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1 주일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군중을 향한 당신의 ‘자비로운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기가 꺾이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ῥίπτω’는 단순히 의기소침한 상태가 아니라,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채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처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고통과 시련의 풍랑에 시달리느라 몸이 지치고 마음이 꺾여 좌절 속에 넘어진 이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가엾이 여기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창자를 뜻하는 옛말 ‘애’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가리키면서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 등으로 간절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창자를 끊어내듯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옛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계승할 ‘새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를 소개합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Τῶν δὲ δώδεκα ἀποστόλων τὰ ὀνόματά ἐστιν ταῦτα·”: 마태 10,2)
그런데 이 표현에서 구약성경의 어떤 대목이 연상되지 않으십니까?[렉시오 디비나의 묵상(meditatio)의 연상(illuminatio)] “야곱과 함께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은 이러하다.”(“וְאֵלֶּה שְׁמוֹת בְּנֵי יִשְׂרָאֵל הַבָּאִים מִצְרָיְמָה אֵת יַעֲקֹב אִישׁ וּבֵיתוֹ בָּאוּ”, “ταῦτα τὰ ὀνόματα τῶν υἱῶν Ισραηλ τῶν εἰσπεπορευμένων εἰς Αἴγυπτον ἅμα Ιακωβ τῷ πατρὶ αὐτῶν ἕκαστος πανοικίᾳ αὐτῶν εἰσήλθοσαν”: 탈출 1,1)
‘열둘’이란 숫자는 이스라엘의 성조(聖祖) 야곱(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열두 아들과, 그들을 수장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곁에 가까이 부르셔서 묶어 주신 그분의 열두 사도는 혈연으로 엮인 구약의 백성을 초월하는 하느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모든 인종, 언어, 혈연, 지연, 종교, 신분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완전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파견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προσκαλέομαι)”, 그들이 당신 가까이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 다음 권한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쫓아내고(ἐκβάλλω)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그리고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마태 10,5)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 파견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①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② 그들을 파견하시어 ㉠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3-1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5-6) 하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전도의 대상을 이스라엘로 제한한 이러한 사실은 민족적 편견이나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지침이 아니라, 복음이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된 것은 사도행전에 의하면,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한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사도 11,19-20).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전교하기 위해 시내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큰 길과 골목길을 아무 말없이 한나절이나 돌아다닌 후 그냥 돌아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정색하며 물었습니다. “스승님, 전교는 언제 합니까?” 이 물음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우리는 이미 걸어다니며 전교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얼굴을 보았고 우리 행동을 보지 않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걸어 다니는 것이 전교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을 많이 하며 다녀도 전교가 될 턱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