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33.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막힐 것 없으니
[한 때 운문선사께서 법을 보이셨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막힐 것 없으니 성향미촉(聲香味觸)이 항상 삼매라네" 라는 구절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라는 향상일구를 들려 주시면서 한 말씀은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막힐 것 없으니”라고 하신 말씀은 견문각지란 “보고 듣고 깨달아 안다”라는 것이 다 있는 그대로가 맞다라고 들릴 것 같지만 그것은 진리적 측면에서 볼 때는 그 상이 무엇인가?라는 측면에서는 그 실체가 없다라는 것과는 불법에는 맞지 않다. 모든 상(相)은 빛의 화현이요 물질 또한 그 실체가 없는 환화공신(幻化空身)인 것이다.
그렇다면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 이것은 물질이라는 것이 그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즉 색즉시공(色卽是空)이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한다면 그것은 상에 속은 것이요 실체를 바로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 없는 것이다.
“성향미촉(聲香味觸)이 항상 삼매라네"라고 인식하기 슆지만 이 또한 바른 안목으로 바라 본다면 소리와 향기와 맛과 느낌이 오온이 그대로 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인데 어찌 이것을 삼매(三昧)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견문각지를 떠나서 그럼 별도의 깨달음이 있는냐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먼저 집접적으로 보고 느끼는 ‘당하지심(當下之心)’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 또는 즉각적인 마음가짐, 당장의 마음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게 보고 들은 것으로 깨달음으로 안다라는 견문각지는 무엇인가?라는 인식논에서 살펴 보아야 하기 때문에 아미산이 논술적으로 풀어 본 당하지심과 견문각지에 대하여 먼저 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하지심(當下之心)과 견문각지(見聞覺知)
‘당하지심(當下之心)’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 또는 즉각적인 마음가짐, 당장의 마음작용, 당장의 의식작용, 찰나의 마음 등의 여러 뜻을 가진 말이다. 번뇌나 욕심을 바로 멈추는 태도를 강조하는 불교⋅유교적 가르침이다.
부언하면, 당하지심은 지금 당장 번뇌나 욕심을 멈추고, 망설임 없이 실천하는 자세를 뜻한다. 예를 들어, <채근담(菜根譚)>에서는 “지금 멈추겠다고 하면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미루지 않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불교⋅유교 전통에서 당하지심은 일상에서 작은 실천이 쌓여 큰 변화를 이룬다는 교훈으로 자주 인용된다. 즉,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곧 수행과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의미이다. 번뇌나 욕심이 생길 때, 바로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당하지심의 실천 예다. 이는 미루지 않고, 우물쭈물 망설임 없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요약하면, 당하지심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실천하는 마음’을 뜻하며, 일상과 수행에서 즉각적인 태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개념이다.
육조 혜능(慧能, 638~713)대사의 선(禪) 특징인 자성불도(自成佛道), 자오자수(自悟自修), 돈오견성(頓悟見性)으로, 이들은 평민문화의 자립, 자력, 정신과 쾌속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고행에 찌든 기존의 불교수행을 직관적 감오(感悟)에 바탕 한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돈오성불(頓悟成佛)로 대체시켰다. 성불의 씨앗인 추상적이고 본체론적인 불성(佛性)을 인간의 천부적인 당하지심(當下之心)으로 현실화시켜 당하즉오(當下卽悟-당장의 즉각적인 깨달음)의 쉽고 빠른 다리를 놓은 것이다
조사선(祖師禪)은 마음(心)으로부터 사람(人)에 이르러, 지금 당장(當下)의 일거일동, 견문각지(見聞覺知)로써 자기 본래가 부처임을 체득함을 더욱 강조한다. 임운(任運)이란 ‘임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운(運)에 맡긴다[任]’는 말인데, 여기서 ‘운(運)’은 우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자연의 운행을 뜻한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그대로 행하되, 자연자재한 자신의 심신 전체 그대로가 부처인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불교에서 ‘자연적’이라고 하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남’을 뜻한다.
따라서 불교의 관점에서는 천지자연의 운행은 엄격한 인과법칙, 즉 연기법이라는 불변의 법이도리(法爾道理-법과 같은 도리)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임운(任運)은 인위적인 조작(造作) 없이 자연의 흐름대로, 법 스스로의 운동에 맡긴다는 뜻으로, 물 흐르고 바람 불듯 그렇게 자연과 하나 돼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조사선에서 주장하는 “임운자유(任運自然)”와 일반 사람들의 생활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대주 혜해(大珠慧海, 8~9세기) 선사의 법문에 이러한 문답이 있다.
원 율사(源律師)라는 이가 와서 대주(大珠) 선사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는 도를 닦음에 노력을 합니까?”
대주 선사가 말하기를, “노력한다.”
