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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량 서재

책이야기/한국의 고서(古書)/허생전

작성자물매|작성시간22.05.15|조회수266 목록 댓글 0

책이야기/고서(古書)/허생전

 

물매 정인량 

 

개요

 

연암 박지원의 소설. 조선 후기에 연암 박지원이 당시 조선의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한문으로 쓴 풍자 소설. 2020년 현재고등학교,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허생전이 현대 한국어로 번역되어서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열하일기 안에 있는 《옥갑야화(玉匣夜話)》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박지원과 비장[1]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박지원 자신이 윤영(尹映)에게서 들은 변승업[2]의 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와 허생에 있던 이야기를 펼친 것이, 바로 허생전의 내용이다.

 

허생전의 후기에 윤영에 대한 자세한 글이 나오는데, 박지원이 스무살에 머문 절에서 만난 노인이 바로 윤영이었으며, 그곳에서 허생의 이야기를 듣고 전기를 짓겠다 그에게 약속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고, 박지원이 다른 절에서 그 노인을만났을 때, 노인은 자신이 윤영이 아니라, 신색(辛嗇)이라고 말했으며, 왜 이름을 바꾸었느냐는 말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오히려 화를 냈다고 기록했다. 박지원이 문을 닫고 나올 때, 노인이 안에서 중얼거리길, 

"애처롭게 되었구나. 허생의 아내는 필경 또다시 굶주리게 되었을 터이지."

 

참고로, 《북학의》를 쓴 박제가가 압록강 동쪽에서 손에 꼽을 만한 문자라고 칭찬한 바 있다. 

 

또한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의 권력의 법칙에서도 날개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한국어판과 영문판 배치 순서가 다르니 찾아보려고 할 경우에는 주의해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줄거리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 원문

주인공인 허생은 가난한 형편에도 10년 글 읽기를 기약하며 매일 글을 읽고 있었는데 7년째 되는 어느 날 아내가 허생에게 내가 당신 다 먹여살리는건 아냐, 선비 질도 장인 일도 장사도 못 하면 차라리 도둑질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오라고 하소연 한다. 

 

그러자 허생은 아내의 절절한 말에 글 읽기를 멈추고 집 문 밖으로 뛰쳐나가서는 한양의 갑부인 변씨를 찾아가 당당하게1만 냥[4]이라는 거금을 빌려 간다. 그리고는 바로 안성시장으로 가서 그 돈으로 과일을 다 싹쓸이해서 10배의 폭리를 취하고 제주도로 가서 말총을 다 싹쓸이해서 망건 값을 10배로 올려 처음 꿨던 돈의 100배로 불린다. 이때 떼돈을 벌어 기쁘지 않냐는 시종에 말에 오히려 "1만냥만 가지면 팔도를 뒤흔들수 있으니 심히 한탄스럽도다!" 라면서 원시적이고 전혀발전하지 못한 조선의 경제체계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얼마 뒤, 때마침 변산에서 도적 떼들이 들끓자 그들의 사연을 듣고는 그들을 회유하여 살기 좋다는 무인도[5]로 데려가서 새 삶을 살게 하고 일본[6]의 기근을 도와주면서 은 백만 냥을 벌게 되었다. 그러나 땅이 좁은 것에 한탄하면서 돌아가기로 마음먹으며 섬에 드나드는 배를 모조리 불태우고 바다에 50만 냥을 그냥 버린다. 그리고 섬에 있는 사람 중에글을 아는 자들을 골라내어서 배에 태워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허생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나누어주고 10만 냥이 남게 되자 변씨에게 몽땅 다 갚는다.

 

이에 변씨는 깜짝 놀라며 남은 돈을 다시 돌려주려고 했지만 허생은 거절했고 이를 계기로 허생과 인연을 맺게 된다. 얼마뒤 변씨가 어영청 대장인 이완 대장에게 허생의 얘기를 하자 이완 대장이 놀라며 허생을 찾아간다. 이완이 허생에게 청나라에 대한 대책을 묻자 세 가지 해결책을 던졌는데 이완이 모두 어렵다는 답만 했다. 그러자 허생이 이완을 꾸짖으면서 로 찌르려고 위협했고 놀란 이완 대장은 뒷문으로 도망갔다. 그 다음 날 이완이 다시 찾아가 봤지만 허생은 이미 사라져그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작품 외적인 내용

 

본 작품이 다루는 당시의 사회상은 다음과 같다.

