)의 아들이며, 판서 건(楗)의 아우이다.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606년 감찰, 이듬해 공조좌랑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문학을 거쳐, 1612년 지평(持平), 이듬해 사서(司書)에 이어 장령이 되었고, 1614년에는 집의가 되어 필선(弼善)을 겸하였다.

1615년 홍문관부응교에 이어 사간이 되었으며,

1617년 정사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부사(回答副使)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피로인(被虜人) 150명을 인솔해 왔으며,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정상화되었다.

1618년 행호군이 되었고, 이어서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운천집

 

*奉別回答使朴子挺之日本 二首

聖主同仁視遠區。詞臣銜命出東隅。何曾惘惘有離色。獨自昂昂眞丈夫。

碧海千尋憑玉節。丹心一片證金烏。懸知竣事歸來日。萬口雷騰曰使乎。

瓢繋慙吾雪滿冠。二年驪岸齒生酸。堪爲負弩故鄕老。不是收錢私覿官。

千里驥蹄開道路。九天鵬翼撃波瀾。雲泥雖遠心何隔。袖裏須看一劍寒。

 

김수현(金壽賢)1565년(명종 20)∼1653년(효종 4).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수(廷叟), 호는 둔곡(遁谷).

장령 진(鎭)의 아들이다.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세자시강원사서를 거쳐 문학(文學)에 재임중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임진왜란으로 불탄 사고의 정비에 참여하였다.

그뒤 헌납·전적·예조정랑을 지낸 뒤 홍원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가 1610년(광해군 2) 호분위부사직(虎賁衛副司直)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수찬으로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는 언론활동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어 장령·검상(檢詳)을 지낸 뒤 정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619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분승지(分承旨)가 되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우부승지·호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곧 대사헌으로 전직되었다가 묘당(廟堂)에서 이조판서 이귀(李貴)와 서로 언쟁을 벌인 것이 화근이 되어 이후 계속적인 알력을 가져왔다.

그뒤 도승지·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포위되어 항복을 강요당할 때 이에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의 주장으로 화의국서가 작성될 때도 척화를 끝까지 내세웠으며, 인조와 조신들이 모두 항복할 때도 연로함을 빙자하여 호종하지 않아 척화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

1644년 나이가 80세라는 이유로 예조참판으로 재직중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었고, 예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운천집

 

*試院。吟呈金亞使壽賢,宋淸牧馹兩先生文右。二首

恩津試院鎖深深。垣竹埤梧翠幾尋。上客筵中看鳳翥。諸生筆下聽龍吟。

他山有石堪攻玉。此日論懷可斷金。別後懸知勞夢想。文星聚處福星臨。

蠟燭輝輝夜已深。硏朱濡翰細鉤尋。淫辭俚似黃華曲。雅韻淸如白雪吟。

種一蘭時除幾棘。披群沙處見零金。因人成事吾何與。藻鑑分明二妙臨。

 

이호연(李浩然) 1565((명종 2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양오(養吾)

아버지는 예조정랑 이원(李瑗)

선조(宣祖) 24년(1591) 진사시 합격

개령현감

 

*送甘文倅李浩然赴任二首 (주) 감문(甘文)은 경상도 개령(開寧)의 古名

靑州新太守。紫玉舊山人。五馬獨歸日。一亭同樂春。

臨分題古句。把贈爲情親。惠愛南翁悅。餘波及老身。

白髮太常客。長齋何所爲。宦情元淡薄。歸計又差池。

一病三旬臥。孤衾萬慮危。春來逢驛使。莫惜寄南枝。

 

김중청(金中淸)1567년(명종 22)∼1629년(인조 7).

본관은 안동.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또는 구전(苟全).

아버지는 절충첨지중추부사(折衝僉知中樞府事) 몽호(夢虎)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 전적·예조좌랑·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에 이어 1621년 승정원승지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운천집

 

*送金而和中淸以千秋兼謝恩使書狀赴燕京二首

주) 김중청은 1613(광해 5) 성절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

 

貫日誠輸事大琛。使乎宜奉我王心。歸陳少海千秋賀。仰謝皇穹萬里臨。

節下已知辭命重。樽前何惜別懷深。鵬搏壯志今如許。瓢繋空慚雪滿簪。

偶送三韓客。眞成萬里遊。威儀應覩漢。禮樂可觀周。

首嶺人如在。遼陽鶴尙留。淸風與仙表。一一錦囊收

 

*送金而和赴新安丙辰

주) 여기서 新安의 星州를 말하며 광해군 7년 성주목를 신안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 원년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김중청은 1616(광해군 8)에 신안현감으로 부임하였다.

錯節盤根須孟勞。休嗟鷄割用牛刀。專城竚見推誠孝。健令何煩制猾豪。

淸洛水流琴響遠。伽倻山靜鶴巢高。須知化蜀文翁教。不在爪膚與刮毛。

 

구전집

 

*壬辰義兵時擬上䟽

臣等俱以寒賤、生丁聖代、藩屛僭逆、猶未之見、夷狄外、侮豈嘗料乎。殺戮我人民、焚蕩我家舎、一俓㓙鋒、千里空虛、而旬月之間、府庫已盡灰燼、宮殿已盡邱墟、廟社口盡顛委、陵寢已盡毁辱、滿朝簪紳己盡渙㪚、一方乗輿已極式㣲、是未知天耶。人耶。言之哽塞不覺鳴咽、臣等、携幼扶老、竄避潜㐲之中、憂時戀國、痛哭涕泣之餘竊自惟念、以謂自古國家見侵於外賊而逐厎滅亡、卒不得興振而匡復者、必皆三昏而臣不良也。今則聖明在上、而賢能在職、則惟兹之亂、只速秀吉之誅耳。豈待終年而復振乎。一有忠臣義士、倡大義於州縣之間、遁逃之守宰可還、㪚亡之士卒可集、賊頭不難梟而疆宇不難恢矣。翹首企足佇乎有聞、而四顧無人、有甚南朝一片青丘胥爲胡有、官吏則曰、國運已盡、無復可興、遁身巖穴之間、而不有爲僧之計、則必懷乞降之心、庶民則曰、王法已廢無復可行、橫越上下之分、而奴不叛其主則弟必陵其兄國之號令誰得以施之、人之倫彛、誰得以明之、臣等杜甫腐儒固知無力於整唐乾坤、而王導微忱、實深慷慨於目晉山河、遂與正字臣柳宗介、生員臣 任屹、約爲兄弟共謀舉兵、志大事畧、隨募隨㪚、僅以百許之卒、獨當一靣之賊、而徒恃無退之律、竟貽莫慘之禍、大將柳宗介及執事金麟祥、尹欽信欽道軍官權擎等死於戰、屹與臣等僅免焉。此實人謀之不臧、豈天之不欲壯我陣乎。不以一敗自沮雖復収拾餘卒而勢旣孤弱事何有成自去年冬以至今年夏、屹爲大將、翰林臣金涌爲左副將、臣李㠏爲右副將、或於聞慶、或於唐橋、風雨屯防、晨夜伺斥、邀尾追逐、冏或怠弛、而尙不能傾䧟賊之一陣、斬頭僅卄餘級、射殺不過百餘人、曾不足以洩憤耻於千萬分之一、而今也。屹辭以疾涌、隨乎駕、㠏獨在右陣、糧無見存、兵闕伍隊、坐束兩手、更無所措、不得已姑爲停罷、以待新糓、鳴呼此豈臣等之初志也。抹血勵氣、期復國讐、㨋白日申申、約誓之意、卒無以自表於人、始知如此、不如不爲迃儒之事、誠可歎也然、而斯時、則與亂初異、官軍、義軍、處處屯聚、公儲、私儲在在收歛、以是食養是兵、以是兵討是賊、事勢已成、雖非臣等數箇竪儒、而恢復之期、庶可指日而待矣。豈不幸甚、豈不幸甚、雖然臣等之慮、以爲斯民也。乃國家之本、而兵之足不足、食之給不給、皆係於斯焉。必先有以安保之、使之樂生興業而後、可以足兵給食、殱盡兇徒、而繋國勢於苞桑矣。倘不念斯民之爲國家本、而不思所以安之、保之則兵何由而足、食何自而給乎。収歛之糧、非可久也。屯聚之軍、非足恃也。然則斯民之安與不安、保與不保、實今日恢復之大機關也。臣等未知今日之民其旣安而保之耶。以臣等目及者而言之、鳥嶺一路、已矣已矣。行數百里未、見人烟、但有白骨堆積郊原、則雖欲安保、其可得乎。惟餘近地六七邑、或已經賊、或僅免禍、而冠初向陸、民實奔匿、秋冬以後、稍㝷舊巢、其地旣皆虛、而始實其民旣皆析、而卒至夫妻父子相與離㪚、操瓢行乞、無以救飢、老弱轉於溝壑、壯者刼於道途、民之窮困、已不忍言矣。而加以癘疫肆酷、比屋死亡、或全家而殁、或舉族而滅、噫、盡之矣。孑遺殘民、尙未安奠、飢餓疾苦、若是甚焉。則國家之爲國家、臣等實未可知也。親民之官、莫如守令、爲守令者、所當視之猶一已之有傷、保之如赤子之靡依、竭慈恤之誠、盡字惠之政、以蘓一邦之民、以固國家之本、以爲恢復之根柢矣。而奈之何、酷虐有甚於前日視、民之困苦無異䄅越耶。夫軍事有機、不可後期、故用傳令、以㥯其號令、則傳令者、必臨陣者之所用也。而今守令之令斯民也。巨事細事皆用傳令、師行失伍必以威整、故有軍律、以嚴其刑法、則軍律者亦臨陣者之所行也。而今守令之刑斯民也。大罪小罪、皆行軍律、惟其用傳令、故官令㥯於星火、惟其行軍律故吏法、毒於豺虎、以㥯於星火之令、驅飢饉垂死之民其能如意從今乎。以不能從令之、故遽治以毒於豺虎之法、其能保其軀命乎。囹圄云隘、枷㭜不足縲絏、呼寃常不下數三百、經旬經朔、枉直無卞、一日死者不四則五、或子而負父之屍、弟而負兄之屍、或父兄而負子弟之屍、抑無父兄子弟而爲獄卒曳去、負者曳者、朝夕於獄門之外、則守令之困斯民殺斯民、又有甚於盗賊癘疫矣。然而其所令於民、毒於民者、苟皆爲國家之㥯、則實不獲已。猶或可也。而今乃不然、自謂勤於國事、而無不營濟已私、不惟自奉之過度、其父母之養、妻妾之供、親戚故舊之資、一皆取辦於官飽煖之餘、更侈儀餙、惟意所欲、百爾營爲、而當初逭遁之日、旣自蕩覆官儲、官非曩時之富、而慾甚曩時之誅求、居是官、逞是慾、若不徵歛於民、何以得充其萬一、貪日益肆、求日益煩、歛日益急、政日益苛、則哀我民斯、無所控告、豈啻如家鷄圈豚、惟所啖咀也哉。紅女廢機、耕夫捨耒、蠶績曠職、稼穡失業、方興有蓷之歎、相和鴻鴈之歌、試見鄕井、已爲十室而九空、八口而一遺、至于来春.將見十室皆空.而八口俱亡矣.然則兵在何地.食在何地.恢復何時而見、國家何時而爲國家耶。此臣等之所嘗痛心而不已者也。惟安東府使臣禹㐲龍、則能以愛民爲政、惟務儉簡、不遑他爲、庶有得於親斯民矣。而四邑皆非㐲龍偏恩、未踰他境、一府幸矣而列郡何益、夫盗賊、害人者也。癘疫病人者也。若其守令、非所以害人、病人乃所以捕盗賊弭癘疫、以生民養民者也。而其爲害、反有加於盗賊癘疫、則殿下之民、誰復撫恤而保活耶。鳴呼、民一也。而困之者三、民安得不竆、民一也。而殺之者三、民安得不死、殿下之任守令也。本欲使困殺其民、如盗賊癘疫而已耶。三望而點一、期年而考再、殿下之慎簡擇、明黜陟也。至矣。而善惡之混淆、用舎之顛倒、卒若是其甚焉。則先正其心、以正朝廷、固殿下之所當反已也。而烹阿大夫以紓民困、亦豈非當今之㥯先務乎。黜罰之責當責、方伯、方伯之廵察是路者、今周一載、其於守令之貪酷、生民之困苦、豈不曾耳聞而目見也。特拘於平日交與之分、而未能公其心正其法以斷之耳。然社稷大臣、受國重託、豈肯爲齊臣之毁譽、以欺我殿下哉。㐲願殿下申勑焉。且臣等㐲見漢史、高皇帝、方領陣而東也蠲蜀民一年之租、當是時也。食非不㥯、而必蠲其租者、豈不以紓民之力、固國之本爲㔫㥯耶。今者雖未得蠲賜一年之租、而抑有可减者二焉。祖宗㝎式本非繁浩、而至廢朝、多所增置、厥後因而不革、遂有科外之督、馴成色目之煩、當在太平、民猶不堪、如今板蕩、將何支供、此不可以减革乎。郡邑倉積、歲多逋欠、而其守宰只計虛息、以溷簿籍、明年秋督一依新債、一民所負、多至百斛、雖破家業、末由備償、此不可以蕩棄乎。黜虐吏蠲二弊、侵殘餘民庶㡬其蘓、異時兵食、庶幾調給、賊徒庶可以討滅、國家庶得以匡復矣。若然則臣等雖已罷退、亦無慨恨於心矣。賊勢尙熾、事不有終、而狂愚一言、只凟天聽、罪當萬死、無仼戰慄、㐲惟殿下、赦其濫妄、惟蒭蕘之言擇焉。

