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종경강의 | 요훈품 16장 |
내 마음과 같기를 바라지 말며…
사람은 누구나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설사 쌍둥이라 할지라도 모습은 좀 비슷하다 하지만 생각은 각기 다르다.
각자가 세세생생 다니며 길들여온 습관이나 업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뜻이 같고 목적이 같으면 서로 맞출 따름이다.
그런데 부모 자녀와 같이 무간한 사이라 해서 부부와 같이 친한 사이라서 형제와 같이 가까운 사이라 해서 내 마음과 같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나와 가까운 사이일수록 내 마음과 같기를 바라는 경우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원이 없는데도 자꾸 하기를 강요하다가 말을 듣지 않으면 속상해 하고 상처받는다. 그러다가 부부간에는 이혼까지도 하게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원 없는 데에는 무슨 일이든지 과도히 권하지 말고 자기 할 일만 할 것이요’(솔성요론 15조)라고 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은 조금만 더 권하면 들어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더 큰 상심을 하게 된다. 자기가 어리석은 줄은 모르고 상대방만 쳐다보고 탓한다.
대종사는 제 마음도 마음데로 쓰지 못하면서 남의 마음을 제 마음데로 쓰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였다.
또 제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까지 간섭하다 시비 가운데 들어서 고통받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였다.
자기 일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관련된 모든 일 즉 부모 노릇, 자식 노릇, 스승 노릇, 교도 노릇, 제자 노릇, 회장 노릇, 주무 노릇, 단장 노릇 등등 자기가 맡고 있는 모든 일을 잘 해가면서 남의 일도 둘러봐야지 자기 일은 잘 하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을 간섭하면 상대방이 듣지도 않으려니와 오히려 실없는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일의 시비이해를 모르고 자행자지 한다면 찰라 찰라로 육근을 동작하는 바가 모두 죄고로 화하여 전정고해가 한이 없을 것’ 이라고 사리연구의 목적에서 밝혀 주었다.
이렇게 시비이해를 확실하게 분석해서 아는 사람은 남의 일을 간섭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이 남의 일까지 간섭하다 시비 가운데 들어서 고통받게 되는 것이다.
제자리에서 자기가 맡은바 범위 안에서 누구에게 피해주지 않고 확실하게 해내는 사람은 보은자요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크게 지혜 있어서 남에게 밝게 비쳐주며 살지는 못하더라도 어리석게 남의 마음을 제 마음 쓰듯 하려고 말며, 제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의 일까지 간섭하다가 시비 가운데 들어 고통받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송경호 교무·순천교당>
| 대종경강의 | 요훈품 17장 |
모든 일을 도로써 구하라
‘모든 것을 구하는데는 반드시 바른 길이 있는데 범부들은 바르게 구하지 않기 때문에 구하면 구할수록 멀어진다’ 하였다.
범부가 도가 없이 구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으로 다른 사람을 해 하면서까지 내 이익만 채우려는 것이다.
욕심이라는 검은 구름이 가리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길이 이롭고 해로운 것인가를 바로 보지 못하여 바른 행이 되지 못하므로 내가 구하고자 하나 점점 구하는 바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복과 혜 두가지 인바 세상은 복의 밭이요 우주는 진리의 덩치이며… 그러나 아무리 구하여도 되지않는 일은 진리에 어긋나게 구하는 연고라’(무본편 10)하였다.
진리에 어긋나게 구한다는 말씀도 바른 도가 없이 구한다는 말씀과 같다.
단촉한 생각으로 속히 이루려 한다거나 노력없이 이루려는 것도 다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불보살은 도로써 구하므로 아쉽게 구하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돌아 오는 이치가 있다 하였다.
불보살은 복을 받으면서 또 끊임없이 복을 닦고 짖고 그 복을 잘 이용하고 복을 아끼니 또 돌아오는 것이다.
모든 생각, 모든 말씀, 모든 행이 다 중생을 위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그 결과 당연히 돌아오는 것은 복과 혜밖에 없는 것이다.
또 처음부터 복과 혜를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을 위해 일하다 보니 모든 일이 다 복으로 화하는 일만 하신 것이다.
우리 중생처럼 단촉하게 눈 앞의 것만 본다거나 짧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멀리 넓게 보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자연히 항상 여유롭고 한가하게 복을 짓고 받는 것이다.
