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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를 교화시킨 대전선사(大顛禪師)
작자: 육문(陸文) 정리
【정견망】
당나라 대전보통선사(大顛寶通禪師)는 광동 조양(廣東潮陽) 진씨(陳氏) 집안에서 태어났고 약산(藥山) 유엄(惟儼)선사 및 혜조(惠照)선사와 더불어 계를 받은 후 남악(南嶽)으로 가서 석두 희천선사(石頭希遷禪師)를 참배하고 두려움 없는 큰 법을 얻었다.
당나라 정원(貞元) 초년 나부(羅浮)산에 들어갔고 조양(潮陽)에 이르러 우암(牛岩)과 영산(靈山) 등의 도량을 열었다. 대사가 조주에 거주할 때 당대 최고의 문호 한퇴지(韓退之 당송팔대가의 으뜸으로 꼽히는 한유를 말한다)를 설복시켰다. 나중에 한유는 대전선사에게 도를 묻고 옷을 남겨 존경을 표했다. 이는 천고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고 대전선사 역시 이 일화때문에 당대는 물론 후세까지 이름을 남겼다.
1. 한유가 한직으로 쫓겨난 이유
당 헌종(憲宗) 원화(元和) 13년 형부시랑(刑部侍郎)으로 있던 한유는 석가세존의 사리를 맞이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황제는 “네가 짐에게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한시대 부처님을 모신 이래 천자가 모두 천수가 짧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건 괴이하다. 임금의 신하된 자로서 어찌 이런 망언을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도부수(刀斧手)에게 “오문(午門) 밖으로 끌어내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다행히 배도(裴度), 최군(崔群) 두 재상이 나서고 백관들이 간청해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에 한유에게 “조주 자사로 쫓아내 조정에서 더는 짐을 노하지 못하게 하라.”는 성지가 내려왔다.
한유가 조주로 내려갈 때 길에서 그의 조카 한상을 만나 그의 무한한 감촉을 받았으며 한수의 시를 지어 주었다.
하루 아침에 구중천 조정에 올랐다가
저녁에 폄적당해 조양 팔천리 귀양길이구나
본래 조정을 위해 폐단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는데
늙고 쇠잔한 몸 어찌 말년이 애석하지 않은가
구름 걸린 준령에 서니 고향은 어디인가
눈이 남관을 막아 말이 나아가지 못하는데
네가 멀리서 온 뜻이 있을 터이니
이 강가에서 나의 뼈를 잘 수습해 다오
一封朝奏九重天
夕貶朝陽路八千
本爲聖朝除弊政
敢將衰朽惜殘年
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
知汝遠來應有意
好收吾骨瘴江邊
2. 대전화상과의 첫만남
원화 14년 한유는 조주에 도착한 후 조정에 표를 올려 동쪽 태산에 봉해달라고 했으나 오랫동안 답을 얻지 못했다. 때문에 우울하고 즐겁지 못했으며 한가하며 적막했다. 그래서 산과 바다에서 경치를 구경하며 다녔다.
어느 날 한유가 영산을 올랐다가 대전선사를 만났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됐다.
대전선사는 “당신은 직언으로 황제의 뜻을 거슬러 이곳까지 오셨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한유는 “그렇습니다. 내가 조정에서 형부시랑으로 있을 때 황제께서 부처님 사리를 영접하는 것을 제지하다가 전염병이 많이 도는 이곳으로 축출 당했습니다. 올 때 험한 산을 넘고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오는 도중 광릉묘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천우신조로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병이 많고 지금은 더욱이 백발에다 치아도 흔들리는데 이곳의 기후와 독충들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그러니 이곳에 온 후 글을 올려 황상께 태산 군수로 봉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휴!”
대전선사는 한유의 처량한 읍소를 듣고 세상에서 존경받던 문인학사에 대해 동정은커녕 반대로 그를 힐문했다.