 

권흔(權昕) 1568(선조 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절(叔節).

조부는 권이(權頤). 아버지는 권화(權和)

1589(선조 22)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35년(1602) 문과에 급제

세자시강원 설서. 예문관검열. 예조좌랑. 병조좌랑. 선조 40년 문화현령. 광해군 3년

홍문관수찬. 광해군 4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광해군 5년 의정부사인으로 죽었다

 

운천집

 

*挽權舍人叔節昕○二首

心堅金石操。學指聖賢門。美質圭無玷。端容玉不言。

蓮堂方接武。經幄幾承恩。天意終難詰。斯人命路屯。

令伯巡雄鎭。阿咸敞慶筵。君歸天與便。賓至派皆聯。

勝會纔星散。凶言忽驛傳。鴒沙顧影慟。誰訴彼蒼然。

 

권태일(權泰一)1569년(선조 2)∼1631년(인조 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아버지는 내시교관 춘계(春桂), 큰아버지인 집의 춘란(春蘭)에게 입양되었다.

학봉 김성일의 사위. 백담 구봉령(具鳳齡)의 문인.

1591년(선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등용되고, 이어서 검열·승정원주서·시강원설서·정언·이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병으로 사임했다.

뒤에 다시 홍문관수찬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이조정랑을 거쳐 영덕현령으로 4년간을 재임하면서 큰 치적을 올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이어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요양한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그뒤 풍기군수를 거쳐 동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경주부윤으로 나가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다시 호조참의·좌부승지를 거친 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의 지방관을 희망, 죽주부윤(竹州府尹)으로 나갔다가, 1623년(인조 1)에 좌승지로 들어왔으나 곧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그뒤 병조참의·충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승진, 지방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이듬해에 대사간을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고, 그뒤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가도(椵島)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죽었다.

저서로는 《장곡집》이 있다.

 

운천집

 

*送權明府守之泰一赴寜海

朝宣綸命銀臺坐。夕佩銅章海郡行。不是左遷辭禁闥。只求便養許專城。

推恩聖德如天大。移孝深誠貫日明。孤露此身空竊祿。把君歸袂若爲情。

 

정언굉(鄭彦宏) 1569년(선조 2)∼1640년(인조 18).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여확(汝廓), 호는 서계(西溪).

아버지는 승조(承祖)이며, 어머니는 함녕김씨(咸寧金氏)로 염(恬)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고, 1609년(광해군 1) 학록(學錄)겸 봉상시봉사(奉常寺奉事), 이듬해 학정(學正)·박사에 승진되었다.

다음해 승문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에 이어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성균관전적 등을 지냈다.

1613년 호조정랑에 체직된 뒤 곧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에 전직되었다.

1614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혼조(昏朝)의 기미가 있으므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고성군수에 특채되어 그간 혼조로 인하여 퇴폐되었던 군정(郡政)을 일신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향리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장이 되어 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문경의 조령(鳥嶺)에 도착하였으나,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군자감정 겸 선공감정(繕工監正)에 배수하였다.

이듬해 청송부사가 되었다가 1631년 예빈시정(禮賓寺正), 이듬해 승문원판교에 각각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맹세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서계문집》 2권이 있다.

 

운천집

 

*送鄭汝廓彦宏之金郊

달수 주) 이시는 정언굉이 1613(광해 5) 금교찰방으로 나갈 때 지은 시

旅榻雖相忘。衾裯歎未同。關門仍遠別。行李問無從。

鄕國俱千里。郵亭又幾重。客中還送客。心緒益忡忡。

 

유함형(柳咸亨) 1570(선조 3)

본관은 문화(文化). 아버지는 유민(柳珉)

선조(宣祖) 27년(1594) 문과 급제. 성균관 전적.

 

운천집

 

*東臺秋夕。次柳廣文咸亨韻。

月滿長江面。層巖跨碧洲。千尋屛展畫。一片玉含秋。

爲問東臺會。何如赤壁遊。蘇仙差早晚。此夕不曾留。

 

*次送柳廣文罷歸韻

長恨塵纓縛世間。白雲山水負淸歡。羨君一脫靑衫出。無盡亭前得得還。無盡。廣文亭名。

江上仙舟每共牽。別懷那得不依然。從今我亦歸田舍。爲是身多疾病纏。

 

이경절(李景節)1571년(선조 4)∼1640년(인조 18).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길보(吉甫). 우(瑀)의 아들이며, 율곡 이(珥)의 조카이다.

외조부는 퇴계문인으로 당대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5년(광해군 7)에 문과 회시에 통과되었으나 과거시험의 공정성에 회의를 품고 전시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서인계열의 인물로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향리인 선산군에 돌아가서 야인생활을 하였다.

그때 그는 동지들과 의논하여 길재(吉再)의 사우(祠宇)를 낙동강 상류지역으로 이전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황산도찰방으로 임명되어, 인심을 수습하고 황폐되었던 역로(驛路)를 완전히 복구하여 상을 받은 바 있고, 또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이 되어 역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뒤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예빈시별좌·사헌부감찰을 거쳐 문경현감으로 나가서 치적을 남겼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향인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으며 문경인들도 그를 도와서 그 지역을 잘 지켰으나, 삼전도화약(三田渡和約)의 소식을 전하여듣고 고향에 돌아가서 관계에는 나오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림과 글씨 및 가야금에 능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운천집

달수 주) 이시는 운천선생이 선산부사로 재임중에 지은 시이다. 매학정은 선산에 있다

 

*次孤山梅鶴亭韻。贈李生景節。生乃黃孤山耆老之外孫○二首

閒從山外到山前。一抹依然返照邊。玉羽已隨仙夢化。氷魂還惹客愁牽。

空吟疏影橫斜句。不見長鳴掠去船。爲語後逋須起廢。忍教風月自年年。

莫把仙區較後前。西湖東洛摠無邊。梅香自入淸詩動。鶴伴寜容俗事牽。

可愛江山遺勝跡。誰從泉壑覓藏船。幽期幸與靑蓮結。別路迢迢又幾年。

 

이안눌(李安訥)1571년(선조 4)∼1637년(인조 15).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행(荇)의 증손으로 진사 형(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이다.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필(泌)에게 입양되었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29세 때 다시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하였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에 나갔으며, 다시 예조에 들어왔다가 단천군수가 되었다.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곧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되었다.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된 뒤 사직하고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비방하는 말들이 생겨 사직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1631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청렴근면한 관리를 뽑는 데 들게 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해(1636)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환도한 뒤에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의정부좌찬성추증되었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저서로는 《동악집》 26권이 있다.

 

동악집

 

*寄題白雲亭。爲雲川金參議 涌 作。用諸公韻。

臨河曾過古津頭。今對兵曹更刮眸。樹石摠從家世遠。風煙偏入品題稠。

白雲有扁公將去。朱紱無心我欲休。安得卜隣成二老。未容三隱數周劉。

永嘉東面瀼西頭。地僻亭高爽客眸。玉鏡涵天春浪細。石屛圍野晩峯稠。

江山父子終相保。麴糱功名早自休。聞說龍蛇兵火遠。桃源元不屬嬴劉。

 

김봉조(金奉祖)1572년(선조 5)∼1630년(인조 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풍산.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대현(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찬금(纘金)의 딸이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단성현감(丹城縣監)으로 재임중에는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경상도도사·익산군수·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이 되었으며,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승진되었다.

특히, 문예에 조예가 깊어 동생 영조(榮祖)와 함께 영남에서 문명을 떨쳤다.

저서로는 《학호집》 3권이 있다.