  • 10년 글공부에 매진하려고 했으나 7년 만에 아내의 구박에 집을 나오는 것은, 돈 한 푼 없으면서 무위도식하는 당시 몰락 양반들을 풍자한 것이다[7]. 양반전의 처음 부분과 매우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여기서 허생은 공부를 자아성취로 보는 반면에 아내는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파악하고 있다.

 

  • 허생이 매점매석으로 시장을 쓸어 버리는 장면은 당시 조선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도고[8]의 패러디이다.

 

  • 도적들과의 만남에서 알 수 있듯 조선 후기 양반들과 새로 부상한 부농들에게 착취당한 힘없는 서민들은 농사를 팽개치고 도적이 되는 경우가 빈번했다.[9]

 

  • 이완을 베어 버리겠다고 한 것은, 북벌론이 오랑캐에게 당한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과는 달리 당시 서인들이 권력을유지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간파한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좀 이상한 지적인 것이 북벌론을 주장한것은 서인, 남인을 가리지 않은 유림 전반의 바람이었고 오히려 숙종조에 들어서면 서인들과 탁남은 "백성들이 힘든데 북벌은 얼어죽을 북벌!"이라면서 회의적이었고, 윤휴를 비롯한 청남계 인사들만이 강력하게 북벌을 추진했다. 막상 효종조에 가보면 송시열을 비롯한 대신들은 "그냥 수신이나 하라"고 하지 "군사를 길러라, 대포를 만들자" 따위의 구체적인 북벌은 언급하지도 않고 아예 북벌에 대해서 때가 이르다는 식의 지극히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내 일전에 청에서 지내면서 저들의 시스템이 어떤지 다 알고 있으니 잘 하면 이길 수 있다!"라면서 혼자서 북치고장구치고 북벌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효종이었고 효종이 죽은 이후 현종이 즉위한 다음에야 송시열, 송준길 등이"이전에 효종 대왕께서 강병 수십만을 길러 북벌을 정벌하겠다라고 하셨다니까요!"라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이 북벌을 도운 효종의 충신임을 강조했다. 게다가 이후의 북벌론도 윤휴의 북벌론을 제외하면 자신이 충신이자 유자임을드러내려는 쇼에 해당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 부분은 북벌을 하겠답시고 허례허식에 매여 정체된 조선 사회를 비판하는 부분이란 얘기도 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효종은 조선의 허례허식을 혐오하고 민첩한 행동이 용이한 융복을 숭상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효종 실록에는 효종이 조선의 예복은 소매도 길고 너풀거려 불편하기 짝이없고 갓은 높은 것이 우스꽝스럽고 문지방에나 부딪힐 복장이라고 까는 한편 청나라의 시스템을 언급하면서 이를칭찬하는 내용이 많아 사대부들이 오랑캐 문화에 빠졌다고 투덜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이하는 길어서 생략

 

  •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허생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은, 당대 조선 사회의 모순이 치료될 수 없음을드러내는 작가의 일갈로 볼 수 있다. 다른 설로는 작가가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거나 당시 기준으로 보면 파격적인 내용이라서 일부러 자취를 감추었다고 설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후일담에서 이 이야기를해줬다는 윤영이 이름을 바꾸고 숨어있는 것으로 묘사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이를 제외하고도 허생의 이인(異人)다움을 강조하고 독자들에게 여운을 남기는 미완성적인 완결이라고 절대론적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쌀을 팔아 은 백만 냥을 얻는 장면에서, 왜 하필 나가사키인지에 주목하는 경우도 있다. 당시일본은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중국은 물론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도 교역을 하면서 문물을 받아들이고있었는데, 당시 일본을 방문한 조선의 통신사들은 일본이 유럽과 교역하는 상황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중국과 무역을 하고 있다는 상황은 잘 알고 있었으며, 박지원은 1763년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인물들 중 일부와 친분이 있었다. 즉 나가사키라는 곳이 무역이 활발한 항구라는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쌀과 은을 대규모로 매매하는 것은 사무역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시대적 한계

