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과 교육 (R.S. 피터즈 저. 이홍우 역. 교육과학사)
제 3 장 정당화에 관한 고전이론
1. 윤리학과 교사
*(69쪽∼73쪽)
교육에 관한 문제들이 윤리학적인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교육’이라는 말에는 ‘개선’이라든가 ‘개량’이라든가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한다’든가 하는 뜻이 붙박혀 들어있다. 그러므로 교육이 모종의 윤리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필연이다. 그러나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사회가 어떤 특정한 가치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논리적인 필연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그 가치의 근거를 따지는 것(즉, 가치의 정당화)도 개념 분석의 범위를 벗어나서 윤리학 이론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교육의 여러 측면 중에서 특히 윤리학적인 기초를 필요로 하는 측면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이다.
교사는 예컨대 예술과 요리법 중에서 어느 것이 보다 가치있는 활동인가, 또는 다른 아이를 때린 아이에게 벌을 주어야 하는가, 주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문제는 아무리 과학 실험을 하거나 아이의 몸을 해부해 보더라도 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선(善)’이라든가, ‘가치있다’든가, ‘당위’라는 말은 그런 방법으로 발견된 것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교육과정에 대한 논쟁이 끊일 새 없이 일어나고,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들끓고 있다. 보다 안정된 시대에 있어서는 참으로 생각이 깊은 교사만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찾기 위하여 전통 이상의 것을 추구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철저하게 게으른 교사나 독단적인 교사가 아니고는 도저히 그러한 추구를 회피할 수가 없다. 또한 오늘날의 교사는 권위자의 말에서 임시 피난처 이상의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다. 권위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며, 그럴 바에야 무슨 근거에서 그 중의 한 권위자의 충고를 특별히 듣는단 말인가? 슬프게도 오늘날 교사는 이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리하여 교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노예 제도와 살인은 명백하게 나쁜 것이며, 여기에 비하여 도박이나 혼외 정사는 나쁜 것 같지만 그렇게 명백하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도덕적 지식에 확실성의 등급이 매겨지게 되는 데는 명백히 모종의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논의를 명백히 밝히는 것이 바로 도덕철학(윤리학)의 일이다.
2. 자연주의(naturalism) *(73쪽)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부딪쳤을 때,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방법은 그 질문을 “무엇이 어떻게 되어있는가(있었는가,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비추어 대답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컨대 만약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결정할 수 있다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분명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수많은 저명한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인간은 그 본성에 있어서 이성이 발달해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계획과 규칙으로 욕망을 제어하는 능력이라든가 추상적 사고의 능력, 그리고 고도로 복잡한 상징체계의 개발 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은 이렇게 정의된 인간의 합리성에 비추어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활동 중에서 높은 수준의 합리성을 나타내는 것일수록 가치가 있다. 누가 보더라도 수학이 빙고보다 더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수학이 합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더 잘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74쪽)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까지에 사용되는 논의의 형식에는 온갖 난점이 있다. 우선 그 결론의 전제 속에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 그 본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앞에서 예시한 논의에서 보면 ‘본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된다. 이런 논의에 대한 첫째 반론은 인간의 특성을 이성적 능력 내지 인간관계에서 찾는 것이 순전히 임의적인 판단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생물 중에는 인간처럼 웃는 생물도 없으며, 인간처럼 오랫동안 새끼를 기르는 생물도 없다. 어째서 이런 것들은 인간의 특성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손가락의 구조를 가졌다는 것은 인간의 특성으로서 추상적 사고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전학적으로 말하면, 추상적 사고를 하는 능력도 구체적 조작을 할 수 있는 그런 손가락 구조를 가짐으로써 발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줄리안 헉슬리는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스무 가지나 열거하고 있다. 이 스무 가지 중의 어떤 것을 근본적인 차이로 보더라도, 이성의 경우에서와 동일한 형식의 논의가 성립된다.