 

운천집

 

*朝詠六言四韻。寄金孝一奉祖松石行軒。

聞說丹丘 羽客來臨 自石松間。盈盈一水 波闊寂寂 千巖雲閒

嗟爾主人 何處愧余 病臥塵寰 無由鼎坐 晤語半夜 魂飛獨還。

 

*祭文[金奉祖]

惟靈珪璋令質。蘭雪淸風。旦歲蜚英。夙夜在公。銓曹玉署。烏府薇垣。惟思盡職。莫念讐恩。直道難容。外符長懸。庭留梅鶴。囊乏金錢。驪江秋晩。蓴鱸起興。投紱歸來。白雲形勝。婆娑初服。激昂晩節。一疾不起。天意難詰。邦其殄瘁。匪我私憂。顧我無狀。叨忝從遊。故人稚子。賢胤損友。通家分誼。愈往愈厚。去夏承誨。令人起敬。喜公未衰。吾黨之幸。何知此日。永訣幽明。臨江一哭。孰知余情。恭蕆菲薄。冀歆微情。嗚呼哀哉。

 

이의활(李宜活) 1573년(선조 6)∼1627년(인조 5) 거: 경주 양동.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설천(雪川).

회재 언적(彦迪)의 손자로, 판관에 추증된 응인(應仁)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옥산장씨(玉山張氏)로 세마(洗馬) 응기(應機)의 딸이다.

대암 박성의 사위. 아들은 여헌 문인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2년 뒤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호조좌랑을 거쳐 감찰이 되었다가 고령현감을 역임하였다.

1618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내고 함경도사로 나갔다.

1620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전횡을 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인조 1) 반정이 성립되어 흥해군수에 발탁되었는데, 지나간 폐정을 바로잡고 백성을 진휼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탐관오리의 부정을 근절하였다.

1627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주야로 집무하다가 병을 얻어 군청에서 순직하였다.

저서로는 《설천문집》 4권이 있다.

 

운천집

 

*送李浩然宜活歸月城

可笑臨河老。胡爲滯漢關。緇塵棲弊袂。雪髮露危冠。

山水軒楹內。煙霞枕席間。送君還此地。新月到應團。

 

유우잠(柳友潛)1575년(선조 8)∼1635년(인조 1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지(尙之), 호는 도헌(陶軒).

아버지는 예빈시정(禮賓寺正) 복기(復起)이며, 어머니는 영덕정씨(盈德鄭氏)로 참봉 진(溍)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이준(李埈)·장흥효(張興孝)·김시온(金是榲)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여, 1594년 팔공산(八公山)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또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적과 싸웠다.

1627년(인조 5)정묘호란 때는 인조의 어가(御駕)가 강화도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를 규합, 적과 싸울 목적으로 훈련하였으나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 하여 중도에 그만두었다.

도정절(陶靖節: 潛의 諡號)을 늘 사모하여 그의 호도 도헌이라 하였으며,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오직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시에 능하여 명작을 많이 남겼다.

저서로 《도헌일고》가 전주유씨 세고(世稿)인 《기양세고》 중에 수록되어 있다.

 

운천집

 

*向黃山寺。歷訪柳姪尙之。友潛

欲訪黃山寺。黃昏過水村。洞深雲已宿。林靜澗猶喧。

瘦馬雖頻蹶。幽懷自不煩。草堂人有待。明月正臨門。

 

*祭文[柳友潛]

嗚呼痛哉。恭惟令叔。稟精河岳。英姿出群。曠懷絶俗。訓承家庭。學有路脈。發軔脩塗。立脚硬地。一心忠孝。二憂進退。端笏殿陛。百僚震魄。佩符湖嶺。四境頌德。專城致養。極其懽情。死喪盡制。動遵禮經。善行旣積。餘慶益綿。伯嗣巍科。諸胤皆賢。世間淸福。人莫與肩。天何無眼。報施不卒。屢喪令原。頻哭白璧。沈痛年來。榮衛俱鑠。保養幸至。宿憊少蘇。退逸江湖。收拾桑楡。一室四壁。百家諸子。重尋舊業。每發新意。質疑請益。學子鼓水。命矣不幸。又嬰劇疾。禍迫木稼。遽見易簀。九天難叫。百身莫贖。顧念公私。悲慟不一。哲人其萎。殄瘁斯極。此在一國。咸有歎惜。鄕無善俗。士無矜式。此在一州。所共傷䀌。至於小姪。痛倍州國。頃歲終天。孑孑無依。惟有令叔。倚如親慈。叨奉几杖。祝壽期頤。何知今日。永失儀刑。顧瞻遺棲。白雲古亭。河流一帶。山矗四圍。風煙依昔。主老何歸。屬玆辰良。神駕啓行。一曲薤歌。十里舊程。恭候路左。哭奠菲薄。英其不爽。庶賜歆格。

 

김령(金靈)1576년(선조 9)∼1650년(효종 1). 거: 군위(軍威).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옥여(玉汝)이고, 호는 경재(警齋)이다.

조부는 정보(廷寶)이고, 아버지는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난경(蘭卿)과 어머니 주부(主簿) 도응두(都應斗)의 딸 팔거도씨(八莒都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재집

 

*上善山使君金雲川[涌]丈

* 운천선생의 답장이 있다. 운천집에는 미수록

 

 

신달도(申達道)1576년(선조 9)∼1631년(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참의 원록(元祿)의 손자이고, 흘(仡)의 아들이다.

월천 조목(趙穆)·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정계가 혼란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1623년(인조 1) 5월에 명나라 희종(熹宗)의 등극을 기념하는 유생정시(儒生庭試)에 갑과로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627년 사간원정언에 이어 곧 지평으로 승임되었다. 이해 6월 병조판서 이귀(李貴)의 전횡(專橫)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려 이귀의 미움을 샀으며 부사직으로 전보되었다.

1629년 사헌부장령이 되었을 때, 내수사(內需司)가 진상을 과다히 강요하는 폐단을 일소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1627년 정묘호란 때 윤황(尹煌)과 함께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후일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만오집

 

김영조(金榮祖)1577년(선조 10)∼1648년(인조 26).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산음현감 대현(大賢)의 아들이며,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9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전적에 승진하였으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지평·부수찬·장령·대사헌·대사성·대사간·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24년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정엽(鄭曄), 대사간 이현영(李顯英) 등과 함께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이괄(李适)의 난에 간여하였다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5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내용이 경망하다 하여 처벌할 것을 주장하고, “인성군 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할 때 동조하였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하여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1633년에는 세자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 한인급(韓仁及)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하사받았다.

1642년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때 인사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았으며 단정하였다. 영천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와집》이 있다.

 

운천집

 

*金孝仲榮祖金溪慶席。吟呈座上。

달수 주) 1612(광해군 4) 종매부 망와 김영조가 문과에 급제하자 축하 시를 지은 것이다

積善家餘慶。長春鶴駕東。門䦨皆種玉。女壻又乘龍。

上客傾雙蓋。仙童舞半空。九天丹桂萼。交映一堂中。一年前後榜兄弟登第。故末句云云。

 

황중윤(黃中允)1577년(선조 10)∼미상. 운천 선생 생질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도선(道先).

황연(黃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응징(黃應澄)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황여일(黃汝一)이며, 어머니는 박황(朴惶)의 딸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생원으로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헌납·낭청·사서 등의 관직을 지냈다. 1616년(광해군 8)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연루되어 추고당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다시 사서에 기용되었다. 이 해 명나라에서 요동 순무를 위해 병마 7, 000을 요청해 왔고, 조정에서 징병에 관한 의논이 있을 때 징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어 병조좌랑에 올랐으나, 입직하다가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으며, 이듬해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무과시험시 관원들이 뇌물을 받은 것을 고발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승지에 올라 왕의 측근에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였고, 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변방에 위리안치되었다. 이어 이듬해 내지로 양이(量移)되었고, 1633년(인조 11) 유배에서 풀려나 시골로 돌아갔다.

 

운천집

 

* 贈黃甥中允寓懷時黃以獻納入都

爲圓何必斵吾方。當事先須立脊梁。若使蕙蘭終變化。不如蕭艾本無芳。

 

이경엄(李景嚴)1579년(선조 12)∼1652년(효종 3).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호민(好閔)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에 현감으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데 대하여 백관(百官)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하였는데, 현감으로 있던 그는 “이 일은 중대하여 소관들의 의논할 바가 아니니 의정부에서 잘 처리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운천집

*詠扶餘倅李景嚴靑琉璃杯

달수 주) 이 시는 운천 선생이 홍주목사 재임 중 향시 시관이 되었을 때 당시 부여 현감으로 있던 이경엄에게 준 시이다

 

謫仙勸我琉璃鍾。自說平生生死同。彩脈粼粼波浩蕩。晶光炯炯氷玲瓏。朱顔酡處分明見。綠蟻濃時看却空。安得身閒無疾病。相携更酌月明中。余適自試院回。氣困辭飮故云云。

 

 

김근(金近) 1579(선조 12)∼1656(효종 7) 안동 귀미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성지(性之), 호는 오우당(五友堂),

아버지는 군자감주(軍資監主) 안계(安繼)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중립(中立)의 딸이다 1642년(인조 20)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리로는 임용되지 못하였다. 그 뒤 초옥을 짓고 `오우당`이라 호를 짓고 학문연구에 힘쓰는 한편, 후학들을 모아 지도하였다. 장현광(張顯光)은 그를 유림노성(儒林老成)이라 칭찬하였다. 구암정사(龜巖精舍)에 봉안 되었다.

배상익(裵尙益)1581년(선조 14)∼1631년(인조 9). 영주 번개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익재(益哉), 호는 치암(癡巖).

나주목사 안촌 응경(應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옥천전씨(沃川全氏)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해(海)의 딸이다.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조수익(趙壽益)·이식(李植)과 교유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이듬해에 시작된 폐모론의 소(疏)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로 유적(儒籍)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고향인 영주에 돌아가 지내다 1624년 인조반정 후 다시 문과에 급제, 1625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보임되었다.

이어 사섬시(司贍寺)·내자시(內資寺) 등에 재임한 후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가좌사(假左史)로서 인조의 피난을 호종(扈從)하였다.

얼마 후 사간원정언 김설(金卨)의 무고(誣告)로 파직당하였으며, 그뒤 1628년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듬해 형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郞), 1630년 전라도와 황해도의 아사(亞使)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31년 진주판관에 제수되어 부임하는 길에 여주에서 객사하였다.

천곡(泉谷)의 봉계서원(鳳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치암집》이 있다.

 

운천집

 

*次裵益哉,權省吾兩生韻。寓懷。

我家蕭灑洛江東。盈尺魚肥積水中。何事泣途千里遠。可憐垂橐一錢空。

官司分處直難脫。牙齒落來頭又童。百計不如歸計得。鋤荒三逕是奇功。右思歸

所願平生宰嶺東。爲遊仙化洞天中。三千玉界連滄海。萬二瓊峯揷翠空。

濟勝具成雙蠟屐。負詩囊有一奚童。京華事事都無戀。幾日分符出武功。右求出宰山縣

晚郊芳草綠迢迢。高下風花亂眼飄。京邸幾年羈遠客。驪江百里放輕橈。

喬山松柏連蒼翠。甓寺煙霞鎖寂寥。莫道使君無一事。淸齋暇日點漁樵。右赴驪興

 

권경(權儆)1582년(선조 15)∼1615년(광해군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오(警吾), 호는 죽군(竹君).