“듣자하니 신하된 사람은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명예와 지위를 중시하지 않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요. 오늘 당신이 어려움을 당하고 괴로워하며 시대에 영합하여 명예를 구하니 이는 신하된 도리가 아닙니다! 하물며 황상에게 직언하여 건드리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며 도리에 맞는 일을 했는데 또 무얼 원망한단 말씀입니까? 당실은 천보의 난 이래로 간신배들이 나라를 혼란케 하고 황상은 그 때문에 겨를이 없소이다. 신하가 된 자는 이왕 내란을 평정하여 나라를 안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아직도 마음을 움직여 황상을 노여움을 건드리고 아직도 상소를 올려 태산에 봉해달라고 하니 어찌 자기 임무를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곤궁함으로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귀신에 제사지내면 그건 명을 모르는 것이요, 천하 인심을 움직이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고는 의지가 없다면 인자한 것이 아니며, 강한 말로 황상을 노하게 하면 곤란함을 당해 근심을 하는 것은 의를 모르는 것이며, 난으로 다스리면 황상에게 알리면 예를 모르는 것입니다.”
대전선사의 추상같은 비평에 옛날의 한유라면 진작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병이 도는 이런 지방에서 처해있는 그로서는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대전선사는 더 나아가 이렇게 물었다. “
당신이 이왕 상소를 올려 부처님 사리를 맞이하는 것을 저지하며 황상이 불교를 신봉하는 것을 반대했으니 반드시 불교에 대한 이해가 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반대했을게 아닙니까?”
3.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다
한유는 불교라는 말을 듣지 곧 화가 났다. 그는 선사의 면전에서 즉시 흥분하여 불교를 욕하기 시작했다.
“당신들 불교는 선왕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윤회생사의 법을 함부로 말합니다. 몸은 예의를 지키지 않고 인과응보의 설을 지어서 전합니다. 또 군신의 예의도 없으며 부자유친도 모르고 경작하지도 않으며 베로 옷을 짜지도 않고 선왕의 도를 해치니 이 한유가 어찌 가만히 있겠소?”
이렇게 대전선사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고지식한 이 학자를 설복시키지 않으면 나중에 더욱 미친 듯이 반대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선사는 한유에게 물었다.
“당신이 불교가 선왕의 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을 하는데 불경 어디에 그렇게 되어 있는지 보았소이까?”
한유 “내가 어디 시간이 있어 그런 경서를 보겠소?”
대전선사는 그가 불경을 하나도 보지 않은 채 대담하게 비판하는 것을 알고 정말 유치하여 웃었다. 그래서 선사는 한유에게 말했다.
“당신은 순임금의 개가 요임금에게 짖는다는 말을 알지요! 순이 개를 한 마리 기르는데 요가 그 집 문 앞을 지나가자 개가 짖었다는 거요. 개는 요임금을 알아보지 못할 뿐 요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요. 오늘 당신이 불경을 보지 않고 이치를 알지 못하며 함부로 비판하는 바로 순의 개와 뭐가 다르겠소?”
선사는 우스갯소리처럼 했지만 한유는 이치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선사의 비유에 대해 비록 듣기 괴로웠지만 맞는 말임을 알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4. 자신의 한계를 알다
선사는 또 물었다.
“오늘 당신은 당나라 황실의 큰 학자로서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소. 하지만 당신의 문장이 라습 법사에 비할 수 있소? 오고 갈 것을 미리 알기를 진나라의 불도징에 비할수 있 소 ?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기를 소량 시대의 지공(志公)선사처럼 할 수 있소?
