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境)·지(智)·행(行)의 격별
2)격별의 관계
앞에서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을 독립적인 개체로 상정하고 각각 안에서의 격별에 대해 확인했다. 이제 그 범위를 넓혀 세 가지를 격별의 관계로 보고 정리하고자 한다. 융합의 전제가 둘 이상의 요소였듯이, 상호 관계성을 논하는 것 역시 대상이 되는 것들을 개별 개념으로서 인정하는 격별의 관점이 우선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과정을 밟았다. 이 상호관계성과 관련하여, 적문10묘가 일어나는 것에 대한 설명 중에서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이 생겨나는 순서에 대해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법화현의』 원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 가지의 차례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에서 상호관계를 정리할 수 있으며, 마지막의 비유 역시 세 가지 각각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시사한다.
참된 모습의 경계는 부처님이나 하늘 혹은 인간이 만든 바가 아니라 본래부터 스스로 있는 것으로 이제 막 시작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가장 처음에 있다. 이치에 미혹하기 때문에 미혹이 일어나고, 이치를 이해하기 때문에 지혜가 생긴다. 지혜는 수행의 근본이다. 지혜의 눈으로 인해 수행의 발을 일으킨다. 지혜의 눈과 수행의 발 그리고 경계의 세 가지 법이 수레가 된다.
경계는 누군가 고안해내거나 발명한 것이 아니며 누군가의 작의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시작과 끝을 따질 수 없이 본래부터 있던 것이기 때문에 가장 처음의 자리에 온다. 앞서 불교의 목적이 진리를 깨달아 이고득락하는 데에 있다고 했다. 이 '진리'를 차원이나 구조를 달리하여 이름하고 설명한 것이 바로 '경계'이다. 『법화경』에서는 모든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은 곧 중생에게 부처의 지혜와 식견[佛之智見]을 열어 보여서, 깨닫게 하고 증득하여 들어가게[開示悟入] 하기 위함에 있다고 했다. 이 '부처의 지혜와 식견[佛之智見]'으로 열어 보이고 깨닫게 하는 것이 지금 논하는 '경계'를 의미한다. 『법화경』에서 이처럼 부처가 세상에 나오고 설법을 펴는 것이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이 경계 깨닫게 하는 데에 있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했기에, 『법화현의』 적문10묘에서도 그 시작을 '경계의 묘'로 여는 것이다.
부처의 지견(智見)으로 보는 것이 경계라 한 것에 따라, 경묘 다음으로 지묘가 오는 것에 대해 논한다. 위의 구절에서는 지혜가 생기는 것을 이치와 연결하여 설명했다. '이치(理)를 이해하기 때문에 지혜가 생긴다'고 표현했는데, 이 때의 이치가 곧 실상의 '경계'를 의미할 것이다. 지묘와 경묘의 관계에 대해 자세하게 밝힌 아래의 원문에서도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지극한 이치는 깊고 은밀해서 지혜가 아니면 드러낼 수 없고, 지혜는 대상을 아는 것으로 경계가 아니면 크게 밝힐 수 없다. 경계가 이미 원융하고 묘하면 지혜 역시 그에 부합하여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다. 때문에 경계 다음에 지혜를 설한다.
지혜는 지극한 이치를 아는 것이다. 앞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통해 지혜의 의미를 설명했듯이 지혜는 현상적으로 단순히 많은 양의 정보를 알거나 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치 즉 원리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 지혜와 경계의 관계를 논하면, 지혜는 대상인 경계를 아는 것이고 반대로 경계는 지혜를 통해 알아지는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지혜를 눈에 비유한다. 대상이 되는 경계를 인식하고 아는 것이 지혜의 역할인 것이다. 이처럼 격별의 관점에서 경계와 지혜의 관계를 읽으면 이는 곧 주체와 객체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지혜는 경계를 인식하고 아는 주체적 역할을 하는 점에서 주체라면 그 대상이 되는 경계는 곧 객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생의 관점에서 경계와 지혜를 인식하는 것이다. 대상이 되는 경계는 변치않는 진리로 처음의 그 자리에 있고, 중생은 지혜를 개발하여 그 경계를 차츰 인식하고 알아나간다.
다음으로 '행묘'에 대해 밝히면서 경·지·행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관계를 맺고 있음, 즉 격별의 관계에 있음에 대해 설명한 원문의 내용을 차례로 해석한다.
무릇 수행은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이름하니, 지혜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혜를 아는 것이 행을 이끄니, 경계가 아니면 바르게 이끌 수 없다. 지혜의 눈과 수행의 발로 청량지에 이른다. 이에 아는 것은 수행의 근본이고, 수행은 능히 지혜를 이룬다. 지혜는 능히 이치를 드러내고, 이치가 막히는 것은 곧 지혜가 그친 것이다.
'향하여 나아가는 것[進趣]'을 수행이라고 이름하는 것에서 수행을 발에 비유하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상경계가 있고, 이를 올바르게 아는 지혜가 있어서, 이것이 수행을 이끄는 순차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게 세 가지를 통해 맑고 깨끗한 지위[淸涼地]에 이른다고 했는데, 청량지는 곧 적문10묘의 네 번째인 '수행계위의 묘함[位妙]'을 뜻한다. 경묘에서 지묘까지의 네 가지 묘가 적문10묘 중 자행(自行)의 원인(圓因)이 되고, 이를 통해 얻는 '3법묘(三法妙)'가 앞의 네 가지 묘를 통해 이루는 자행의 원과(圓果)이다.
