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실시품 21장
꿈나무와 신의
이 법문의 요지는 대종사님께서 하늘 사람들과의 무심코 지나는 약속이라도 그 신(信)을 저버리지 않으심을 나타낸 법문이다.대종사님의 사랑과 훈육 속에 자란 미래의 꿈나무들, 그들은 지금 누구일까.대종경속의 만년의 아이들! 그들은 영원히 대종사님의 사랑받는 아이들로 남아 있을 행복한 아이들이다.신용 땅에 미래의 꿈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불법연구회가 들어서고 제자들의 사가가 들어서면 부터라고 한다.대종사님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무조건적인 사랑보다 교육적인 입장에서 사랑과 훈육으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그 때 당시 대종경 속의 아이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경계가 있지만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불장난 하지 말 것.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께 문안 올리고 총부 구내 어른들께 인사할 것. 자기가 사용한 물건 정리 정돈 할 것. 밥 먹은 뒤 이를 닦을 것. 청소를 잘 할 것 등등.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더 있지만 생략한다.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비비며 조실로 달려가 인사를 했고 인사를 하고나면 손에는 손가락 과자가 쥐어져 있었다. 문안 인사가 끝났는데도 과자를 주지 않으면 과자를 기다리는 아이들.대종사님은 야회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이 녀석들이 이른 아침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안인사를 하길래 기특하게 생각했는데 다니는 목적이 문안 인사에 있는지 과자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여러분은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늘 그 목적을 반조하고 어떤 어려운 역경과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그 목적과 처음 서원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당부하셨다고 한다.대종사님은 아이들은 마음 가운데 털끝만한 사심이 없기에 어머니를 통해 천록이 나오는 하늘사람이라고 하셨다.또 부모는 자녀와 같이 무간한 사이라도 자기가 실행하지 못하는 조건으로 권면하면 잘 받지 아니한다 하시며 언행일치를 하도록 하셨고 경박한 말을 쓰는 제자를 엄책하시며 어린아이라 하여 함부로 하지 않도록 하셨다. 또 자녀를 심교·언교·행교·엄교 네가지로 지도하면 착한 사람 되게 하는데 일조를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대종사님의 꿈나무 교육법은 마음으로 전하는 사랑과 마음의 채찍과 마음의 훈증을 풍부하게 공급한 교육법이었다.요즘 아이들은 모두 버릇이 없다고 한다. 요즘 부모들의 사랑이 너무 커서 버릇없는 것까지도 다 수용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요즘 부모들 자체도 너무 버릇이 없어서 자식들의 버릇없는 것을 지도할 만한 지도력 상실일까."자기 자식이나 잘 가르칠 일이지 왜 남의 자식까지 가르치려 드세요?" 아유! 요즘 엄마 무서워라!
대종경강의 38 -- 실시품 24장
사심 부수고 정심 북돋기
이 법문에서 대종사님은 한 제자를 크게 꾸짖으시더니 후에 그 제자를 보고 예전의 자비하신 성안으로 대함에 그 연유를 묻자 “전에는 그 제자가 끄리고 있는 사심을 부수기 위함이요, 이제는 그 정심을 북돋기 위함이다”고 말씀하였다.
사심(邪心)이란 삿되고 악한 마음. 잘못되고 바르지 못한 마음. 대도 정법이 아닌 사도를 생각하는 마음을 말하며, 천도교에서는 도를 닦지 아니하여 천심(天心)에 어그러지는 마음이라고 하였다.또 정심(正心)은 사심에 상대되는 말로 올바른 길, 정당한 도리, 대도정법으로 중생을 불보살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교법으로 정도는 일시적으로는 해로운 것 같으나 결국은 이로워지고, 사도는 일시적으로는 이로운 것 같으나 결국은 해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도인들은 마음을 허공같이 흔적 없이 쓰신다. 대종사님이 “쫓아낼 놈” 하고 야단을 치실 때는 총부 구내가 들썩 들썩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지 잡수실 때는 언제 야단을 쳤냐 싶게 평소와 다름없이 식사를 하셨다고 한다.형산 법사님과 성산 법사님도 공사를 할 때는 세상 사람보다 더 무섭게 싸우셨는데, 싸우고 나서 식사 하실 때 보면 도란 도란 얘기하며 언제 싸웠냐는 듯 그렇게 다감하실 수가 없었다고 한다.도인들의 심법은 불천노(不遷怒)한다는 것이다.
도인들의 심법은 싸워도 법으로 싸우고 또 그 싸움의 흔적은 마음속에 고여 있지 않고 허공이라는 대해로 흘러서 그때 그때 소멸시켜 버린다.그러나 우리 중생은 어떤가? 우리 중생들은 사소한 감정 대립이나 오해로 부딪치게 되면 말을 하지 않거나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굴을 돌려버리는 오만과 무례를 서슴치 않는다.
