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대상으로서의 의도
2)심신의 통합적 관찰
의도와 갈애의 관계를 기준으로 보면, 의도는 인간을 윤회하게 하는 과정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자신 안에 나타나는 의도를 대상으로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과정을 통해 갈애를 다스리고, 열반의 증득을 추구한다.
『맛지마니까야』의 『가나까목갈라나숫따(Gaṇakamoggallānasutta)』는 수행의 단계적 발전을 다루고 있다. 붓다는 바라문 가나까 목갈라나에게 불교수행에 '단계적인 배움', '단계적인 실천', '단계적인 발전과정'이 마련되어 있다고 설한다. 이 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수행의 단계로서, 가장 먼저 계행과 계율을 갖출 것을 권한다. 계행과 계율은 마음이 몸으로 표현되는 것을 다스리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먼저 몸의 영역을 조절할 것에 대해 초점을 둔다. 붓다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기 위해서, 몸에 관련된 다섯 가지 요소가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첫째, 계행을 닦고 계율을 갖추고, 계율에 의한 제어를 준수하고 행실과 행경을 원만히 하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 계율을 수용하여 배울 것, 둘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이 남긴 인상이나 연상에 집착하지 않도록 할 것. 셋째, 식사하는 데 분량을 알 것. 이것이 오락, 도취, 아름다움, 매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몸을 지탱하고 건강을 지키고 상해를 방지하고 청정한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임을 인지할 것. 넷째, 낮밤으로 경행과 좌선을 하고, 잠들거나 깨어나는 순간조차 깨어있음에 전념할 것. 다섯째, 몸에서 경험되는 모든 동작에 알아차림을 적용할 것. 보고, 몸을 굽히고, 먹거나 마시거나 삼키거나 소화시키고, 대소변을 볼 때, 행주좌와(行住坐臥)의 모든 순간에, 깨거나 말하거나 침묵할 때에도 그것을 올바로 알아차릴 것을 강조하였다. 붓다는 이렇게 수행하고 나면 비로소 외딴 곳의 처소에서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음 단계로 숲속의 수행처에서 5장애를 제거하고, 첫 번째부터 네 번째 선정까지 성취하는 것이 가능함을 설명하였다.
『가나까목갈라나숫따』는 수행의 발전에 있어서 단계가 필요하며, 수행의 초반에는 계를 갖추고 6근을 통해 이미지나 연상작용으로부터 멀어질 것을 강조한다. 계행, 감각 관찰, 식사에 대해 알아차림하는 것, 경행과 좌선을 열심히 하는 것, 일상생활의 모든 자세에 대해 알아차림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다스림을 다루고 있다. 붓다는 이러한 단계적 성취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모든 수행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한다. 왜냐하면 붓다가 길을 제대로 제시하였다 할지라도, 그 길은 수행자 개인이 직접 가야 하며 그 결과까지 보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라자가하 시로 가고자 그대에게 다가와서 이와 같이 '존자여, 나는 라자가하 시로 가고자 합니다. 라자가하 시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대는 그에게 '존자여, 이 길이 라자가하 시로 가는 길입니다. 잠시 이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어떤 마을이 보일 것이다. 조금 더 가면, 그대는 어떤 도시가 보일 것이고 조금만 더 가면, 아름다운 공원들과 아름다운 숲들,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라자가하 시가 보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그대에게 충고를 받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는 잘못된 길을 택해서 서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경전의 설명을 통해 수행자의 점진적인 수행 방법과 발전 과정이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마하사띠빳타나숫따(Mahāsatipaṭṭhanasutta, 大念處經)』는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을 강조한다. 4념처 수행은 네 가지 수관(隨觀)을 제시한다. 신념처(身隨觀)으로 설명되는 몸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은 앞서 '의도와 3학'에서 8정도의 정념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신념처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여섯 가지의 방법이 서술된다. ①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②행주좌와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알아차림, ③몸의 동작에 대한 순수한 알아차림, ④몸을 이루는 서른 두 가지 부정한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⑤몸 속에 존재하는 땅, 물, 불, 바람이라는 4대(四大)의 요소, ⑥아홉 가지 단계로 변화해 가는 시체에 대한 관찰이 그것이다. 