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수업 자료

(도덕발달) 자유

작성자김원중|작성시간11.04.11|조회수288 목록 댓글 0

윤리학과 교육 (R.S. 피터즈 저. 이홍우 역. 교육과학사)

 

제 7 장 자유

 

* (185-186쪽)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명백히 해를 끼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요컨대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은 일단 당연한 가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데는 이유를 댈 필요가 없으나, 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데에는 항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구속이나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 (184쪽)

자유가 중요하다는 근거는 그것이 사람들의 이익을 증진시켜 준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자유는 가치 있는 활동의 기회를 최대한으로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주어지는 경우,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나쁜 것을 선택하고 그것에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보는 일이다. 여기서 부모나 교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다. 즉, 아이들의 결정이 확실히 그들의 이익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이 스스로 (즉,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어른이 보기에 명백하게 아이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머리 좋은 딸이 대학에 다니려고 하지 않고 나이 많은 놈팡이와 결혼하겠다고 우기는 경우에 부모의 딜레마가 바로 그것이다.

 

* (193-195쪽)

여기서 우리는 ‘지나친 자유는 자유를 없앤다.’는, 포퍼가 말한 소위 ‘자유의 파라독스’에 직면하게 된다. 무관심할 수도 없고 간섭이 거의 불가능하지도 않은 생활 영역에서, 만약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면, 그 때 벌어질 사태는 십중팔구 강자가 약자를 제멋대로 구속하는 사태일 것이다. 이런 생활 영역에서 개인들은 법과 여론에 의하여 임의적인 간섭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비로소 사실 상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역사가 가르쳐 주는 한 가지 입맛 쓴 교훈은 구속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구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개인이 어떤 영역에서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보다 덜 악질적이고 보다 평등한 구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구속은 자기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자기를 구속하기도 하는 것이다.

 

* (196쪽)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원대하고 효과적인 구속의 형태인 이 그들의 자유를 지켜주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와 동시에 법은 사람을 억압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국가는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될 수도 있고 마르크스가 말한 지배계급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찬동한 몇몇 정치철학자들이 그 침해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로서 ‘진정한 자유’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아동의 자유

* (202 - 204쪽)

교육 사태에 자유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교육 사태라는 것은, 거의 정의 상, 아동이 하고 싶어 하는 것에 구속이나 통제가 가해지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우선, 아동은 강제적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어 있으며, 이것부터가 자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아이들 중에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하는 아이도 있다. 그러나 법적 요구와 부모의 압력이 합세하여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학교에 다니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행위라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로, 일반적으로 학습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보면 교육 사태에는 법적 규제 같은 것이 반드시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각각 자기의 흥미에 따라, 자기의 학습 진도에 맞게 공부하라고 아무리 역설한다 하더라도, 좁은 장소에서 많은 아이들이 동시에 공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충분한 질서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 질서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아동의 연령과 수, 학습 내용,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 등에 달려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질서가 없이는 교실은 바벨탑처럼 소음과 혼란의 수라장이 되어버릴 것이며, 몇몇 아동들이 자유를 누리는 대신 나머지 아동들은 희생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래 가지고는 교육을 해낼 수 없다.

 

셋째로, 교육 사태라는 것은 본질 상 계획되고 통제된 환경이다. 물론, 교육에서는 아동들로 하여금 공부하는 동안에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흥미를 따르도록 하는 면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교육에서는 아동의 자발성과 자율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것 중에서 하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에게는 실험을 하도록 해야 하지만, 그 실험에는 칼이나 파라핀 용액 같은 위험한 재료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괴기 만화책이나 외설물은 학교 도서관 서가를 장식하지 않는다. 실험이라고 해도 성에 관한 실험은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통제된 조건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에 가해지는 일반적인 구속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속을 통하여 성인은, 비록 강력하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압력을 행사한다.

