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지 말라
공부나 일이란 원래 재미없는 것이므로 이를 악물고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중고등학교 도덕 교과서나 저명한 분들의 인생 강의에 의하면 ‘일은 삶의 보람이요, 나의 존재 의의는 바로 내가 하는 일 속에 있다’고 하는데, 나는 어찌 된 인간인지 일이나 공부에서는 좀처럼 재미를 못 느끼고, 노는 데라면 부르지 않아도 꼭 쫓아가야만 직성이 풀리니 내심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중 위안 삼을 수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부가 지겹기는 누구나 마찬가지더라는 것이다. 그날 나는 어떤 명문대학교에 초청을 받아 강의를 했는데, 자주 그렇듯 또 강의 도중 옆길로 빠져서 한참 가다 보니 엉뚱하게도 ‘나는 공부가 싫으니 어쩌니’ 하는 쓰잘 데 없는 고백까지 하게 되었고, 말 나온 김에 강의 듣고 있는 여러분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대형 강의실에 가득 찬 300여 명의 학생 중 공부가 좋아서 한다는 사람은 불과 대여섯 정도였던 것이다, 그 공부 잘한다는 일류대학 학생들도.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역시 ‘일이나 공부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원래 재미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미도 없는 것, 뒤로 미루고 싶은 것이 당연하고,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 또한 지당하리라는 것이다. 학대 받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 매저키스트가 아니고서야 누가 고통스러운 일을 찾아다니며 하겠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Never put off till tomorrow what you can do today.)’라고 말한 사람은 그러니 이상한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어디 한번 차분하게 따져보자. 오늘 내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what I can do today)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하자고만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다다음 주가 마감인 청탁 원고를 쓸 수도 있고, 어지럽혀진 책장을 정리할 수도 있고, 다음 학기 강의 준비를 할 수도 있고, 내년에 써야만 하는 논문을 위해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갈 수도 있고, 무식하다는 말을 더 듣지 않기 위해 사회과학서적을 비롯한 다양한 교양도서를 읽을 수도 있고, 내주까지 내야하는 각종 공과금과 세금을 내러 은행에 갈 수도 있고, 머리를 깎으러 이발소에 갈 수도 있고, 오랜만에 목욕탕에 갈 수도 있고, 언젠가 꼭 하고 말 세계여행을 위해 외국어 회화공부를 시작할 수도 있고, 전부터 하고 싶었던 섹소폰을 배우러 처음으로 음악 학원에 갈 수도 있고, 노후 대책으로 보험을 하나 들 수도 있고, 언젠가는 죽을 테니까 유서를 미리 써 둘 수도 있고.......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 모래, 역시 그 날 그 날 할 수 있는 일을 따져보자면 이에 못지 않을 터이니,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으려 하다’가는 결국 앞으로의 모든 날들이 꼭두새벽부터 자정 너머까지 그 날 하려고만 한다면 할 수 있는 수 천, 수 만 가지 일들로 빽빽하게 채워지지 않겠는가. 한 가지 일을 끝내고 나면 역시 그것도 그날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 일을 하고 나면 또 그 다음 일이 기다리고..... 그렇게 살다가는 며칠도 못 가 지치고 탈진해서, 아니 어쩌면 지치기도 전에 미쳐버려서 그 지옥 같은 삶을 탈출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니? 이것이 어찌 제 정신 가진 사람이 할 소린가? 어쨌든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늘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이 있지만 지금 당장은 음악이나 들으며 쉴 것이며, 오늘 저녁에는 역시 오늘 할 수는 있지만 회화 공부니 논문 준비니 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려 가련다. 차라리 오늘 마실 수 있는 술을 내일로 미루지 않을 것이며 오늘 놀 수 있는 건수를 내일로 미루지 않으리라.
그러나 여러분 중에서 내 글을 읽고 그대로 따라하다가 학점이 구멍 나고 졸업도 못하게 된다고 해서 그 책임을 나에게 떠넘기려 하지는 마라. 그건 내가 책임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따지고 보면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일도 아니니까. 나는 분명히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을 오늘 하려고 하지 마라(Never do today what you can put off till tomorrow.)’라고 했지 ‘내일로 미룰 수 없는 일도 오늘 하지 마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렇게만 해놓고 이야기를 끝낸다면 나는 매우 무책임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연 어떤 일이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이고, 또 어떤 일이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되는 일인지 판별할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그 기준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로 하자. 나는 모든 인간사를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what you can put off till tomorrow)’,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what you should not put off till tomorrow)’, ‘내일로 미루지 않으면 안 되는 일(what you should put off till tomorrow)’의 3 개 영역으로 분류해보고자 한다.
먼저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들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 내일이 선보는 날만 아니라면 그까짓 머리 깎는 일과 목욕하는 일은 내일로 미루어도 별 상관없으리라. 아직도 일주일이나 여유가 있는 리포트를 이 좋은 토요일 오후에 미리 꼭 써 두어야만 한다고 여러분도 주장하지는 않겠지? 그 동안도 어지럽혀진 책상에서 공부 잘 해왔으면서, 잠시 쉴 틈이 생겼다고 모든 것을 뒤집어엎으면서까지 지금 꼭 방 정리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선배, 동료들과 함께 하는 흥겨운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까짓 아르바이트쯤이야 내일로 하루쯤 미룬다 한들 무슨 큰일이야 생기려고?