증조는 권이(權頤)이고, 조는 권화(權和)이며, 아버지는 형조판서(刑曹判書)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이고,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윤국형(尹國馨)의 딸이다.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의 세대가 끊어지게 되자, 종인(宗人)들이 그의 아버지 권반에게 봉사(奉祀)하도록 조정에 청하여 길천군에 봉해졌다.

1603년(선조 36) 계묘식년사마시(癸卯式年司馬試) 진사(進士)에 1등으로 합격하고,

1613년(광해 5) 문과급제. 승사랑(承仕郞)의 품계로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가 되었는데,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의인(宜人)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조판서(吏曹判書) 문간공(文簡公) 이수광(李晬光)의 딸이다. 권제(權躋), 권적(權蹟), 권지(權趾) 세 아들을 두었다.

 

운천집

 

*挽權正字儆○二首

荒岡埋白璧。槐院隔靑雲。已棄人間事。應修地下文。

傷心鶴髮老。忍見鳳雛群。惟有雙龍劍。相隨更不分。

阮叔途窮早。阿咸數又奇。沙頭鴒弔影。庭畔玉槯枝。

積善家如許。呼天理莫知。猿腸我先斷。不死淚空垂

 

권환(權寏)1580년(선조 13)∼1651년(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택보(宅甫), 호는 이우당(二愚堂).

아버지는 증사헌부집의 대기(大器)이며, 어머니는 흥해배씨(興海裵氏)로 희도(希度)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부장(副將)이 되어 죽령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강화가 성립되어 적이 물러가 전투에 임하지는 못하였다.

1635년 장릉참봉에 천거되었으며, 그뒤 사옹봉사·직장 등을 지냈다.

163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으며, 1640년 예부좌랑, 1641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 1646년 강원도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전형적인 청백리로서 조정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는 거침없이 직간을 하여 당시 문란한 당쟁의 와중에서도 공평하고 명분이 뚜렷한 정책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학문을 권장하고 풍속을 순화시키는 한편, 인정(仁政)을 널리 펴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이우당문집 二愚堂文集》 4권이 있다.

 

이우당집. 운천집

 

*輓金雲川[涌]

早從詩禮老猶修。懿行淸標出軰流。臺閣不能安一日。丘園猶自樂三休。

德儀已屬儒林望。道骨還催上界遊。痛哭斯文殆喪盡。白雲川際但悠悠。

 

유진(柳袗)1582년(선조 15)∼1635년(인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아버지는 영의정 서애 류성룡(成龍)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12년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무(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잡았다.

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寃獄)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의 경탄을 샀다.

1627년에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보고에 허위가 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634년 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당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이 전한다.

 

운천집

 

*輓詞[柳袗]

聲名家世冠吾鄕。早歲雲衢步武長。玉樹臨風儀可象。氷壺受月道彌光。

佩符湖嶺春馴雉。秉筆天官鐵作腸。已矣老成今不在。哀詞題罷淚沾裳。

 

이환(李煥)1582년(선조 15)∼1661년(현종 2). 거: 용궁(龍宮)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계명(季明)이고, 호는 호우(湖憂)이다.

증조는 월연공(月淵公) 이태(李迨)이고, 조부는 신경(藎卿) 이원충(李元忠)이다. 부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이윤수(李潤壽)와 모친 유중영(柳仲郢)의 딸 풍산유씨(豊山柳氏) 사이에서 6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1616년(광해군 8) 증광시 생원 3등 69위로 합격하고 성균관유생으로 들어갔으나, 광해군 때의 어지러운 정국을 보고 벼슬길을 버리고 돌아와 정신을 수양하는 공부에 전념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자, 학문과 덕행으로 왕자사부(王子師傅)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어 재랑(齋郞)으로 불렀음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목릉참봉(穆陵參奉)에 제수되었을 때에는 서울에 올라가서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만 올리고 바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말은 간략하지만 문장의 뜻이 풍부하여 용주(龍洲) 조경(趙絅)으로부터 유성룡(柳成龍)의 여운을 지녔다는 평가를 들었다.

묘는 경상북도 용궁면 구미산(龜尾山) 선영에 있다.

문집으로 4권 2책의 시문집인 《호우문집(湖憂文集)》이 전한다.

 

운천집

 

輓詞[李煥]

聖代難容一藎臣。江湖閒閣老成人。天心未欲治東國。地下猶應嚮北辰。

堅白豈因磨涅改。淸修終使子孫貧。從今世道吁難定。失楫中流不見津。

 

김연조(金延祖) 1585(선조 18)-1613(광해군 5)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희석(希錫), 호는 광록(廣麓),

아버지는 대현(大賢). 봉조. 영조의 동생이다. 서애 류성룡 문인.

서애 선생이 그의 영민·호학(穎敏·好學)을 크게 칭찬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1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선되었으며 예문관한림(藝文官翰林)에 천망(薦望)이 올랐던 중 29세를 일기로 병졸하였다. 임종에 백형(伯兄)에게 말하되 “우리 형제가 부모를 잘 봉양치 못하였고 다년 근독(勤讀)하여 입신양명을 하렸더니 다행히 등과는 했으나 몸이 또 불행하니 명이 아니겠습니까”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 동생 鶴沙 金應祖가 지은 행장에 金參議涌。聞其訃。驚曰。此人如精金美玉。何遽至此。

 

홍호(洪鎬)1586년(선조 19)∼1646년(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숙경(叔京), 호는 무주(無住)·동락(東洛).

대제학 귀달(貴達)의 후손으로, 무반인 덕손(德孫)의 아들이다.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나이 20세에 서애 유성룡(柳成龍)을 만났으며, 그때 그에게 크게 칭찬을 받은 바 있다.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권력을 쥐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의 아들 대엽(大燁)을 승문원에 등용하자는 시론이 있었으나,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권지(權知), 이듬해 전적을 거쳐 박사에 이르렀다.

그 뒤 외직으로 안동부제독으로 자청하여 나갔으며, 1623년(인조 즉위)에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정경세가 호소사(號召使)가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난의 진압에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와 폐모에 반대하다가 인조반정 후 아들과 함께 자살한 박승종(朴承宗)의 적몰사(籍沒事)에 공정한 견해의 상소를 올렸다가 훈신들의 미움을 사 영변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1628년 예조정랑, 1630년 사예(司藝), 이어 종부시정(宗簿寺正)·장령·승지·공조참의·흥해군수 등을 거치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용병술로 포수를 지휘한 바 있다.

1640년 예조참의·동부승지, 1643년 우부승지 등을 거치고, 1645년 대사간이 되었다.

인품이 깨끗하고, 영욕과 이해타산이 없어서 강한 자로 평을 받았으며, 문신이면서도 용병에 관하여 지식이 많아, 국책에 반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무주일고 無住逸稿》가 있다.

 

*祭文[洪鎬]

惟我鶴峯。士林之師。仲氏有子。瑞世英姿。千里之駒。先生所奇。敎之誨之。聞禮聞詩。盡孝父母。兄弟怡怡。國器早成。立揚允宜。早歲捷科。羽儀丹墀。翰苑薇垣。東銓兩司。黼黻皇猷。冠佩葳蕤。君子獻頌。庶民望治。嗚呼命窮。世忽明夷。四屈州郡。不以爲卑。區繁剸劇。蘇殘起疲。在官政擧。旣去人思。在公餘事。百不一施。建夫季年。時益艱危。龍亡虎逝。鰌鱔狐狸。不仕無義。黽勉當時。軒冕何榮。所重民彝。一心斷斷。道則匪虧。言旋故里。數椽茅茨。遊神物表。屛除事爲。天胡不仁。一疾長辭。已矣奈何。世道堪悲。不肖聾瞽。倀倀路岐。聞風雖久。覿德則遲。未見君子。惄如調飢。旣見君子。中心藏之。然未摳衣。今其曷追。已矣奈何。如失蓍龜。日暮道遠。采采江蘺。恭奠靈筵。泣涕漣洏。其誰知之。非哭吾私。嗚呼哀哉。

 

권성오(權省吾)1587년(선조 20)∼1671년(현종 12). 영주군 도지촌(道知村).

본관은 안동. 자는 자수(子守), 호는 동암(東巖).

아버지는 경기전참봉 호신(虎臣)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선무랑 우(遇)의 딸이다.

자질이 총명하여 일찍부터 문장을 잘하였고,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기용되었다.

이어서 학유(學諭)·박사·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1616년 강계판관으로 부임 도중 칠원현감으로 체직되었다.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받아 사직하였다. 곧이어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이듬해 사헌부감찰·예조좌랑을 거쳐 경상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이어서 공조와 형조의 정랑을 지냈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할 때 호종하였다.

이듬해 보령현감으로 나가 백성을 위하고 부세를 경감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뒤 관계에 나가지 아니하고 후학을 교육하였다.

저서로는 《동암문집》 4권이 있다.

 

운천집

 

*次裵益哉,權省吾兩生韻。寓懷。

我家蕭灑洛江東。盈尺魚肥積水中。何事泣途千里遠。可憐垂橐一錢空。

官司分處直難脫。牙齒落來頭又童。百計不如歸計得。鋤荒三逕是奇功。右思歸

所願平生宰嶺東。爲遊仙化洞天中。三千玉界連滄海。萬二瓊峯揷翠空。

濟勝具成雙蠟屐。負詩囊有一奚童。京華事事都無戀。幾日分符出武功。右求出宰山縣

晚郊芳草綠迢迢。高下風花亂眼飄。京邸幾年羈遠客。驪江百里放輕橈。

喬山松柏連蒼翠。甓寺煙霞鎖寂寥。莫道使君無一事。淸齋暇日點漁樵。右赴驪興

 

*유인배(柳仁培) 1589(선조 22)~1668(현종 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재(德載), 호는 원계(猿溪)

류인건(柳仁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회(善晦). 진일재(眞一齋) 숭조(崇祖)의 현손

 

운천집

 

*題柳從善晦仁健草堂

閒園幾日養幽姿。小結三椽不剪茨。籯裏金無傳世寶。床頭書有教兒辭。靑山簇簇雲披絮。玉澗泠泠柳拂絲。借問此中何所事。朋來開笑酌鸕鷀。

 

이기(李岐) 1591(명종 16)~ 1654(인조 2) 64세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사숙(士夙) 호는 수졸당(守拙堂)

증조부는 퇴계 선생. 조부는 준(寯.) 아버지는 영도(詠道).