 

그럴 도리밖에 없다. 왜냐하면 교육자라면 아무도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그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교육자로서 그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한 부분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질적인 면이나 지속성의 면에서 변형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형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에 다소간 지속적인 구속을 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통제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가치 있는 교육 내용에 연결 지을 수는 있을 것이다. 예컨대, 배 만들기, 기타 만들기, 춤추기와 같은 활동에서, 아이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욕망과 관련지어 이해력, 기능, 가치 기준 등을 발달시킨다든지, 구안법(構案法, project method)에서와 같이, 아이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욕망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에 관계없이, 무엇인가 가치 있는 내용을 배우도록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많은 학생들은 그들에게 전혀 흥미가 없는 어떤 것에 관하여 글을 쓰도록 강요된 결과로 그것에 새로운 흥미를 갖게 된다. ....... 교사는, 보통의 사회 사태에서처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다른 사람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는 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에게 달려있는 문제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학교에서 이러한 자유방임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교사로서 마땅히 할 일을 포기하는 것이다. 애를 봐주는 사람이면 혹시 몰라도, 교사는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 없다.

 

* (204쪽)

학교에서 질서 유지는 ‘자유의 파라독스’가 적용되는 좋은 보기로서, 자유의 원리에 입각해서 그와 같은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한다. 즉, 권위자에 의하여 공평하게 부과되는 법적 규제가 없으면, 아이들은 각자가 하고 싶어 하는 바를 실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악동의 자의나 동류 집단 압력의 횡포에 지배된다. 진보적인 학교, 즉 정책적으로 교직원들이 정당하고 균등한 사회적 통제를 행사하기를 꺼리는 학교는 동류 집단의 압력과 이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내는 혹독한 규칙들이 횡행하는 곳으로 이름나 있다.

 

* (205쪽)

인간이 모여 사는 어느 사태에서나 마찬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 타고난 품위와 선의가 있다고 해서 어른이나 아이나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비현실적이다. 인간이 사실상 자유로운 것은 도덕률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가지 규칙들이 타인에게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지로 선택해야 할 것은 완전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과 완전히 구속을 받는 것,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 종류의 구속 중에서 어느 것을 받을 것인가에 있다. 자유의 관점에서 볼 때 임의적인 압력이나 무자비한 집단 압력에 짓밟힐 위험이 있는 자연 상태에 자신을 내맡기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자유를 제한함과 동시에 자기를 간섭하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도 제한하는 균등한 구속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 (206쪽)

그러나, 물론 구속이나 제약은 적을수록 좋은 것이며, 모든 규칙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규칙의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해지며 어떻게 시행되느냐 하는 것은 아이들의 연령, 학교의 크기, 기숙학교와 같은 폐쇄체제에 어느 정도 가까운가 등등, 여러 가지 상황적 조건에 달려 있다. 일반적인 원리들을 이와 같은 구체적인 시행 단계까지 끌어내리는 데는 그와 같은 많은 상황적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 (209쪽)

합리성은 권위주의와 허용의 중간을 걸어 나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부모나 교사가 권위에 대하여 합리적인 태도를 가지고 또 합리적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다.

 

◎ 교사의 자유

* (209쪽)

교사의 자유에 관한 문제는 주로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칠 권리논쟁점에 관한 자기 자신의 관점을 내어놓을 권리와 관련된다. 이 권리는 보통 이 그의 ‘자유론’에서 사용한 것과 비슷한 논지에 의하여 옹호된다. 즉, 사람들의 의견이 아무리 정통성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이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할 때 비로소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만약 정통적인 견해가 옳다면 그것과 대립되는 여러 가지 견해에 의하여 도전을 받음으로 해서 더욱 더 옳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통적인 견해가 그릇되다고 하면 그것에 대한 비판을 허용해 줄 때 비로소 그 그릇됨이 드러날 수 있다.

 

* (210쪽)

교사의 입장은 예컨대 일반 성인 대중을 대상으로 책을 출판한다든지 과학학술협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사람의 입장과는 다르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교사의 자유에 어떤 제한이 가해져야 하는가를 고찰해 보자.

 

밀은 그의 논문에서 ‘사고의 자유’와 ‘행위의 자유’를 구분하였다. 전자(사고의 자유)의 권리는 절대적임에 비하여, 후자(행위의 자유)의 권리는 타인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조건부로 주어진다.