본 경전은 이처럼 몸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pajānāti)을 제시한 후, 느낌, 마음, 법을 다루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렇게 몸에 집중하는, 즉 호흡을 관찰하거나 행주좌와 등 자세를 통해 알아차림을 강화하는 수행방법이 대중적 수행체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몸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마음으로 나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맥락으로, 냐나포니까 테라는 몸에 대한 수행이 먼저 확립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몸을 대상으로 제한하여 먼저 알아차림을 시작한 다음, 그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고 이후 지각하는 과정과 내용들, 생각에 이르기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동일하게 생존을 추구하는 모습도 있지만 고귀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측면도 존재하며 이러한 특징이 곧 알아차림의 영역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인 몸의 차원과 보이지 않는 마음의 차원이 수행에 있어 모두 경험되어야만 내적인 성장 역시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내적 충동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마음은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지만 정작 몸은 지쳐서 도저히 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라거나, 감정과 이성이 충돌한다거나 하는 상황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냐나포니까 테라는 이러한 모든 상황에 균형적이고 통합적인 알아차림을 적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관건이 된다고 보았다.
"수행의 영역에 있어 결국 무엇을 단련하고, 변형하고, 초월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 수행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경험하는 수행자는 일상적인 경험을 함에 있어서 4념처 모두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1차적으로는 신체적인 요소들에 대해 제한하여(few selected subjects) 사색하는 것이 필요하나, 이후에는 다른 요소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
이러한 근거로 보아, 몸[육체적 감각]을 관찰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은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초기경전 안에서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반드시 '순서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설명은 찾아보기는 어렵다. 몸의 관찰이 먼저 진행될 수는 있겠으나, '몸의 관찰을 모두 마친 후에야 느낌의 관찰로 넘어갈 수 있다'는 설명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몸을 관찰한다는 것은 곧 몸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에, 몸을 관찰하는 것과 느낌을 관찰하는 것을 따로 떨어뜨려 순서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신수심법(身受心法)을 수행 방법의 순서로 볼 수 없음은 자명한데도, 몸을 관찰하는 것이 마음을 관찰하는 것보다 우선이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몸을 관찰하는 것이 마음을 관찰하는 것에 비해 보다 수월하다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좌부불교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집대성한 『청정도론』에는 몸과 마음에 대한 대상으로서의 순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어쩌면 이러한 문헌적 배경이 오늘날 남방상좌부불교의 수행 진행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와 같이 물질에 대한 파악이 지극히 선명해졌을 때 비물질적 사실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명해지는 까닭에 물질에 대한 파악이 지극히 선명해진 자만이 비물질적 사실의 파악에 매진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자가 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한 가지 물질적 사실이나 두 가지 물질적 사실이 나타날 때 물질을 버리고 비물질을 파악하기 시작하면, '땅의 두루채움'의 수행에서 설명한 산속의 암소처럼 명상 주제를 잃고 만다. 물질에 대한 파악이 지극히 선명해졌을 때 비물질적 사실에 대한 파악에 매진하는 자에게 명상 주제가 성장되고 증대되고 확장된다."
