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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발달) 윤리학의 직관주의

작성자김원중|작성시간11.03.07|조회수608 목록 댓글 0

윤리학과 교육 (R.S. 피터즈 저. 이홍우 역. 교육과학사)

 

 

제 3 장 정당화에 관한 고전이론

 

3. 직관주의(intuitionism)

 

*(81-82쪽)

직관주의에는 두 가지 상이한 모형이 있다. 한 가지 이론에 의하면 좋다는 것은 깊은 사려에 의하여 파악되는 일종의 성질(property)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컨대 현대 플라톤주의자인 무어(G. E. Moore)는 ‘좋다’는 것은 ‘단순하고 분석불가능한 비자연적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자연적이라는 것은 감각이나 보통의 내관(內觀, introspection) 과정에 의하여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점에서 ‘좋다’는 것을 아는 과정은 갈증이나 고통을 느끼게 되는 과정과 다르다. ..... 그리하여 이 이론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비자연적인 대상이나 성질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대상은 특별한 내적인 눈으로 보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도덕적 지식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보면 마치 과학적 지식이 단순한 성질이나 관계에 관한 감각적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지적 파악에 기초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직관(intui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내가 본다‘는 단어의 파생어로서, 그것은 곧 그와 같이 보는 지적(知的)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82-83쪽)

가치 있는 활동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도덕적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취급할 때, 직관주의는 ‘보는 것’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모형을 사용해 왔다. 이 경우의 ‘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수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던 ‘자명한 원리’의 파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학은 플라톤에 의하여, 그리고 그 후 데카르트와 같은 많은 사상가에 의하여 지식의 전형적인 케이스로 취급되었다. 그리하여 도덕적 지식은, 그것도 도대체 지식이라고 하면, 그 구조에 있어서 수학적 지식과 비슷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 .... 데카르트는, 수학은 물론이요, 과학이나 도덕의 지식도 이러한 명제의 논리적 구조가 명백히 밝혀질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도덕적 지식에 관한 이러한 견해는 그 후 르네상스 이후의 자연법 사상가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존 로크에 이르러 이 견해는 인간에게는 누구든 범할 수 없는 기본법 - 즉, 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 - 이 있다는 확신에 대한 인식론적 기초가 되었고, 이 확신은 그 후 미국 독립선언과 그 밖의 여러 혁명적 교의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근래에 와서 데이비드 로스(David Ross)는 모든 도덕적 의무는 몇 가지 안되는 기본적인 ‘자명한 의무’ - 예컨대 약속을 지키는 것 - 를 기초로 성립하며, 이 자명한 의무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84-85쪽)

직관주의 이론은 보통 수학적 및 도덕적 공리(公理)를 파악하는 방식을 나타내는자명성’(自明性, self-evidence)의 개념과 긴밀히 제휴하고 있다. ‘자명성’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속성과 심리적인 속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개념이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공리를 파악할 때에는 모종의 내적인 섬광이 일어난다고 생각되며, 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목하 파악되는 내용(공리)의 증거가 그 내용의 내부에 이미 들어있다고 생각된다.

.......

 