3법은 진성궤(眞性軌)·관조궤(觀照軌)·자성궤(資成軌)의 3궤를 말한다. 경묘는 곧 진성궤에 통하고, 지묘는 곧 관조궤에 통하고, 행묘는 곧 자성궤에 통한다. 경(境)·지(智)·행(行)은 1승의 인행(因行)에서 타는 3궤이고, 위(位)는 1승의 과정에서 지나가는 3궤라고 했는데, 앞서 경·지·행의 세 가지 법이 '수레'가 된다고 한 뜻이 여기에 있다. 또한 경·지·행은 법신·반야·해탈의 3덕에 부합한다. 경·지·행을 통해 3법을 성취해 3덕을 얻는 것이다. 3덕을 얻는다는 것은 반야 즉 지혜로 업을 짓지 않고 그로 인한 고통을 없애 해탈하면 이는 곧 법신을 이루는 것으로, 불과를 얻어 초주 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뜻한다. 적문10묘에서 자성3법과 화타3법을 말하는 것은 스스로 3법을 이루어 불과를 얻고, 중생이 3법을 얻어 불과를 얻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3법과 3덕을 경·지·행의 각각에 배대하여 읽고 떨어진 것으로 보는 것 역시 격별의 관점에서 세 가지의 관계를 논하는 일이 된다.
다음으로 '아는 것은 수행의 근본이고, 수행은 능히 지혜를 이룬다'는 것에서 서로 쌍방의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혜가 수행의 근본이라는 말은 앞서 행묘에서 '지혜가 이끄는 수행'으로 4교 각각의 수행 등에 대해 설명한 것을 뜻한다. 수행이 지혜를 이룬다는 것은 수행을 통해 지혜를 개발하고 증장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지혜와 수행은 양방향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어서 지혜와 경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지혜는 능히 이치를 드러내고, 이치가 막히는 것은 곧 지혜가 그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앞서 '이치에 미혹하기 때문에 미혹이 일어나고, 이치를 이해하기 때문에 지혜가 생긴다'다고 설명한 것과 의미가 통한다. 경계를 아는 것에 막힘이 있고 그것을 인식할 만큼의 지혜가 없는 것, 즉 지혜가 부족함을 뜻하는 것이다. 『법화현의』에서는 지묘가 경묘에 상응함의 비유를 들어 지묘의 의미를 밝혔는데, 상자와 덮개가 서로 상응하듯이 인식되는 대상인 경계와 이를 인식하는 지혜의 양자가 모두 불가사의하다고 말했다. 경계의 관점에서 말하면, 경계는 생겨나거나,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지혜의 관점에서 말하면, 지혜가 증장함에 따라 인식하는 경계가 달라지기에 이를 전에 없던 새로운 경계를 발견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로 '안개' 속에서 '대상'을 보는 이의 '시력'을 비유한다. 안개는 곧 무명, 대상은 곧 경계, 시력은 곧 지혜이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안개 속의 대상을 인지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낸다. 반대로 안개 속의 대상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만한 시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지혜를 눈이 아니라 '시력'으로 비유한 것은 대상을 아는 것의 가능 여부를 넘어 정도의 차이까지 표현하기 위함이다. 시력이 좋고 나쁜 정도에 따라 안개 속의 대상을 인지하고 식별하여 아는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즉, 경계의 수가 무량하다고 했는데 이 중 어떠한 경계를 인식하고 아는가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더 세분하면 같은 경계 안에서도 차이에 따른 추묘를 말하며 구별하고 분류했는데, 4종12인연 중 어떤 12인연을 아는가 등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으로 4교의 지혜가 비추는 경계가 각기 다름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원문의 표현들을 토대로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의 관계를 여러 관점에서 논했다. 앞서 이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듯이 상호관계를 논한다는 것은 대상의 독립성 및 개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에 천태 대사는 세 가지를 분절적 개념으로 떼어서 보고, 서로 필요에 의해 그 뜻에 기대어 설명하는 것은 '묘(妙)'가 아니라고 했다. 설명을 위해 격별의 관점에서 세 가지를 연쇄적 상호관계 안에서, 시작에 있는 경묘가 묘하기 때문에 이에 따라 지묘와 행묘를 순차적으로 밝힌 것은 상대묘에 해당한다. 단지 격별의 관계에서만 세 가지를 받아들이고 이해해서 상대묘에 머문다면, 그 뜻에 분별이 있고 원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추이다. 천태 대사는 항상 경전과 교판의 해석에 있어서 추와 묘의 판별로 상대묘를 확인했다. 이후엔 개추현묘로 모든 추가 묘에 귀일하여 추즉묘가 되는 절대묘를 말한다. 이에 본 논문의 다음 장에서는 세 가지의 관계를 다시 통합과 절대묘, 그리고 원융의 관점에서 논한다.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의 관계에 관한 연구/이혜린 금강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불교교학전공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