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사랑이 무어냐’는 질문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단 한마디 ‘눈물의 씨앗’이라고 명쾌하게 답한 일이 있음을 나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단지 ‘최근에 그가 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서러운 마음에 혼자서 몹시 울었던 모양이구나.’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내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고전적(?) 정의에 대하여 이렇듯 비아냥거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실은 사랑에 관한 한, 나는 그렇게 간략하면서도 명쾌한 정의를 내릴 수 없음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리 고백하거니와, 사랑에 관한 나의 이야기는 명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듣고 보면 결국은 뻔한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어쨌든 이제 시작하기로 하자. 나는 사랑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대비법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즉, 사랑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부각시키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개념과 사촌 격쯤 되는 다른 두 개념 즉, ‘정’과 ‘매력’을 비교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요.”라는 말은, “나는 그 사람과 정이 들었어요.”라는 말이나, “나는 그 사람에게 반했어요.”라는 말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고 누가 자신 있게 우길 수 있겠는가?
먼저, ‘정’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받을 땐 꿈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운 것’ (주: 조용필의 노래 중에서)이라고, 또 혹자는 ‘사랑보다 더 슬픈 것’ (주: 심수봉의 노래 중에서)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나, 나는 ‘정’은 다음과 같이 좀 더 과학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이란 ‘나의 생활을 통해 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대상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생성되고 쌓여 가는 정서적 경험의 축적물’이며, 그것은 ‘그 대상이 내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역할의 중요성, 함께 보낸 시간의 길이에 정비례하여 증대되는 것’이라고.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나의 생활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대상이 나의 감각 기관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면, 그에 대한 불수의적 반응으로 내 마음속에는 그 대상에 대한 정이 발생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정은 ‘쌓여 가는 것’이다. 정은 어떤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겨나 자연적으로 커 가는 것이다. 물론 정이 더 빨리, 더 깊이 들게 하는 조건은 있다. 그 대상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시간의 연속성이 길면 길수록, 그리고 감각 기관 중에서도 촉각 기관을 통한 자극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은 더 빠른 속도로 깊어진다.
그리고 정은 그 대상으로 사람, 동물, 장소, 사물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부인들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놈의 정’ 때문에 남편과 헤어지지 못하고 여전히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많은 아이들은 기르던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또한 정 때문에 당분간이나마 식음을 전폐하며, 댐이 생기면서 수몰된 고향을 떠난 노인들도 정 때문에 고향을 삼켜버린 호숫가를 혼자 배회하며, 손에 익었던 싸구려 손목 시계나 만년필을 분실했을 때도 또 ‘그 놈의 정’ 때문에 며칠간 허전함이 계속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유 씨 부인의 ‘조침문’은 사람이 작은 바늘 하나에도 얼마나 깊이 정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하여 정은 평상시에는 잘 모르고 있다가 그 대상과 분리된 다음에야 내 마음의 공허함을 통하여 그것의 존재와 크기를 알게 되는 그런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이 든 대상과의 분리 후에 오는 ‘공허감’과 ‘허전함’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여 그로 하여금 그 대상과 이전의 관계 양태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의 ‘체제 유지’적 힘이다.
‘정’의 속성 중 독특한 한 가지는 그것의 다양성이다. 즉, ‘정’에는 ‘고운 정’이 있는 반면에, 또한 ‘미운 정’도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고운 사랑’, ‘미운 사랑’이라는 말이나, ‘고운 매력’, ‘미운 매력’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그 대상이 차지하고 있는 내 마음 자리의 온도, 질감, 색깔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운 정’은 사랑의 ‘기초’이며, 또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에는 ‘미운 정’도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미운 정도 정의 일종이므로 ‘체제 유지’적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미운 정이 깊이 든 사람들은 만나면 서로 다투고 미워하게 되어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지만, 헤어진 상태에서 혼자 있고 보면 견딜 수 없이 외롭고 마음이 공허하여 다시 그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내 마음이 이렇게 허전한 것을 보니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원래의 관계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운 정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만나고 다투고 헤어지고 외로워하고 다시 만나고 다시 다투는’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한발 한발 깊은 고통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 결국은 소중한 청춘을 탕진하고 만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잘 알기도 전에 정만을 깊이 들여 놓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만남의 초기에 ‘정의 성장 촉진 조건’을 마련하지 말아야 한다. 즉, 서로 알게 되자마자 부터 둘이서만 너무 붙어 다녀서는 안 되며 특히 조급한 피부 접촉 욕구를 인내로 자제해야 한다.
