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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현의자료

경·지·행의 원융 - 원융의 관계

작성자원강사리|작성시간26.06.21|조회수19 목록 댓글 0

경((()의 원융

 

2)원융의 관계

천태대사는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의 관계를 상호간의 영향과 기능에 의거하여 상세히 설명한 바, 앞의 절에서 이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이 해를 위하여 격별을 적용하여 상호의 차이와 영향, 기능을 설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이처럼 세 가지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의 수행이 곧 모든 수행인 묘행(妙行)이 아니라고 했다. '세 가지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곧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이 서로를 개별 객체로서 작용을 주고 받는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에 격별의 관계를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격별의 관계에서의 수행은 원융한 묘행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은, 격별의 관점에서의 설명을 끝내고 원융의 관점에서 세 가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묘행'의 개념을 꺼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이러한 묘행과 더불어 앞의 경계 그리고 지혜는 하나이지만 셋으로 논하고 셋이지만 하나로 논한다고 했다. '하나이지만 셋으로 논하고, 셋이지만 하나로 논한다'는 것은 원융이 무조건적으로 일체의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글자의 뜻에만 의지하면 원융을 어떠한 분류도 없이 그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진정한 원융은 각개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원융하게 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부처가 여러 방편설로 분별하여 이야기했지만 종국에는 원융한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천태대사가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차별상을 통해 상대묘를 말하는 등 격별의 관점에서 대상을 설명하고난 뒤에는 다시 통합하여 상대할 추가 없이 묘한 절대묘로 귀일함을 말하며 원융의 관점으로 일체의 대상을 회통하는 것과 같다.

 

비일비이(非一非異), 부사의(不思議)한 하나, 불차제(不次第) 등 원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수식어들을 통해서도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표현은 중생이 생각할 수 없는[不思議] 범주의 이야기다. 나와 남·아군과 적군·흑과 백 등 이분법적 분리에서 시작하여 일체의 것들을 분파적으로 인식하고 분류하여 살아가는 중생에게 '다르면서도 같다'는 기존 인식체계와 충돌하는 명제는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순서가 없다[不次第]는 것은 각개의 것들이 차례로 있는 와중에 순서대로 일어나지 않고 동시에 복합적으로 중첩하여 하나로 일어나는 등을 포괄하여, 순서라는 개념이 궁극적으로 임시적인 방편임일 뿐을 시사한다. 이 역시 중생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는데, 인간은 보편적으로 시간을 한정적 혹은 직선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한정적이라는 것은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를 단위로 끊어서 생각한다는 것이고, 직선적이라는 것은 시간이 주로 미래의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적 사고에 대응하는 가르침을 통해 중생을 교화한다. 차별상에 의지하는 분별관에 대해서는 법화경본문에서 적본(迹本)의 부사의함을 이야기했듯이 부사의하게 원융한 것이 일체의 진실상이라고 설한다. 한정적·직선적 시간관을 맹신하는 것에 대해서는 중론』 「관시품(觀時品)에서 '시간'이라는 대상을 관하고 논파된 바 있다. 이를 통해 용수는 시간의 모습[時相]을 말하고 규정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중생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이고득락을 통해 불도를 이루자면,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원융에 대한 일말의 지각과 이해가 요구된다.

 

이에 천태대사는 그의 강설과 논서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각각의 대상을 먼저 격별의 관점에서 상세하게 논하고, 종국에는 원융으로 회통하는 단계적 설명방식을 사용했다. 특히 법화현의적문10묘에 대해서는 법이 비록 무량하더라도 10가지의 뜻이 모두 원융하여 나와 남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구경에 이른다 했다. 10가지가 궁극적으로 자타(自他) 모두 3법의 불과를 이루게 하는 데에 뜻이 있기 때문에 원융하다. 법화경'()'를 어느 측면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 기능과 성질을 달리하여 10가지로 나누어 말하지만, 이는 초점이 다른 것일뿐 하나의 대상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서 같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10묘에 포함되며, 본 논문에서 다루는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분별적 사고와 한계적 시간관을 가진 중생이 세 가지가 하나로 원융하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에 중생의 이해와 설명의 편의를 위해 세 가지의 개념을 구분짓고 역할과 관계를 상정하여 이야기하지만, 이는 세 가지 측면에서 하나의 대상을 바라본 것으로 본질적으로 원융하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세 가지 초점에서의 접근과 설명이기에 절대적인 분절점에 의해 구별되는 개별객체가 아니라, 셋으로 논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로서 원융한 관계인 것이다.

 

비유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보다 훨씬 큰 관찰대상이 있고, 이를 세 명의 관찰자가 각기 다른 지점에서 대상을 관찰한다고 가정하자. 이들에게 각자 관찰한 바를 묘사하라고 한다면, 그 대상이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관찰한 측면이 달라 묘사하는 바가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같은 대상을 관찰했다는 사실을 고지해주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없지만, 관찰대상이 하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즉 경묘·지묘·행묘는 묘()라는 하나의 대상을 각각 경계·지혜·수행의 측면에서 셋으로 말하지만, 하나로 원융하다. 그리고 적문10묘의 범주를 떠나 부처의 가르침을 대상으로 말하면, 경계·지혜·수행이라는 측면에서 셋으로 말하지만 하나로 원융하다.

