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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 용어

알기쉬운교리5-삼학팔조-최정풍교무

작성자조 오갈|작성시간07.07.25|조회수140 목록 댓글 0

최정풍 교무의 알기쉬운 교리 행복한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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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간 취사력을 얻는 방법-노력엔 낙망이 따른다

‘귀는 여래(如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법문을 많이 들어서 귀의 수준이 부처님이라는 것이지요. 아는 만큼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말입니다. 정말 모르는 것도 문제이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대종사님의 마음공부는 사실 마음만을 다스리는 공부가 아닙니다.

마음의 변화를 넘어 행동의 변화, 인격의 변화, 세상의 변화까지를 요구합니다. 먼저 마음이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마음공부라고 할 뿐입니다. 이런 면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부가 작업취사 공부입니다.

정의는 실천하고, 불의는 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죽기로써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낙망하게 됩니다. 담배 하나를 끊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해보면 압니다. 내 습관 하나를 고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또 알게 됩니다. 노력은 낙망을 동반한다는 것을.

 

무언가를 이루려 노력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 어려움은 우리를 낙망과 절망으로 몰고가려 합니다. 물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겐 낙망도 찾아가지 않습니다. 노력의 동반자, 낙망을 따돌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대종사님 말씀입니다.‘모든 일을 작용할 때에 즉시 실행이 되지 않는다고 낙망하지 말고 정성을 계속하여 끊임 없는 공을 쌓을 것이니라.’ 동정간 취사력 얻는 방법의 세 번째, 마지막 방법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새기고 싶습니다. -정성스럽게 노력하자, 낙망이 지쳐 쓰러져 쫓아오지 못할 때까지! 라고. 낙망은 결코 정성을 이기지 못합니다.

 

삼학수행-오래 오래 ... 오래

원불교의 수행은 마음공부이고 마음공부는 삼학(三學)입니다.

삼학을 마무리하면서 꼭 짚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정전의 ‘정신수양의 결과’를 보면 ‘우리가 정신수양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정신이 철석 같이 견고하여, 천만경계를 응용할 때에 마음에 자주(自主)의 힘이 생겨 결국 수양력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리연구의 결과’를 보면 ‘우리가 사리연구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천만사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 걸림없이 아는 지혜의 힘이 생겨 결국 연구력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작업취사의 결과’를 보면 ‘우리가 작업취사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모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어 결국 취사력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활 속에서 너무나 흔하게 듣는 안타까운 말이 있습니다. ‘해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말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하면 한 만큼 반드시 진전이 있습니다. 단, 한두 번으로는 그 결과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오래오래 계속하면’이라는 표현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계십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 아니라 오래오래 하고 또 하라는 당부이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내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두 번 해보고 되지 않는다고 낙망하고, 몇 날이나 몇 달 해보고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천지만물이 모두 오래오래 공들인 결과입니다.

 

‘오래오래’라는 말씀을 표준삼아 새롭게 출발해야겠습니다.

 

마음공부- 먼저 하라, 당하기 전에

대종사님의 가르침은 마음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의 측정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마음공부를 오래 했어도 그 결과를 평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날 좌선하는 사람이 수양력이 저 정도야?’ 또는 ‘확실히 다르네, 마음공부한 사람이’하는 식으로 누군가 나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군가는 가까운 가족일 수도 있고, 동료들일 수도 있고, 법신불 사은님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 하나하나가 쌓이고 쌓여서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들이 모여서 인격이 될 때 비로소 사람들 눈에 띄게 됩니다. 눈에 띄도록 굳어진 습관과 인격은 돌이키기 힘듭니다.

그 사람 너무 가벼워, 그 사람 너무 까다롭더라, 너무 게으르더라, 술버릇이 고약하더라, 신용을 못 지킨다던데 등 ……. 누군가의 평가를 잘 받으려고 전전긍긍하면서 마음공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마음공부를 하려면 스승님들께서 내주신 표준으로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정할 때 마음 나가는 번수와 동할 때 마음 끌리는가 아니 끌리는 가를 대조하면 수양력 정도를 알 것이요, 안으로 성리연마와 경전 해득과 밖으로 사물 판단하는 능력을 대조하면 연구력의 정도를 알 것이요, 안으로 일기하여 계문을 조사하고 밖으로 일을 당하여 수시 응변하는 능력을 대조하면 취사력의 정도를 알 것이니라.’정산종사법어 경의편 17장 말씀입니다.

 

평가의 목적은 마음공부의 실력 향상에 있습니다. 당하기 전에 스스로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 삶은 전진하고 있는가?