물질적 사실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물질을 버리고 비물질을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은, 몸에 대한 관찰이 완성되기 전에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위빠사나(Vipassanā)의 수행지침에 대해 언급하는 우 바 킨 역시 수행을 시작하는 초보 수행자에게는 마음이 아니라 몸의 느낌에 보다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와 접촉에 의해 생겨나는 느낌은 다른 유형의 감정보다 확실히 또렷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 수행자의 경우 물질이 변화하는 것을 관찰함을 통해 보다 쉽게 무상(無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상이라는 진리를 보다 빠르게 이해하기 원한다면 몸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 된다. 물론 다른 식의 방법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다른 방법[마음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을 시도하기 전에 몸의 느낌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무상에 대한 이해를 확립하는 것을 보다 권장한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경우라면 쉴 새 없이 빠르게 변하고 확장하는 마음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몸[몸의 느낌]을 관찰하는 편이 보다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수행에 정진하여 이에 진전을 거둔 수행자라면 계속해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 방식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마음의 영역으로 관찰의 대상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진의 결과로 수행자의 관찰 능력은 점차 향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숙련된 수행자라면 몸과 마음의 영역을 함께 알아차리는 수행으로서 의도를 관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몸의 감각에 치우친 수행의 대상을 몸과 마음을 함께 알아차리는 것으로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수행의 대상을 확장함으로써 수행의 깊이를 더하게 할 수 있게 된다. 『청정도론』 역시 있는 그대로의 앎을 위해, 몸과 정신을 모두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명시한다.
"그러므로 의혹에 대한 극복을 원하는 수행승이라면, 항상 새김을 확립하여 널리 명색의 조건을 파악해야 한다."
수행자는 사띠를 통해 명색의 조건을 파악해야 하며, 의도는 명색의 조건에 해당한다. 즉, 수행자는 사띠를 통하여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위방가숫따』는 명색의 구성 요건으로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을 설명한다. 즉, 의도를 수행의 주요한 대상으로 삼을 것이 요구된다. 상좌부 불교 전통을 계승한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는 의도와 관련한 수행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을 통해 의도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먼저, 몸의 관찰을 통해 무아의 진리를 관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바로 직전의 현상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다음의 현상들이 뒤따라와 그 자리를 대체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나는 움직인다'라고 문장 표현을 하더라도 거기에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 있을 때, 서려고 하는 의도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서 있는 자세를 지탱하는 뻣뻣한 순간들이 지속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서 있다'라는 것은 단지 개념일 뿐이다. 그들은 통찰을 기르는 이와 같은 수행법[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서려고 하는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의도함과 경직된 느낌이라는 것이 순차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괄호는 논자]
마하시 사야도의 설명에 따르면, 수행자는 몸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하나 결국 이러한 몸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을 통해 자아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고, 의도와 느낌만이 경험된다는 것을 지각하게 된다. 또한 몸이 움직일 때 관찰하는 것을 통해, 가려고 하는 마음도 물질과 혼동하지 않고 따로 분리하여 알 수 있음을 확실히 하였다. 즉, 자아(自我)가 아닌 몸과 마음의 현상들만이 생멸의 연속선상에 있을 뿐이다.
"가려는 의도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들이 단계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안다. 단계적으로 생겨나는 가려는 의도 때문에 단계적으로 생겨나는 움직임들만 존재한다고도 안다. 가려는 의도들이 여러 움직임들에 이르지 못하고 여러 움직임들도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에 이르지 못한 채 부분 부분, 단계 단계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안다.…중략…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의 무더기일 뿐이다, 좋지 않은 성품일 뿐이다라고 스스로의 지혜로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결정할 수 있는 통찰지를 네 가지 바른 앎이라고 한다."
초기경전에서 설명하는 의도는 관찰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에 대한 관찰 방법은 마하시 사야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작업은 단순히 몸의 느낌과 움직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 이전에 발생한 다양한 의도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법은 마치 수행자가 단순히 몸의 움직임에 명명하여 관찰하고, 알아차리려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수행에서는 몸을 통해 나타나는 느낌뿐만 아니라, 의도라는 마음의 영역을 관찰하게 되고 이를 통해 몸과 마음을 모두 통찰할 수 있는 장이 열리게 된다. 또한 이렇게 의도를 알아차리려고 집중하는 것이 반복되면 행위 이전에 마음이 선행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몸이 움직일 때, 먼저 발생하는 의도를 관찰하는 것은 진리를 파악하는 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다만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자아의 존재에 대한 오랜 집착과 탐욕이다. 의도에 집중하여 관찰을 시도한다고 해서 '내가 가려한다' 라는 자아관념을 확산시키거나, 의도를 의지작용으로 이해하여 '∼할 것이다' 라고 이해한다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수행 과정이 될 수 없다. 결국 정념(正念)이라고 하는 마음챙김의 확립수행(Satipaṭṭhāna bhāvanā)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 마하시 사야도는 이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작 개나 자칼들이 자신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수준에 불과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어느 정도로 파악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에 상응한다는 해석은 수행에 임하는 태도를 다시금 강조한다. 또한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도 늘 걷고 말하고 움직이고 행동하며 다양한 동작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행동을 온전히 관찰하지 못하고 방황하기 십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움직임, 걷는 것, 밥 먹는 것, 손을 뻗거나 팔을 구부리는 것, 혹은 수행 도중에 자세를 바꾸는 동작 등은 움직임을 일어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의 물질적 표현이다. 따라서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알아차림의 영역은 마음으로 확장하고 더욱 성장하게 된다.