또 공부가 덜 된 중생들은 화가 나면 화풀이를 엉뚱한데다 한다.
부부가 싸우면 자식에게 화풀이 하고, 상사에게 당하면 부하 직원에게 화풀이 하고, 고부간에 싸우면 자식 손자가 수난을 당한다.정산종사님께서는 “성불을 하려거든 파리 기운하고도 막혀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대종사님께서는 실시품에서 ‘잘못을 엄책하시나 그 사람이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 않게 하셨다’고 한다. 사심을 부수기 위한 꾸중이요 정심을 북돋기 위한 자비 심법은 곧 부처님의 심법이다. 우리도 그런 심법을 갖도록 노력할 일이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듯 원근친소로 고여 있는 감정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것은 증애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앙금이 남아있으면 상대방의 한 행동도 곱게 보이지 않고, 한 마디 말도 좋게 들리지 않는다. 내 가까이에 원수처럼 미운 동지가 있다면 그는 정말 업장이 두터운 사람이다. 다투되 법으로 다투고 감정은 그때 그때 허공으로 날려 버리자.
알기쉬운 대종경강의 - 실시품 25장
전무출신의 사가(私家) 대책
이 법문의 요지는 자력이 없는 처지라면 몰라도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떳떳하고 행복한 생활이라는 말씀이다.
3남1녀의 어머니이면서 가장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시던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님의 일상의 단면을 그림으로 보는 듯 하다. 그의 일상생활은 논매기 밭매기를 비롯하여 손수 거름을 쳐내고 돼지 막에서 두엄을 쳐내며 완전 자력 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 우리 원로원에 계시는 선진님들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감회가 새로우실 것이다.
대종사님 당시의 전무출신들의 사가 생활은 누구 한사람 유족하게 사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공회당에서 대종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내가 도성이 사는 것을 보면 기가 차고 입장이 딱해서 사가 살림을 경영하라고 밖에 내 보내면 한문을 잘하고 글씨를 잘 쓰니 제 집 살림 하나는 잘 권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공중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 우리가 봐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들은 송도성은 평소 꼿꼿하게 정좌하던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하니 얼마나 간고한 살림살이였을까!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그때의 살림살이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그러셨을까? 대종사님께서는 교단품 15장에서 전무출신들의 사가에 대한 대책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전무출신이 사가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공사에만 전력하게 하기 위하여 곤궁한 사가는 회중에서 보조하는 제도를 두면 어떠하겠는가’
대종사님 당대에 전무출신들이 사가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전무할 수 있도록 하셨지만 오늘날도 교화현장에 있는 전무출신들의 사가에 대한 대책은 아직도 완전히 서있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맞벌이를 해야 자녀를 교육 시킬 수 있다고 두 부부가 직업전선에 뛰어드는데 전무출신 우리 교무님들은 요즘 대학생들 한달 용돈에도 못미치는 용금에도 소리 없이 가정을 잘 꾸려가는 것을 보면 정토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 것인지는 대개 짐작이 간다.
우리 일선 교당에서도 이제는 교무님들의 용금에 대한 현실화를 예산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교도님들 우리 교당에 봉직하고 있는 교무님들의 용금이 얼마인지 알고 계시는지….
얼마 전 출가 교화단에서 휴양림 근처의 절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곳의 한 스님이 “원불교 교무님들의 연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중 누구도 그 스님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엉겁결에 “스님들하고 같을 겁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필자는 스님들의 연봉이 얼마인지 짐작도 못한다. 그냥 내 자존심상 그랬을 뿐이다.
전무출신들이 각자의 터전에서 자신들의 역량과 능력을 충분히 창출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용금의 현실화가 이뤄져야하고, 교단적 차원에서 정토님들의 행복한 생활을 위한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 또한 우리 교단의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실시품 26장
상(相)없는 대덕
이 법문은 교단 초창기 엿장수로 생계를 유지해 나가던 때, 이청춘 선진이 그동안 모아 놓았던 전 재산 40섬을 입회 기념으로 내 놓았을때 대종사께서 이청춘의 희사를 만류하시다가 “덕을 쓸진대 천지같이 상없는 대덕을 써서 영원히 그 공덕이 멸하지 않게 하라”하시며 “상 없는 보시”할 것을 강조하신 내용이다.
여간해서 상없는 보시 즉 무상보시하기는 쉽지 않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좋은 일을 하고 나면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또 드러내 주기를 바란다. 또 드러내 주지 않는다든가 알아주지 않으면 괜히 했나하고 후회하는 마음도 든다.
어느 날 교당 어린이집 아이 하나가 귤 하나를 가지고 와서 “원장 교무님께 드리려고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나는 이 뜻밖의 귤 선물에 “고맙다. 잘 먹을께”하며 나도 과자 하나를 주었다.
