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2 주일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 들어간 학생이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던 독서실에서 적은 글입니다. “독서실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한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내가 제일 공부를 잘하는데, 내가 제일 열심히 공부한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의 예수님의 제자 파견 설교 가운데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받게 될 박해를 각오하고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태 10,16)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고 세 번(26ㄱ.28ㄱ.31ㄱ)이나 말씀하십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자유와 평화와 일치를 누리기 위해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하느님을 향한 두려움’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에 겪는 하느님의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느님께서 따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하느님께서 그를 찾으시자 하느님의 눈을 피해 두려워 숨습니다. 그리고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하고 말합니다.
아담이 하느님을 피해 숨은 것은 그가 단순히 ‘알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분을 피해 숨습니다. 이제 아담에게 하느님은 더 이상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그를 처벌하시는 무서운 심판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지은 첫 번째 죄, 곧 ‘원죄’(peccatum originale, original sin)의 결과는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초래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이시기 보다는 인간을 속박하는 하느님이고, 인간을 용서하는 하느님이시기 보다는 인간을 처벌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사랑과 자비, 인간에게 용서와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둘째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 집회서의 저자 벤 시라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마음이 즐겁고, 행복과 희열을 맛보며 수(壽)를 누린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삶의 끝이 좋으리니 죽는 날에 축복을 받으리라.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공동번역」, 집회 1,12-14ㄱ)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ㄴ)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으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1-32.38-39)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겪께 될 고통이나 박해에서 우리를 빼내주시리라는 믿음이 아니라, 그분께서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고백으로 오늘의 강론을 갈무리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