 

* (211-214쪽)

의견을 표현하는 문제에 있어서의 교사의 위치는, 첫째로 교사는 교육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과, 둘째로 교사는 미숙한 아동을 다루기 때문에 특별한 책임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대단히 미묘하다.

 

대학 수준에서는 이 문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학 교수는 주로 여러 가지 형식의 진리탐구에 헌신하려는 확고부동한 태도를 가지고 있고,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진리탐구에 입문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교수들도 교수요목(敎授要目)과 시험에 의하여 어느 정도 규제를 받고 있으나 그 교수요목을 해석할 권리가 교수에게 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대학 교수의 주된 관심은 진리탐구이며 밀이 ‘사변적 의견’에 관하여 말한 내용은 교수들의 경우에는 아주 적절하게 적용된다. 교수들은 자기 전공분야의 논쟁점에 관한 자기 자신의 관점을 학생들에게 강력하게 제시하는 것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수들은 만약 학생들이 자기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또한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교수의 관점을 검토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고형식을 갖추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만약 학생들이 교수가 한 말에 대하여 논박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교수는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초․중등학교의 상황은 약간 다르다. 우선 초․중등학교의 교사들도 대학 교수들과 같이 그들이 가르치는 학문에 철저하게 헌신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지만, 교사는 대학 교수와는 달리 지식을 최첨단에서 발전시켜 나가는 일보다는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

 

교사가 일하고 있는 사태의 성격으로 보아, 교사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정당화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측면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대부분의 경우에 교사는 가르치고 있는 ‘사고의 형식’에 관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능한 설명자이다. 교사에게서 배우는 학생들은 동일한 문제에 관하여 다른 사람의 다른 관점을 들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둘째로, 고등학교 학생이라 하더라도 그 학생들은 ‘사고의 형식’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사고의 형식’에 담긴 방법은 아직까지 배우지 못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학생들은 교사가 말한 것을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는 적절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예컨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역사에 관한 경제학적 해석을 한 경우에 교사는 그의 해석을 논박하고 나서는 학생을 거의 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교사가 종교개혁을 순전히 프로테스탄트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면, 카톨릭교를 믿는 학생은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기분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조심성 있고 신중하고 유능한 교사라면 이와 같은 문제에 관하여 다른 해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교사의 관심은 학생들에게 자기 의견을 집어 넣어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교사의 기본적인 임무는 학생들에게 생각할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교사가 부처처럼 묵묵히 앉아 있어야 된다든지, 어떤 문제에 관한 견해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교사가 자기 의견을 명백히 제시하지 않더라도 학생들은 좌우간 교사가 지지하는 입장이 어떤 것인지 짐작해내는 것이 보통이다. 합리적인 교사라면 그의 태도는, 어느 편인가 하면, 어떤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은 자기가 우연히 그것을 옳다고 믿는다는 사실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태도이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그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믿건 다른 사람이 믿건 간에, 어떤 의견을 믿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교사는 어느 정도로는 그가 가르치고 있는 것에 관하여 권위가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교사로 임명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교사의 권위는 어떤 구체적인 문제에 관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견해의 ‘내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그러한 견해를 가지게 한 '사고의 형식'의 통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고의 형식’의 통달이야말로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내용이다. 교사는 마침내 학생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

 

실제적 의견에 있어서도 교사는 학생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기화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학생들에게 전시할 권리가 없다. 교사 중에는 채식주의자나 평화주의자도 있고 나체주의나 일부다처주의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도 있다. 교사의 관심은 학생들이 교사를 존경한다는 것을 기화로 그러한 입장들을 취하도록 개종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입장이 기초로 하고 있는 이유를 학생들이 알도록 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교사의 일은 가르치는 것이지 교화(敎化, indoctrination)하는 것이 아니다.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직시하도록 하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근거가 되는 근본 원리로 학생을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의 의견이 그 내용에 있어서 교사와 일치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별도의 문제이다.

