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용시성(作用是性)" 문제
달마의 작용시성설을 계승발휘한 혜능(慧能, 638-713)의 "정성자오설(淨性自悟說)"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혜능(慧能, 638-713)의" 정성자오설"은 크게 "진여불성"설과 '견성성불"설로 구성되어 있다. "진여불성"설은 사람이 모두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을 가리키는데, 혜능의" 득법게(得法偈)"인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맑은 거울 또한 대(臺)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불성은 항상 청정하므로), 어디에 티끌이 끼이겠는가"에 잘 나타난다. 현행본 『육조단경』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돈황본에는 "불성상청정(佛生常靑(淸)淨)"으로 되어 있는 바, 종합해서 말하면 각오(登悟)를 상징하는 보리수나 명경대는 존재하지 않고, 진정한 존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청정(常淸淨)한 불성이라는 말이다.
본래 "청정"은 염오와 상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선(善)을 가리킨다. 이는 성구염정론에서 이미 살펴본 바이다. 그런데 혜능이 말하는 "청정"은 "보리는 단지 마음에서 찾을 것인데, 어찌 밖에서 오묘함을 구하겠는가? 이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서방정토는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만법이 자심에서 다함을 알라 어찌 자신의 마음(자심)에서 진여본성을 문득 현현하게 하지 않는가?", "부처는 자성에서 이루어지니, 결코 밖에서 구하지 말라", "그러므로 만법은 자심에서 다하는 것임을 알라" 등의 말에 비추어 볼 때, 상대적 차원에서의 "청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를 "상청정"으로 표현하므로, 그것은 절대선(絶對善)ㆍ초월선(超越善)을 가리킨다는 것이 분명하다. 혜능의 이상과 같은 생각은 성구염정론에서의 "불성" 개념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고, 달마의 "작용시성"을 본체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성이 선악ㆍ염정을 동시적으로 구비하고 있다면, 그러한 불성은 이미 선악ㆍ염정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동시율(同時律)"은 인과율(因果律)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이를 설명하는 논리가 곧 체용론(體用論)이다. 본체와 현상을 인과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율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체용론인데, 불교에서 흔히 비유하는 "인과의 관계는 바람과 파도의 관계이고, 체용은 물과 파도의 관계이다"에서 그 성격이 잘 나타난다. 달마의 "작용"이라는 말이나 혜능의 "상청정"은 반드시 체용론에서 해석해야 되는 바, 이 논리에서만 "파도가 곧 물이고, 물이 바로 파도이다"라는 즉체즉용(卽體卽用)이 성립될 수 있다.
한편 작용시성설은 여전히 우주생성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세계본원으로서의 "불성"을 가능성 내지 가능태로 파악하는 관념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유학의 성선론을 비판하기 위해 채택된 측면이 강하였다. 우리는 이를 전등대사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맹자의 성선론, 순자의 성악론, 양웅의 성유선유악론을 언급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선생의 이론은 각기 성의 한 면만을 말한 것으로 성문에서 취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모두 재(才)와 정(情)으로써 정(情)을 말한 것이며, 성(性)으로 성(性)을 논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유가의 인성론은 실제로는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성을 이루고 있는 재정(才情)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비판이다. 전등대사에 의하면, 성선론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人皆可以爲堯舜)"는 것만을 강조하고 그 반대인 "인간은 모두 걸주가 될 수 있다(人皆可以爲桀紂)"는 명제가 똑같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 때문이고, 이를 거꾸로 적용하면 성악설도 마찬가지가 된다. 한편 양응의 성유선유악론은 인간이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치에 가깝기는 하지만 "성" 자체에 선이 있고 악이 있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전등대사는 유가의 성론은 "선악은 성이 그것을 하는 바이지 성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한다. 그는 송유(宋儒)들이 천지지성(天地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분한 것에 대해서도 같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천지의 성은 선하며 악이 없는 것이고, 기질의 성은 선도 있고 악도 있다. 그래서 논자들은 맹자의 성선은 다만 천지의 성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말한 선악이 혼재한다는 것은 기질지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성은 불변을 의미로 하는 것인데 천지지성과 기질지성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또 사람 이 천지오행을 품부 받아 몸을 이루면 천지의 성이 또한 거기에 부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지는 체가 되고 기질은 용이 되어, 체가 있은 다음에 용이 있는데, 어찌 체가 단독으로 용을 겸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가가 말하는 성은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 이미 선악을 말하였으니, 이른바 정(情)이 유가에서 말하는 성(性)이다. 성인은 성인이 되는 까닭이 있고, 소인도 악인이 되는 까닭이 있다.