이제 ‘매력’으로 넘어가자. ‘매력’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정’과 공통점이 많으니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기보다는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감정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는 점, 그리고 만남을 촉진하고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정’과 같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정’은 ‘지속적인 만남을 통하여 축적된 것’임에 반하여, ‘매력’은 지금까지 전혀 본 적이 없거나 겨우 몇 번 스치고 지나친 일밖에 없었던 사람도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정’이 ‘그 대상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내 마음에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면, ‘매력’은 ‘백지 같은 내 마음에 처음으로 칠해진 강렬한 크레파스 자국’이라고나 할까? 나를 황홀하게 만든 외국 영화의 주인공, 내가 ‘첫눈에 반한’ 전철 속의 여인,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나의 모든 감각을 사로잡던 그 사람에게 나는 어느 새 ‘매력’을 느끼고 만 것이다. 우리는 그 매력적인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한다. 가능하다면, 나와 그, 단둘이만 만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속일 수 없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벌써 이야기하지는 말자. 왜냐하면 나는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어떤 것을 소중히 여기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고 있다.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럴 경우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실은 ‘그 사람은 이럴 것이다’라고 내 마음속에 내 멋대로 구성해 놓은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매력’을 너무 깎아 내린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매력’이 곧 ‘사랑’은 아니다. 그러나 매력은 사랑의 출발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대상에 매력을 느낀다고, 그것이 곧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 대상을 알아 가면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수는 있는 것이다. 어떻게 나에게는 아무런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우리의 원래 주제, ‘사랑이 무어냐?’에 답할 차례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것만은 모르겠다. 모른다고 여기서 중단할 수도 없으니 남의 이야기를 옮겨 놓을 수밖에.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저 위대한 사랑의 이론가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의 사랑론을 내가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여기서 ‘기술’이라는 우리말 번역은 영 마음에 안 든다. 원제는 ‘The art of loving'이며. '‘사랑이란 이름의 예술’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어떨까 싶다.)에서 ‘관심, 앎, 존경, 책임감(care, knowledge, respect, responsibility)'을 사랑의 기본 4 요소라고 하였다. 즉, ‘나는 그를 사랑해요’라는 말은 ‘나는 그에게 관심이 많고, 나는 그를 잘 알고, 그를 존경하고, 그를 만나는 나 자신, 그리고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책임져요’ 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 사랑의 기본 4 요소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관심은 사랑의 ‘씨앗’이다. 우리는 삶의 과정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중 어떤 사람에게는 나도 모르게 관심을 갖게 되고,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를 알고 싶어진다. 따라서 누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 그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점점 더 많아지고, 동시에 나의 마음속에는 그를 좀 더 상세히, 속속들이 알고자 하는 욕망이 저절로 자라나게 된다. 그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에 관한 관심은 없다거나 그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은 그래서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다.
알기 위해서는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것이 아닌가? 앞에서 매력을 설명할 때 ‘그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매력’과 ‘관심’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의 ‘매력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나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매력’이 그렇듯 ‘관심’도 사랑의 출발이기는 하되 사랑의 완성은 아니다.
(2)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잘 ‘안다’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만도 행운이다. 왜냐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는 문을 두드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거나 혹은 기회가 생겨서 용기를 내어 노크를 해도 결국 받게 되는 것은 문전 박대뿐인 경우가 흔하니까. 미팅에서 애프터를 신청했다가 딱지를 맞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커피 한잔 하자고 청했다가 냉정한 거절을 답례로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이 세상 전부를 얻은 듯 너무 기고만장할 것은 없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태도 변화를 보일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연극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 그것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진행될 수 있을지, 아니면 단막의 비극으로 곧 끝장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한두 번 개인적으로 만났다고 해서 나와 그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오판하지는 말자. 흥분하여 너무 떠벌리고 다닐 일도 아니다.