운천 선생 문인

을묘년에 아버지가 관직을 버리고 집에 와서 생활하니 그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절의(節義)가 한집에 모여있다’공 칭송하였다. 관직은 참봉. ‘수졸당(守拙堂)’이라는 편액을 달고 또 남간(南澗)이라 호하였다. 증손 수약(守約)이 참봉에 천거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운천집

 

*敬次退溪先生東巖言志韻。贈李生岐。兼示兒子柱,楨。先生嘗卜東巖未就。今李靑松作大家居之

依然堂構翠微頭。佳木䓤瓏繞背幽。遠岫替屏窓外列。一溪如玉檻前流。

雲籬苔砌有餘馥。畫棟雕樑寜復求。願爾諸孫思善繼。莫教門户負淸休。

 

권성구(權聖矩)1642년(인조 20)∼1708년(숙종 34).

본관은 안동. 자는 서여(恕余), 호는 구소(鳩巢).

찬성 벌(橃)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뇌(賚)이다. 유직(柳稷)의 문인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전적·병조정랑을 지냈다.

1688년 진산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한때 모함을 당하여 벼슬을 떠나 귀향하였다가, 1692년 직강(直講)으로 복직하였다.

이듬해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1699년 강진현감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저서로는 《구소선생문집》 4권 2책이 전한다.

 

구소집

 

*吉安松巖謹次雲川金公[涌]韻

 

 

참고

 

운천선생 관련 자료

 

기축록 상(己丑錄 上) 황혁(黃赫)

○ 정언 김용(金涌)이 아뢰기를, “정철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인 것을 나라 사람들이 원통해 하지 않는 자 없으며 신은 비록 지난번에 추삭해야 한다는 의논에 참여치는 못했으나 공론이란 저지시킬 수 없고 흉악한 음모는 가려줄 없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여 많은 사람이 다 보는 바입니다. 지금 발단이 되었사오니 불가불 시비를 분별해야 하는데, 신은 동료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했사오니 피혐하고 물러가옵니다.” 하였다.

○ 부제학 김늑(金玏) 등이 상차(上箚)하기를, “공론이라는 것은 국가의 원기(元氣)이옵니다. 쇠미한 것은 이것으로 진작시키고, 급박한 것은 이것으로 구하는 것이옵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길러야 하오며 또한 만세에 밝혀야 하옵니다. 대개 이것이 없으면 원기가 쇠진하여 주린 것 같습니다. 정철이 최영경을 모함해 죽인 것은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에게 폭로되었고 위로는 임금께서 환하게 알고 계신 것이니, 이것이 틀림 없는 천하의 공론이오니 불가불 하루라도 쉬어서는 안 되오며 한 사람이라도 간언(間言)을 하여서는 안 될 것이옵니다. 신흠의 설은 사악(邪惡)을 누르는 데 방해가 되었고, 이시언(李時彦)과 이시발(李時發)은 견강 부회하는 데 빠져서 잃은 것이 없지 않사옵니다. 김우옹(金宇顒)과 기자헌(奇自獻)이 장차 정엽을 논핵하고자 한 것과 이개(李墍)가 전에 추삭하자고 의논한 것과 김용(金涌)이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사람이 딴말을 한다 해서 어찌 해될 것이 있겠사옵니까. 청컨대 신흠과ㆍ이시언ㆍ이시발은 갈아치우고, 김우옹ㆍ기자헌ㆍ이개ㆍ김용 등은 모두 출사(出仕)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조경남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안집사 김늑이 안동에 당도하니 선비와 벼슬아치들 50여 명이 찾아왔다. 그래서 전 도사(都事) 안제(安霽), 전 검열(檢閱) 김용(金涌)을 수성장으로, 출신(出身) 권전(權詮)을 영병장(領兵將)으로 삼았다. 인하여 각 읍에 영을 전달하여 도피한 수령들은 관아에 돌아와 일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적의 군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령들이 제 마음대로 도망갔는데, 유독 예안 현감 신지제(申之悌)만은 관문에 군사를 모으고 말에 재갈을 물리고서 변란을 대비하며 토적(土賊)을 잡아 죽이고 창고를 굳건히 지켰다.

○ 경상도 안동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다. 이때에 생원 김윤명(金允明), 진사 배용길(裵龍吉) 등이 초유사의 격문을 보고 부로들에게 고하여 이달 9일에 금법사(金法寺)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앞의 사람들이 먼저 가서 기다렸더니 전 현감 권춘란(權春蘭), 전 봉사 안제(安霽), 전 검열 김용(金涌), 진사 신경립(辛敬立) 등이 모두 와서 모이다. 의(義) 자는 스스로 뻐기는 혐의가 있다 하여 향병이라고 칭하다. 기약을 정하여 13일에 또 임하현(臨河縣)에 모였는데 전 예천 현감(醴泉縣監) 이유(李愈) 또한 참여하여 임하의 모임에는 사람 수를 백으로 헤아렸다. 김윤명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배용길로 부장(副將)을 삼아서 17일에는 향교에 모여서 일을 시작하는데, 윤명은 몸이 쇠하고 처사가 둔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생원 이정백(李廷栢)이 대신하다. 전 검열 김해(金垓)가 예안(醴安)으로부터 와서 합세하기로 모의하고, 이튿날에 일직현(一直縣)에서 동맹하여 예안ㆍ안동ㆍ의성(義城)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합하여 하나의 진을 만들어 다시 김해로서 대장을 삼고 정백ㆍ용길은 부장이 되며 안동 향교를 진소(陣所)로 삼다. 신경립은 문서를 맡다. 소속된 각 고을의 남정(男丁)은 모두 관군에 들어갔으므로 군사가 1만 명이 차지 못하자, 이에 선비와 품관(品官)을 모두 징발하여 건장한 자는 군대에 속하고 늙고 약한 이는 종[奴]을 대신하여 쌀을 바치게 하니 일부(一府)에서 얻은 것이 마침내 5백여 원(員)과 쌀ㆍ콩 1천여 석이 되다. 약속하기를, “적의 머리를 베는 것으로 상공(上功)을 삼는다면 먼저 베려고 다투다가 적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들의 이 일은 다만 적을 죽이려는 것이니, 잘 쏘아 꼭 죽이는 것으로써 상공을 삼고 머리 베고 왼쪽 귀를 베는 것은 차공(次功)으로 하자.” 하다. 그 뒤에 김면이 합도 대장(闔道大將 전라도 의병대장)이 되고 경립이 의병 명부를 가지고 강을 건너서 충청도 황간(黃澗)으로 둘러서 거창에 도달하다. 김면이 명부를 열람해 보매 모두 유생으로 편성되어 있으니, “이야말로 참의병이로다.” 하다. 이듬해 계사년에 김해는 천병을 따라 경주에 있다가 계림(鷄林)에서 병으로 죽다. 일이 위에 알려지매 홍문관 수찬으로 증직되었고, 생원 금응훈(琴應壎)이 대신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증(贈) 참판(參判) 김공(金公)의 묘명(墓銘) 미수 허목 찬

공은 본래 강좌(江左)의 문소(聞韶 의성(義城))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고려 때의 태자 첨사(太子詹事) 김용비(金龍庇)라는 분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인데, 공에게 12세조(世祖)가 된다. 공은 명 나라 가정(嘉靖) 36년(1557, 명종12) 11월 4일에 안동부 일직현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공의 휘는 용(涌), 자는 도원(道源)이고, 증조부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김예범(金禮范)이고, 조부는 성균관 생원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김진(金璡)이고 부는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을 지낸 김수일(金守一)이고,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사과(司果) 조효분(曺孝芬)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27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34세에야 과거에 올라 승문원 권지정자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뒤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 그해 겨울에 당직청에 있다가 천연두 발병으로 매우 위중하여 생기를 잃게 되자, 상이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위문하고, 또 이르기를,

“비록 병이 들어도 천품이 두터운 자는 요사(夭死)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과연 병이 나았다. 집에 갔다가 돌아오기 전에 왜구의 침략이 급하여 상이 서도(西都)로 파천하니, 이때가 바로 선조 25년으로 공의 나이 36세였다. 왜적이 잇달아 삼경(三京)을 함락하여 길이 통하지 않게 되자 공이 향병(鄕兵)을 모집하고 모든 의병(義兵)을 모아 방어하다가, 다음해 가을에야 비로소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다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양사(良史 훌륭한 사가)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때에는 황제(皇帝 명 신종(明神宗)을 가리킴)가 요좌(遼左)의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하러 와서 계속 승리하였는데, 고양(高陽)에 이르러 날랜 말을 타고 왜적을 대항하다가 크게 패하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은 달아나 화를 면하였고, 드디어 화의(和議)를 맺어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교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겨울에 상이 환도하자 공이 봉교(奉敎)에서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고 병조 좌랑으로 옮겼으며, 얼마 안 되어 정언(正言)으로 춘방 사서(春坊司書 세자시강원의 사서)를 겸했다가, 헌납으로 승진되었으며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으로 전직되었다. 얼마 후 지평에서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에 승진되니, 이에 당시의 중견(重堅)이 되었다. 학사 조정립(趙正立)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서사(筮仕 처음 벼슬하는 것)한 이래 청직(淸直)한 마음을 가진 이로는, 오직 정경임(鄭景任), 김도원(金道源) 두 사람을 보았을 뿐이다.”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사간에서 사성으로 옮겼다가, 집의가 되어서는 춘방 보덕을 겸하니, 이때가 선조 31년으로 공의 나이 42세였다.

왜적이 해상에 주둔하여 다시 쳐들어올 뜻을 밝히자, 명 나라 황제는 또 남북의 관병(官兵) 10여 만을 동원하여 왜구를 정벌하게 되었다. 이때에 좌상(左相) 이원익(李元翼) 공이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가 되고 공이 종사관이 되었는데, 매사를 계획할 적마다 강력한 보좌라는 칭찬을 받았다. 대병(大兵)이 이르러 군량이 시급해지자, 공이 교리(校理)로서 나아가 독운어사(督運御史)가 되었는데, 이때에 유성룡(柳成龍) 공이 영상(領相)의 임명을 받았다. 위란(危亂)한 즈음에 죽기로써 소임을 수행하였으므로 상(上)도 그를 의지하고 믿어서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소인(小人)이 틈을 타고 밤낮으로 온갖 계책을 써서 저해하여, 상의 마음을 노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유공(柳公)이 직위에서 물러나자, 조정에 있던 선량한 사람이 하나하나 쫓겨 가게 되었고 공도 쫓겨나는 화를 당하여 조정에서 용납될 수 없었으므로, 산직(散職)에 버려지거나 외직(外職)에 전보되어, 선산 군수, 예천 현감, 상주 목사, 홍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전란에 즈음하여 안팎이 소란하고 치도(治道)가 크게 무너진 때였으므로, 공은 가는 곳마다 백성 보호와 학교 재건과 풍속 개선에 힘을 썼지만 관직에 오래 있을 수 없었고, 길어야 1, 2년에 지나지 않았다.