인성은 유일한 것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인데, 천지지성과 기질지성은 통일적인 인성을 분할하여 둘(二)로 만든 것으로써, 이는 인성에 모순과 대립을 인위적으로 내재시킨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통해서 볼 때, 전등대사의 성구염정론 또한 혜능의 "상청정"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혜능의 "상청정"설이 근본불교의 교리에서 과연 어긋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유가 인성론과의 비교 문제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이상과 같은 이론을 기초로 "인불불이"를 논하면서,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인불(人佛)의 차이가 있게 되는 이유를 "미오(迷悟)"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혜능은 '진여불성'이 망념에 가리어 있으면 성불이 없지만, 그 망념을 제거하고 본성을 자견(自見)하면 바로 성불이라는 점을 "자성을 미(迷)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을 오(悟)하면 중생이 곧 부처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자심(自心)이 불성을 각오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고, 자심이 불성을 각오하지 못하는 그 자리가 바로 바로 중생이라는 것이다. 미오(迷悟)가 이미 자심에 있으므로 오직 일념으로 상응하여 자기의 본심을 각오하면 바로 성불한다는 것이 이른바 "견성성불"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불"은 일념(一念, 찰나)의 사이에 있게 된다.
그런데 혜능은 "견성성불"을 말하는 자리에서 종종 유가적인 "인성(人性)"에 비추어 말한다. 이것은 이전의 불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인데," 인성은 본래 청정하지만 망념으로 말미암아 진여가 가려진 것이다. 다만 망상이 없다면 성은 스스로 청정할 것이다", "세인의 성은 본래 스스로 청정한 것으로 만법은 자성을 따라 생한다. …마치 하늘이 항상 맑고, 태양과 달이 항상 밝지만 구름이 가리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운 것과 같아 돌연 바람이 불어 구름을 몰아내면 위아래가 모두 맑아져 만상이 모두 드러나는 것과 같다"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혜능에 오면," 자성청정심", "인성", "인심", "불성"이 대동소이한 개념이 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혜능의 "진여불성"설은 일정한 의미에서 유가의 성선설을 발휘한 것이었다. 차이점은 "진여불성"이 인의예지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번뇌를 벗어나는 자아해탈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많은 차이를 지적할 수 있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유가는 성인경계가 반드시 장기적인 수습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반면 혜능은 일념사이에 미(迷)로부터 오(悟)로 전환하기만 하면 바로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혜능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 이고(李翶의 복성설(復性說)이나 정이(程頤)의 제자들,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 등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런 까닭으로 이를 직접 비판하고 나온 것이 이른바 주희의 "작용시성론"이라는 것이다.
주희의 "작용시성론"이란 선종의 심성론을 공격하기 위해 별도로 설정한 일종의 작업가설적인 이론이다. 주희의 "작용시성"이라는 표지 아래에는 고자(告者)의 "태어난 그대로를 성이라 한다(生之謂性)"와 선불교의 "지각 운동이 성이다(知覺運動是性)"라는 명제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는 이 이론을 노장철학이나 선종의 심성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유학내의 다른 학파인 육왕(陸王)학파와 상채(上蔡)학파 등을 선불교적이라고 비판하는 데도 적용하고 있다.
