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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 '신라'의 장신구

작성자이성민|작성시간09.04.07|조회수1,360 목록 댓글 0

장신구 정의

장신구(裝身具)란 신체의 일부에 직접 쓰거나 걸거나 또는 끼는 장식품과 의복의 장식을 위해

붙이거나 매거나 또는 늘어뜨리는 소품을 지칭하며 그 외 장식 목적에 필요한 도구까지를 포함한다.

그 종류에는 허리띠, 팔찌, 반지, 귀걸이, 목걸이, 노리개, 머리장식품 등이 있으며, 장신구의 기능은

인간의 원초적인 미적 의식을 나타내주는 장식적(裝飾的) 기능과 함께 악령을 퇴치하는

주술적(呪術的)인 기능, 그리고 부와 권력의 표시수단인 신분적(身分的) 기능이 있다.

장신구는 무엇보다도 시대가 바뀌어 의생활의 양상이 달라짐에 따라서 변천하고 발달하였다.

또한 제도가 바뀜에 따라 장신구의 규제로 인하여 양상을 달리하여 그 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었다.

장신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는데 신석기시대 에는 옥석을 갈아서 만든 관(管) 모양의 옥이나

짐승의 뼈로 만든 목걸이의 장식을 이용하여 장식과 아울러 주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장식하는 특성이 강화되어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귀걸이, 반지, 팔찌, 목걸이 같은

장신구가 기본 의복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장신구는 고려시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儒敎思想)의 영향으로

여자들의 부덕이 강조되었으므로 일반 부녀자의 몸치장은 어느 정도 제한이 있었다. 곧 이러한

장신구의 사용은 상류층이 아니면 일반 서민의 경우 혼례복(婚禮服)을 입을 때만 사용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는 금, 은의 사용이 제한되어 삼국시대의 찬란한 금속 장신구 문화에 견주어 오히려 쇠퇴하였으나

그 소박미와 정교성은 미의 극치를 이루었다.

 

삼국시대의 장신구

삼국시대에는 장신구의 발달이 세분화되어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장신구의 제작과 착용에 있어서 체계적인 계통이 서게 되었고, 신분제에 따른 규제가 있었다. 금속의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 금속의

채취가 문제시 되고 이에 따라 야금술이 발달되어 한층 장신구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고구려는 고분에서 출토된 투각초화문(透刻草花紋)금동관 과 투각용봉관금동관 과 긍동관형 장식과

금동 귀걸이 등이 있다. 상당한 세공으로 놀랄만한 장신구의 시원양식을 나타내었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한층 다양한 장신구를 발견할 수 있다. 나주의 금동관 과 송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금은 제품인 버들꼴의 장식은 관모에 꽂았던 장식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것이 관식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무령왕릉의 발굴에서이다. 즉 왕관·왕비관에 꽂았던 관식이 발견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백제의 장신구의 발달이 한층 고도화되었고, 무령왕릉에서는 머리 뒤에 꽂은

뒤꽂이가 출토되었다. 옥 종류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옥이 출토되어 장신구의 발달을 얘기해 준다.

신라시대는 우리나라 장신구 발달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고분을 중심으로 발달된 장신구는

거의 순금 제품이며 기교성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난 것이 많다. 귀걸이는 고리가 굵은 태환식(太環式)과

고리가 가는 세환식(細環式)이 나타났으며, 그 장식의 복잡한 양식과 풍부한 종류는 가장 화려하다.

 

신라 장신구

신라의 장신구는 종류와 양식의 다양성으로 보아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매우 발달하였다.

귀걸이는 대부분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모양도 매우 다양하다. 귀에 닿는 부분이 가는

‘가는고리귀걸이(세환이식)’와 귀에 닿는 부분이 굵은 ‘굵은고리귀걸이(태환이식)’로 나눌 수 있다.

신라의 귀걸이는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여 신라인들의 미적 감각과 수준 높은 금속 공예 기술을

보여준다. 굵은고리귀걸이는 어떻게 매달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중심고리의 구조로 보아 귀에

직접 매달기는 어렵게 되어 있는데, 실이나 끈을 이용하여 관테나 모자에 매달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남색을 띤 유리구슬로 된 목걸이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늘어지는 끝에 비취, 수정, 마노 등으로 만든 곡옥을 하나씩 단 것이 많다.