자녀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 부모님들 속이 탑니다. 자녀들이 편식을 해서 부모님들 마음이 상합니다.
공부를 다그치고 골고루 먹으라고 강요하지만 아이들은 잘 따르지 않습니다.
다그치고 강요하기 전에 가만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아이들이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지. 왜 공부를 하는지, 공부를 해서 무엇을 이루려 할 것인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 한 변화는 없습니다. 건강을 이루려는 마음이 없이는 편벽된 입맛을 바꾸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이루려는 마음이 바로 ‘원(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은 삼학의 수행에 덧붙여 마음공부를 진행시켜주는 네 가지 조목을 말씀하십니다.

신(信), 분(忿), 의(疑), 성(誠)입니다.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위대한 마음공부 길을 밝히셨으나 정작 이 마음공부를 추진하는 마음이 없으면 공부의 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녀들을 걱정하기 전에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거듭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전진하고 있는가?

나는 좀 더 나아지고 있는가?

내 신앙과 수행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대종사님은 말씀하십니다.

땅에 일원상을 그려 보이시며, 이것이 우주의 본가인데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조화가 다 갖추어져 있다, 이 본가에 들어가려면 ‘삼대력의 열쇠를 얻어야 들어갈 것이요, 그 열쇠는 신·분·의·성으로써 조성하나니라.’(불지품20장)


원불교의 신앙을 알지만 생활이 은혜롭지 않다면, 마음공부의 수행을 알고는 있지만 마음의 힘 이 쌓이지 않고 있다면 그 삶은 정체한 삶입니다.


 

대종사님 피는 ...

열한 살 어린이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5년간 삼밭재 마당바위에서 기도를 올립니다.

그 후로는 6년간 스승을 찾아 일천정성을 들입니다. 그 후 이십대 초반에는 또 4년간 깊은 입정의 세계에 침잠합니다. 가세는 기울어 고생이 이루 말 할 수 없었으나? 진리를 향한 구도의 열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는 엄동설한에 삽과 곡괭이로 바다를 막았습니다. 창생을 구하겠다는 서원 하나로 제자들과 하늘의 인정을 받아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엄혹한 칼날 앞에서도 이룰 것을 이루었습니다. 숯장사, 엿장사를 마다치 않았고, 논밭을 빌려서 땀 흘려 노동했습니다.

우리가 꿈에도 그리는 대종사님이십니다. 재산도 학식도 지위도 권세도 별 것 없으셨던 분. 눈에 보이는 것은 가진 게 별로 없으셨으나 맨 주먹으로 이 회상을 이룩하신 분이십니다.
어찌 대종사님의 피가 뜨뜻미지근했겠습니까? 등상불 신앙을 과감히 뒤로 하고 농기구를 메고 돌아오는 제자들을 보고 이들이 우리집 부처님이라고 당당히 일본 시찰단들에게 선언하던 대종사님의 마음이 어찌 차가웠겠습니까?
뜨거울 자리에선 뜨거우시고, 차가울 자리에선 차가우셨던 대종사님이시지만 이 또한 구원겁래의 뜨거운 서원이 먼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감히 추측해봅니다.
‘분(忿)이라 함은 용장한 전진심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니라’라는 말씀이 그저 말씀이 아니라 대종사님의 뜨거운 피로 느껴지는 대각개교의 달입니다.?
가진 것 없어도 뜨거운 마음 가지고 있다면, 그사람이 바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의심을 없애는 의심
‘인생이 이게 뭐야? 이런 거야 정말?’ 울먹울먹 신세한탄 하며 소주를 들이킵니다. 쉽게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부처님들이나 성현님들도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라고.
인생에 대한 고민이란 점에서 같고, 삶의 본질에 대한 의심인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신세한탄식의 의심으로는 얻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반대로 구도의 자세로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는 의심은 깨달음을 가져옵니다.
투자를 하면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끝없이 그 말을 의심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삶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 제안이 맞는 것인지를 알아내려는 ‘의’, ‘의심’의 추진이 행해져야 하고 정확하고 빠른 판단에 이르러야 합니다.
세상엔 두 가지 의심이 있습니다. 의심 끝에 얻을 것이 별로 없는 의심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지혜에 이르게 해서 무언가를 이루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는 의심입니다. 뒤에 말한 의심이 대종사님께서 진행사조에서 말씀하시는 ‘의’, 의심입니다.
‘의라 함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니라.’(정전 원문)
의심과 의심을 뭉쳐서 의단(疑團)으로 깨달음에 이르시고 열악한 상황을 이겨내시고 회상을 펴신 대종사님의 일생이 바로 의심의 올바른 추진을 웅변하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문명이든 정신문명이든 나사못 하나에서 인륜도덕까지 의심 없이 생긴 것은 없습니다.