또 자기 혼자만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차하지 않고 항상 당당하며 형상있는 물건이나 환경을 초월하고 생사고락과 선악인과에 해탈하여 당하는 대로 마음이 항상 편안하다.
‘중생들은 그릇이 작은지라 없던 것이 있어진다든지 모르던 것이 알아지고 보면 곧 넘치기가 쉽고… 불보살들은 그 그릇이 국한이 없어서 있어도 더한 바가 없고 없어도 덜할바가 없어서 그 살림의 유무를 가히 엿보지 못한다.’(불지품14장)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삼천년이 넘었어도 지금도 불전에는 끊임없이 공양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다.
불보살들은 무슨 일이든지 하고자 하면 시일의 조만은 있을지언정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
<송경호 교무·순천교당>
| 대종경강의 | 요훈품 18장 |
일은 먼저, 먹기는 나중
‘그 일을 먼저하고 먹기를 뒤에 하는 사람은 군자요 그 일을 뒤에 하고 먹기를 먼저하는 사람은 소인이니라.’
요즈음 신문이나 방송에 회자되고 있는 각종 게이트 사건들이 모두 일과 먹기의 순서를 잘못 이행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고 본다.
지금처럼 밝은 세상에 일을 하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을 알면서도 성급하게 먹고 보자는 부조리 현상 때문에 세상이 온통 끓고 있다.
가까운 예로 건설 쪽을 살펴보자. 공무원들이 건축 허가를 내줄 때 뇌물을 받고 허가를 내주면 업자는 그 뇌물을 면하기 위해 자재 값을 줄이려고 자재를 나쁘고 싼 것을 쓰므로 부실공사가 된다.
모 정치인들이 선거를 치를 때 과도한 선거비용을 쓰고 그 비용을 채우기 위해 부조리를 행하는 등 악순환이 계속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군자는 정신의 세력이 확장되어 있고 살림의 범위가 넓고 커서 일을 하면서도 잘 지치지도 않고 모두 내 일이기 때문에 먹는 것에 그렇게 큰 비중을 두지않는 반면에 소인은 하는 살림이 범위가 좁고 정신의 세력이 약하므로 항상 배가 고프고 빨리 지치고 일도 하기 전에 먹을 생각부터 하는 것이다.
천지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때 대가를 바랐다면 이 세상 만물은 그 도에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가없이 베풀어 주는 은혜로 우리는 이와 같이 생명을 보존하고 살고있는 것이다.
군자는 그 도를 가장 잘 받들어서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군자가 된 반면 소인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로 선후를 분간하지 못 하고 욕심을 내기 때문에 항상 소인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것을 먹어도 되는가, 또 나 혼자서 다 먹어도 되는가 한번만 더 생각을 한다면 요즈음 처럼 날마다 뉴스거리가 되어 일생에 불명예로 헛삶을 산 결과를 초래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이 지위나 권리나 명예나 부가 한번 올라가면 거기에 맛들여지고 길들여져서 내려오는 것은 괴롭고 죽기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 처한 자리에서 항상 내 주위를 살펴보고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습관을 끊임없이 길들이면 어느 자리에 있든지 어느 처지에 있든지 항상 당당하고 떳떳한 것이다.
‘천하 만사가 다 본말과 주종이 있나니 근본을 알아서 근본에 힘쓰면 끝도 자연히 좋아질 것이나 끝을 따라 끝에 힘쓰면 근본은 자연 매하여 진다하였다.’(인도품 5장)
주종과 본말, 천지의 순리자연한 도를 알아서 그 도에 순응하고 그대로 그 길을 밟아나가면 먹을 것은 세세생생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송경호 교무·순천교당>
| 대종경강의 | 요훈품 19장 |
화복의 근원
대종사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을 복을 받기는 좋아하나 복을 짓기는 싫어하고 화를 받기는 싫어하나 죄를 짓기는 좋아하나니 이것이 다 화복의 근원을 알지 못함이요 설사 안다할지 라도 실행이 없는 연고’라 하였다.