 

또 앞서 설명한 '불차제'의 개념을 들어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을 원융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세 가지 각각의 원융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 연쇄성 및 연계성에 기대어 처음의 경계가 원융함에 따라 이에 상응하여 지혜와 수행 역시 원융함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직 순서와 구별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각각의 원융에 대한 논의에서 세 가지의 관계로 그 범위와 구조를 확장해서 이야기하면, 세 가지 모두가 다름없이 하나를 뜻하기 때문에 순서나 연쇄 성에 의지하지 않고 불차제로 원융하다. 그 이유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 바와 예시를 든 것과 같다.

 

또한 천태대사는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의 원인(圓因)을 통해 얻는 원과(圓果)3법묘(三法妙)와의 연결을 통해 세 가지의 원융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아래와 같다.

 

앞의 경계는 법상과 같다고 설하니, 법상이 세 가지를 갖추어 이를 비밀장이라 이름한다. 앞의 지혜는 법상의 이해와 같으며, 이 이해 역시 세 가지를 갖추어 얼굴에 세 개의 눈이 있는 것과 같다. 지금 수행은 행해지는 것으로 말한 바와 같고, 수행 역시 세 가지를 갖추고 있어 이자(伊字)3()이라 이름한다. 셋이든지 하나이든지 모두 부족하거나 빠짐이 없기 때문에 묘행이라고 한다.

 

앞서 3법묘 역시 진성궤(眞性軌관조궤(觀照軌자성궤(資成軌)3궤로, 각각을 경계·지혜·수행의 묘에 배대하여 격별의 관계에서 논했다. 그러나 3궤를 비록 셋으로 말하지만 이는 다만 하나의 대승법으로, 1불승이 곧 3법을 갖추어 셋이지만 하나로 논하고, 하나이지만 셋으로 논하여 원융하다. 그리고 이 3법을 얻기 위한 1불승의 인행인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 역시 원융하기 때문에 인과가 모두 원융하여 원인과 원과라고 일컫는 것이다.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의 세 가지가 각각 '비밀장·세 개의 눈·이자의 3'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곧 3궤를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인과 원과가 각각 원융한 가운데 또한 원인의 각각이 원과를 모두 갖추고 있어서 인과가 서로 원융하여 구별이 없다. 이에 셋으로 말하든, 하나로 말하든 '묘행'이라고 하는 것에서 한 번 더 그 뜻이 확장되고, 적문10묘의 10가지의 뜻이 모두 원융하다는 것에 그 의미가 통한다. 자행과 화타, 원인과 결과로 구조를 나누어 말하지만 각각이 원융하고, 또 서로의 뜻을 갖추어 원융하기 때문에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르다.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의 의미 및 범위를 확장하여 실천적 측면에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격별의 관점에서 세 가지를 그 역할과 성질에 따라 구분지으면 경계는 곧 불자들이 얻고자 하는 깨달음[], 지혜는 교학 수행은 곧 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차별상에 대한 관심이 극단적으로 흘러가 상충되거나 대립적인 개념의 양분(兩分)으로 이어지면, 선과 교의 대립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지혜와 수행을 격 별적으로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개인과 집단의 이익 및 욕구와 결부시켰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개념을 양분하고 대립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불교 안에서 '[]'와 집단을 앞세워 차별을 만들고, 이것이 종파의 대립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원융의 관점에서 세 가지로 말하지만 하나임을 주지한다면, 이러한 대립은 무의미하다. 구별없이 하나인 것들끼리 충돌하거나 우위를 따지는 일은 발생할 수 없고, 불가능한 일에 대한 논쟁이나 대립 역시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선호나 편의에 따라 교학과 수행 중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하는 일 역시 모순이 될 것이다. 본래 원융한 것 중 어느 하나만을 취득하는 것, 그리고 그 원융한 것 가운데 한 가지만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천태대사는 교학과 수행법 모두를 중시하여 자세히 설명했고, 양자의 원융을 토대로하여 선정과 지혜 모두를 닦을 것[敎觀二門]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법화현의에 의거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설명하면,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의 원융한 관계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곧 불도의 시작이다. 적문과 본문10묘는 자성3법과 화타3법으로 이루어져 그 뜻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원융하게 구경에 통한다고 했는데, 남을 교화하고 또한 스스로 3법을 이루는 자타불이의 원행을 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단계적 방식에 따라 먼저 격별의 관점에서 경전의 말씀을 다양한 초점에서 읽어나가면서 경계·지혜·수행을 그 의미와 역할에 따라 파악한다. 그러나 10가지 묘가 원융하게 하나의 뜻을 가리키듯이, 세 가지 역시 셋으로 말하지만 하나이기에 원융의 관점에서 이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세 가지를 원만하게 이해하고 실천할 때 그에 따른 지위에 도달하고 결과를 받는데, 이것이 곧 스스로 3법을 이룸을 뜻한다.

 

<경계와 지혜 그리고 수행의 관계에 관한 연구/이혜린 금강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불교교학전공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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