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에서 사도로』 2026. 6. 7
마태복음 9:9-12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들어가며
제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제가 노숙자 쉼터 ‘벧엘의 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 21살짜리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21살짜리가 왜 노숙을 할까요? 거제도에 살고 있던 그 친구는 아버지와 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엄청난 주정꾼이었습니다. 술 마시느라 아이들을 고등학교도 안 보냈고 그 친구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술 먹고 자기와 동생을 하도 때려서 지능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한참 꿈을 꾸고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술 취한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지능이 떨어지고 아버지를 피해서 대전역으로 나와 노숙한다는 상황이 납득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 더 관심 갖고 사랑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무조건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구청에 사정사정해서 공공근로를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친구도 열심히 일했고 통장에 돈도 제법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하루는 사무실로 오더니 “실장님 오만 원만 인출 해주세요.” 그러는 겁니다. 그때 당시에는 저는 실장님이라고 불렸습니다. 돈이 왜 필요한지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물어도 대답을 안합니다. 그때 저는 자활해야 하는 아저씨들이 돈을 조금 모으면 가지고 나가서 한방에 다 써버리고 다시 대전역으로 돌아가는 모습 때문에 굉장히 실망했을 때입니다. ‘이 아저씨는 조금 다르겠지.’ 기대했는데 여지없이 술 바람이 불면 무너지는 겁니다. ‘이 아저씨는 자활할 수 있겠지’ 희망을 걸면 또 술 바람이 발동이 걸려서 대전역으로 가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잃어가고 있을 때 마침 이 친구가 아무 이유도 없이 오만 원을 달라고 하길래 “너도 똑같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통장에서 돈을 찾아 주었습니다. 저녁이 되었는데 그 친구가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검은색 봉지 하나를 건넵니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제게 “실장님 졸업 축하드려요.” 이 녀석이 제 대학교 졸업식을 어떻게 알고 대전 중앙시장에 가서 넥타이를 하나 사 왔습니다. 그 순간 고맙기도 하지만 얼마나 그 친구에게 미안하고 창피한지 저도 얼굴이 빨개져서 “오해해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대전 중앙시장에서 사 온 넥타이가 멋질까요? 촌스러울까요? 한번은 동기 모임에 갔는데 저마다 멋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 넥타이를 보더니 친구들이 하나같이 넥타이가 그게 뭐냐고 놀리는 겁니다. 그때 제가 친구들에게 진짜 멋진 말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멋으로 넥타이를 매지만, 나는 사랑으로 넥타이를 매. 이 넥타이 누가 선물한 줄 알아?” 정말로 그 넥타이를 맬 때마다 저는 넥타이에 손을 얹고 그 친구를 위해서 마음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 친구에게 참 미안해요. 그리고 아직도 창피합니다. 전에 제가 설교 시간에 했던 말인데 인디언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그 사람이 걸었던 길을 한 달 이상 걸어보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하지 마라.” 저는 그 말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혹 우리 중에 저처럼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창피한 일을 겪으신 분들 계시죠? 그때 미숙했던 나를 생각하면서 함께 말씀을 나누면 귀한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 9-10절 말씀 같이 보시겠습니다.
2. 나는 어느 쪽입니까?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세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혐오하고 증오하던 대상이었습니다. 동냥하던 맹인들도 자신에게 적선하는 이가 세리라는 사실을 알면 자기 동냥 그릇을 엎어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특히 예수를 만난 세리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가슴을 쳐요. 예수의 복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고 자복합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를 보면 바리새인은 성전, 가장 정중앙에서 두 손을 들고 다른 이들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하나님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철저하게 십의 일을 드리며 특히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누가복음 7장 36절 이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께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않고 머리에 기름을 붓지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여리고의 세리장이 삭게오는 주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셨을 때 자신이 직접 주님의 시중을 듭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간 세리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죄 씻음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가슴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귀한 은혜 첫 번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너무나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 삶이 세리였던지, 바리새인이었든지 지금까지 내 삶의 자리가 존경과 인정의 자리였건, 비난과 조롱의 자리였건, 예수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내가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통회 자복하면서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는 선하고 바르고 이만하면 되었지!’ 우월의식과 교만 속에 사로잡혀 있는지 나는 어느 쪽입니까?