나와 그는 이제 겨우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을 뿐이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의 만남을 서양말로는 데이트라 하는데, 어떤 서양 사람은 데이트를 정의하기를 ‘결혼할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두 이성 간의 만남으로서 구애나 구혼하고는 다르다. 데이트란 꼭 결혼할 의무는 지지 않는 만남이다’(Rabuda)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데이트는 탐색전인 것이다.
누구나가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어 하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당당히 탐색전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만으로도 일단은 행운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떤 선수는 초반 행운에 도취하여 자기 본분은 잊은 채 상대방 선수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만을 계속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옛말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평생을 살아도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어떻게 한두 번 만나는 것으로 그 사람을 알겠는가? 사람을 아는 일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려는 자세 즉, 냉철한 이성(理性)을 요구한다. ‘관심’이 마음의 일이라면, ‘앎’은 머리의 일이다. 그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야 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을 때 내가 마음속에 그려 보았던, 정말 그러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즉, 내가 세웠던 그 사람에 관한 가설을 검증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너무 삭막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 않을 테다. 왜냐하면 어차피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너무 신이 나서 내 말은 기억도 못할 테니까.
(3)누구를 사랑하다는 것은 그를 ‘존경’한다는 것이다.
데이트를 통해 상대방을 알아가다 보면 그 사람은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내가 마음속으로 그려 왔던 왕자님이나 공주님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일 뿐이다. 이 사람은 이런 가정에서 이렇게 살아 왔고, 이렇게 살고 있고, 이런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앞으로 이런 삶을 살고자 하고, 이런 성격이고, 이런 취미를 갖고 있고, 이런 장점이 있고, 저런 단점이 있으며, 이만큼 술을 먹는다.
이렇게 알게 된 그 사람이 왕자님, 공주님은 아니더라도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면 나는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그의 삶의 방식, 그의 꿈을 존경하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존경이 너무 무겁다면 최소한 존중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존경이나 존중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을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다. 이러한 관계에서 ‘고운 정’이 커 간다. 고운 정은 존경(존중)에 기초를 둔 사랑을 먹으며 끝간 데 없이 자라는 화초이며, 또 그 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서로에 대한 존경이나 존중으로 이어지는 만남은 그리 흔치 않다. 더 많은 만남은 초기의 황홀감에도 불구하고, 아니 초기의 만남이 그만큼 황홀했으므로 오히려 더 처절한 실망으로 막을 내린다. 어떤 경우는 서로에 대한 원망과 경멸로 끝을 내기도 한다. 내가 이깟 사람을 그 동안 그토록 그리워했던가, 하는 자기 모멸감과 함께.
그러나 이렇게 둘의 관계를 끝장내 버린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편에 든다. 서로를 모욕하고 상처주면서도 만남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운 정이 너무도 깊이 들어 헤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미운 정’은 탐색전 즉, 앎의 단계에서 이성(理性)은 접어둔 채 서로에 대한 착각을 바탕으로 만남의 초기부터 너무도 많은 시간을 지속적으로 함께 보내며 피부 접촉을 계속한 사람들 사이에 축적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헤어지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4)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만나는 나와 우리의 관계를 ‘책임’진다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 요소 즉, 관심과 앎과 존경은 그 목적어가 ‘그’인데 반하여, 책임의 목적어는 ‘나’이며, 우리의 ‘관계‘이다.