무릇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 각각 하나의 성(性)을 부여하였다. 성이란 물건 같이 그렇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도리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性)이 체가 된다고 하는 까닭은 단지 인의예지신 다섯 글자에 있을 뿐으로 천하의 도리는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유는 사람에게 성이 되는 것은 다섯(인의예지신)이라고 말했는데, 그 설명이 이러한 도리를 가장 잘 파악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말하는 성은 대부분 불교와 노자(老子)의 말을 섞어서 말하기 때문에 성자(性字)를 지각(知覺)ㆍ심의(心意)로 보는데, 성현이 말씀하신 성자의 본래 의미는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종에서 말하는 "'작용'(지각ㆍ심의)은 성이다"라는 명제는 주희의 말에서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혜능에게서 그것은 심성론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본체론적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논의를 위해 선종에서의 "성"의 함의를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선종에서 말한 "작용시성"에서의 "성"은 첫째, "공체(空體)"로서의 불성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주자학자들은 자신들은 "실리(實理)", 즉 "성체(性體)"를 말하지만 불교는 "허리(虛理)"를 말한다고 비판한다. 둘째, "작용시성"에서의 "성"은 작용에 융합된 것(體合於用)으로 작용(현상) 그대로가 성체의 발현이라는 말이다. 셋째, "성"의 구체적 작용은 심(心)의 지각작용이며, 심의 지각작용이 밖으로 드러난 "시청언동" 그대로가 "성"의 작용이다. 주희의 "작용시성론"은 이들 세 가지 특징을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먼저 달마대사가 우리 5관의 감각기관이나 수족 등의 형체가 지니고 있는 작용 기능을 "성"으로 간주한 것은 고자(告子)의 "생지위성(生之謂性)"과 같은 것이다. 주희는 "작용"을 그대로 "성"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사람이 칼을 잡고 함부로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감히 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비판한다. 주희의 이러한 문제 설정은 현상(用)과 본체(體)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주희는 선종의 체용일원(體用一元)적 주장에 상대하여 "체용일원(體用一源)"을 제시하는 데, 간단히 설명하면 지각이나 운동과 같은 마음(氣)의 작용은 형이상의 리(理)와 비록 근원을 같이 하지만(體用一源), 작용 그 자체가 형이상의 성(리)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희의 입장에서 물 걷는 일, 땔나무 나르는 일 모두 묘용(妙用)이라는 선종의 견해는 곧 "체합어용(體合於用)", 죽 현상적인 모든 것을 본체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주희는 "성은 리이다(性卽理)"를 원칙으로 한다. 주희는 "실리(實理)"를 말하므로, 여기서의 "성" 또한 추상적 본체가 아니라 인의예지(仁義禮智)로 규정된다. 그리고 인의예지는 절대선(絶對善)ㆍ본체선(本體善)이 아니라 "지선(至善)"이다. 그런데 "생지위성"에서의 "성"은 "가능선(可能善)"과 "가능악(可能惡)"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다. "가능선"과 "가능악"을 동시에 구비하고 있는 것은, 주회의 규정에 따르면 "심(心)"이지 "성"이 될 수 없다. 주희에게서 심(心)은 의식현상의 총체를 나타내는 범주이고, 성(性)은 본질을 표시하는 범주로서 결코 동일차원의 범주가 아니다. 따라서 주희의 비판은 "작용시성"이 "심"을 "성"으로 혼동한 것이라는 데로 나아간다.