“어떻게 노력합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모든 사람이 전부 그렇게 하는데 스님의 노력과 같지 않습니까?”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그들은 밥 먹을 때 밥만 먹지 않고 백 가지로 분별하며, 잠잘 때 잠만 자지 않고 천 가지로 계교하니 따라서 다른 것이다.” 이에 원 율사가 입을 다물었다.
대주 혜해 선사는 우리들에게 닦음(修)과 닦지 않음(不修)의 차이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임운수행(任運修行)은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일상생활, 즉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말한다. 마음[心]이 객관 세계[대상]를 접촉하는 것을 총칭한다. 즉, 마음의 모든 인식활동 또는 인식기능을 총칭하는 말이다.
당하지심(當下之心) 가운데서 체현하는 것이다. 조사선에서 이른바 견문각지는 진여본성의 작용을 표현한 말이다.
『여기서 ‘각지(覺知)’는 ‘깨달아 안다’는 뜻이 아니라, ‘느끼고 안다’로 풀이해야 한다. 견문각지는 불교의 인식론(유식론)에서 나온 것으로 인식기능인 여섯 가지 인식(6識) 작용, ― 내지 여덟 가지 인식작용(8識)을 네 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피부(身), 마음(意)의 여섯 가지 인식기관이 있고, 이 기관들은 각각 고유의 인식기능이 있다. 그 기능의 작용을 보면, 눈은 보고(見), 귀는 듣고(聞), 코는 냄새를 맡으며(聞), 혀는 맛을 보고(覺), 피부(온 몸)는 촉감 등을 느끼고(覺), 마음은 앞의 다섯 가지를 통합하거나 고유의 기억작용 등과 연계해서 분별 판단하고 아는(知) 것이다.
다시 말해 견ㆍ문ㆍ각ㆍ지(見聞覺知)는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이 지닌 탁월한 모든 능력을 요약한 것이며, 그 작용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듣는다. 그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 숨어 있다.
분명 탁월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때부터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자신이 자신에게 속는 묘한 상황이 전개된다. 흔히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 우월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이 탁월한 인식능력을 왜 불교에서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인식능력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주인 노릇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분별’ 해서 아는 그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없다. ― 그만큼 감각이라는 게 부정확하다. ―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바로 갈등과 싸움으로 이어져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세상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전쟁도 그 시작은 단순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처님은 낱낱의 생각들이 절대적으로 영원히 옳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가르쳐 주셨다. 따라서 이미 일어난 그 생각에 절대적 가치를 두지 말고 치우침이 없는 중도적 지혜로 밝게 보라는 말이다. 중도적 지혜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생각이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번갯불 같은 것임을 밝게 봐야 한다.
한 생각이 일어나 끌려가기 시작하면 그림자처럼 고통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자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견문각지가 원래 너의 본성이며 또한 본심이다. 다시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부처가 없다.”
이것에 대해 황벽 희운(黃檗希運, ?~850) 선사 또한 해석하기를,
“다만 견문각지 그곳에서 본심을 깨달아라. 그러나 본심은 견문각지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견문각지 위에서 견해를 일으키지 말고, 또한 견문각지 위에서 생각을 움직이지 말라. 그리고 견문각지를 떠나서 마음을 찾지 말고 또한 견문각지를 버리고 법을 취하지 말라. 같이 있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으며즉 불즉불이(不卽不離)이며,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서 부주불착(不住不着), 종횡으로 자재하니 도량 아님이 없다.
일체 모든 법이 담연(湛然)하고 공적해 필경공(畢竟空)이요 필경정(畢竟淨)이다. 그러므로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본성, 본심의 작용이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불성은 비록 견문각지가 아니지만 그러나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를 닦는 사람은 견문각지 가운데서 그 성품이 본래 공적함을 깨달아 같이 있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아서 부즉불이(不卽不離)이니, 자연히 곧 번뇌 가운데서 보리를 증득하고, 세간사 가운데서 불사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유마경>에 또한 제시하기를, “법은 견문각지가 아니다. 만약 견문각지를 행하면, 곧 견문각지일 뿐이어서 법을 구함이 아니다.” 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불법은 오염이 없다. 만약 세간법에 대해 여전히 집착한 바가 있고 내지 열반에 대해 역시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더러움에 탐착한 것이라 불법을 구할 수 없다. 불법은 견문각지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만약 견문각지를 구하면 그것은 견문각지의 감수와 마음의 의식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불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마조(馬祖) 선사는 불성의 작용(有)의 입장에서 “견문각지가 본성이다.” 라고 말했고, <유마경>은 불성의 본체(空)의 각도에서 “법은 견문각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 것이다.
그래서 훗날 문각(文覺) 선사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평술했다.