나는 그 사람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 사람도 나를 책임지지 않는다. 서로는 우리의 관계를 위하여 자기 자신만을 책임질 뿐이다. 사람은 자기가 기르는 개나, 금붕어, 난초를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하지만 다른 사람을 책임질 수는 없다. 예외가 있다면 내가 낳아 기르는 갓난아이의 경우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 아이가 혼자 설 수 있기 전까지만의 일이다. 내가 책임지는 것들은 내가 기르는 것들로서 그것의 살고, 죽음, 잘 되고, 못 됨은 모두 내 손에 달려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를 기르지 않는다. 그 사람은 자기 판단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그의 자발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월권이며, 또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나는 나 자신을 책임질 뿐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므로 나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내 기분 내키는 대로 살지도 않는다. 그 사람 앞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나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대할 때도 그러하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어리고 약하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점이 많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 나를 믿고 지켜보아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가볍고 한층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전에는 나도 모르고 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새로운 나’도 원래부터 내 속에 있었던 것이므로 새로운 모습으로 사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다. 전의 내 모습보다 지금의 내가 나에게도 더 마음에 들며 더 ‘나답다’는 느낌이 든다. ‘책임감’은 그 사람이 나에게 부과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다.
이제 사랑의 이야기도 다 했다. 멋지게 마무리 짓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자. 사랑은 ‘능력’이다. 사랑은 사랑의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피아노는 이전에 배운 사람만이 칠 수 있고 자전거 타는 것 역시 그렇듯이 사랑도 미리 배워 사랑의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자전거를 탈 줄 아는 것이 아니듯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다. 둘이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여 같이 살 수는 있어도 사랑을 할 수는 없다. 마무리 부분에 와서 이렇게 비관적인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는 나도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여러분은 지금쯤 내가 과연 사랑의 능력을 갖고 있는지 궁금할 것이고 또 내가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이면 어쩌나 걱정도 될 것이다. 사랑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자는 실은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사랑의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외적으로 알아보는 방법은 단 한가지뿐인데, 그것은 그 사람이 지금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란 바로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동료, 나의 선생님, 나의 선배, 나의 후배, 나의 이웃들일 것이다. 사랑의 능력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감출 수도 없고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 꾸며 보일 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사랑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역시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무관심하거나 그를 미워하고 있다. 아직까지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의 말에 대하여 이렇게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내 비록 지금까지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지만 앞으로 임자만 만나면 멋들어지게 사랑을 할 것이다. 지금가지 외로웠던 것이 억울해서라도 남들보다 몇 배로 더 아름답게 사랑할 것이다, 임자만 만나면.” 그러나 그 말은 나에게는 마치 이런 말처럼 들린다. “내가 아직까지는 피아노를 못 치지만, 훗날 언젠가 내 마음에 꼭 드는 흰색 그랜드 피아노 앞에만 앉게 되면, 나는 누구보다도 더 멋지게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리라.” 혹은 “내가 지금은 자전거를 못 타지만 내 마음에 딱 맞는 날씬한 자전거가 있다면 바로 타고 야외로 멋진 하이킹을 나갈 것이다.”
우리에게 사랑론을 강의하신 위대한 스승, 에리히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원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진실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먼저 사랑의 능력을 키울 일이다. 사랑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사랑 연습의 일차적 대상은 바로 나 자신과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나 자신과 그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고, 좀 더 잘 알려고 하고, 나와 그들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더욱 존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러분이 나 자신과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성공한다면 누구를 사랑하는 일에서도 성공할 것이지만, 만일 그 일에 실패한다면 누구를 사랑하는 데도 실패하리라. 간절히 바라건대, 이 글을 읽은 모든 사람이 사랑의 능력을 키우는 일에 부디 성공할 수 있기를!
(경남대 김원중)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보봐르 작성시간 10.09.17 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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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태산북두짱 작성시간 10.09.17 정답은 없지만 최상의 해답을 찾아 가는것이 인생사 인것 같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개개인 마다 느끼는 감정과 욕구가 차이가 있으니까요.. 저또한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어느 누구든 무엇이든 더불어 살아갈수 있는, 진정한 마음을 나눌수 있는 그런게 사랑이 아닐까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것이 가장 강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사람이 부부이자 인생의 반려자이겠지요.. 저는 아직 그런사람은 만나지 못했지만 항상 모든이가 마음편히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갈수 있는 우리들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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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세렌디피티 작성시간 10.12.15 우리가 기존에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교수님이 설명해 주신 사랑은 에고인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