이렇게 따지다 보면 강박신경증 환자를 제외한 일반인들의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은 실은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을 먼저 골라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리라.
과연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들은 어떤 것들일까? 당연히 ‘오늘 안 했을 경우 생존에 위협이 되는 일’들이겠지. 어느 누구나 숨쉬기 운동하는 일, 밥 먹는 일, 잠자는 일, 화장실 가는 일은 하루라도 거르면 안 될 것이다. 학생이라면 학점이 구멍 나서는 안 될 테니까 출석을 꼬박꼬박 부르시는 깐깐한 교수님의 강의에 들어가거나 친구에게 대신 대답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 내일 오전까지 제출해야하는 리포트를 쓰는 일, 벌써 두 번이나 빼먹어서 한번만 더 빠지면 파면 당할 것이 뻔한 아르바이트에 가는 일 등이 그런 일들일 것이며, 나 같은 직장인이라면 이제는 핑계거리도 떨어졌으니 윗분들에게 찍혀서 실업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번 달에는 더 이상 지각, 조퇴를 안 하는 일, 오늘까지 제출하지 않으면 부서 전체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는 서류를 정말 지겹지만 억지로라도 작성하는 일, 오늘이 아내 생일이니까 생존을 유지하려면 저녁 때 장미꽃이라도 한 송이 사들고 들어가는 일 등이 내일로 절대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의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 그외 좀처럼 내일로 미루지 않은 일들이 있는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재미있게 노는 일’, ‘동료들과 어울려 상사 욕하면서 술 먹는 일’과 후배나 제자가 찾아왔을 때 열 일을 제쳐두고 성의껏 대화하는 일 등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내일로 미룰 수 없는 일들도 결코 적지 않은 것 같다. 아이고, 힘들어!
이제 마지막으로 내일로 미루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을 찾아보고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자. 과연 그런 일들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의외로 많다. 실연당해 당장 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자살 기도를 하루쯤 뒤로 미루어보는 것도 손해 보는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대학 신입생이라면 앞으로의 진로 결정은 잠시 미루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중대한 결정을 하기에는 아직 뭘 모르니까. 진로 결정을 하려면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를 비롯하여 자신의 여러 가지 특성을 분명히 알아야 함은 물론, 이 세상에는 어떤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고등학교에서 판에 박힌 생활만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알아서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겠는가? 준비가 덜 되었을 때는 일단 뒤로 미루는 것이 상책이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자신에 대한 이해도 점차 깊어지고 세상사도 어느 정도 알게 될 테지. 그런데 적지 않은 신입생들이 하루라도 빨리 진로 결정을 하지 못해서 안달이다, 하루하루가 불안하다느니, 뭔가 목표가 있어야지 사는 맛이 나지 않겠냐느니 하면서. 이런 학생들이 이제부터 새로 익혀야 할 것은 목표를 먼저 정한 다음 뛰는 것이 아니라 뛰면서 동시에 목표를 찾는 삶의 방식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대학 합격이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지만 성인인 대학생들에게는 그런 기성품의 인생 목표가 있을 수 없다. 각자 자기 나름의 인생설계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하지 않다. 하루하루 주어진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자신과 세상을 살펴보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얼마 후에는 흡족한 진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니 오늘은 일단 미루고 보자.
또 한 가지 이 시대의 대학생들이 꼭 미루어야 할 것은, “사랑합니다. 결혼합시다” 하는 말이다. 언젠가,
‘사랑한단 한 마디, 그를 잡고 말을 못하면 너는 바보야. 어서 말을 해. 흔적 없는 거리거리 마다 말 못하는 사람들뿐이야. 정만 주면 무슨 소용 있나. 가고 나면 울고 말 것을.......’
해싸며 젊은이들을 부추기는 노래를 들었는데, 그걸 듣고서야 왜 요즘 청춘들이 사랑까지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우는지 알게 되었다. 젊은이들이 그리 급하게 사랑을 시작하고 진도도 쏜살 같이 나가는 이유가 아마도 그런 류의 노래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고루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너무 쉽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결혼합시다’는 더더욱 그렇고. 그런 말을 하려면 먼저 ‘사랑’이 뭐고 ‘결혼’은 또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이 급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면서 여자는 무엇이며 남자는 어떤 족속인지, 그리고 ‘사랑’은 또 뭔지 공부할 일이다. 대학 캠퍼스는 그런 것들을 배우기에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 조급함을 달래면서 일단은 먼저 인생 경험을 쌓자. 그런 다음에 적당한 시기가 되면 그 공부와 경험을 바탕으로 나에게 맞는 짝을 잘 만나 몇 개월 전에만 ‘사랑합니다’ 고백해도 결혼은 무난히 할 수 있다. 그러니 벌써부터 너무 안달하지는 말지어다.
내 생각에 동의한다면, 당신이 오늘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랑합니다. 결혼합시다’라는 말은 일단 다음으로 미루자.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해야만 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경남대 김원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