이세상에 복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죄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복받는 사람 따로 있고 화나 죄를 받는 사람이 따로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복을 받고 싶다고 받고 화를 받기 싫다고 받지 않는 다면 이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것은 분명 엉망진창인 세상이 될 것이다. 혹자는 이세상 모든 사람이 복만 받고 화는 받지 않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것은 이세상에는 분명하고 밝은 진리가 있어서 복을 짓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을 받게하고,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화를 받게하는 엄연하고 변함없는 인과의 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복을 지은 사람에게 복을 받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복을 지은 사람에게 화를 받게 한다든지 죄를 지은 사람에게 복을 받게 한다면 그같이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저지르기 쉬운 죄를 쉽게 지으면서 받을 때에는 진리가 불공평하다느니 내가 지은 죄가 없거늘 왜 이렇게 화를 당하는지 모르겠다고 진리를 원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 원하는 바와 몸으로 행하는 바가 서로 같지못하니 받을 때도 복은 받고 싶으나 화를 당하게 되고, 죄는 면하고 싶으나 화를 당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렇게 쉽고도 당연한 진리를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알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못해서 세상은 이렇게 항상 시끄럽고 복잡하다. 이원칙에 적용해서 모든일을 감당하면 좋으련만 원하는 바와 몸의 실행이 항상 헛바퀴를 도는 것이다. 또한 설사안다 할지라도 실행이없는 연고라 하였다.
왜 실행이 없는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행자지로 육신과 정신을 아무 예산없이 양성하여 철석같이 굳은 연고요, 육신과 정신을 법으로 질박아서 나쁜 습관을 제거하고 정당한 법으로 단련하여 기질변화가 분명히 되기까지 공부를 아니한 연고요, 응용하는 가운데 수고 없이 속히 하고자 함이다’(고락에 대한 법문)고 밝혀주셨다.
복받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면 끊임없이 복을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복없는 사람을 보면 복못받을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남의 것은 잘보이는 데 나는 얼마나 올바르게 잘짓고 있을까?
<송경호 교무·순천교당>
| 대종경강의 | 요훈품 20장 |
편안하고 부귀한 사람
‘정신 육신 물질로 혜시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장차 복을 많이 받을 사람이요 인과는 여수라 하였다.’ 던진만큼 되돌아 오는 것이 인과의 원리이다.
마음으로라도 남을 위해 기도하고 빌어 주는일도 자주 챙기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쉽다. 또 육신으로도 남을 위해 베푼다는 것은 내 몸이 고달파야지 편안한 상태로는 남을 위할 수가 없다.
또 남을 위해 양말 한 켤레 단돈 몇 푼도 몇 번 생각해야 주는 것이지 선뜻 베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복받기도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현실생활에서는 현실적 수입이 많아야 그 생활이 윤택하고 편안할 것이요, 진리면에 있어서는 현실적 손실을 볼지라도 진리적 저축이 많아야 영원한 세상에 복록이 유족하리라. 현실적 수지도 잘 맞추려니와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써 늘 남을 더욱 이익주며 날로 달로 참다운 수지 대조로써 한량없는 복전을 개척하라(무본편 49장)”
‘어떠한 경계를 당하든지 분수에 편안한 사람이 제일 편안한 사람이다’했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세상은 편리하고 화려하여 졌으나 사람들은 편안하고 행복하지 못하다. 오히려 불안하고 불행하다. 자기의 처지와 환경은 살펴볼 여가도 없이 밖의 경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휩쓸리다보니 불안하고 불편하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을 얻는 사람이 제일 부귀한 사람이니’라 하였다. 사람의 욕심은 한정이 없다. 아홉 가진 사람이 열을 채우려고 하나 가진 사람의 것을 욕심 내며 온갖 애를 다 쓴다.
‘최령한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우고 하여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동물의 몇 배 이상이 되므로 그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을 취하자면 예의 염치와 공정한 법칙은 생각 할 여유도 없이 자기에게 있는 권리와 기능과 무력을 다하여 욕심만 채우려 하다가… 혹은 극도에 들어가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게 되나니… 이 욕심을 제거하고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수양을 하자는 것(정신수양의 목적)이다’고 하셨다.
처지에 만족을 얻는 사람이 제일 부귀한 사람이라고 일러 주셨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부단한 수행으로 정신이 철석같이 견고하여 천만 경계를 응용 할 때 마음에 자주의 힘을 얻도록 까지 죽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되어지지 않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이렇게 수양력을 얻고 보면 복도 많이 받고 어떠한 경계를 당하든지 분수에 편안하며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모두 만족하여 마음에 부자가 되는 줄을 배워서 알게 되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실행을 철저히 하여 다같이 마음에 힘을 얻자.
<송경호 교무·순천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