불법(佛法)의 두 글자는 오직 부처에게만 이 법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중생에게는 이 법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불법이라 말한다. 부처(佛)란 깨달음(覺)의 뜻이니 깨달음은 곧 법이다. 깨달음은 미혹으로 인해 세운다. 어떤 것이 미혹인가? 산하대지를 보고 산하대지를 만들어 인식하고, 견문각지에서 바로 견문각지를 세운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어떤 것이 깨달음인가?
산하대지를 보고 산하대지라 부르고, 견문각지에서 견문각지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똑같이 산하대지를 보고 똑같은 견문각지인데 어째서 미혹이 있고 깨달음이 있는가?
돌! 산하대지, 견문각지여! 몇 번이나 너를 향해 미혹을 말하고 깨달음을 말했던가. 결국 깨달음을 말하고 미혹을 말해도, 참됨을 말하고 거짓을 말해도, 모두가 거짓 이름이다. 중생을 인도하니, 나와 그대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은 본래 스스로 이루어지고, 본래 스스로 구족해 본래 생멸이 없고, 공(空)도 아니요 유(有)도 아니고, 참됨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고, 미혹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다.
오직 중생을 위해 집착과 집착 없음, 걸림과 걸림 없음을 말하고, 망견으로 공도 있고 유도 있으며, 참됨도 있고 거짓도 있으며, 미혹도 있고 깨달음도 있음을 말한다. 만약 일념을 회광반조(回光返照)하면 자연히 만법이 갖추어지리라. 이 도리를 알고자 하는가? 나귀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또 온다[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혜능(慧能) 대사가 일찍이 <육조단경>에서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곧 견문각지해도 만 가지 경계에 물듦이 없고 항상 자재하다”라고 제시한 이후, 신회(荷澤神會, 670~762) 선사가 <어록> 가운데서 또한 “비록 견문각지가 있으나 항상 공적하다.”라고 설했다. 신회는 견문각지의 “공적영지(空寂靈知)”를 강조했는데, 즉 공적의 영지요 영지의 공적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성은 공적하면서 신령스레 알고, 신령스레 알면서 또한 공적하다. 자성의 공적영지에서 보면, 눈으로 보되(見) 봄이 없고, 봄이 없되 본다. 귀로 듣되(聞)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되 듣는다. 몸으로 느끼되(覺) 느낌이 없고, 느낌이 없되 느낀다. 마음으로 알되(知) 앎이 없고, 앎이 없되 안다.
그러므로 황벽 선사는 “본심은 견문각지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이 있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는다 부즉불이(不卽不離),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서 부주불착(不住不着), 종횡으로 자재하니 도량 아님이 없다.”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람들이 “본래 생멸이 없고, 공(空)도 아니요 유(有)도 아니고, 참됨(眞)도 아니요 거짓(妄)도 아니고, 미혹(迷)도 아니고 깨달음(悟)도 아닌” 불이중도성(不二中道性)을 구족했기 때문이다.
만약 수선자(修善者, 수행자)가 일념 가운데 견문각지하여 회광반조(回光返照)하면 즉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들여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자연히 만법이 청정공적함을 단박, 당하지심(當下之心)으로 깨달아 임운자재(任運自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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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운문선사께서 법을 보이셨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막힐 것 없으니 성향미촉(聲香味觸)이 항상 삼매라네" 라는 구절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
운문선사가 위의 말을 인용하였지만 이것은 다 같은 견문각지를 세속심으로 본 것이고 성향미촉법도 즉 소리와 향기와 맛과 느낌과 법도 다 본래공에서 본다면 다 부정할 수 밖에는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향상일구를 날립니다.
["어느 곳도 삼매가 아니니, 작용할 때도 삼매가 아니다. 어디에선가는 말하기를, '성향미촉의 본체도 한 쪽에 있고 성향미촉도 한 쪽에 있다'고 하나 그것은 고식적이고 치우친 견해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세속심에서 긍정한 것을 출세간 법에서는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회광반조해서 본다면 삼매(三昧) 역시 마음의 경지에서 본다면 무심의 경지와 다름이 없습니다.
한 생각 일으나지 않는 무심한 경지에서 즉 본래공의 자리에서 한 생각 일으나는 것은 오직 진공묘유(眞空妙有)이 것이지만 마음이란 한 자리가 있다는 것이 됨으로 본래공의 자리에서 본다면 사실 일으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벌써 일으난다, 일으나지 않는다는 차별상이요 분별심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삼매라는 현상은 참선이 깊으지면 다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성품의 자리인데도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실까요
“어느 곳도 삼매가 아니니, 작용할 때도 삼매가 아니다.”라고 부정을 하시고는 다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어디에선가는 말하기를, '성향미촉의 본체도 한 쪽에 있고 성향미촉도 한 쪽에 있다'고 하나 그것은 고식적이고 치우친 견해이다.”라고 하시는 것은 부정하는 것은 절대평등의 중도정견에서 본다면 무엇이든 다 한 쪽에 취우친 편견이라고 하십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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