홍주에 있은 지 1년 만에 대부인(大夫人)의 연세가 높아 부모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 다음해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공의 나이 벌써 54세였으나, 상중에 하는 절차를 늙었다 하여 조금도 변동하지 않았으며, 상복을 벗은 다음에는 태상정(太常正)이 되었다. 편수관(編修官)으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는데, 소인들이 정권을 잡은 터라 시비(是非)가 크게 엇갈렸다. 그때마다 공은 얼굴빛을 엄정히 하고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가니, 영상 기자헌(奇自獻)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조 때의 일을 명백하게 알기로는 이 사람보다 더 나은 이가 없다.”

하였다. 부평(富平)에 의옥(疑獄) 사건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해결을 못하자 본도(本道)가 계문(啓聞)하였으므로, 조정에서 특별히 사람을 택하여 파견하게 되었는데, 공이 명을 받고 가서 원고와 피고의 말을 듣고 사실과 허위를 조사한 다음 그 자리에서 판결을 하니, 인심이 크게 기뻐하면서 모두들,

“인재로군, 인재야.”

라고 하였다. 태상정에서 규례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서반(西班)에 있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던 해에 공의 나이 벌써 60세였고, 세도(世道)가 크게 어지러운 때라 공은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아문(衙門)의 일이 끝나면 여주 강상에서 조용하고 한가하게 지내다가 공의 장자(長子)가 죽자 돌아가 장사 지낸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가게 되었는데, 배를 타고 북강(北江)으로 올라가는 행색이 초라하고 쓸쓸하기만 하였다. 여주의 부로(父老)와 아전들이 강가에서 송별할 때 한참을 결백한 행정에 대해 서로 감탄하다가 해산하였다. 공이 시골로 돌아간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경신년(1620, 광해군12) 10월 19일로 나이는 64세였다.

공은 평생에 담소(談笑)가 적었고 외모(外貌)가 우아하고 수려하였으며, 입으로 남의 잘잘못과 조정의 득실(得失)을 말하지 않았으며, 책을 즐겨 읽고 사물(事物)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가까이할 만한 이를 가까이하고 착한 이를 착하게 여겼으니, 행동과 마음가짐의 올바름을 볼 수 있었다. 자제(子弟)를 훈계할 적마다 말하기를,

“성현의 글을 읽고 실천이 없으면 빈말이 되어 유익함이 없다. 내가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중간에 반평생을 헛되이 보내고, 나이 늙어 잘못을 고치려고 하였으나 미칠 수 없었다. 내 평생 가슴에 새겨 둔 것으로는 ‘궁해도 의리를 잃지 않고 영달하여도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는 것이었으니 이 여덟 자의 말에 힘쓰라.”

하였다. 성품이 담담하여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산수(山水)로 즐거움을 삼은 까닭에 자호(自號)를 운천(雲川)이라 하였으며,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세속과 더불어 평온하게 지내면서 재주와 덕을 감춘 채 생을 마쳤다. 임종(臨終)에는 부인을 물러가게 하고 말하기를,

“예에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운명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가사에 대하여는 말이 없이 편안하게 돌아가니, 생을 잘 마친 군자라 이를 만하다. 다음해 정월 갑신일에 임하(臨河 안동) 신곡(申谷)에 안장하였다.

숙부인 이씨는 군기시 첨정 이준(李寯)의 딸이며, 도산(陶山)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황)의 손녀인데, 부인은 본디 부덕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시부모 섬기기를 예법대로 하여 온 가문이 그 어짊을 칭찬하였다. 또 잉첩(媵妾 시중드는 여자 종)에게는 인자하고 종족에게는 돈독히 하니, 모두들 대현(大賢)의 세가(世家)에서 가정 교육을 잘 받아서라 하였다. 부인은 공과 동년생으로 공이 세상을 떠난 후 슬픈 마음으로 삼년(三年)을 곡읍(哭泣)하였고, 67세에 세상을 떠나니 10월 9일이었다. 임당(林塘)에 안장하였다. 5남을 두었으니 김시주(金是柱), 김시건(金是楗), 김시정(金是楨), 김시릉(金是棱), 김시상(金是相)이다. 김시주는 을유년에 국자감 시험에 장원을 하고 대과(大科)에 합격하여 병조 원외랑이 되었으며, 김시정도 동방(同榜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함) 생원이었으나, 불행히 명이 짧았다. 공보다 먼저 죽은 이가 네 사람인데. 김시주는 공이 여주에 있을 때 43세로 죽었으므로 돌아와 장사를 지낸 분이다. 김시건은 21세, 김시정은 34세, 김시상은 28세이며, 김시릉은 공이 세상을 떠날 때에 44세였으나, 상사(喪事)를 감당하지 못하고 1년이 못 되어 그도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 20년 기묘년(1639, 인조17)에 장손(長孫) 김희(金煕)가 묘지를 다시 정하여 임하 지동(枝洞)에 합장하고, 또 13년 뒤 신묘년(1651, 효종2)에 효종이 처음 등극하였을 때에, 임진년에 향병을 모집하여 방어한 사실을 상에게 아뢴 사람이 있어, 공이 특별히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인도 정부인이 되었다. 지금 와서 묘명을 청하는 사람은 김 원외랑의 손자로, 효릉 재랑(孝陵齋郞 인조릉의 참봉을 말함) 김태기(金泰基)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 嗚呼

군자의 나라 / 君子之邦

군자의 가르침 / 君子之敎

군자의 인격이라 / 君子之人

노 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 魯無君子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러하리요 하였으니 / 斯焉取斯

실로 이와 같은 사람이 있구나 / 信有若人

 

贈參判金公墓銘

公本江左聞韶人。姓金氏。高麗時。太子詹事龍庇。新羅敬順王之苗裔。而於公爲十二世。明嘉靖三十六年十一月四日。公生於安東府一直縣龜尾里。公諱涌。字道源。曾祖贈承政院左承旨禮范。祖成均生員贈吏曹判書璡。父自如道察訪守一。母漢陽趙氏。司果孝芬之女也。公少讀書修行。以才學著名。二十七。父歿。三十四。登科目。補承文權知正字。尋遷藝文檢閱。冬。在直。發痘甚重。無生氣。上令中官踵問之。且謂曰。雖病。厚賦者不殀。疾果瘳。歸家未返。有倭寇急。上西幸。是昭敬王二十五年。而公三十六。賊連陷三京。道不通。公募鄕兵。會諸義兵拒守。至明年秋。始得達行在所。復入翰苑。稱良史。時帝已發遼左兵來救。連勝之。至高陽以輕騎。遇賊大敗。提督遁免。遂與連和。令軍中禁勿交兵。冬。上還京。公以奉敎。陞成均典籍。移騎省佐郞。未幾。以正言兼春坊司書。陞獻納。改副修撰兼經筵檢討官。尋以持平。爲吏曹佐郞。陞正郞。於是重於時。趙學士正立語人曰。自吾筮仕來。秉心淸直。惟見鄭景任,金道源兩人云。未久。以司諫移司成。爲執義兼春坊輔德。時昭敬王三十一年。而公四十二。賊留屯海上。聲言再擧。而帝又發南北官兵十餘萬征倭。左相李公元翼爲諸道都體察使。公爲從事。每與計事。稱強佐。方大兵至。而兵食甚急。公以校理。出爲督運御史。時柳公成龍以上相。受命危亂之際。以死自任。而上亦倚任之甚重。小人乘瑕隙。日夜沮毀百計。令憾怒上心。柳公去位。而在朝良善一一斥去。公亦被斥。不容於朝。或置散。或補外。爲善山,醴泉,尙州,洪州。方師旅之際。中外板蕩。治道大壞。公所至。一以保民興學善俗爲務。亦不得久於官。久不過一年二年。居洪州一年。太夫人年高。以親老謝歸。其明年。太夫人歿。公已五十四。居喪之節。不以衰老少變。旣除喪。爲太常正。以編修官。參修昭敬王實錄。當群小秉政。是非大乖。公正色一一正之。領相奇自獻歎息曰。明知先王時事。無善於此人者。富平有疑獄。久不決。有本道啓聞。朝廷特擇人遣之。公受命往。聽所造閱實。情僞立辨。人心大悅。莫不曰有人有人云。以太常正。例陞通政。居西班▣年。爲驪州。公已六十。方世道大亂。公益無意世事。衙罷。遊驪上蕭散而已。公有長子死。而辭以歸葬。因去歸。乘舟上北江。行李蕭然。州父老吏士送之江上。相與嗟歎政潔。良久乃散歸。公歸田里四年而歿。庚申十月十九日。年六十四。公平生寡言笑。儀狀秀雅。口不言人臧否朝政得失。樂觀書。不以事物經心。親親善善。可見行己處心之正。戒子弟。常言說讀聖賢無實踐。空言無益。吾少年志學。中間枉過半生。年老雖欲悔過。亦莫追。吾平生服膺窮不失義。達不離道八言。亦勉之。性澹然無他嗜好。以山水自娛。自號雲川。當亂世。與俗易良。韜晦以終。臨歿。屛婦人曰。禮。男子不絶於婦人之手。不言家事。恬然而化。可謂君子之善終。後年正月甲申。葬臨河申谷。淑夫人李氏。軍器寺僉正寯之女。而陶山李文純公之孫也。夫人素稱婦德。事舅姑有禮。一門稱其賢。又仁於媵妾。篤於宗族。皆曰。大賢之世。家敎有自。夫人與公同年生。公歿。夫人哀慼。哭泣三年。而六十七歿。十月九日也。葬林塘。有五男是柱,是楗,是楨,是棱,是相。是柱。己酉國子壯元。登大科。爲騎曹員外。是楨。亦同榜生員。不幸短命。先公死者四人。是柱四十三。公驪州時死而歸葬者也。是楗二十一。是楨三十四。是相二十八。是棱公歿時四十四。不勝喪。亦未練而死。公歿之後二十年己卯。長孫煕改卜宅兆。合葬於臨河枝洞。又後十三年辛卯孝廟初政。以壬辰募鄕兵拒守事有白上者。公特追爵吏曹參判。夫人爲貞夫人今來問銘者。金員外之孫。方爲孝陵齋郞金泰基也。其墓銘曰。

嗚呼。君子之邦。君子之敎。君子之人。魯無君子。斯焉取斯。信有若人。

 

紀年便攷

 

金涌

 

金涌義城人守一子誠一從子字道源號雲川宣祖庚寅登增廣歴翰林銓郞官止

參議壬辰募郷兵拒守後赴行在趙正立每許其淸直郷人爼豆之

 

國朝人物志

(光海朝)金涌

字道源號雲川義城人察訪守一子宣祖庚寅文科壬辰募兵會諸義將拒倭爲奉常正修宣祖實錄出爲驪州牧使時年六十世道大亂無意世事棄官歸

 

향병일기 金垓

萬曆壬辰

四月

二十八日丁巳,

御駕西狩 裴龍吉 金涌 金玏等謀擧義兵 禮安鄕人奮義 倭入安東 倭入禮安 安東倭出陣豊山

八月

五日壬辰,

權永吉持招諭使 金誠一招諭文, 來示裴龍吉, 龍吉卽通文于安東, 一邑士類, 約會廬江書院, 與金允明·金允思兄弟往廬江, 惟柳復起·鄭澡赴約, 金涌 金 缺 원주 未至, 又出文約會于全法.

