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밑그림
제16회 작품상
강표성
세월이 그린 오선지다.
길도 없는 노선에서 넘어지고 주저앉은 흔적이다. 거친 침묵, 뜨거운 말줄임표, 다급한 숨비소리가 골을 이뤘다. 삭이지 못한 그늘이 완고하게 자리한다. 달항아리처럼 매끄럽고 깔끔한 자리, 엄마 손이나 연인의 입술을 허락할 정도로 맑고 단정한 이마에 스며든 생의 암각화다.
햇살 좋은 날, 거울을 바라본다. 그늘진 이마 위로 해맑은 시절이 얼비친다. 날렵한 사지 바지를 입은 아버지가 보이고, 모본단 저고리에 벨벳 치마를 즐겨 입던 엄마가 어른거린다. 두 분 사이에서 술래잡기할 때면 세상은 온통 내 차지였다.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는 든든한 기둥이고 엄마의 풍성한 치맛자락은 즐거운 은신처였다.
아버지는 주름에 민감하셨다. 바지의 선이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외출복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 수직의 권위인 양 반듯한 선에 검은 라이방과 포마드 기름으로 무장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던 당신에게 후줄근한 생의 구김살이 따라붙었다. 엄마는 넉넉하고 은근한 치마꼬리 대신에 일바지를 갖춰 입어야 했다. 중심선이 흔들리면서 주름지기 시작한 삶은 아무리 다리미질을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권위와 맵시의 증표였던 바지 선 대신 아버지의 이마에 새로운 선이 자리 잡았다.
구김살에 파묻힌 두 어른은 세상의 빗금으로부터 이제는 자유로워지셨다. 봄만 되면 떠난 분들의 그림자가 내게 스며든 것을 본다. 알게 모르게 드리워진 자잘한 금들이다.
지난 계절은 혹독했다. 두드리고 두드려도 철옹성처럼 꼼짝하지 않는 문에 가로막힌 듯했다. 돌아서고 싶었지만,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려 발을 뺄 수 없었다. 겨울잠에 빠진 짐승처럼 웅크린 채 동굴을 버텼다. 바깥세상은 봄날로 출렁거리고 햇살도 노랗게 빛나는데 새순을 틔울 수 없는 계절이라니. 벌써 몇 번째인지, 마음을 틀어막은 채 봉쇄원의 수도사처럼 기도문을 읊조리던 나날이었다.
다시 눈을 홉뜨고 앞을 바라본다. 들메끈을 고쳐 매고 이 시간을 건너가야 한다고 다짐해도 제자리걸음이다. 접힌 마음에 토를 달고 밑줄을 긋는 날들이 이어진다. 갈수록 생의 구김살이 깊어지고 이마 위의 잔금도 짙어진다.
무엇보다도 마음속 주름은 보이지 않아 더 문제다. 걸핏하면 사람 사이를 무지른다. 구김이 많을수록 관계와 관계는 멀어지고 작은 틈새에도 걸려 넘어지고 만다. 밀리고 접혀서 눌린 뒷모습은 서로가 서로에게 나아가는 선이 아니라 미끄러지는 계기가 된다.
최근에도 그랬다. 이웃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양말을 뒤집듯이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었다.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데 더부룩한 속을 드러내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서야 내 안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의 주름살, 그것이 문제였다. 지독한 결핍이나 내면의 상처를 그대로 버려둔 결과인가 보다.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 되거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순간에 사람을 넘어트리고 마는 내 안의 그것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은밀하게 숨어있다가 순간에 존재를 드러내는 불편한 밑그림이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슬픈 나이테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누구인가를 나타내기에 더 무참하다. 조금만 방심해도 거칠고 구부러진 모습을 드러내고 말아 한심하고 서글프다.
의외로 친구는 다르다. 마음의 빗금조차 넉넉하고 부드러워 보인다. 자신의 굳은살에 연연하지 않고, 상흔마저 독특한 무늬를 이룬 것 같다. 과거의 상처를 통해 누군가의 의자가 되고, 계단이 되고, 징검다리로 이어지고자 한다. 진정 부유한 영혼이 아닐까 싶다. 깊이와 높이를 지닌 그런 이기에 나도 몰래 눈부처로 다가서고 무릎걸음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산다는 것은 주름을 경작하는 일이다. 작은 선 하나에 지나온 세월이 담겨있다. 나이와 동떨어진 얼굴을 보면 어쩐지 어색하다. 내용이 부실한 자서전을 읽는 기분이랄까. 밑줄이나 주석, 색인이 사라진 책 같다고나 할까. 이마의 주름뿐만 아니라 웃음 짓는 눈가에 가선 몇 개 살포시 얹힌다면 제법 괜찮은 농사가 아닐지. 숨 가뿐 숨비소리와 낮은 휘파람 소리 몇 가락 섞여 있다면 지루하거나 신산한 풍경으로 머물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적당히 주름진 얼굴은 자연스럽다. 인생이라는 값을 잘 치른 것 같다. 굽이굽이 몰아친 세월의 흔적에 등을 기대고 싶다. 그늘과 구김살조차 잘 새겨둔 이 곁에 서면 내 영혼도 잠시 반짝인다. 세월이 그린 작품을 오랜 골동품 감상하듯 찬찬히 들여다보며, 저 안에는 어떤 밑그림이 있을까 속으로 헤아려 본다.
주름은 특별한 기호다. 한 사람의 생을 기록하는 상형문자다. 자기만의 선으로 독특한 문양을 그리는 셈이다. 평생 흔적을 새기며 나아가는 인생, 나는 어떤 그림을 이어가는지 자못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