*(76쪽)
위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비단 인간의 본성을 동물과의 차이에서 끌어내려고 했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어떤 사실적인 법칙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인 원리에 의하여 지지되지 않을 때는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게 된다. 예컨대 홉스는 인간은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간단한 규칙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주장의 근거로서 인간은 본성에 있어서 권력에 대한 욕망과 타인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으려는 욕망,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밀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는 근거에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실제적(practical) 질문에 대한 대답을 ‘무엇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하는 이론적(theoretical)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추론하고 있다는 논리적 난점을 가지고 있다. 역사상 그러한 논의의 형식에 대한 각성이 생기기 시작했을 당시에, 흄은 그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때까지 내가 접한, 도덕성에 관한 체계적인 논의에는 예외 없이 필자가 얼마동안 보통의 추론방법에 따라 신의 존재를 주장하기도 하고 인간백사에 관한 사실적인 언급도 하다가 갑자기, 놀랍게도 보통의 서술문인 ‘이다’, ‘아니다’라는 말 대신에 언필칭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쓴다. 이 변화는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새로운 관계 내지 논립(論立)을 나타내는 말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나름으로 서술되고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와 동시에 이 전적으로 불가사의한 사실, 말하자면 어떻게 하여 새로운 관계가 전적으로 다른 관계에서 연역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이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흄은 오늘날의 용어로 ‘윤리학의 자율성’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윤리학의 자율성이라는 것은 도덕적 판단이나 원리를 포함하지 않는 전제에서는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연역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윤리학 이론으로서의 자연주의는 암암리에 또는 명백하게, 전제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결론으로 도출될 수 없다는 엄격한 연역적 추론의 요구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다. 전제 속에 모종의 행동을 권장하다든지 모종의 기호를 표현하는 실제적 원리가 포함되지 않는 한, 어떻게 그런 종류의 실제적 판단이 결론으로 도출될 수 있단 말인가?
※ 참고사항 1 (해석판 이해를 위한 해설, xi 쪽)
①실제적(practical) - 어떻게 해야 하나? - ...해야 한다 - ought(당위) - 規範적 기능 - 윤리학,정치학
②이론적(theoretical) - 어떠한가, 왜 그런가? - ...이다 - is(사실) - 記述적 기능 - 과학,수학
※ 참고사항 2 (이돈희 저, ‘도덕교육’ 23쪽)
① 사실적 진술(종합적 명제) - 지구는 둥글다. - 과학
② 이론적 진술(분석적 명제) - 모든 총각은 결혼 안한 남자이다. - 수학, 논리학
③ 도덕적 진술(명제가 아닌 믿음, 신념) - 남을 돕는 것은 선한 행동이다. - 윤리학
☞ 명제(proposition): 그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문장
※ 참고사항 3: 연역법 (= 삼단논법)
연역은 일반 진술 하나와 특수 진술 하나를 증거로 하여 또 다른 특수 진술 하나가 진리라는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이다. 증거가 되는 일반 진술 하나를 ‘대전제’ - 대전제는 이미 과거에 진리로 증명된 진술이어야 한다. - , 또 다른 증거가 되는 특수 진술 하나를 ‘소전제’, 증명된 진리를 ‘연역적 결론’이라고 한다.
<예 1>
모든 포유류는 동물이다. (대전제)
고래는 포유류다. (소전제)
그러므로 고래는 동물이다. (결론)
<예 2>
모든 곤충은 다리가 여섯이다. (대전제)
개미는 곤충이다. (소전제)
그러므로 개미는 다리가 여섯이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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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의 빈(賓) 개념이 대개념(다리가 여섯): 대개념이 나타나 있는 전제를 ‘대전제’라 함.
- 결론의 주(主) 개념이 소개념(개미): 소개념이 나타나 있는 전제를 ‘소전제’라 함.
- 매(媒)개념(곤충): 대전제와 소전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개념.
<문제>
모든 새는 다리가 둘이다.
'삐삐'는 다리가 둘이다.
그러므로 '삐삐'는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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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론은 옳은가, 그른가?
*(77쪽)
어떤 행동이 가지고 오는 결과를 기초로 하여 그 행동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는 결과주의 이론(consequentialist theory)도, 만약 그 행동의 결과 중에서 어떤 것이 판단에 중요한 관련을 가진다는 윤리학적 원리가 진술되지 않는다면, 앞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 반론을 받게 된다. 예컨대, 날카로운 도구로 다른 사람을 찌르는 것은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주장이 있다고 하자. 이 주장이 타당한 것이 되려면 고통이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피를 흘리게 되기 때문에 가장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피는 붉기 때문에, 그 행동은 이 단조로운 세상에 붉은 빛깔을 덧붙이는 결과가 되며, 따라서 그 행동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78쪽)
자연주의 이론의 결함은 인간의 본성과 도덕적 논의의 행동통제 기능 사이의 관련을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맺는 데에 있다. 자연주의 이론가들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사실이 행동의 규칙을 추론해내는 전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80쪽)
자연주의 이론은, 흄의 말을 빌면, ‘이다’와 ‘해야 한다’ 사이에 다리를 놓지 못했다는 점에서 난점이 있다. 요컨대 자연주의 이론은 도덕적 논의의 ‘객관성’은 강조하지만 - 대부분의 자연주의 이론은 도덕적 논의를 인간의 본성 내지 욕망과 관련짓고 있다 - 도덕적 논의의 ‘자율성’은 올바로 강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