九日丙申,

前縣監 李愈, 前縣令 權春蘭, 前翰林 金涌及金允明·金允思·李亨男會, 裴龍吉·李應鼉·辛敬立·權益亨·琴夢馹·權終允·權泰一·權德成·權重光會于臨河縣東耆仕里松亨, 相議擧兵, 以裴龍吉·金涌爲召募有司.

十二日己亥,

前都事 安霽期, 會于臨河, 而是日 缺 원주 .

十三日庚子,

晴, 大會于臨河, 一鄕士友, 不期而至者, 以百數, 薦生員金允明爲大將, 以進士裴龍吉爲副, 金允思·李亨男爲整齊有司, 李應鼉·南祐·權泰一·金得礒爲掌書, 金得硏·柳復起爲餉軍都監, 缺 원주 自府以東, 權訥主之, 以西權紀主之, 權益亨掌北面, 金瀹掌南面, 缺 원주 會 缺 원주 , 翰林 金涌, 差本府守城將. 缺 원주 .

十五日壬寅,

雨, 會于安奇郵亭, 義城 禹景忠·義興 朴淵等, 自禮安歷訪相話, 缺 원주 之意曰, 隣近列邑同志之士, 同盟合陣, 則兵勢不爲孤弱, 此意通諭于安東士林云云.

十六日癸卯,

晴.

十七日甲辰,

晴, 會于鄕校, 點閱軍兵.

十八日乙巳,

右道人金沔·郭再祐·鄭仁弘等亦擧義兵 金垓爲大將 安東列邑鄕兵 額內額外儒以勞不均不滿 與下道鄕兵合陣于一直

晴, 大將以下諸有司, 會鄕校, 生員李庭栢 自橫城至, 大將金允明致席辭曰, 余智慮膚淺, 膂力襄鈍, 李庭栢沉湥有定志, 願亟遞代以成事, 衆議歸一, 遂拜爲大將,以鄕校爲陣所, 繕兵治械. ○時, 禮安 金垓·榮川 朴漉·安東 裴龍吉等, 幷起義兵, 而右道人金沔·郭再祐·鄭仁弘等, 亦擧義兵, 嶺南一道, 不屈膝於賊者, 義兵之力也.

十九日丙午,

晴, 禮安 金垓·琴應壎等, 來宿安東, 翌日將與列邑士友, 同盟于一直縣.

二十日丁未,

晴, 安東·禮安人, 與義城·義興·軍威人, 會盟于一直, 以禮安 承文院正字 金垓爲大將, 以安東生員李庭栢·進士裴龍吉, 爲左右副將, 兵號安東列邑鄕兵, 以義字嫌於自號, 故曰鄕兵. 원주 以安東爲本陳.

二十一日甲戌,

晴, 大將·副將, 自一直還本陳, 査考校籍, 擇除孱病者, 俾納米, 或代奴, 一從公論定之. ○額外儒安民 缺 원주 ,等百餘人, 有怏怏之意, 不聽號令, 大將捕來問之, 曰額內額外爲儒, 則等, 而勞逸不均, 此吾等之慊然者也, 大將曰, 公等誠碌碌也, 缺 원주 儒者所耻, 夫身先臨敵, 策馬奔殿, 固今日同盟之意, 而公等怨已之賢勞, 忌人之偃息, 是厭於討賊, 而樂於偸生也, 烏在其忘身殉國之義乎, 況整齊之際, 豈有容私遺漏之理哉, 公等以些小之憤, 遽背約束, 致軍中 缺 원주 不定, 遂此不已, 十步之內, 公等之首, 未免注槊, 於是安民 缺 원주 等, 懷憤乃釋, 退從號令 缺 원주 .

十二月

十四日庚子,

右副將還陣, 夕入見巡察使及兵使.

十五日辛丑,

晴, 大將及左副將還陣, 二松院金謀議亦來, 三衛將各率其卒合陣.

十六日壬寅,

朝雪晩晴, 三將入見監兵, 兩相相議擧事事, 聞二王子踰嶺, 駭憤益深, 見府伯下鄕校帖, 以廣募精勇之士, 圖出王子事也. ○高提督應陟, 高冲雲 義興·整齊將康忠立·軍官鄭恕·李適來于陣中, 大將與提督共作遣憤詩, 詩見別錄, 今亡之. 원주

十七日癸卯,

風, 高冲雲·庚忠立等辭歸, 大將及右副將, 與金謀議射帿. ○見府使所諭, 自忠州下來之賊五六百, 同到唐橋合陣云, 夜義將金涌, 率金澈·具成胤等, 來議討賊事.

十八日甲辰,

聞唐將沈祖二人率兵四萬來到順安 唐橋之賊大入龍宮

晴, 高提督來訪, 軍官金坪·吳淦等辭歸, 掌書琴夢馹來見, 聞掌書辛敬立遭外艱. ○答醴泉鄕兵書曰, 儒兵孤弱, 必須官軍, 果如所敎, 第未知將相之謀, 何時可定也, 鄙意則兵難遙度, 列邑諸陣, 雖會於二十日, 而相議謀定之際, 且經數三日, 抄選諸陣伏兵精銳者, 若得五六百, 則可與官軍合勢, 以當一面, 若或賊勢鴟張, 官軍雖未擧事, 而五六百精銳之軍, 會于一處, 則分番發遣, 晝可以追逐斬獲, 夜可以斫營焚蕩, 貴陣之軍, 必待官軍而後動, 則恐或機不可及, 而事未得也云云.

十九日乙巳,

雪, 大將朝見安集使, 因獻議四條于巡察使, 一曰立紀律, 二曰嚴黜陟, 三曰明好惡, 四曰謹延攬, 議在別錄 원주 ○聞唐將沈祖二人, 率兵四萬來到順安, 李成樑子兵部侍郞某率精兵七萬渡江云云. ○左副將來到陣中.

二十日丙午,

晴, 大將及琴謀議左副將 缺 원주 .

二十一日丁未,

晴, 兵馬使發向義城, 虞侯行醴泉.

二十二日戊申,

晴, 眞寶傳通云, 平義智已死. ○大將及右副將金謀議來陣, 掌書權得可繼至.

二十三日己酉,

晴, 午前合陣. ○大將權應銖馳報云, 唐橋之賊, 大入龍宮, 結陣于縣後山官客舍及元堂·神堂·古月谷·紙洞·院洞·石峴武夷谷等里云. ○及暮捲兵還唐橋. ○謀議盧景佖及善山鄕兵整齊將吉云得來陣. ○掌書金允安來陣.

二十四日庚戌,

晴, 金謀議及吉云得歸. ○軍粮都揔李詠道來陣. ○大將率掌書軍官, 試射于射壇. ○軍官金光道來陣.

二十五日辛亥,

晴, 巡察使出義城. ○大將副將試射. ○高提督盡先天圖送陣.

二十六日壬子,

營吏傳通大槩 軍威鄕兵埋伏仁同 軍威 奇大立等斬倭頭奪倭物上送云

晴, 遣伏兵將李選忠, 率精兵三十名出龍宮, 大將率掌書金堈·軍官金兌· 金坪·吳湜·李適出于豊山, 以節制伏兵也. ○高提督來陣, 講論先天圖及字說. ○李詠道歸. ○善山 朴遂一來陣. ○金兌來傳, 洪宗祿有白頭翁, 作詩贈之曰, 雨灑西邊柳色靑, 東風吹送馬蹄輕, 滿朝名䆠還都日, 奏凱懽聲已滿廷, 恢復之兆, 已見於此云.

二十七日癸丑,

風, 大將行到豊山, 取震天雷去, 大將以安伏事發向龍宮時也. 원주 ○營吏傳通大槩, 今月二十三日, 虞侯 權應銖率精兵四十人, 自比安往仁同, 覘賊射殺, 僧俗交賊者八人, 擒男三口, 女一口, 卽斬之, 以地勢不利不能大擧云. ○突擊將馳報內大槩, 今月二十日, 大邱賊五百餘名到仁同, 二十一日千餘名, 又自大邱向仁同, 仍留屯云. ○軍威鄕兵校生奇大立·姜慶瑞等, 埋伏仁同, 各射殺賊徒, 奇大立斬馘來獻, 卽報巡察使.

二十八日甲寅,

晴, 義城整齊將秘牒來到, 封不開卽送大將行住處. ○大將西行日記附, 是日風, 曉送人戒伏兵將李選忠, 愼有夜擊, 事不遇而還, 大將出仙夢臺, 指望賊陣, 自歎兵孤卒弱, 未能進討, 當夕而還. ○全繡·安福老·安敬孫等來見. ○西行日記附, 伏兵將李選忠處, 親聞賊奇, 大將趂曉發行, 路次見右副將, 馳報軍威 奇大立等, 斬倭頭, 奪倭物, 上送云, 歷龍宮登王泰洞西山, 候覘賊勢, 乘夕而歸, 人居燒盡, 白骨成灰, 將卒相顧, 不覺揮涕懷憤, 作除夕詩, 詩見集中 원주 , 還宿于松邱.