"발을 한 번 밀어내는 움직임 안에는 그보다 더 작은 움직임들이 들어가 있다. 걸을 때마다 걷고자 하는 의도와 걷는 동작 그 자체에 주목한다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도와 몸의 움직임을 구별해서 파악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의도라는 정신적인 과정을 몸과 섞어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다른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 의도와 움직임의 분리된 단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걷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의도만이 존재하고, 여기에 물리적 현상의 집합체가 움직이는 것만이 따라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물리적 현상도 눈 깜짝할 사이조차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모든 것은 무상하며,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
의도를 관찰하는 것은 단지 정신의 한 가지 요소를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수행자가 몸을 움직이는 과정 전반을 알아차릴 수 있게 성장하면, 마음의 움직임인 의도 역시 관찰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수행자는 지속적으로 생멸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통해 무상, 고, 무아라는 진리를 통찰하게 된다. 이처럼 의도를 관찰하는 것은 지혜로 향하는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도 주요한 요소로 대두되며, 이는 붓다의 핵심 가르침에 해당한다.
초기경전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관찰도 강조한다. 이렇게 의도를 관찰하는 수행은 마음의 관찰이라는 흐름으로 연결된다. 앞서 의도는 느낌 이후에 생겨나기도 하지만, 느낌보다 먼저 생겨나는 요소로 나타났다. 의도는 느낌 이전에 먼저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수행자는 신의 몸을 관찰하면서 그 느낌보다도 먼저 선행하는 의도를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다. 수행의 깊이가 더해지면 지금 현재 몸과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의도를 모두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의도의 관찰은 알아차림의 대상을 몸의 느낌에 제한하지 않고, 그 대상을 마음의 영역까지 확장할 수있는 중요한 전기로 기능한다.
또한 의도 관찰을 통한 마음으로의 확장은 색계선정에서 무색계선정으로의 전개를 통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임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수행자는 4선정(四禪定)을 통해 자신의 몸을 경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무색계 선정에 머물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작용한다.
"그는 [신체적] 행복과 고통이 버려지고 이전의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을 뛰어넘고 즐거움을 뛰어넘어, 평정하고 마음챙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네 번째 선정에 들면 호흡이 소멸하고..",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사라지고…중략…,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그치고]…중략…,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고요해지고…."
수행자가 신행(身行)의 중지를 통해 더 이상 몸의 감각[호흡]을 관찰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알아차리는 작업은 지속된다. 즉,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은 상수멸정을 성취하기 전까지 지속될 수 있다. 초기경전은 수행의 발전에 따라 선정의 단계를 나누어 설명한다. 4선정에서는 호흡을 대표로 하는 신행(身行, kāyasaṅkhāra)이 중지하고, 선정의 이전 단계에서 경험했던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모두 중지한다. 여기서 호흡이 실제로 멈춘 것인지, 인지의 범위를 벗어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4선정에 이르면 수행자는 자신의 신체를 수행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단계에 도달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4선정 이후, 수행자의 관찰대상은 몸이 아닌 마음이다.