지난 수요기도회 시간 나발과 다윗에 관련돼서 함께 말씀을 나눌 때 저는 마지막 멘트는 이랬습니다. “혹시 내가 부요할 때, 힘이 있을 때 나발처럼 교만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내가 다윗처럼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거나 공든 탑을 무너뜨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지금 이 순간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고백,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고백은 “하나님 제가 나발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윗처럼 분노와 불평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이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이 바리새인처럼 율법에 정통하지 못해도 사두개인처럼 전문적인 종교인은 아니더라도 그 누구보다 예배를 통해 회개의 눈물을 흘릴 줄 알고 예배를 통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그런 믿음 가지고 11절 말씀 같이 보시겠습니다.
3. 바리새인은 왜 믿지 못했나?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두 번째 바래새인들은 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믿지 못했을까요?
지금 세리 마태의 집에 앉아 계신 예수가 탐탁지 않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세리는 정죄 받아야 합니다. 11절에 나오는 죄인들은 요? 특히 그 당시에는 중한 병에 걸린 자들은 하나님께 저주받거나 심판받은 자들이라고 규정되었습니다. 그들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자업자득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의 영은 회복시켜 주시고 그들의 육은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가정마다 문제가 풀리고 열리며 형통하고 흥왕하는 복을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화가 나는 이유는 율법에 의하면 그들은 당연히 아파야 하고 힘들어야 하고 주저앉아야 하는데 왜 주님은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안아주시고 치유하여 주시고 다시 일으키시냐는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면 죽은 줄 알았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무 기쁜 마음에 자신의 가락지를 끼워지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입혀주고 자기 신을 아들에게 벗어줍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온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잔치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아버지 말씀을 듣지 않고 집 밖에서 배회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죠?
“저는 지금까지 아버지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탕진하고 온 저 아들을 위해 겉옷을 벗고 가락지를 끼워주셨다고요? 저를 위해서는 친구들과 나누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시지 않더니 저 탕자를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다고요. 아버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때 아버지께서 큰아들의 손을 잡고 하시는 말씀이 “둘째는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아들이고 얘 지금 내 모든 것이 너의 것이잖니?”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이유,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나를 위해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축복을 잊어버리고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오후 찬양예배 때 찬양단과 함께 불렀던 찬양 중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라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찬양 가사를 보면 “나는 아흔 아홉 마리 양 같아서 무리 중에 숨어 사랑하는 척 살았죠.” 저는 그 가사를 듣고 소름이 돋는 것 같았습니다. 99마리의 양 속에 숨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믿음이 좋은 척, 말씀대로 사는 척 그런데 지금도 어린양 한 마리를 찾고 계신 주님을 향해 어쩌면 서운한 마음을 가졌던 첫째 아들처럼, 바리새인들처럼 “왜 어린 양만 소중히 여기시냐고 주님은 99마리의 양이 보이지 않으시냐”라고 우리 서운해하고 잊지 않습니까? 그러는 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서운함 때문에 내 마음에 싹튼 작은 원망과 불평 때문에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께 잃어버린 어린 양이었을 때, 내가 사탄, 마귀의 종 노릇하느라 절망과 저주와 어둠 아래 신음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내가 구원 받았음을 깨달았을 때 그때 느꼈던 감격과 감사와 감동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신 그 감격, 감동, 감사가 내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까? 우리 안에 이 마음이 회복될 때 지금 세리와 같은 이들, 지금 둘째 아들과 같은 이들을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마지막으로 12절 말씀 같이 보시겠습니다.
4. 세리에서 사도로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지막 세 번째 오늘 말씀 속에 나오는 세리 마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리에서 사도로” 우리 같이 해볼까요? “세리에서 사도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마태복음은 누가 썼죠? 오늘 말씀의 주인공 세리 마태입니다. 마태가 오늘 말씀을 기록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착복해서 호의호식하던 자기가, 다른 이웃들이 뭐라고 해도 다른 이웃들이 피눈물을 흘리든 말든 자신은 토색하고 착복해서 떵떵거리며 살던 자기가 예수를 만나서 불의하게 모은 제물을 예수의 복음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리며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때 받은 은혜를 잃어버렸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바리새인처럼 다른 이를 정죄하고 사두개인처럼 그저 전문적인 종교인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왜 어린 양을 찾으시냐고 왜 그 아들을 거두시냐고 불만을 갖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지금 내 신앙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나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인물 중 누구를 닮았습니까? 그러나 정말 중요한 진리는 뭐죠?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결단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의 가슴이 아직도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감격, 처음 교회 나왔던 때 말고, 정말로 주님을 영접했을 때 흘렸던 눈물, 그 뜨거움을 가지고 지금도 세리 마태와 같은 자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복음에 의하여, 복음의 삶을 살아가시길, 그 길이 참 축복의 길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 위에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