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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자료

(도덕발달) 맹교의 문제

작성자김원중|작성시간11.03.23|조회수249 목록 댓글 0

맹교(盲敎)의 문제

 

(盲敎는 영어 단어 indoctrination을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사람에 따라 ‘주입’, ‘세뇌’, ‘교화(敎化)’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교수 활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의 기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느냐, 즉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느냐, 혹은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덜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느냐의 물음이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르쳐야 할 것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있느냐에 관련된 기준이다. 즉, 전자는 내용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내용의 부적합성과 방법의 비효율성은 모두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여기서는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관련된 도덕적 문제의 하나인 맹교의 개념과 도덕 교육의 문제들을 밝혀보고자 한다.

 

맹교의 개념은 구구하게 설명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진리가 아닌 허위를 가르치는 것을 가리켜 맹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비록 진리를 가르치되 그것이 진리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수용하게 할 때 그것을 가리켜 맹교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명제도 그것이 진리라는 절대적 확신을 줄 오류 없는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어떤 명제를 진리라고 믿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에 불과한 것이지 절대적으로 진리라는 보장을 할 수는 결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중에 허위를 때때로 가르치고 거짓 증거를 제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맹교를 진리 여부, 증거 제시의 여하로 설명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허위를 가르치거나 증거를 은폐시킬 때 그것을 가리켜 맹교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맹교의 문제를 엄격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교사가 K라는 명제를 진리로 믿고 가르친다고 하자. 이때 교사는 K를 진리라고 믿고 있으나, K가 진리 아닌데도 불구하고 진리로 믿고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그 교사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을 수도 있다. 존 윌슨(John Wilson)에 의하면,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양 가르치는 것은 맹교이다. 그러나 누가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허위가 아니라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누가 맹교를 범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윌슨도 진리의 절대적인 인식가능성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윌슨이 진리라고 한 것은 확실성을 뜻하고, 그 확실성은 객관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방법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에 뒷받침되는 것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객관성이란 주어진 명제에 관여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의 성원들 각각의 주관이 공감하는 것, 즉 공통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뜻한다. 윌슨은, 그 명제가 이와 같은 의미의 객관성에 의해서 성립되는 확실성이 보장되는 만큼의 진리라면, 그것을 어떻게 가르치든지 간에 맹교는 아니라고 하였다. 교사는 적어도 허위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맹교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맹교는 진위의 문제이다. 윌슨은 그것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는 관심이 없었다. 방법의 문제는 효율성의 문제는 되어도 맹교의 문제는 아니라고 믿는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은 그것의 확실성 또는 진리성을 영원히 유지하지 못한다. 오늘의 진리는 내일의 허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교사는 원하지 않는 맹교를 불가피하게 범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의미의 맹교를 물리치고자 한다면 교육은 불가능하게 된다. 윌슨은 진리의 여부를 당대 사회의 객관적인 지식에 비추어서 가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사를 포함한 많은 당대인들이 모든 지식이나 주장에 대하여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맹교는 오히려 교사의 주관적이며 양심적인 판단에 비추어, 객관적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행위에 적용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교사는 K를 확실성의 증거에 근거하여 진리로 믿으나, 그것이 진리임을 뒷받침하는 증거와 방법적 과정을 함께 가르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증거와 방법적 과정을 함께 가르치지 않고 어떤 명제를 진리로 믿게 하는 것이 맹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떤 명제를 알도록 한다는 것은 명제의 진술 그 자체를 알고 이를 암기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증거와 방법적 과정을 함께 알도록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지식 교육의 중요한 원리에 속한다. 물론, 이때의 증거란 타당한 증거를 뜻한다. 만약에 교사가 타당하지 못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K라는 명제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진술 자체를 단순히 암기시키는 것보다 더 비교육적일 수도 있다.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할 때, 거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교사가 증거를 알지 못할 경우이고, 또 하나는 증거를 알고도 제시하지 않을 경우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학생이 증거 혹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경우이다. 첫째의 경우는 교사의 능력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 삼을 성질의 것이 못되고, 둘째의 경우에는 교사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윌슨의 생각대로 비난받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앗트킨슨(R. F. Atkinson)에 의하면, 그 어느 것이나 맹교에 해당한다. 그런데 세 번째의 경우에, 예컨대 갑돌이는 퓨즈가 끊어졌을 때 납의 철사로써 연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왜 납의 철사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모르며 갑돌이의 지적 수준으로는 그것을 배워도 알 수가 없다면, 거기에는 부득이 맹교가 불가피하게 된다. 초등학교 아동을 상대로 교육할 때, 교사는 지적으로 미성숙한 아동들에게 증거를 가르칠 수 없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왜 사계절이 생기느냐?’, ‘지구는 언제 생겼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에다 아동의 지속적인 질문 ‘왜?’라고 묻는다면, 아무도 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에서의 어려움은 교사도 과학자도 그 답을 알지 못하는 데도 있지만, 비록 안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아동이 알 수 있도록 설명할 길이 없을 수도 있다. 거기에다 사회의 도덕적 문제가 관련되어 있으면 증거 제시를 교사는 기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컨대, 어린이들의 성에 관한 질문은 그 한 예이다. 앗트킨슨의 맹교는 이와 같은 경우에 불가피한 것이 된다.

 

만약에 교사가 K를 진리로 믿지 않으면서, 어떤 확실성의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증을 알고 있으면서, 그것이 진리이며 확실성이 있는 것인 양 가르치는 수가 있다면, 이 경우는 교사가 도덕적으로 잘못 무장되었거나 자신의 교육관이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극적으로 교사가 증거 제시를 기피하든, 적극적으로 위장된 증거를 제시하든 간에, 그가 의도적으로 허위를 가르칠 수도 있다. 이것이 아마 가장 비도덕적인 맹교의 개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어(R. M. Hare)에 의하면, 도덕 교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학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성장을 의도적으로 중지시키려고 할 때 맹교가 적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도 문제는 있다. 왜냐하면,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고자 하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인하여 그러한 능력의 성장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비교육적일 수 있다. 무능한 교사는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맹교를 범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맹교에 관한 여러 가지 관점을 검토하였지만, 거기에는 도덕적 문제와 교육적 문제가 함께 혼합되어 있다. 만약에 우리가 교육적인 효과는 교육원리 상의 문제로 제쳐두고, 도덕적인 것만 문제 삼는다면, 문제는 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잘 가르쳤느냐의 문제는 교육방법적 문제이며, 가르쳐져야 할 것이 가르쳐지고 있느냐는 도덕적 문제의 대상이 된다. 맹교는 교육방법적 문제라기보다는 도덕적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가르쳐지지 말아야 할 것이 가르쳐지고 있을 때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며, 그 전형적인 것은 허위를 진리로 가르칠 경우이다. 이 말은 진리는 진리로 가르치고, 허위는 허위로 가르치며, 어느 것이든 증거의 확실성만큼 확신시켜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맹교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을 때 적용되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용납된다는 말은 시대적-사회적 특수성과 더불어 논의될 수 있다.

 

* 출처: 도덕교육 (이돈희 저. 교육과학사) pp117∼122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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