.......

 

보다 일반적인 종교적, 정치적 의견에 관한 영역에서는 교사의 입장이 매우 명백하다. 교사는 어떤 종파의 선교사나 정당의 당원 모집관으로 고용된 것이 아니다. 교사의 임무는 민주국가에 사적(私的)으로 참여하며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필요한 기술, 태도, 지식을 갖추도록 학생들을 입문시키는 것이다.

 

* (215-216쪽)

학교 밖 사생활에 있어서는 교사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해도 좋다. 즉, 그의 활동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법률이나 여론에 따라야 한다. 교사라고 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누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교사도 여러 가지 일에 관하여 좀 색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교사도 비정통적인 정당과 종교 단체에 가입할 수 있다. 교사도, 밀의 용어로, 이상야릇한 ‘생의 실험’을 즐길 수 있다. 교사로서 그의 직분을 왜곡시킨다거나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민주사회에서 행정당국이 이와 같은 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어떤 교사가 자기의 여가를 이용하여, 동성애 집단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어느 협회에 가입하였다고 하자. 그러면 학부모와 분개한 시민들이 작당하여 그 교사를 타락의 근원으로 보고, 그 교사의 파면을 선동할 것이다. 또, 술을 지나치게 먹거나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교사에 대해서는 교사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떨어진다든가 학생들이 그의 행동 때문에 타락될 것이라는 여론이 나돌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락과 자질 저하의 구체적인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약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 교사의 지위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 학부모의 자유

* (217-218쪽)

부모가 자기 아이들을 자기 뜻대로 교육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영국 국민이 가장 오랫동안 누려온 권리 중의 하나이다.

......

물론 이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의무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있어 왔다. 의무 교육을 한다는 것은 부모가 자기의 자녀를 교육시키지 않을 재량권을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자유의 침해이다. 그러나 이 면에서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독(讀)․서(書)․산(算)의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든지 상당수의 사람들이 고도의 전문화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있지 않으면 고도 산업사회는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개인에게 어느 정도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도록 강요하지 않으면, 그 개인은 훌륭한 교육체제에서 전수되는, 그 사회에서의 풍부한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자유의 제한은 국가사회의 이익이라는 측면과 그 사회를 구성할 개인의 장기적인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요한 문제가 순전히 부모의 건전한 상식에만 맡겨질 수는 없는 것이다.

 

* (218-219쪽)

공교육이 발달한 이후, 자녀교육에 있어서의 학부모의 권리는, 만약 학부모가 돈을 들일 용의가 있다면, 자기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게 되었다.

......

민주사회에서 사는 사람 치고, 학부모가 자기의 마음대로 자녀를 교육한다는 이 자명한 권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여유 있는 부모가 그들의 권리행사를 고집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일류 사립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의 질이 대단히 훌륭하다는 데 있다. ....... 사립학교 중에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대단히 훌륭한 학교가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런 학교는 오랜 경험과 시행착오 끝에 인격 수련과 학업 성취를 성공적으로 조화시키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학교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육 실험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고, 국가는 이 사립학교의 모범적인 예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와 같이 영국 교육의 질적 향상에 많은 공헌을 해왔고 또 현재에도 하고 있는 교육체제를 없애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범죄라고 할 만큼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정말로 물의를 일으켜야 할 점은 주요 정당과 공공기관이 지난날 교육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국가 전체적으로 적절한 교사 봉급과 학교 지원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도 입으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지만, 막상 참으로 효과적이고 공정한 교육체제를 발전시킬 돈을 내는 단계에 와서는 언제나 교육보다는 다른 부문이 훨씬 긴급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사태에 대한 재무성의 해명은 뻔한 것이다. 즉, 국가 공교육의 근본적인 개선은 돈 많고 영향력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공립학교에 보내게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그 논쟁은 여러 가지 근본 원리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를 가장 잘 예시하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뜻대로 자기의 아이들을 교육시킬 부모의 권리가 전적으로 무시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종의 절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절충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은 정책 입안자들의 지혜와 판단에 달려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