한유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 “내가 그들만 못합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당신은 그들보다 못하면서 그들이 신봉한 불학을 반대하니 어찌 지혜 있는 사람의 행동이겠습니까? 오늘 당신은 조그마한 이익 속에 빠져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우울하고 조급해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다면 벌레가 더러운 물속에서 다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대전선사의 이 훈계에 한유는 정말 크게 기가 꺾였고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선사를 바라보면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한유가 “말씀 다 끝나셨습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당신께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당신이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지 말에 그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유가 또 물었다. “아직도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선사는 “당신의 욕심을 제거하고 마음을 성실히 하고 정신을 편안히 하며 천성을 다하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며 하늘의 명을 다한 다음 다시 오면 불법의 지극한 이치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5. 제자
한번은 한유가 대전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제자는 군대와 주의 사무가 바쁩니다. 불법의 요처를 듣고 싶으니 한번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선사는 선상(禪床)에 다리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한유의 말을 듣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때 선사의 제자 중 삼평(三平)이라는 사람이 옆에 서 있다가 상을 세 번 두드렸다.
선사가 삼평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삼평이 말했다. “먼저 선정으로 움직인 후에 지혜로써 뽑아내십시오(先以定動,後以智拔)”(뜻은 선사가 가부좌 한 후 다시 가르침을 베풀어 한유를 깨우쳐 달라는 뜻)
한유가 말했다.
“스님의 풍격은 높고 험한데 제자인 저는 옆에 서서 가르침을 다시 얻어 불문(佛門)에 들고 싶습니다.”
나중에 한유가 원주(袁州)자사로 발령받아 갈 때 대전선사를 찾아가 작별을 하고 승복 두 벌을 보시하며 물었다.
“제가 곧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떠나기 전에 한말씀 얻어 들을 수 있다면 행운이겠습니다.”
대전선사가 말했다. “남의 말을 듣고 쉽게 믿는 사람은 쉽게 말을 바꾸며 남을 잘 칭찬하는 사람은 비방도 잘 합니다. 그대가 내 말을 듣고 쉽게 믿으니 어찌 또 이단의 말을 듣고 내 말이 틀리다고 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다시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한유가 원주(袁州)에 도착한 후 상서 맹간(孟簡)이 한유와 선사가 같이 다닌 일을 알고 한유에게 편지를 주어 계속 부처 수행을 하라고 권했다. 한유는 회신하는 답에서 이렇게 썼다. “대전선사의 총명하고 지혜가 높아 ... ... 사물에 구속을 받지 않으므로 저는 달갑게 가르침을 받고 그와 돌아오고 싶습니다.”
황산곡이 말했다.
“한유가 대전 선사를 만난 후 그의 글이나 인간의 정리에서는 불교를 배척하는 말을 볼 수 없었다.”
6. 기타: 불교 배척에 앞장섰던 구양수
일반인은 한유가 불교를 배척한 글이 파란을 일으킨 것을 알 뿐 그의 전철을 밟은 송대 구양수가 잘못된 것을 모른다. 몇 가지 뚜렷한 예가 있다.
구양수는 한유를 본받아 불교를 배척한 것이 한유에 버금간다. 가우(嘉佑) 년간에 서촉에서 온 용선생이 있었는데 그 말에 분노하여 한유의 언행이 불손한 점을 발췌해내어 조목조목 야단을 쳤는데 그 문장이 20 편이 되며 세상에 유행했다.
구양수가 그것을 보고 감탄했다. “이런 글은 비록 한유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읽은 후에 스스로 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구양수 만년에 역시 불경을 읽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이전에 불교를 심하게 비방하고 파괴했으므로 마침내 그 공이 잘못을 메꾸지 못해 악보를 깊이 받았다.
한유와 대전 선사의 일은 한자외전(韓子外傳)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싯구가 전한다.
대전 화상을 만난 후
문호는 필경 고개를 떨구었다
一見大顛和尚後
文豪畢竟也低頭
송나라 유학자 역시 이렇게 읊었다:
한유는 스스로 부자(夫子)라 일컬으며
원도에서 부처와 노자를 심하게 배척했건만
대전을 알아보지 못했다
몇권의 책을 진중히 하고 승복을 남겨놓았다네
宋儒亦曾詠詩道
退之自謂如夫子
原道深排佛老非
不識大顛何以似
數書珍重更留衣
(석자운이 저술한 <불문이기(佛門異記)>에서)
발표시간: 2013년 1월 11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16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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