 

성(聖), 성(性), 성(成)

해는 장구한 세월 동안 어김없이 어둠을 밝히며 떠오릅니다. 바다의 파도는 철썩 철썩 거대한 바위를 모래로 만듭니다. 똑 똑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수는 바위를 뚫습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푸른 싹이 돋아납니다.
내 몸의 심장도 어김없이 맥박을 만들며 자기 할 일을 합니다. 이 글을 읽고 쓰는 이 순간에도 들숨과 날숨이 고르게 왕래합니다.
아이가 자라는 것도 소리 없이 정성스러운 어머니의 손길 때문입니다.
대종사님은 ‘성이라 함은 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間斷) 없다는 것은 끊임이 없는 것, 사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염염불망(念念不忘)하고 심심상련(心心相連)하고 행하고 또 행해야 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만물 그 어느 것도 정성 없이 이뤄지는 것은 없습니다. 대종사님 내어주신 신, 분, 의, 성 네 가지 덕목 가운데 정성이 빠지면 세 가지는 힘을 타지 못합니다.
한 때의 신심, 한 때의 분발심, 한 때의 의심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공부와 일을 하면서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성(誠), 정성심입니다.
부처님들이나 성현님들 그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모든 분들의 삶의 핵심에는 반드시 ‘정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성은 범부와 성인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聖>,
정성은 깨달아야, 견성해야 샘솟는 것이고<性>,
정성은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그 목적을 달하게<成> 하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성(誠)은 성(聖)이며, 성(性)이고, 성(成)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버린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차디 찬 얼음으로 기관차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한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그저 웃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얼음을 녹여 물을 만들고,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들었습니다. 증기를 터질듯하게 뭉치고 뭉쳐서 터빈을 돌렸습니다.
무거운 쇳덩어리 기차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불신은 아무 것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믿음은 실천을 낳고 놀라운 결과를 얻게 합니다. 물도 얼음도 수증기도 모두 수소분자 두 개에 산소 분자 하나(H2O) 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 어떤 행동도 나올 수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범부 중생과 불보살이 한 마음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범부 중생은 결코 부처의 인격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음공부로 마음의 자유를 얻고, 생사를 초월하고, 죄복을 임의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수행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은에 보은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는 한 보은행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결정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불신이라 함은 신의 반대로 믿지 아니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결정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라’(정전)라고 대종사님은 말씀하십니다. 버려야 할 네 가지-불신, 탐욕, 나(게으름), 우(어리석음)-의 첫 번째입니다.
신(信)이 없는 공부는 마치 죽은 나무에 거름하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결과를 보지 못한다는 대종사님의 말씀이 무겁게 다가옵니다.(신성품7장)


불신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삶을 버리고 말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가끔 소화제를 먹습니다. 무언가를 과식했기 때문이지요. 아주 가늠이 없지는 않아서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 이거 과식하는 건데…’하면서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소화제를 먹으면서 참회를 하지만, 가끔씩 반복하는 걸 보면 참회의 진정성이 의심스럽습니다.
탐욕은 ‘모든 일을 상도에 벗어나서 과히 취함을 이름’이라고 대종사님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배탈은 음식을 상도(常道)에 벗어나 과히 취한 탐욕의 결과입니다.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무언가를 취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적절하지 않고 과히 취하는 데서 탈이 납니다.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과하게 하고, 술꾼들은 술을 과하게 마십니다.
먹는 것이 과해서 비만이 되기도 하고, 너무 먹지 않아서 건강을 해치기도 합니다. 믿음이 과해서 탈이 나기도 하고, 불신이 과해서 탈이 나기도 합니다.
개인이 배탈 나듯이 대기업들은 8천억, 1조원을 토해냅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 문명은 ‘과히 취하는’ 문명인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편하게 살고자 석유를 쥐어짜다가 전쟁을 일으키고, 경제적 이익을 과히 취하다가 수많은 빈곤층을 만들어냅니다.
사랑도 과하면 애착이 되어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마음도 과하면 반드시 탈이 뒤따릅니다. 인과의 원리입니다.
진정 잘 살고 싶다면 성능 좋은 소화제를 찾기보다는 ‘상도에 벗어나서 과히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뒤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도를 벗어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이 곧 마음공부일 것이고, 탈나지 않으려면 일단 탐욕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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