 

  • 허생의 한계 역시 허생전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자신 역시 장사를 했던 주제에 상인을 장사치라고 폄하하면서 자신은 선비라고 주장해 아직 조선 시대의 사농공상이라는 전통적 계급, 신분 사회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 비교우위 항목에서도 보이지만 당대인 입장에서 상업과 상인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가치는 이해하기 매우 힘든일이다.[10] 이들은 실제 생산을 하지만, 직관적으로 볼때 생산하는 것이 없어보인다. 유학에서도 상인은 도둑보다조금 나은 사람으로 상업은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없이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만 하는 "투기꾼"에 불과했다. 공자부터가 백성의 질이 안좋아지므로 상업을 억압하라는 말을 해두었다. 허생전에서는 조선경제를 이처럼 부흥시키라는 말을 하는게 아니라 허생같은 나쁜 놈들이 돈을 버는 법이 이렇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따라서 조선은 허생같은 나쁜 놈을 막는 법을 깨우쳐라가 답이지, 허생을 키워라가 그 교훈이 아니다. 당장 위에서 50만 냥을 그냥 바다에 버렸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 사실 극 후반으로 가기 이전까지는 충분히 개화사상을 강조하는 실학자의 서적일 수 있었다. 조선 경제가 그렇듯토호 한두명의 물가장난질에 취약했던 것은 소설 이전에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물류운송망이 너무나도 취약해 국지적인 물가상승/하락에 대응헤 다른 지역에서 물자를 수송해온다는 옵션이 없었고, 시세정보에 대한 예측,교류가 이루어지는 거상의 상단과 상인조합이 부재했기 때문에 대지주 토호 몇이 이런 시세 장난을 치는게 가능했던 것이다. 이 덕분에 소설에서 허생의 장난질이 성공했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잇었다. 이런 문제를 현대의 경제학자들에게 해결하라면, 육상도로망을 정비,확충하고,해운교통로를 확립시키고 조선소,항만의 건설로 해상물류를 발달시키며, 상인 상업조합의 결성,보호로 각지의 시세정보 예측 및 각지의 상인들로 하여금 그 예측치의 원활한 교환이 될 수 있었다면 허생같은 매점매석짓은 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조선인들의 물자조달비용이크게 하락하고 후생과 생산력이 폭발하여 조선의 국력은 크게 성장했을 것이다. 

 

  • 하지만 그가 이상향으로 제시한 것은 글자를 모르는 농부들만의 섬, 즉 전통적인 유가에서 이상화한 원시공산제적농업공동체로 퇴화했다. 성호 이익의 정전론에서 보듯이 실학자들도 유학자인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성리학자와다르게 현실을 볼 수는 있었으나, 그래서 뭘해야지 될줄은 몰랐으며 오히려 더 반동적인 제안을 하기 일쑤였다. 이렇듯 깨어있다는 조선후기 실학자의 경제관념도 겨우 이 정도에 불과했던걸 알 수 있다. 실학자들을 자본주의 맹아론의 일부로, 한국의 자본주의를 일깨울 사람처럼 묘사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 그들의 경제처방은 언제나 유교 서적에 써있는 균전제 정전제에 머물러 있었고, 심지어 실학의 최고봉으로 빨리는 정약용은 중공의 인민공사같은 여전제를 내놓는 등 유사한 근대적 사고방식을 찾아보자면 사회주의에 오히려 가까웠다. 그리고 그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이런 처방은 왕망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으로 제대로 먹힌 적이 단한번도 없다.

 

  •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제목의 소설도 있다. 작가는 최시한. 오리지널처럼 당시 사회상을 비꼰 내용이면서도 허생전 자체에 담겨있는 한계 또한 비판하면서 마지막 대목 허생이 떠나는 것에 대해 "그것이 당시 지식인의 한계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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