팔찌는 남녀 공용으로 보통 양팔에 착용하였고 한번에 여러 개를 차기도 하였다.

금, 은, 동, 옥제품이 있다. 반지는 남녀 모두 애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 은, 옥제품으로

양손 모두에 끼었다. 금반지는 윗부분이 넓고 마름모꼴을 한 것이 대부분이나 금령총의 반지는

마름모꼴의 윗부분에 다시 마름모꼴의 장식을 배치하고 그 안에 칠보 유리옥을 넣어 만든 것이다.

신라의 금반지는 화려하고 발달된 세공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관모 - 삼국 중에서도 신라시대의 관모는 북방 아시아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스키타이적인 문화와 깊은 관계에서 신라나 가야식의 금관으로 변화, 발전되어 결국 화려한 신라금관을 탄생시켰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신라금관의 연구결과이다.

고대에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유물들이 발굴조사시 많이 출토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가운데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굴된 나뭇결 무늬 유리잔은 로만글라스 계통으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관계를 증명해주고 있는 훌륭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고대부터 동서교역이 성행하고 있었고 신라금관 또한 그 교역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금관은 신라인이 만든 위세품(威勢品)으로 세계에서 그 형태가 없는 독창적인 걸작품으로 칭찬받고 있다.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머리띠와 ‘출’자 장식 주위에는 점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양 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으로 된 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줄 끝에는 비취색 옥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외관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가 관 밖에서 발견되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관은 기본 형태나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금관이다.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금관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높이 32.5㎝의 전형적인 신라 금관으로 묻힌 사람이 쓴 채로 발견되었다. 머리 위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는 山자형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2줄로 있는 형태이다. 山자형은 4단을 이루며 끝은 모두 꽃봉오리 모양으로 되어있다. 금관 전체에는 원형 금판과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리고 금판 장식을 촘촘히 연결하기도 하였다. 밑으로는 나뭇잎 모양의 늘어진 드리개(수식) 2가닥이 달려있다.

금관 안에 쓰는 내관이나 관을 쓰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널(관) 밖에서 다른 껴묻거리(부장품)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귀걸이 - 전세계를 통틀어 경주만큼 금귀걸이가 많이 나오는 곳도 없다 한다. 신라의 귀걸이에는 신라인의 미감과 최고조에 이른 금공예 기술이 녹아 있다. 수백 개의 금알갱이를 붙이고 파란색 혹은 빨간색 옥을 끼워넣어 매우 화려한 모습을 연출한다. 신라의 남녀들은 모두 귀걸이를 착용했다는데, 어떤 용도였을까? 현대에는 여성들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신라의 지배층은 남녀 모두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지위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귀걸이를 착용했다. 비슷한 도안의 귀걸이를 착용함으로써 그들끼리는 자신들이 신라를 이끄는 지배층이라는 우월의식을 느끼려고 했다. 또한 신라의 가는고리 귀걸이는 고구의 귀걸이를 모델로 하여 변용함으로써 다시 신라적인 도안으로 재탄생하였다. 신라 귀걸이의 시대별 디자인 변화와 유행을 연구해 보면 그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대외적 관계를 알 수 있다.

 

           

금령총 금제                        금령총 금제                  금제 가는고리귀걸이       금제 가는고리귀걸이

가는고리귀걸이                   가는고리귀걸이

         

 

   

부부총 금제

굵은고리귀걸이

 

 

금제 굵은고리귀걸이 

 

황오동52호분 금제굵은고리귀걸이

 

 

 

목걸이 - 신라의 무덤에서는 남색을 띤 유리구슬로 된 목걸이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늘어지는 끝에 비취, 수정, 마노 등으로 만든 곡옥을 하나씩 단 것이 많다.

 

 

98호분 금목걸이

 

금령총 가슴걸이

 

노서동 금목걸이

 

미추왕릉 상감유리목걸이

 

안계리 유리목걸이

 

 월성로 유리가슴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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