본래 유학에서도 "심(心)"은 지각의 주체이며 "시청언동(視聽言動)"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성(性)"과 "심(心)"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정주학의 입장에서 "심"은 기(氣)이고 "성"은 리(理)이다. 주희에게서 "마음"은 "기(氣)의 정상(精爽)"으로 허령(虛靈)함을 본체로 하여 지각할 수 있는 주체인 반면에, "성"은 리(理)로서(性卽理也) 그 자체는 어떤 조작이나 정의(情意), 계탁(計度)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형이상학적 실체이다. "심"은 리(理)인 "성"을 결코 떠나 있을 수 없지만, "성"은 기(氣)인 "심"이 없이도 존립이 가능한 형이상학적(淨潔空闊底世界) 실체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아무리 정세하게 갈고닦는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마음이고 "성"이 아니며, 마음이 본래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조금도 깨닫지 못함이 없는 지각작용의 주체라 하더라도, 지각작용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것은 "심" 그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객관 사물 속에도 내재되어 있는 리(理)이다. 주희의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보리는 바로 자성이며, 본래 청정하다. 이 마음을 쓰기만 하면 그 즉시 성불할 수 있다"는 선종의 "성"은 "심"과 혼동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주희의 비판에서, 그는 심의 지각을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동물도 가지고 있는 지각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허령(虛靈)한 지각 능력으로 도덕법칙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전자는 선종의 "작용시 성"을 비판하는 중요한 전제이다. "작용시성"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외계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를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을 종지로 하는 견성론인데, 주희의 입장에서 볼 때 선불교의 이러한 주장은 심의 지각 작용을 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성에서 천리(天理)라고 하는 도덕적 가치가 그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주희는 이러한 논리 아래 심의 지각과 성을 구분하면서 불교를 비판한 것이다. "심은 다만 저리를 체득할 뿐이다. 불교는 원래 이러한 리를 체득하지 못하므로 곧 지각운동을 성이라고 간주하게 된 것이다"라는 주희의 말도 같은 비판인데, 여기서 말하는 "리(理)"는 천리(天理)를 가리키므로, 주희는 불교가 천리의 성체(性體)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시청언동 그대로가 성이라는 달마의 말은 중생의 현상 그대로가 절대 본체의 현현임을 말하는 것으로써 "가능선" 또는 "가능악"으로 볼 수 있는 "생지위성"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덕청(德淸, 1546-1623)은 "우리 인간이 자신의 마음이 부처임을 안다면, 마땅히 무엇으로 인해 중생이 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중생과 부처는 물과 얼음과 같다. 마음이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되고, 마음이 각오하면 중생이 부처되는 것이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과 같이 이름은 다르지만 체를 바꾸지는 않는다. 미혹하면 깨닫지 못한 것이고,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 다 미혹하지 않으면 깨달은 것이고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된다"고 한다. 이는 능공적(凌空的)인 것처럼 보였던 성불(成佛)이 중생의 현실 인생으로 하관(下貫)되어 중생 자신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최종적 경계로 삼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주희가 이상과 같이 비판한 데에는 선종의 "체합어용"이 본체와 현상의 무차별적인 동일로 귀착함으로써 일상생활 가운데서의 인륜질서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더욱이 혜능은 유가적 용어라 할 수 있는 "인성", "도심(道心)", "인심(人心)"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불성과 성불을 말함으로써 유가의 주요 방법인 "반구제기(反求諸已)"에 접근하였고, 주희는 바로 이를 경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이 주희의 천리유행설(天理流行說)이다.
"유행"이라는 유가적 용어는 함의가 복잡하여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으나 "내재(內在)" 또는 "내재본질(內在本質)"이라는 기본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천리가 인간에 내재한 성체(性體)를 가리킬 때는 "성죽리(性卽理)"에서의 "성"이 되지만, 그 유행을 강조할 때는 "도심(道心)"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작용시성"은 "도심을 버리고 인심의 위태로운 것을 취하고 그것을 작용이라 하였으니 그 정밀한 것을 버리고 그 조잡한 것을 취하여 도를 삼은 것이다. 예를 들어 인의예지를 성이 아니라 하고, 눈의 보는 작용 같은 것을 성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그 원두처가 잘못된 것일 뿐이다."
"인불불이"는 일단 수습(修習)을 전제하지 않는 본체론적인 불성론에서 가능한 주장이다. "불성"은 단지 "성불"의 가능 근거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중생 그대로가 "불성"의 현현, 즉 "불성"은 중생의 실체, 우주의 본체가 된다. 물론 수습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말이 수행의 불필요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는 혜능의 "미오"설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미"와 "오"는 기본적으로 "지각(知覺)" 영역의 문제이다. 따라서 '수습'이라는 것도 '지각'에 대한 것인데, '지각' 그 자체 또한 불성이므로, 중국 불성론에서는 이른바 "돈오성불설(頓悟成佛說)"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작용시성론에 의한 주희의 불교비판은 실제로는 돈오성불설에 대한 비판이고, 또 그 수행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주희는 "범성불이(凡聖不二)"를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인불불이"는 불교 불성론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성과 불성의 비교/ 유흔우 동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