한참 후 무슨 일로 아래층에 내려가자 그 아이가 “원장교무님, 귤 맛있게 드세요”한다. 나는 성의있게 “그래 맛있게 먹을께”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다음날 그 아이를 만났는데 또 “원장 교무님, 귤 맛있게 드셨어요?”한다.
나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아따 그놈 귤 하나주고 되게 밝히네’하는 생각을 하며 “그래 귤이 정말 맛있더라.” 하고 대답했다.
대개 어느 교당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교당의 값나가는 비품들이나 집기들을 보면 ‘000증’이라고 써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또 각 교당의 경종들을 보면 빙 둘러서 희사한 사람들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언젠가 군산교당이 화재로 불타 건축기금이 확보되지 못했을 때에 전해들은 이야기다.
지금은 열반에 드셨지만 군산교당 오철환 회장은 자기 소유 채소밭을 희사했고, 채소밭 옆에 있는 개인 소유의 집을 시가 보다 비싼 가격으로 샀다. 당시 교무였던 고현종 원로 교무는 걱정이 되어 오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장님, 교당 신축 부지는 그만하면 확보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축기금이 없어서 어떻게 교당을 지어야 할지 걱정입니다.”하니 “교도들에게는 돈 얘기 하지 마세요. 제가 통장 하나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렵더라도 시작해 봅시다.” 했다.
오 회장은 바로 신축기금을 입금했고, 태전약국의 이익금을 계속 교당 신축금으로 희사했다.
오 회장은 교당 신축금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도 약을 담았던 종이 상자를 휴지통으로 사용하고, 약 선전 광고지 뒷면을 메모지로 활용하며 절약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큰 보시를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에게는 매우 인색하다는 것이다.
자기 과시욕이 강한 사람들은 보시가 대단히 어려우며 또 보시도 하지 않으면서 잡음을 일으키는 사람도 없지 않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뚝 떼어 꼭 필요한 곳에 베풀어 쓰는 것도 어렵지만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성경의 말씀처럼 오른 손으로 한 일을 왼 손도 모르게 하는 무상보시의 공덕을 행할 때 복과 혜가 더욱 빛날 것이다.
41 실시품 30장
든든하고 떳떳한 길
이 법문의 요지는 미리 예방차원에서 지시하신 가르침을 그대로 받들지 않고 신통으로 보는 것을 경계하시고 든든하고 떳떳한 길을 밟고 행하도록 부촉하신 말씀이다.
부교무 시절에, 교감님께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사람은 문리가 터져야 한다. 문리가 터지면 일의 기틀을 볼 줄 알아서 막히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는 어쩌면 그렇게 시키는 일도 제대로 받들어 들이지 못했는지. 또 교감님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부교무 눈에는 일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당시는 그 말씀의 뜻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말씀의 뜻이 새록 새록 느껴진다.
한 사람이 제자에게 “귀하의 선생님이 성인이라 하니 사리간에 무엇이든지 아시는가”하는 질문에 “다 아신다”고 대답했다. 그 사람은 다시 “그러면 비행기나 기차 제조하는 것도 아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리의 대체를 아시는 것이요. 그 대체는 근본을 말함인데 대소유무와 시비이해의 대의를 통달하므로 사리를 아신다는 것이지 말단의 기술부분까지 아신다는 것은 아니다”고 대답했다는 일산의 말을 들으시고 대종사는 “그말이 옳다” 하셨다.(변의품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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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틀과 대체를 알면 |
사람들은 자기 시야와 근기와 그릇만큼 밖에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의 기틀과 대체를 알면 모든 일과 이치가 손바닥 가운데 구슬처럼 투명하게 보일텐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밖에 보지 못하며,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들리는 소리밖에 듣지 못한다.
<실시품>에 ‘대종사 일이 없으실 때에는 앞으로 있을 일의 기틀을 먼저 보시므로 일을 당하여 군색함이 없으셨다’는 법문이 있다. 대종사님께서는 일의 기틀을 보시고 뒤탈을 없게 하기 위하여 마무리를 철저하게 잘 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의 대강 대강은 크고 작은 많은 일에 뒤탈을 불러온다. 매사를 대강 대강 보고, 누구의 말일지라도 대강 대강 듣고, 매사를 대강 대강 처리하고 그러므로서 수 많은 불신과 오해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고 또 중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흔히 교도님들은 일의 기틀을 보고 하는 말도 그 말이 딱 맞아 떨어지면 교무님은 “훤히 다 알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며 마치 신통으로 뭘 볼 줄 아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 법문은 대도정법을 배워 든든하고 떳떳한 길보다 속성의 길을 택하려 하는 우리, 요행을 꿈꾸고 로또복권이나 꿈꾸는 우리들에게 좀 더뎌도 든든하고 떳떳한 길을 밟아 행하라는 경종의 메시지이다. 신통은 성현의 말변지사라! 오직 든든하고 떳떳한 길을 밟아 행할 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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