청정도론은 4선정(四禪定)을 설명하는 심청정의 단계를 넘어서 혜청정을 통해 견청정의 시작으로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지혜(名色區別知, nāmarūpa pariccheda ñāṇa)를 설명한다.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라, 몸의 작용과 마음의 작용이 서로 생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의도를 분명히 알아차림으로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것이 더욱 확고해지고 선명해지는 단계로 나아간다. 따라서 의도를 관찰하는 수행은 몸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에서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7청정의 성장을 위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의도의 관찰은 수행의 진전을 돕는 핵심적 요소로 기능한다.
그리고 의도의 관찰은 선정이나 위빠사나의 혜청정 과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앞서 살펴본 『가나까목갈라나숫따』나 『마하사띠빳타나숫따』의 정지(正知)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의 알아차림도 가능하게 한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의도를 일으키고, 그 의도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며 생각한다. 걷고자 하는 의도가 먼저 일어나서 걷는 동작이 행해지는 것처럼, 남에게 상처 주고자 하는 의도가 먼저 일어나기에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앞서 삼학의 계학과 의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의도를 순간순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삼행을 통해 나타나는 행위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정준영은 의도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수행자는 행위 이전에 일어나는 의도를 주시하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행위 전에 일어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자 노력하는 것 역시 몸, 말, 마음으로 짓는 악한 행위를 줄이고 선한 행위를 늘릴 수 있는 훈련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의도에 대한 주시를 통해 우리는 선업과 악업을 조정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의도를 보는 방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열심히 운동하여 근력을 키우듯 주시[마음챙김]의 힘을 꾸준히 늘려가면 의도를 보는 힘도 커지게 될 것이라 설명한다. 수행자는 수행의 과정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마음챙김의 힘을 키워나가며, 자신의 의도를 관찰하고 삼행을 단속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자는 일상생활을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잠시 호흡과 몸의 감각을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의도를 관찰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앤드류 올렌즈키(Andrew R. Olendzki)는 선한 태도와 그렇지 않은 태도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지의 문제, 선하거나 그렇지 않은 태도 중 어느 쪽에 의도적으로 에너지를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능력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러한 능력은 전쟁 혹은 평화의 문제, 그리고 그것들을 투사하는 마음의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전쟁의 외적 특징은 불신, 폭력, 살육 등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단지 두려움, 분노, 증오, 잔인함과 같은 내적 혼란상태의 표현일 뿐이다. 반면에 평화는 조화, 정직, 상호 존중, 협력과 같은 외적 현상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활동을 일으키는 내적 상태에는 평온, 친절, 연민, 이타심 같은 요소가 포함된다…중략…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존과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전투 기질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어려움을 겪는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한 까르마(kamma)를 불러올 것이다. 대조적으로 평소에도 전투태세를 갖춘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 이상으로 선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게 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선한 태도와 그렇지 않은 태도는 선한 의도와 그렇지 않은 의도에서 시작한다. 마음의 방향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외부적인 행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의도가 업'이라고 밝힌 붓다의 핵심 교설과도 상통한다. 정신이 모든 것의 시초임을 선언한 『야마까왁가(Yamakavagga)』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닌 정신적 요소까지 강력히 단속할 것을 강조한 붓다의 가르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정신(mano)이 사실(현상, dhamma)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리. 수레바퀴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자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만약에 사람이 깨끗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르리. 그림자가 자신을 떠나지 않듯."
앞서 '의도의 의미와 기능'을 통해 의도는 명(名)의 구성 요소이고, 업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함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의도의 의미와 기능을 생각한다면, 상기 경전의 '정신(mano)'과 '의도(cetanā)'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의도는 현상을 선행하고, 의도는 이들의 최상이고, 이들은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누군가 오염된 의도(마음)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따른다. 의도는 불교수행의 과정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실천에서 의도는 관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만약 악한 의도가 일어나려 하면 막아야 하고, 이미 일어났다면 끊어야 한다. 선한 의도가 없다면 일으키려 노력해야 하고, 만약 일어났다면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올바른 노력이다. 붓다의 가르침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행동하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의도를 관찰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초기불교 수행의 의도 역할 연구/ 곽정은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