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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이야기

고대 황궁의 정전, 왜 금란전이라고 할까?

작성자원명|작성시간12.05.30|조회수360 목록 댓글 0

고대 황궁의 정전, 왜 금란전이라고 할까?

 

北京 故宮은 紫禁城이라고도 불린다. 明淸 두 王朝에 걸친 皇宮인 紫禁城은 北京 시내 중심에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궁전으로 구성돼,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완벽하고 오래된 고대 건축물 중 하나다. 故宮이란 舊 왕조의 궁전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축물은 太和殿, 中和殿, 保和殿 등 3대전이다.

 

자금성은 明나라 永樂영락(1402~1424) 연간에 건축됐는데 당시에는 正殿을 ‘奉天殿’이라 했다. 그러다 嘉靖가정(1521~1567) 연간에 重建한 후 ‘皇極殿’으로 改名했고 淸나라 때는 다시 ‘太和殿’으로 고쳤다. 흔히 金鑾殿이라 불린 太和殿은 3대전 중 으뜸이고 明淸 兩代에 걸쳐 황제의 등극식을 거행하던 곳이었다.

 

그렇다면 왜 고대 황궁의 正殿을 ‘金鑾殿’이라 부르게 됐을까?

 

고대 민간에서는 황제가 천하에 詔令하는 곳을 金鑾殿이라 불렀다. 그러나 金鑾殿은 원래 唐나라 大明宮에서 유래한 말이다. 송나라 때 문인 沈括심괄이 쓴 '夢溪筆談몽계필담'에는 “唐나라 때는 翰林院이 궁궐 안에 있었으니 곧 황제가 거처하는 곳이다. 玉堂, 承明, 金鑾殿은 모두 그 사이에 있다”고 했다.

 

唐나라 수도 長安에는 太極宮, 大明宮, 興慶宮 등 3대 궁전이 있었다. 이중 大明宮은 중국 역대 왕조의 궁전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

 

大明宮은 3개의 구역으로 나뉘고, 각 구역마다 또 前朝와 內庭으로 구분됐다. 前朝는 다시 外朝와 中朝로 나뉘는데, 外朝에 大明宮에서 가장 큰 대전인 含元殿이 있어 중요한 국가행사가 열렸다. 또, 中朝는 宣政殿을 주체로 해 황제가 일상적으로 신하들을 만나 조회하던 곳이었다. 中書省, 門下省, 禦史臺, 文館, 史館 등 조정의 중요 기구들이 여기 있었다.

 

大明宮에는 이런 주축이 되는 건물 외에 別殿과 亭閣, 樓觀 등 30여 채가 동서 양측에 분포돼 있었다. 남쪽의 반은 조정의 영역이요 북쪽 반은 생활영역이었는데, 북쪽에 太液池라는 호수를 둘러싸고 호화로운 궁전누각들이 들어서 황궁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았다.

 

金鑾殿은 이곳에 있었다. 太液池를 경계로 동쪽 구역에는 珠鏡殿, 蓬萊殿, 大角觀, 清思殿, 浴堂, 淩綺 등 황제와 后妃들의 생활공간이 있었고, 서쪽 구역에 麟德殿, 翰林院, 金鑾殿, 仙居殿, 長安殿 등 황제가 宴會를 베풀던 곳이 있었다.

 

金鑾殿은 皇宮 내 중요 전각도 아니요 황제가 매일 정사를 돌보던 곳도 아니었다. 하지만 文人이나 學士 등이 황제의 詔命에 응하기 위해 기다리던 곳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 唐나라 시인 李白(701~762)은  玄宗(685~762) 때 翰林院 供奉으로 있으면서 자주 金鑾殿을 드나들며 황제를 만났고, 사람들은 金鑾殿과 翰林院이 인접했기에 翰林學士를 높여 ‘金鑾’이라 부르기도 했다.

 

宋나라 때 와서도 唐 제도를 踏襲해 京城에 金鑾殿을 만들었다. 唐宋시기 수많은 文人雅士들은 자신들의 작품에서 황궁의 正殿을 金鑾殿이라 표현했고, 민간의 전통연극이나 소설도 이를 踏襲했다. 현대에 와서도 紫禁城의 正殿인 太和殿은 속칭 金鑾殿으로 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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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씬위(心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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