 

여지도서

慶尙道 善山

名宦

金涌 有淸白之操壬辰亂後始建學校文化大行

 

壇廟

安東

默溪精舍 在府東六十里立祠祀掌令 玉沽 大司諫 金係行 贈參判 金涌樓亭

石門亭 在府西二十里靑誠山觀察使 金誠一所構○金誠一詩誰謂吾生寠春來事事奇山鋪紅錦障天作碧羅帷拂石雲生袖呼尊月蒲古書還有味芻豢可忘飢

仙遊亭 在河東十五里生員金璡所構○金璡詩臺隱亭頭倚杖立秋風吹我到仙庵洪河北拆龍吟壯巨石西蹲虒視閃閃波紅楓倒錦盈盈沙白月鋪縑平生未盡江湖趣爲寫衰眞寄舍南○金克一詩藥山仙洞多官府曾卜淸奇結小庵水躍群魚尾潑潑庭馴雙虎眼眈眈詩書敎子藏黃卷金玉傳神掛素縑日祝靈春長秀茂兒孫成隊禮弧南

白雲亭 在臨河縣北二里察訪 金守一所構○金璡詩鑿壁開亭翠献頭江山明媚拂人眸日臨鏡面魚紋動雲掃天心雁字稠百里游歌曾物色一區花草亦光木樽前知有無窮樂只恐兒孫醉似劉○金誠一詩喜看堂構傅巖頭景物依然集遠眸兩岸秋山霜後爭一江春樹雨來稠星垂南極應難老棣八周詩可匹休勝事欲歌無好語淸詞誰借建安劉○李安訥詩永嘉東面襄西頭地僻亭高爽客眸玉鏡涵天春浪細石屛圍野晩蜂稠江山父子能相保麴孼功名早自休聞說龍蛇兵火遠桃源元不屬贏劉○金涌詩白雲亭子翠微頭雲去雲來幾入眸潭影悠悠飄練闊山容皓皓變衣稠萬千氣象還多感十二詩思詎蹔休坐臥於斯歌又哭吾知免矣慕天劉

人物

金璡 漢啓之曾孫號靑溪中司馬 贈判書後人立影堂祀之五子配焉

金克一 璡之子登第官至司成號藥峯配祀泗濵影堂

金守一 克一之弟中司馬薦補察訪號龜峯配祀泗濵影堂

金明一 守一之弟中司馬以儒雅見稱號雲巖配祀泗濵影堂

金誠一 明一之弟師事李滉聞心學之要堅苦刻勵造詣精深登第官至觀察使嘗奉使 日本動以禮法倭人敬脤壬辰之亂受本道招諭之 命忠義感動義旅爭集江右一帶賴以得完未幾卒於軍中士民涕泣相吊後 贈判書謚文忠配享虎溪書院有鶴峯集 梅槎錄等書行于世

金復一 誠一之弟淸介有志行登第官至府使號南嶽配祀泗濵影堂

金涌 守一之子號雲川登第歷敭淸顯正直持論風彩動朝官至兵曺參議以原從功 贈吏曺參判後人祀于默溪精舍

金是榲 克一之孫淸苦有志操好學能詩崇禛丙子後 除參奉不就杜門屛居後人立石表其居曰崇禎處士 遺墟今 上乙卯因 筵臣陳達 贈執義

金世欽 涌之玄孫登第官至弘文校理

 

*贈資憲大夫吏曹判書雲川金先生諡狀 徐正淳 撰

 

我 聖上卽阼之二十有九年壬辰以中興舊甲慨然追感上顯號于宣祖室凡當日勳庸勞勩臣之有未盡褒錄者贈爵有差於是故通政大夫兵曹參議知製敎贈吏曹參判金公加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三十七年庚子嶠南紳士以公道學忠節聯疏請易名事下政府政府覆請 上可之朝家崇奬之典備矣公之後孫甲秉以其狀屬正淳正淳雖不文竊有平日執鞭之慕遂不敢終辭謹撰次之先生諱涌字道源號雲川系出新羅敬順王第四子諱錫食采義城子孫仍籍焉四傳至高麗太子詹事諱龍庇有功德廟食其土入本朝有諱漢啓官集賢校理及 莊陵遜位不仕而終寔爲公五世祖高祖諱萬謹進士贈通禮曾祖諱禮範贈左承旨祖諱璡號靑溪生員贈吏曹判書以公叔父文忠公諱誠一貴也文忠公兄弟凡五人幷稱退陶李先生高弟考諱守一薦遺逸官察訪號龜峯妣漢陽趙氏司果孝芬女以 明宗丁巳生公于安東一直縣龜尾里第公生而儀彩峻發精神秀朗聰悟絶人藻思遒逸判書公奇愛之授以傳世寶所謂文章釼者也文忠公嘗抱置懷中曰門戶之望在汝及長聘退陶先生之門時先生易簀纔數年及門諸公皆在公獲聞緖餘已知爲學之方而所以濡染服習者不離典訓之內年未弱冠以文章才德著聞西厓柳文忠公見而歎曰天生此輩人儘不偶然癸未丁察訪公憂愼終喪祭如禮廬墓終三年後以太夫人命應鄕擧庚寅登文科薦入藝文館爲檢閱在直患痘 上遣中使踵問且曰天賦厚必無虞得無損好貌否聞者榮之病已呈告歸壬辰倭寇急 上西幸道梗不得奔問公雪涕曰此豈臣子苟生之日耶卽發家丁褁私糧入本府爲倡義禦賊之策安集使金公玏檄公爲本府守城將公立草募兵文曰死生當以討賊不討賊爲決忠誠豈因食祿不食祿有間事成可以雪憤於神人不成猶且不愧於徒死聞者莫不感奮遂繕城理兵時出銳師多斬獲時文忠公以右監司在晉陽隱然聲勢相倚江左十數郡賴以全翌年秋間道赴行在復拜檢閱陞待敎奉敎相臣有貪懦者直書不饒時人韙之冬扈駕還都陞典籍遷兵曹佐郞甲午拜司諫院正言兼侍講院司書與大司憲金公宇顒執義李公晬光箚論崔處士永慶冤而伸之拜奉常主簿司諫院獻納選入弘文館授副修撰知製敎遞爲司憲府持平鶚立 朝端風采凜然咸曰眞金鶴峯侄也鶴峯文忠公號也拜吏曹佐郞凡有除拜常帶知製敎尋陞正郞自此四年之間多在天官而汰濁揚淸人不敢干以私趙公正立語人曰吾嘗見爲銓郞者淸直不可犯惟金某鄭景仁二人耳丁酉倭寇再訌左相李公元翼爲都體察使辟公從事曰吾之强佐也悉以衆務委之戊戌拜司諫司成執義兼輔德上書 東宮曰事爲之見於外者或可勉强行之本源之陰症裏病消歇與否非外人之所知徒欲逐事而捄正不幾於破屋之禦寇乎光海心憚之亦無以罪也拜校理仍差督運御史七年兵荒之餘公私赤立布諭諸郡承風恐後漕餉未嘗乏絶遷 宗廟令時北人倚光海用事西厓柳公以讒去公亦被劾不容于朝己亥補善山府使府新刳於兵蓬蒿溢目公至則安集之導以儒化閭里始知有生民之業而文敎稍振捐俸葺金烏書院與盧公景任崔公睍日講學于其中癸卯入爲濟用軍資二正弼善甲辰拜直講司藝出爲尙州牧使未幾忤方伯投劾歸乙巳錄原從功二等賜錄券甲午復出爲醴泉郡守將行辭尹相承勳尹相躧履出迎家人恠其已厚尹相曰爾不聞金某爲當今第一流耶爾以其官我以其人至郡以育才爲先務依朱子同安學規選邑之秀者月一大會講義理儒風丕作時館儒請五賢從祀賊臣仁弘上箚毁斥李文元公又有一種時論詆短金文正公以沮之有以書來問者公答曰陞祀實無損益於兩先生而論其傳道統緖一時從祀無疑矣自是異議遂寢己酉除洪州牧使以親病辭庚戌丁大夫人憂時公年幾耆守制如前喪不少衰撰文忠公言行錄其末曰向善之誠信道之篤如水必東如矢注的不以幽闇而或間不以細微而或忽義理公私之間毫釐不容不察事物應接此乙卯以編修實錄勞陞通政拜兵曹參議特除知製敎光海姬屬許姓某來言嶺臬有闕吾爲公圖之三問而公不答丙辰除驪州牧使時群奸用事朝綱日紊公益厭世故無意吏事愛驪之山水扁舟赴之衙罷往來江上蕭然不知其爲官長也丁巳乞暇還鄕行李惟梅花四季二叢而已及歸力辭遞公歷典五邑不以官物自隨歸家輒假貸以食內而諸省列寺外而州府郡之吏與民一辭稱之曰耳古目今無如某爺淸者云引藍田呂氏鄕約及退陶先生立條著爲鄕憲行之又除兵曹參議及冬至使皆以病辭蓋自 西陵變後杜門謝事決意自靖有黃甥者以官赴召過公公以詩絶之曰爲圓何必劚吾方當事先須立脊梁若使蕙蘭終變化不如蕭艾本無芳鄭公經世聞之貽書曰脊梁詩令人欽服然西湖雖好莫吟詩古人所戒也公平生受用在論語一部而尤慕顔氏之學扁其室曰不貳作賦而自警嘗諭子弟曰讀書不能身踐只是說話却不濟事孟子曰窮不失義達不離道是吾八字符也當是佩服而勿失有請學者必以四子書及洛閩諸賢書爲工夫次第一時學士大夫多宗師之自幼事親孝盡誠致敬事死如事生與弟友愛怡怡撫孤如己出平居顔色必正几案必整終日歛膝淸坐未嘗是非朝廷議論人物不以家事經心屢空晏如也不起第宅亦無常居境與意愜輒寓焉晩歸于先公所構白雲亭每風日淸美雲霞澄鮮角巾藜杖飄然有出塵想而憂國傷時之懷發於嘯詠而不自禁也公素無疾庚申十月忽示憊未數日而革命子侄而前曰汝曹愼爲善吾病非可醫也仍屛婦女以十九日考終享年六十四所著詩文逸於喪亂有若干卷行于世紆餘理達不事雕餙讀者知爲有德者之言也配贈貞夫人眞寶李氏僉正寯女退陶先生孫早服家訓婦德咸備後公三年卒始葬各原後因遷公兆而合封于臨河縣獨自山負壬原公歿後三十二年辛卯 孝廟以倡義功贈吏曹參判公有五男二女長是柱佐郞次是楗贈左承旨是楨生員是棱是相女適判官裴相益生員李廷俊孫曾以下不盡錄先生以天挺峻偉

之姿忠孝以本之問學以資之授受端的踐履篤實蘊之爲德行發之爲事業譽望日隆恩遇日摯因是而進爲於世則行道濟時非公之事歟顧乃奔走於戎馬之際沮敗於讒忌之口終之鬼蜮肆行倫常斁絶到底無着手處惟有卷懷林泉收拾斯文之遺緖以爲後學之模範而已跡公立朝行己之可見者入則講對剴切懇懇輔導忠言讜論棘棘不阿直筆書事讒誣屛息出則所在政淸絲毫無累蘇殘祛弊興學善俗以言乎勳績則扞禦一方義勇響從督運諸州餽餫輻至以言乎操履則掖親納餂拒而不顧近屬赴官耻之若凂此特公之著於施措嚴於出處者而猶未足以槪公也同時諸賢皆以淵源之學歸之有曰造道成德未嘗不始於剛而卒反之純如也有曰晩年道益崇德益邵雖古之名賢奚加焉臨湖書院是公俎豆之地而士林之尊慕愈久不泯蓋公之學得之文忠公文忠公得之退陶先生嫡傳正脈有自來矣於此可質公之平生而以詔百世也歟或者以公之道未行爲公憾而行與不行命也於公乎何有烏乎距公歲且三百有餘矣後之仰公者讀其書誦之義其孰不掩卷而興歎玆庸撮其大略以告太常氏

從一品崇祿大弘文館學士達城徐正淳謹撰

[照訖付奉常司

光武六年二月六日

堂上     郞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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