‘살인은 악이다’와 같은 몇 가지 도덕적 판단은 앞에서 말한 확신감이 붙게 된 말이라고 보아도 좋다. 뿐만 아니라 그런 도덕적 판단들은 대부분이 관례에 의하여 거의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예컨대 ‘살인’이라는 것은, 그 법적 정의야 무엇이든간에 일반인의 의식 속에는 ‘악하게 죽이는 행위’와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살인’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죽이는 행위’가 어째서 악한가 하는 원래의 문제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정의(定義) 그 자체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선․악, 의․불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감 또는 이른바 ‘자명성’이 그것을 결정할 수는 더욱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인공유산이나 합의에 의한 동성애에 대해서도 살인이 나쁘다고 확신하는 만큼, 강한 확신감을 가지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감은 인공유산이나 동성애에 대하여 다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윤리학 이론으로서의 직관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반론은 도덕의 기본 원리에 대한 추구가 너무나 조속히, 또 너무나 임의적인 시점에서 끝나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데이비드 로스와 같이 ‘특정한 기본적 의무는 자명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경우, 그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좋은 보기는 벌에 관한 것으로서, ‘규칙을 어긴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확실하다’는 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반대해 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예컨대 약속은 일반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데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자명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는 한, 그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과 같이 중요한 사회적 규칙이 하등 이유 없이 자명하다는 것을 어떻게 진심으로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약속을 지키는 따위의 의무가 자명한 것이라고 하면, 흑인은 피부색이 검기 때문에 차별 대우를 해야 한다든지, 세상에는 필요 이상의 적색이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든지, 도박은 자명하게 그릇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직관주의자들이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든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든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의 차별이나 도박에 관한 것들을 직관적으로 안다고 말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직관’으로 돌리게 되면 그것이 어째서 옳은가를 따지려는 노력이 너무도 임의적인 수준에서 멈추어 버리게 된다. 임의가 횡행하는 영역은 바로 ‘취향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 성립하는 영역이다. 직관주의자들 자신이 항상 도덕성은 비사적(非私的), 객관적인 것이라고 역설해 온 것에 비추어 보면, 임의나 취향이라는 것은 도덕성의 기초로서 매우 부적합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 참고사항: 공리(公理)와 정리((定理)

①공리(公理, axiom): 무증명 명제라고도 한다. 수학의 이론은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 이론에 있어서의 명제나 그 증명의 전제를 거슬러 올라가서 더듬어보면 그 이론에 있어서 처음부터 가정되어 있는 몇 개의 사항을 만나게 된다. 그것을 그 이론의 공리라 한다. 이를테면 보통의 기하학에 있어서는 직선, 평면의 기본적 성질, 평행선의 기본적인 성질 등을 공리로 삼는 일이 많다. 이들은 그 기하학의 범위 내에서는 증명하려 하지 않고 이들을 논리적인 출발점으로서 그 전체를 세운다. 공리라는 말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에 있어서의 공준, 공통 개념에 유래하나 그 이래 자주 기하학을 세우기 위한 전제 조건과 같이도 생각되어 왔다. 공리는 하나의 이론 체계를 세울 때의 기초로서, 현대의 수학은 모두 각각의 공리로부터 세워지고 있다

 

②정리(定理, theorem): 수학적으로 참인 명제(命題)를 말한다. 즉, 공리(公理)와 정의(定義)로부터 증명(證明)에 의해 정리가 유도되며, 이미 증명된 이들 정리와 공리 또는 정의를 추론(推論)의 근거로 하여 또 다른 정리가 옳다는 것을 확인한다.

 

*(90쪽)

직관주의가 도덕의 ‘객관성’ 또는 ‘간주관적(間主觀的)인 표준’을 확립하는 방법은 도덕적인 ‘성질’ 내지 ‘관계’가 누구든지 볼 수 있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방식으로는 도덕의 객관성이 확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내적인 눈으로 비자연적인 성질 내지 관계를 본다는 설명은 표준적 조건이 무엇이며 정상적 관찰자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

 

직관주의자들이 언제나 강조해 온 바에 의하면 ‘보는 것’의 궁극적인 경험은 사태나 활동에 관하여 사심 없이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는 사색인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직관’이라는 것은 그 이상의 추론이 불가능한, 추론의 기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보아 그 안다는 사실이 진(眞)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아는 사람이 그것이 진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쓰이며, 그와 동시에 보통 ‘안다’는 말에 따라오는 또 하나의 조건(즉, 그것을 확신할 근거가 있다는 것)을 철회하고 그 조건이 이미 명백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에 쓰인다. 이런 식으로 하여 직관주의는 이유(reason, 이성)와의 관련을 계속 강조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덕의 기초를 비임의적인(객관적인) 원리에서 찾으려고 하는 노력을 너무 일찍 포기해 버린다.

 

<참고 자료>

 

첨부파일 칸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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